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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노동자의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공무짱
이 성철(창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1. 들어가며
생활양식(the way of life)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들은 주로 미국의 도시사회학 분야에서 제기되었다. 이들은 도시의 문화적인 특징을 규정짓는 주요 변수들의 개발에 집중하면서, 이것들을 중심으로 주민들의 생활양식의 특징들을 기술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워스(Wirth, 1938)는 인구의 크기, 인구밀도, 그리고 인구의 동질성 등의 변수를 중심으로 도시의 이상적인 생활양식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생활양식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너무 소박하여 현대사회의 다양한 속성(즉, 성, 세대, 지역, 그리고 학력 및 사회불평등의 정도 등)에서 기인하는 생활양식의 특성들을 제대로 파악해내기는 힘들다. 즉 생활양식의 내용과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러한 인구 요인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 심화에 따른 여러 사회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예컨대 까스텔(Castells, 1976)은 도시의 특징적인 생활양식을 현대사회의 합리화의 진전과정 및 시장경제의 출현, 그리고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문화적 표현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생활양식은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으로 발현된다. 즉 생활양식의 차이점들은 개인이나 집단수준에서 취향으로 나타나거나 구별 짓기의 형태로 실재화 된다. 그리고 생활양식의 형성은 기본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는 일상생활의 공간은 흔히 생각하듯 미시 수준에 한정되지 않는다. 즉 여기에는 생물학적 재생산(가족), 노동력의 재생산(계급), 그리고 생산의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구조로서의 자본주의)이라는 공간들이 유기적으로 연동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 기초한 생활양식은 특정 계급의 질적인 유대의 기초를 제공하기도 한다(오재환, 1996: 93).
최근 들어 일상생활 및 생활양식에 대한 관심들이 확대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무엇보다 이론적으로는 일부 포스트 모더니즘론의 영향 탓이기도 하다. 그 런데 이들 이론 중 일부는 자신들의 이론적 특징들을 기존의 거시 사회이론들(예컨대 정치경제학)과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면서 오히려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일상생활을 총체적으로 그려내는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1). 그러나 이와 달리 일상적인 생활양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연구자들(르페브르, 부르디외, 하버마스, 푸코 등)의 경우에는 생활세계와 사회구조간의 관련성과 그 상호작용에 천착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에서도 기존의 계급이론 등이 간과했던 ‘구조화된’ 일상의 행위양식을 잡아내기 위해(정선기, 1996: 213), 또는 기존의 생산 및 물적 토대 중심의 논지를 넘어서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일상성 및 생활양식에 주목하고 있다(뤼트케 등).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 성격에 대한 논의도 위와 같은 문제의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 동안의 소비에 관한 많은 연구들(특히 부르주아적 사회과학)이 소비자 행동분석, 소비만족도, 구매윤리, 시장수요조사, 그리고 소비자 교육 등의 부문에 집중됨으로써 발생한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생산의 사회적 관계내에서 움직이는 노동자계급의 소비성격을 간과하여왔고, 둘째 소비를 생산외적인 또는 생산의 잔여물 정도로만 파악함으로써 생산과 재생산의 길항적인 작용을 온전하게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도 앞서 언급한 바처럼 일상의 생활세계를 여타의 다른 분석수준과 연계해서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기능론과 상태론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일상은 그 본래적 성격이 보수적이거나 우경화의 성격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에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들은 다시 사태로 사태는 구조로, 그리고 구조의 총화로서 역사가 구성(이는 인과적인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 수준의 다양한 상호작용과정도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둔다)됨을 인식할 때2), 일상은 계급적 정체성의 형성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소비는 이러한 일상에서의 계급적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된다. 본 글에서 의미하는 문화소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지니고 있다. 첫째, 어떤 재화에 대한 단순한 경제적인 소비지출의 차원만이 아니라, 국가나 자본의 문화정책 및 문화산물에 대한 수용과정을 통해 지체 또는 발전될 수 있는 계급적 정체성까지를 파악해보려는 관계적 개념이다. 둘째,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소비는 생산의 부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의 성격은 일터의 조건 및 실천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화소비는 단순한 상품의 소비(consumption of goods)가 아니라, 일상적으로는 의미투쟁의 장이 되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본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바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문화소비에 관한 선행연구들의 검토를 통해, ①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 성격이 자본주의 상품구조에 갇혀있는 수동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점과, ② 문화소비는 노동과 여가를 잇는 중요한 매개물로서 작용한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기존의 일부 소비론이 제출한 생산 및 노동과 유리된 소비의 유형론 및 개인주의적 소비성향론의 한계점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③ 문화적 텍스트의 분석에만 치중하여 노동자계급의 실천성과 현재의 한계점들을 이로부터 곧바로 도출하려는 일부 민중주의(populism)적 경향의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와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에 있어서의 실천적인 과제들에 대해 토론하게 될 것이다.
