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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명언 스크랩 김우중 4無 경영인
정외철 추천 0 조회 30 09.02.15 18: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2일 저녁 서울 강남 포스코센터 서관 19층 중식당 휘닉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윤영석 전 대우그룹 총괄회장을 비롯해 서형석 전 ㈜대우 무역부문 회장,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회장, 윤원석 전 대우중공업 회장, 김성진 전 대우경제연구소 회장, 정주호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 장병주 전 ㈜대우 사장, 이경훈 전 대우그룹 중국지역본사 사장 등 옛 대우그룹의 최고경영자(CEO) 50명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날 모임의 호스트김우중(73) 전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사는 두 시간 넘게 계속됐다. 모임을 마치고 나온 옛 대우 CEO들 손엔 작은 선물꾸러미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하지만 식당 정문 앞에서 기다린 중앙SUNDAY 취재진은 정작 김우중 전 회장을 만날 수 없었다. 김 전 회장은 취재진을 피해 주방과 연결된 비상 엘리베이터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모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많아 분위기가 좋았다”고 했다. 다른 참석자는 김 전 회장의 건강 상태를 묻는 질문에 “괜찮으신 것 같다”고 답했다.

김 전 회장이 고락을 함께하던 사장단과 모임을 한 것은 1999년 대우그룹이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 개선) 판정을 받아 해체된 지 10년 만이다. 그는 99년 출국해 5년8개월간 해외에서 떠돌다 2005년 귀국했으나 곧바로 구속 수감됐다. 41조원대의 분식회계를 지시하고, 이를 통해 국내 금융기관에서 10조원의 불법 대출을 받은 혐의(특경가법상 사기)였다. 심장질환 등 건강 악화로 한 달여 만에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그 후로는 줄곧 재판의 연속이었다. 2006년 5월 1심 재판에서 징역 10년과 추징금 21조4484억원, 벌금 1000만원의 중형을 선고받은 그는 그해 11월 항소심에선 징역 8년6월에 추징금 17조9253억원, 벌금 1000만원을 선고받았다. 김 전 회장은 상고를 포기했고, 형은 확정됐다. 그는 이듬해 말 사면·복권됐지만 추징금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와중에 김 전 회장이 옛 경영진을 대거 불러모은 12일 행사는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이날 참석자들은 대우그룹 창립일(3월 22일)을 기념해 다음 달 20일 그룹 출범 42주년 행사를 밀레니엄서울 힐튼호텔에서 성대하게 치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대우그룹은 김 전 회장이 자본금 500만원으로 시작한 섬유 수출회사 대우실업 설립일을 창립 기념일로 삼아왔다. 그룹 해체 이후엔 대우 전직 임원 모임인 ‘대우인회’가 격년제로 기념식을 열어 왔다. 대우인회는 80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40주년이었던 2007년 행사는 쓸쓸했다. 김 전 회장이 형 집행정지 상태여서 참석하지 못해서다. 김 전 회장은 120여 명의 대우 전·현직 임원이 참석한 이날 모임에 감사와 미안한 마음을 담은 인사말을 전했다. 장병주 전 ㈜대우 사장이 대신 읽은 인사말에서 김 전 회장은 “비록 대우그룹은 해체됐지만 우리가 몸담았던 회사들이 지금도 좋은 성과를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많은 위안을 얻고 있다”며 “우리가 함께 품었던 열정과 우리가 이뤄낸 성취들이 누군가에 의해 이어져 나가고 저에게도 추억으로나마 동반자가 돼 준다면 저는 더 이상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건강 추스르며 독서·산책으로 소일
12일 행사에 참석한 한 인사는 본지와의 전화 통화에서 “올해 창립행사에선 예년과 달리 세미나도 열 것”이라며 “참석자들이 대우 사가(社歌)도 함께 부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유명 아동작가인 고(故) 윤석중씨가 작사한 ‘대우가족의 노래’는 “대우주 해와 달이 번갈아 뜨는 / 육대주 오대양은 우리들의 일터다 / 우리는 대우가족 한집안 식구 / 온누리 내 집 삼아 세계로 뻗자”는 내용이다. 대우의 경영 모토였던 ‘세계 경영’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번 창립 행사에 김 전 회장이 참석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다만 그가 대우의 ‘명예회복’을 희망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그룹 해체 10년째인 올해 행사엔 참석할 가능성이 크다. 김 전 회장은 자신의 국제 네트워크를 활용해 마지막으로 국가에 봉사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측근을 통해 틈틈이 밝혀왔다. 그가 동유럽과 러시아·동남아 등 20여 개국의 유력 인사와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출국금지 상태인 김 전 회장이 검찰의 허락 아래 신병 치료차 귀국 후 처음으로 지난해 11월 일본과 베트남을 방문하자 베트남 관련 신규사업을 모색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 하노이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의 입안자였다. 2005년 귀국 전에도 한동안 베트남에서 머물며 국토개발 사업에 조언해 줄 정도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아직은 김 전 회장의 사업 재개를 거론할 단계가 아니라는 분석이 많다. 사면 직후 지난해 초 김 전 회장이 국내외 금융권 인사와 접촉한 것으로 전해지자 해외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한 자금 조달 문제를 타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새만금 사업에서 모종의 역할을 할 것이란 얘기도 흘러나왔다. 그러나 현재까지 구체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룹 해체 이후에도 김 전 회장을 보좌하고 있는 백기승 전 대우그룹 홍보이사는 12일 모임에 대해 “작은 몸짓을 크게 해석하면 공연히 나라만 복잡해진다. 그냥 밥 한 끼 먹은 것일 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귀국 후 줄곧 재판에 시달리느라 경황이 없다 보니 이제야 옛 사장단들과 만난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인사 대부분도 “그저 친목 모임이었을 뿐”이라며 말을 아꼈다. 김 전 회장의 한 측근은 “김 전 회장의 연세도 있고, 건강상태도 그저 그런 상태”라며 “참석 인사 대부분이 60대 후반이나 70대인 점을 감안해 상식적으로 판단해 달라”고 말했다. 사업 재개 등을 거론할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다른 측근도 “대우 부활 운운하는 것은 한참 빗나간 분석”이라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해외에서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하는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요즘 건강을 추스르며 산책과 독서로 소일한다고 한다.