2.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에 관한 선행연구들의 비판적 검토
대개의 문화연구에서는 소비의 주체로서 ‘대중’(the mass 또는 the popular)을 상정한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일반적인 개념으로서의 대중보다는 노동자계급에 초점을 맞추어 선행연구들이 검토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이들은 ‘대중의 문화소비’를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로 편리하게 치환시켜 기존 논의들의 이론적 유의성을 훼손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사용하는 노동자계급의 의미를 대중이나 민중 등의 개념과 비교ㆍ검토하여 그 연관성을 보다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3).
강현두 등(1999: 4, 13-14)은 대중과 민중 등의 개념들을 서로 다른 범주들로 볼 것이 아니라 유동적 기표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개념의 문화적 의미가 내장되어 있는 사회ㆍ역사적인 맥락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들은 자본주의사회내의 대중의 삶의 방식, 의미실천 등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그것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대중은 노동계급의 또 다른 이름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박명진(1996: 12-14)은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민중 개념은, 문화간의 엄격한 구분과 계급사회 내에서의 이념적 기능이 차별화되는 문화 도식 위에서만 그 정당성을 누릴 수 있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곧 이어 민중문화와 대중문화라는 대립구도가 합당한 것인지 검토해볼 것을 제의한다. 그 결과 그녀는 대중문화 유형 중 ‘진솔한 대중문화’(genuine popular culture)가 우리의 민중문화와 상통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것으로 본다4).
한편 베넷(Bennett)을 비롯한 그람시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대중문화 자체를 민중의 저항력과 지배계급의 통합력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의 장으로 설정하고, 이 공간을 분석하기 위해 ‘정치사회’ 범주를 제시한다. 정치사회 영역은 국가와 자본 그리고 민중간의 투쟁이 일상화 된 곳임을 염두에 둘 때, 이들의 대중 개념 역시 노동자계급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성철, 2002: 305-306). 그러나 이상의 논거들을 통해 대중=노동자계급이라는 등식을 곧바로 도출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정치사회영역에서 작용하고 표현되는 갈등과 긴장이 단 하나의 갈등(즉, 노동계급문화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간의 갈등)만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단지 정치적으로 대답될 수 있을 뿐이다. 대중문화는 항상 중심부에 정치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다(Fiske, 2002: 233).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대중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지배 블럭에 대항하여 사회세력의 광범한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대중’을 구축하고, 우세한 문화적 비중과 영향력을 확보함으로써 정치적 중요성을 높이는 것이다(Bennett, 1996: 269). 계급문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주어진 사회적 조건 속에서 대립적인 계급들간의 개별적인 저항(또는 수용) 및 집단적인 투쟁(또는 통합) 등이 일상적이면서도 역사적으로 형성된(또는 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이성철, 2002: 298), 이러한 과정에서 대중성의 확보라는 문제는 여타 사회집단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본 글에서는 이상의 논지들에 공감하면서 대중으로서의 노동자계급5)문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1)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문화적 민중주의
이제 구체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에 관한 선행연구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한다. 먼저 프랑크푸르트 학파6)에 따르면, 비록 그들이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의 특징을 규격성, 수동성, 그리고 지배계급의 사회적 연대요구에의 적응(또는 동의)으로 제시한다7). 먼저 규격성은 어떤 문화적 양식이 대중들에게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이것을 상업적으로 고갈될 때까지 사용하다가 마침내는 규격이 결정되기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징에 대한 설명은 자본주의의 본성인 이윤창출의 욕구를 설명하는 데는 당연한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박상우 시인의 「새로운 라면」이라는 시의 일부를 인용해보자. “내 삶은 새로운 라면을 먹는 거랑 비슷합니다/ TV에 새로운 라면이 선전 나올 때면/ 혹시 해서 사 먹으면/ 역시 엇비슷합니다/ 이름이 다르고 포장이 다르고 면발이 약간 스프가 약간 다를 뿐/ 뭐 새로운 라면이 있겠습니까만/ 새로운 라면을 찾지 않으려면/ 심오한 정신이 필요합니다(중략)”. 이 시는 다품종 생산이 대중들의 문화소비에 대한 기호의 차별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논리가 매우 편협한 문화론에 입각해 있음을 보여준다(이시리 카즈오, 1998: 11). 즉 감각적 가치나 허구화된 의미에 기초한 소비론은 궁극적으로 자본의 이윤추구논리에 복무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산업론은 이러한 자본 논리에 대응하는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실천을 강조하기보다는 여기에 매몰된 성격, 즉 수동성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에 있어서의 수동성은 노동의 긴장과 지루함으로 말미암아 여가시간에도 생산적이고 바람직한 것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을 회피하는 것을 뜻한다. 이 결과 이미 기성화된(ready-made) 욕망의 구도 속에 안주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8). 흔히 이에 대한 경험적인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평일 및 휴일에의 여가 활용방법에 관한 조사 결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결과의 제시를 통해 노동자계급 문화의 수동성을 설명하려는 것은 실증주의적 또는 경험주의적 총체성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동자계급의 여가 성격이나 실태는 일터의 조건, 경제의 양상, 그리고 자본과 국가의 성격 등 배경적이며 관계적인 속성이 함께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재걸(1992: 249)은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① 자본주의의 상품성과 상업문화의 퇴폐성을 아무런 방어벽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공단문화, ② 노동자들의 낮은 의식으로 말미암아 개량화 영역으로 잦아드는 소시민적 문화, 그리고 ③ 자본의 문화정책이 노동자내부에 관철되어 가는 모습(신경영전략으로서의 기업문화운동) 등의 제시를 통해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의 수동성이 상당 정도 확산되어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물론 그 대안도 제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소비의 규격성과 수동성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국가 및 자본의 지배적 헤게모니의 작동방식으로 이어진다.
즉 위와 같은 문화소비의 성격은 오히려 국가 및 자본의 사회통합 기제로 작용하게 된다. 이들에 따르면 통합은 ‘리드미컬한 복종’과 ‘감정적 복종’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전자는 자본의 착취나 국가의 억압의 리듬에 맞추어 산만하게 춤추는 것, 그리고 후자는 현재의 상황을 잊고 감상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들 학파가 그람시(Gramsci)의 헤게모니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바는 없지만, 헤게모니가 위기적인 상황이 아닌 정상적인 상황에서 지배 및 통제에 보다 긴밀하게 작용(박거용, 1992: 142)함을 염두에 둘 때, 이는 노동자계급의 생활세계에 대한 국가 및 자본의 ‘일상적인’ 부드러운 테러를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의 성격을 이상과 같이 규정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논지에 대한 비판은 그들이 사용한 규격성, 수동성, 그리고 사회적 통합이라는 기준을 다시 질문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즉 노동자계급은 자신들의 문화적 소비를 틀 짜여진 규격속에서 수동적으로만 수행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결과 지배계급의 통제 논리에 복종하고만 있는가 라는 반문이 그것이다(이에 대해서도 추후 논의하게 될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한 바처럼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에 대한 이들의 진단은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의 자본논리를 폭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의도와 상관없이 노동자계급의 상을 ‘구조에 갇힌 수인(囚人)’ 쯤으로 평가하는 미필적 고의를 저지른 셈이 되어버렸다. 파슨즈(Parsons)류의 구조기능주의에서 흔히 제시하는 명제인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의 의미가 ‘행위자들의 존재 이유는 사회통합이라는 기능에 복무하는 것’임을 염두에 둘 때, 이들의 문화소비론은 ‘기능주의적 마르크스주의’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9).
이상과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소비론은 문화적 민중주의(cultural populism)와 논의의 맥락을 함께 한다. 왜냐하면 이 이론 역시 자본주의 구조하에서 노동자계급이 겪고 있는 문화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점들은 잘 지적하고 있을런지는 몰라도, 이들 계급들이 지배문화에 대응하는 다양한 실천적인 전략들에 대해서는 방기 내지 무게 중심을 싣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많은 좌파 문화연구자들은 담론 수준의 왜소한 ‘이론적 잡담’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페리 엔더슨10)(Perry Anderson, 1976: 93; 박거용, 1992: 135쪽에서 재인용)은, 최근 문화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지식인들의 염세적 후퇴의 징후이며 노동자계급 투쟁의 정치적 현실에서 그들이 철저히 벗어나 있음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이는 현재의 좌파 문화연구들이 상당 부분 ‘민중주의’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하위문화 연구들을 통해 제시되고 있는 문화적 민중주의의 문제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신병현, 2001a: 47; 신병현, 2001b: 130-131; Storey, 2002: 185-186을 참조). 첫째, 문화소비의 주체, 즉 행위자들에 대해 과도한 신뢰를 부여한 결과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버린 점이다. 즉 문화소비 과정에 있어서 소비자들의 취향이란 매우 자율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의 선호에 대해 어떤 기준을 가지고 미학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문화적 민중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문화산업이 이미 민중주의 이데올로기를 자신들의 이익 극대화라는 목적을 위해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둘째, 소비의 개인주의화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대중들의 지배 헤게모니 및 문화에 대한 대응 전략을 ‘상징적인 도전’ 수준으로 격하시킨다는 점이다. 이 결과 개인적으로는 잡종적 정체성의 구성과 다양성,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정치경제학과 비판적 사회이론과의 단절이라는 양상을 빚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 연구에 있어 이러한 좌파 민중주의의 문제점들이 발생하게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무엇보다 연구방법상으로는, 문화적 산물을 전제로 담론적 실천수준의 작업에만 천착한 결과이다. 이럴 경우 문화연구는 생산모델과 소비모델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 위험을 안게된다(여국현, 1999: 107-108). 이와 관련된 또 다른 하나는 이들의 이론적 관점에서 비롯된다. 즉 자본주의의 상업적 대중문화로부터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실천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시도들을 말한다. 