재계에서도 김 전 회장의 재기(再起) 가능성을 낮게 본다. 고령에다 건강 문제가 걸려 있고, 사업을 새로 시작할 만한 국내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부인이 운영하는 아트선재센터와 아들인 선협씨가 대표로 있는 아도니스 골프장·호텔 정도다. 여기에 밀레니엄서울 힐튼호텔 꼭대기 층인 23층 펜트하우스의 ‘초저가 임차권’을 확보한 상태다. 김 전 회장은 지난주 서울고법 판결에서 연간 12만원(하루 328원)에 이 호텔 펜트하우스를 99년부터 25년간 장기 임차한 계약을 인정받았다.

대우 워크아웃 10년, 김 전 회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그는 결과적으로 실패한 경영인이다. 대우의 부실을 뒤치다꺼리하느라 막대한 공적자금이 들어갔다는 비판이 그를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99년 대우 해체를 ‘정치적 타살’이라고 주장하고, 당시 정치권 압력으로 출국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구체적인 정황에 대해선 여전히 함구하는 데 대해서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67년 젊은 패기를 무기로 사업을 시작해 대우를 재계 서열 2위의 대기업으로 키운 공적을 가벼이 볼 수는 없다. 그는 샐러리맨의 우상이었다. ‘대우 신화’를 보고 무수한 인재들이 ‘제2의 김우중’을 꿈꾸며 도전했다. 그 과정에서 좌절한 사람도 많지만, 그런 도전 정신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밑바탕이 됐다.

無酒·無色·無遊·無家의 ‘4無 경영인’
그가 보여줬던 ‘소탈한 회장상(像)’도 아직까지 많이 회자된다. 서류가방 하나 달랑 들고 수행 비서와 함께 공항에서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우며 전 세계를 누볐다. 웬만한 규모의 중소기업 오너만 돼도 회장 타이틀을 달고, 의전(儀典)을 따지며, 군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영자가 적지 않은 현실에서 그는 ‘탈권위적 경영인’의 대표격이다. 김 전 회장 혼자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1인 회사’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대우는 ‘회장’이 가장 많은 그룹이기도 했다. 그는 95년 회사별 회장제를 도입했다. 윤영석 총괄회장을 비롯해 그룹에 10명의 회장이 생겼다. 보통 오너 한 사람이 회장 타이틀을 틀어쥐는 요즘 재계의 모습에 비춰보면 이색적인 장면이다.

김 전 회장의 해외 도피 시절, 그의 법률대리인 역할을 했던 석진강 법무법인 우일 변호사는 당시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김 전 회장에 대해 무주(無酒)·무색(無色)·무유(無遊)·무가(無家)의 ‘4무(無) 경영인’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술을 일절 안 하고(무주), 여자 스캔들이 없으며(무색), 바둑을 제외하고는 골프나 포커 같은 잡기도 안 하고(무유), 가족이 없는 사람처럼 일만 한다(무가)는 인물평이었다.

그가 주창한 ‘세계 경영’도 빼놓을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의 장보고 이래 해외 네트워크를 가장 잘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화란 단어가 생소했던 93년 그는 세계 경영을 모토로 내걸고 외국으로 내달렸다. 하나가 된 세계 시장에서 제조·판매·투자를 하는 글로벌 기업을 꿈꿨던 그의 경영철학을 다른 기업은 한참 뒤에야 배우고 실천했다. 김 전 회장의 한 측근은 “김 회장의 공(功)과 과(過)를 균형 있게 평가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중앙SUNDAY 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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