김성기(1998: 87)에 따르면, 서구의 경우 1980년대 중반 이후 문화개념이 ‘소비문화’와 거의 동일시된다고 지적하면서, 이제 대중문화상품에 대한 소비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단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들이 소비과정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수 있다라는 논지로까지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노동자계급의 정치성은 ‘대안적 삶의 지평을 열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의미와 즐거움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만) 대체된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실천 및 투쟁의 성격을 전도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관계적 실천으로서의 문화가 아니라 독립변수로서의 문화 현상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의 삶의 목적도 희화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볼 때, 보다 나은 삶의 의미와 즐거움 자체만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은 특정 집단에 한정될 수밖에 없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실천적 행위를 통한 제도의 개선과 사회의 진보를 통해서만 이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접근법은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실천을 소비라고 하는 비교적 안전한 사회적 소재에 국한시키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성을 봉인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는 상징과 이미지분석에 치중하여 대중들의 문화소비 성격을 파악하려는 ‘속류’ 포스트 모더니즘의 소비주의론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다11).
한편 피스크(Fiske, 2002: 234-247)는 라클라우(Laclau, 1977)의 민중주의의 유형12)에 대한 논의를 빌어와 상기의 문제점들에 대한 대안으로 ‘대중적 저항 민중주의’를 제시한다. 라클라우에 따르면 민중주의는 민주적 민중주의, 대중적 저항 민중주의, 그리고 민중적 저항 민중주의로 대별된다. 먼저 민주적 민중주의는 자유주의적 다원론의 관점과 일치하는데, 이에 의하면 국가와 국민의 다양한 조직사이의 차이는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공모와 동의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주의는 종속계급의 문화를 지배영역으로 끌어들여 계급갈등이나 여타의 저항들을 소멸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체제하에서는 대중의 생명력과 공격성은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민중적 저항 민중주의는 사회적 위기의 순간, 즉 역사적 조건과 상황이 개혁이나 심지어 혁명을 야기할 만한 상태가 될 때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민주적 민중주의는 국가와 자본에 의해 일상적으로 관철되는 반면, 민중적 저항은 국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대중들의 일상적인 대응 전략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제기하는 것이 대중적 저항 민중주의이다.
대중적 저항 민중주의는 국가와 자본의 억압에 대항하기 위해서 밑으로부터 스스로 조직한 시스템을 활용하고, 이들의 일상적인 지배를 억압으로 느끼면서 지배문화의 포섭과 합병 전략에 공모 또는 동의하지 않는 특성을 지닌다. 피스크는 이러한 설명에 공감하면서, 자본주의사회하의 대중문화실천은 주로 민중적 저항 형태보다는 대중의 영역에서 일상적으로 작동하며, 그 전략들은 급진적이라기 보다는 진보적이라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지배권력을 전복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해 지속적인 압력을 행사하면서 그들의 고유한 저항성을 활기차게 그리고 비타협적으로 살려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적 적대감이 고양되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는 지배권력에 직접 도전하는 급진적 민중운동의 전제조건이 된다(이를 그람시의 틀로 설명한다면 ‘안주적(安住的)’ 진지전이 아니라 ‘운동적’ 진지전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성격을 설명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일부 민중주의 문화론의 내용과 문제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최근 들어 이러한 문제점들을 지양하려는 문화이론들이 재조명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그람시(Gramsci)와 부라보이(Burawoy), 그리고 윌리암스(Williams)의 이론들이다13).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람시의 논의는 라클라우의 대중적 저항 민중주의와 연결될 수 있고14), 나아가 윌리암스의 사회과정으로서의 문화 개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이들 개념들은 모두 노동자계급 문화의 저항과 수용, 투쟁과 통합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논의의 편의에 따라 먼저 그람시와 부라보이의 이론들을 관계적으로 재구축 해보도록 한다.
2) 그람시의 ‘정치사회’와 부라보이의 ‘생산의 정치’
그람시는 통합국가(the integral state) 개념을 통해 국가-시민사회-정치사회라고 하는 연관 부문들을 제시한다. 여기서 ‘정치사회’의 개념은 “국가와 시민사회간의 역동적 상호관계를 매개하는 독립적 정치지형으로서의 중요성을 갖는다”(임영일, 1998: 53-54). 기존의 해석과 달리 정치사회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할 때의 강점은, 이 부문 내에서 발생하는 노동-자본-국가간의 계급정치 분석에 유용하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비계급적 갈등들도 포함된다15). 이러한 정치사회 영역에서는 제 집단 또는 계급들간의 다툼이 일어나는데, 이를 ‘헤게모니의 행사를 둘러싼 지형’(임영일, 1985: 323)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흔히 ‘지적, 도덕적 지도력’으로 설명되는 헤게모니의 의미를 평면적인 의미로만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헤게모니를 가치적인 것 혹은 상부구조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이 개념은 물적 토대와 상부구조간의 관계를 매우 정교하게 나타내는 개념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둘째, 헤게모니의 지배력을 동의의 내용으로만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게모니는 지배계급의 ‘강제력(경제적, 권력적, 그리고 언론적 강제력 등)에 기초한 합의 창출 능력’임을 염두에 둘 때(이성철, 2002: 305), 이와 같은 해석은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베버(Weber)의 정당성 개념으로 돌려버리는 셈이 된다(임영일, 1985: 321). 셋째,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이행의 문제틀(서관모, 2003: 149)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일부 논자들의 경우 이러한 이행의 문제설정에서 벗어나 이를 자유주의적인 시민사회의 활성화에만 묶어두는 경향이 있다16). 이상의 세 가지 문제점들은 그람시의 이론 중 몇 가지 개념들과 메타포만을 응용하는 수사학적 수용ㆍ활용방식이거나, 전술운용 차원에서 부분적으로만 그의 이론을 차용하는 것이다(김현우 외, 1995: 10). 이럴 경우 노동자계급문화가 갖는 저항력과 통합력 또는 공모와 동의, 그리고 희생과 타협 등을 둘러싼 투쟁의 성격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행의 틀로서의 진지전 개념에는 카우츠키의 ‘지구전략’도 포함되어 있지만17), 더욱 중요한 것은 ‘강제로서의 국가’의 사멸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국가권력의 장악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Forgacs, 1995: 278).
이상과 같은 그람시의 정치사회 및 헤게모니 개념은 노동과 문화의 관계뿐만 아니라 생산과정(일터)과 재생산과정(삶터)의 두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의 문화 특징을 분석 가능하게 한다. 즉 지배계급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헤게모니의 확보는 생산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한 유통영역과 재생산 영역의 식민화로 확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람시의 정치사회 및 헤게모니 개념은 부라보이(Burawoy, 1999: 17-18, 119)의 ‘생산의 정치’ 개념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18).
그에 따르면, 생산의 정치에는 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지니고 있는 작업조직, ② 생산관계를 규제하는 독특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생산장치가 내포되어 있는데, 이러한 생산의 정치과정에서 주도적인 헤게모니를 확보하기 위해 노동과정, 기업들 사이의 시장경쟁, 노동력의 재생산, 그리고 국가의 개입 등이, 위의 두 요소의 확대를 위해 경쟁하고 있다. 이러한 속성은 작업장이라는 미시적인 차원에서도 발생하고(생산내 정치, 즉 일터의 정치), 노-사-정이라고 하는 거시적인 사회적 구도 속에서도 발생한다(생산의 정치, 즉 삶터의 정치).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부라보이는 그 동안의 노동자계급론에서는 생산내ㆍ외의 정치를 경제주의적 본질론으로 접근하였고, 나아가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효과도 갖지 않는 파생적 영역이라고 간주하는 분석경향을 보여왔다고 비판한다. 필자는, 부라보이가 기존의 작업장 중심의 노동과정론에서 벗어나, 노동과정론이 보다 광의의 문화론적 확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매우 통찰력 있는 이론적 기여를 했다고 판단한다19).
3) 윌리암스의 ‘구성적 과정으로서의 문화’
일상적인 문화소비과정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정체성과 미래를 위한 문화적 실천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론적 자원은 레이먼드 윌리암스로부터 찾을 수 있다. ‘문화적 유물론’으로서의 그의 이론은 앞서 살펴본 그람시와 부라보이의 이론과 많은 부분에서 상동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상동성은 단순한 개념상의 근친성에서가 아니라, 행위와 구조의 상호 관계, 일상의 의미 투쟁을 통한 계급적 정체성의 형성, 그리고 지배적 헤게모니에의 포섭과 이에 대한 저항 등 패러다임적 유사성에서 비롯된다. 이제 윌리암스의 주요 내용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20).
먼저 그는 자신의 논점을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통해 제시한다. 즉 그는 마르크스의 업적 중에서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던 부분은 사회적 과정에 대한 구성적 성질보다는 도구적 관점에 대한 강조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마르크스는 문화의 역사를 종속적이고 부차적인 ‘상층구조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윌리암스는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재검토한다. 이에 따르면, 헤게모니는 명료한 상층수준의 ‘이데올로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 개념이 갖고 있는 지배(통제) 또는 교화(조작)의 기능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헤게모니는 이데올로기의 이러한 내용뿐만 아니라, 행위자들이 지닌 자신들의 역량에 대한 인식과 그 배분, 그리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구성적 지각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헤게모니는 가장 강력한 의미의 ‘문화’가 된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문화는 그람시의 ‘정치사회’나 부라보이의 ‘생산의 정치’ 개념처럼, 특정한 계급들간의 압력과 제약, 그리고 이를 넘어서려는 저항과 돌파라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러한 ‘구성적인 사회과정으로서의 문화’는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 및 그 실천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윌리암스는 이를 파악하기 위한 분석적 도구로서 전통ㆍ제도, 형성물/ 지배적, 잔여적, 부상적 문화/ 정서 구조 등의 개념을 관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들의 관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윌리암스가 제시하려는 노동자계급 문화소비의 실천적인 의미들을 찾아보도록 한다.
윌리암스에 의하면, 모든 문화적 과정은 전통과 제도, 그리고 형성물이라는 세 가지 내용을 갖는다고 한다. 먼저 전통은 일반적인 해석처럼, 단순히 ‘살아남은 과거’가 아니라, 지배적이고 헤게모니적인 압력과 제약을 가장 뚜렷이 표현하기 때문에, ‘현재’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실질적인 통합수단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전통 중에서도 압력과 제약에 가장 효과적인 것인 것만 강조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배제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시 강한 전통으로 된 것이 ‘선별적 전통’이다. 이것은 당대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조직의 한 측면으로서 특정 계급의 지배에 봉사하게 된다. 즉 의도적인 선별과정을 통해 당대의 질서에 역사적, 문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역 헤게모니 작업).
한편 선별적 전통을 보다 효과적으로 확립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꼴을 갖춘 (즉 정형적인) ‘제도’가 필요하다. 윌리암스는 이 제도의 대표적인 것으로 ‘사회화’ 제도들을 들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제도들을 통해 선별된 범위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관례에 행위자들을 결속시키며, 이것들은 또 필수적인 지식과의 밀접한 관련을 통해서 헤게모니적인 것의 진정한 기반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특정 계급이 자신들의 헤게모니적인 기반을 구성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표준 사회학이론들에 의하면 사회화가 갖는 두 측면, 즉 ① 행위자들의 사회체계로의 복속과, ② 이러한 압력과 제약을 돌파하려는 힘의 형성 중 전자만이 상대적으로 많이 강조되고 있다. 윌리암스 이러한 경향을 지적하기 위해 “모든 제도의 총합이 곧 하나의 헤게모니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문화는 항상 제도들의 총화 그 이상이다”라고 말한다. 즉 우리의 현실은 모순과 미해결의 갈등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제도들의 움직임은 사회화가 아니라 오히려 복합적인 헤게모니 과정이라는 것이다21).
윌리암스가 곧이어 형성물이라는 개념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형성물들은 ① 행위자들의 의식적인 움직임 및 경향들인데, 그러나 이것들은 단순히 행위자나 특정 계급의 의식, 사고, 정체성 등의 개별적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움직임과 경향들을 통해 만들어진, ② 보다 큰 규모의 실제 형성물들의 표현임도 알게 된다. 바로 여기에 ‘과정으로서의 문화’, 그리고 ‘실천으로서의 문화’의 중요성이 있다. 문화의 이러한 실제적인 과정과 내적인 역동적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제시하는 분석 틀이 곧, 지배적(dominant), 잔여적(residual), 그리고 부상적(emergent) 문화 개념들이다. 먼저 밝혀 둘 것은 윌리암스는 이들 개념들을 단순히 유형론적으로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잔여적 그리고 부상적 문화가 지배적인 문화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면서 그 특성을 드러내는 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잔여적인 문화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잔여적인 문화는 구시대적인 문화와 구별 짓기는 매우 힘들지만, ‘구시대적인 것’은 전적으로 과거적인 요소로 인정되어 관찰과 연구의 대상이 되며, 때에 따라서는 심지어 고의적으로 부활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잔여적인 것은 과거에 그 효과적 형성을 보았으면서도 문화적 과정 속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윌리암스는 그 예로써 조직화된 종교와 전원적 공동체를 들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배적 문화에 통합되어 버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반면에 지배적인 문화에 대해 대안적이거나 심지어 반대적인 관계에 있을 수도 있다. 즉 이러한 잔여적인 문화의 요소들은 지배적인 문화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배계급의 선별적 전통이 강력히 작용하여 종속계급의 능동적인 잔여 문화를 재해석, 무력화, 그리고 차별적 포함과 배제 등을 통해 지배적인 문화 속에 통합시켜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부상적인 문화 역시 지배적인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검토되고 있는데, 이것은 지속적으로 창출되고 있는 새로운 의미체계, 가치관 및 관례, 그리고 새로운 관계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새롭다’는 의미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첫째는 지배적인 문화의 새로운 국면을 뜻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지배적 문화에 대해 실질적으로 대안적 내지 반대적 성향을 지닌 엄밀한 의미에서 부상적인 것이 그것이다. 이 두 번째 측면은 잔여적 문화의 특성과 일견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잔여적인 것은 이전의 사회적 형성물 및 국면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지배적인 문화가 이를 통합 또는 배제하는 뚜렷한 국면을 보여주지 않을 경우, 과거로 회귀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특성을 보인다. 반면 부상적인 것은 이와 달리 현재의 지배적인 요소들에 대해 대안적이거나 반대적 성질을 지닌 문화적 요소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계급구조는 이러한 요소들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사회적 토대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이 부상하면 할수록(예컨대 노동조합, 노동자 정치세력화, 그리고 노동자계급 생활양식의 활성화 등) 지배적인 문화의 통합작용이 본격적으로 시도된다는 점에서는, 잔여적 문화의 대항적 속성을 일정 정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구성체에 관한 윌리암스의 논의를 여기까지 만으로 국한시킨다면 문화소비에 있어서 노동자계급의 실천적인 전략들을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현란한 이론과 빈약한 실천’이라는 민중주의적 늪으로 잦아들 수 있기 때문이다. 윌리암스는 이를 넘어서기 위해 ‘정서구조’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뚜렷한 형태의 부상물(명백한 부상물) 뿐만 아니라, 활동적이고 급박하면서도 여전히 명료하게 표출되지 않은, 부상 준비중인 것을 수합해내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현실 속의 어떠한 생산양식이나 지배적인 사회질서도 노동자계급의 모든 실천이나 에너지 및 의도들을 다 포섭하거나 탕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윌리암스는 계급적 관점에 서서, 타인에 대한 대안적 지각, 그리고 물질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각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실천 등을 찾아내기 위해 정서구조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가 ‘정서’ 개념을 사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① 정서는 주관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② 정서 개념은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보다 정형적인 개념들과 구분되어야 한다. ③ 정서구조 대신 경험의 구조라는 표현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 개념 속에는 과거 시제가 담겨 있다. ④ 반면 정서는 생동적이고 상호관련적인 연속성 속에 놓여 있는 현재적인 실천적 의식이다.
이러한 정서 속에는 사회적 경험들이 용해되어 있다. 그러나 이 용해물은 단순한 유동액이 아니라 부상적인 것을 준비하는 형성물이기 때문에 ‘구조(화)’로서도 인식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분화된 계급들간의 복잡한 정서구조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새로운 정서구조가 부상하는 것은 하나의 계급이 형성되는 것과 가장 잘 연관되어 있고, 또한 이의 부상은 한 계급 내부의 모순이나 분열 또는 변화의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이에 대한 대안들을 모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 시기 우리나라 노동자계급 문화소비의 성격에 대한 고민들은 윌리암스가 논의하는 바로 이 지점에 와 있다. 왜냐하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민중문화 또는 노동자문화의 내용을 과거 시제로만 회고할 것인지, 아니면 그 시절의 부활만을 단순히 희망만 할 것 인지의 문제를 넘어서서,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상황에서 노동자계급 문화소비의 실천적인 전략들을 어떻게 제시해야 하는지가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4) 소결
지금까지 살펴본 이론적 논의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에 관한 비교적 선행의 체계적인 이론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상품성이 갖는 물화(refication)현상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분석을 제시해주고 있으나,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이미지는 이러한 구조 속에 갇혀 있는 수동적인 존재로만 나타난다. 한편 민중주의적 경향을 안고 있는 다양한 좌파 문화이론들 역시 생산모델이나 소비모델 중 어느 한 곳에 편중되든지, 아니면 노동자계급을 제압하려는 자본주의 구조와 이에 저항하(려)는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실천간의 긴장관계를 보여주지 못하고, 텍스트 나 담론분석으로부터 곧바로 실천으로 점프하는 ‘이론의 과잉과 실천의 빈약’ 문제를 보여주었다.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에 관한 이러한 이론적 문제점들을 극복하려는 시도로서 그람시와 부라보이, 그리고 윌리암스의 문화이론이 논의되었다. 이들 이론들이 갖는 공통된 점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의사소통/ 정책결정 등의 사회적 성격이 이전의 그것과 매우 큰 변화가 있어, 사회문제를 바라볼 때 관계적 관점보다 부문적 그리고 유형론적 관점을 갖기 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치적이고도 사회계급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둘째, 정치사회, 생산의 정치, 그리고 과정으로서의 문화 개념 등을 통해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노동자계급상을 그려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과 체계, 일터와 삶터, 그리고 구조와 행위간의 관련성과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는 문화적 실천전략들에 대한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다. 윌리암스의 표현대로라면, 부상하는 것과 부상준비 중인 것들에 대한 형성은 이제 우리들의 몫이 되었다.
3. 나오며: 어떻게 할 것인가
앞서의 서론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노동자계급의 문화소비는 경제적인 재화에 대한 단순한 지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문화정책 및 자본의 문화전략과 그 산물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수용과 배척, 동의와 저항 등을 모두 아우르는 관계적인 개념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적 생활양식의 정주(定住), 노동자계급적 아비투스의 확산을 위한 계급적 관점이 문화소비의 영역에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노동운동의 문화화나 문화적 노동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것으로서의 노동운동과 여타의 노동운동은 당연히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를 생활양식의 총체라고 단순하게 정의하더라도, 노동운동을 통한 계급적 전망의 확대는 노동자 계급문화의 형식과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몇 가지의 사례들을 통해 노동자계급 문화소비의 바람직한 전략들에 대해 토론해 보기로 한다.
첫째 ‘이념의 하향평준화와 연대의 지체’로 압축될 수 있는 현재의 운동상황하에서, 이를 넘어서려는 활동들이 강화되어야 한다. 이는 기업별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활동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 동안의 경험에 따르면 이들 활동가들은 사업장의 범위를 넘어서서 지역과 전국으로 이어지는 연대의 틀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기울여왔다(임영일, 1999: 8). 그러나 활동가들의 이러한 연대의 틀은 최근 들어 그 동력이 다소 떨어지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그러므로 동력의 활성화와 활동가의 양성 등을 위한 연대 틀의 재조정과 교육체계의 재건설이 매우 시급하다(신재걸, 2002: 3-4).
둘째, 단위 사업장의 바람직한 문화소비의 성과들이 사업장 안팎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식사시간을 이용한 ‘조합 TV방송’을 들 수 있다.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의 경우, 현재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주당 5분간의 조합 TV를 방송하고 있다. 이 역시 단체교섭을 통해 획득한 것인데, 아직까지는 비록 주 5분이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생산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자들이 작업장 바깥에서 매일 세례를 받고 있는 자본의 논리를 일터에서조차 은연중에 수용해야한다는 것은 매우 경계되어야 할 내용이다. 그러나 대기업 노동조합의 경우도 기획에서부터 방송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용과 전문적인 인력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사례들을 산별적 방안으로 구체화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 일터와 삶터, 생산과 재생산, 작업장과 지역, 그리고 기업과 산업을 넘나들면서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생활 양식, 그리고 정체성을 보다 내실 있게 할 수 있는 사업들을 발굴하여 정책화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우리는 D조선 노동조합의 ‘산업안전보건 프로그램’(필자가 붙인 명칭임)으로부터 많은 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금속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과 관련된 최대의 현안은 근골격계 문제인데, 이의 해소를 위해 D조선 노동조합의 경우 재활센터22)의 운영을 통해 적극적인 대처를 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인 운영 방식은 따로 논의되어야 하겠으나, 그 요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조합원의 요구 → 사내 산재상담소에서의 상담 → 상담후 입원, 통원, 또는 재활센터에서의 치료 결정 → 치료 후 곧바로 현업에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내의 현장적응 프로그램에서의 전반적인 재훈련 → 현장복귀 또는 재순환. 이 시스템은 독일의 현장 내 산업안전 문제를 담당하는 ‘직능조합’23)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비단 일터에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가정, 그리고 지역을 연계하는 매우 의미 있는 노동조합의 활동으로 평가된다. 이 과정을 통해 조합원들은 소속감과 연대의식을 일상적으로 경험ㆍ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중한 성과들 역시 앞서 언급한 바처럼 단위 사업장을 넘어 확대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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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덤프연대 경남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