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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토론 접기최주호 / Choi Juho(20######65)
2022년 5월 2일5월 2일 오후 7:34
1. 저자는 동아시아 각국의 족보에 대한 명칭에 대하여 종보는 종족의 명부라는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가보는 족보 수록 범위의 협소함을 나타낸 것이라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세보는 어떠한 특징을 반영한 명칭인지 궁금합니다.
2. 혈연집단의 명부는 신분 구성원의 범주를 정확히 하여, 대내외적 구성원 규정 및 결속력 강화, 행정 활용을 위해 비신분제 사회보다는 신분제 사회에서의 효용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송에서 먼저 발원하여 인근 지역으로 확대된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2022년 5월 3일5월 3일 오후 12:31
감사합니다~
pm 2:125월 12일 오후 2:12
오늘 여기 질문이 쌓여있다고 알려주어 이제야 답합니다 ^^
일단 이 질문은 내가 족보 전공은 아니라서 심도 깊은 답변은 어려울 듯합니다. 세보는 일본처럼 장자만 적는 것은 아니고 방계도 넣지만, 부계 직계혈연계통으로 종손과 기타에 차이를 두는 즉 종법제도(원래는 주 나라에서 기원)를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혈연집단 명부는 신분제 사회에서 더 효용이 클 것 같은데, 신분제가 없어졌다는 명 이후 동아시아 각 지역까지 확산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흥미롭네요.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족보의 발전은 과거제와 획득신분으로서 "사" 신분의 재생산 매커니즘이 확립되면서 그 과정에서 이뤄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제와 신분제는 상치되는 개념이지만, 과거제와 과거 합격 전략 및 과거 합격 후 학위자의 "은택"을 공유하는 집단으로서 종족 내지 가문의 명문화는 필요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위 토론 접기최민식 / Choi Minsik(20######03)
2022년 5월 4일5월 4일 오전 2:06
중국과 한국의 족보를 비교했을 때의 차이점이 중국은 세표도가 있다는 것이었고 한국은 세표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이 세표도가 없는 이유에 대한 내용은 없어서 이에 대해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가족,친족 제도에서는 동세대 사람 간 연령으로 질서가 형성되므로 세표도가 필요했던 것인데 한국은 그런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세표도가 거의 없었던 것이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최민식 / Choi Minsik(20######03)이(가) 5월 4일 오전 2:06에 편집
pm 2:195월 12일 오후 2:19
이 점은 나도 궁금하네요. 쉽게 이야기하면 세계도는 "항렬"이 중요하고, 세표도는 "출생순" 나열인 것이잖아요.
한국이 세표도가 없다는 것은, 결국 나이가 많냐 적냐보다 항렬이 나보다 위냐 아래냐가 훨씬 중요한 사회였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는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하자면, 같은 족보에 있어도 서로 6촌 8촌 이상이면 가깝지 않지만, A와 B가 만났을 때 A가 삼촌뻘이면 B가 나이가 10살이나 더 많아도 무조건 나이 많은 B가 A보고 숙부, 삼촌 반대는 조카 이렇게 불렀지요. 항렬은 이름의 돌림자를 보면 금방 알 수도 있고, 족보에서 무슨 씨 무슨 파 몇 대 손이냐 물어도 알 수 있겠지요.
중국보다 더 항렬 따지는 한국 문화가 조선 시대 족보에 세표도가 없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하위 토론 접기강하영 / Kang Hayeong(20######00)
강하영 / Kang Hayeong(20######00)
일요일5월 8일 오후 5:15
1910년 한국이 토지조사사업을 할 때 410만보 가량의 토지가 있었다고 하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도 조선과 비슷한 농경 가능한 토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의 1.5배 정도 되는 영토를 가진 일본이 왜 우리와 비슷한 농경지를 가졌는지 의문이 든다.
저자는 족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 몰락 양반의 족보를 사서 자신의 이름을 넣는 왜곡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것도 조선 족보의 방대함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pm 2:255월 12일 오후 2:25
1910년대 한국과 일본의 농경지 규모가 비슷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일본은 토지의 상당 부분을 농업 외에 다른 곳에 쓰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일본은 1880년대 섬유, 철도업을 중심으로 제1차 산업혁명을 겪고, 1900년대 러일전쟁 시기를 전후하여 중공업 위주의 제2차 산업혁명을 이루어 1910년-1920년 부근에는 경제 규모로 세계 20위 권 안에 들어가고, 산업구조도 농업 등 1차산업보다 2차, 3차 산업이 커집니다.
현재 족보 중 거의 절반은 가짜 아닐까요? 조선 말까지 노비 인구가 여전히 30%였고, "성"을 가지지 않은 인구가 절반 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성도 있고 족보도 대고 있으니.... 이러한 족보 만들기가 활발해지는 것은 18세기이고 그 흐름은 계속 이어졌다고 봅니다. 지금이야 안동 부근 말고는 족보 찾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만... 중국의 경우, 천민이 거의 사라지지만 복건성 수상족이 천민 취급을 받았는데, 명 말 청 초에 이들 수상족 중 일부의 활발한 족보 만들기 사례에 관한 연구가 있습니다.
하위 토론 접기전혜령 / Jeon Hye Ryeong(20######20)
전혜령 / Jeon Hye Ryeong(20######20)
일요일5월 8일 오후 6:37
조선의 족보는 세계도 중심의 형태로 책에서는 중국과 같이 방계자손까지 포함한 방대한 인원이 수록되었다고 언급되어있는데, 그렇다면 홍길동(가상인물이지만)과 같은 서얼 또는 혼외자도 족보에 기록되었었는지 궁금합니다. 조선의 임금이었던 영조 또한 모친이 천민이었다고 알고 있으며 비록 서얼은 정실 소생이 아니지만 사회 진출과 같은 몇몇 분야에 있어서만 제약을 받을 뿐 실제 양반까진 아니더라도 비슷한 생활을 누렸음에도 만약 족보에 기록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 또한 궁금합니다.
전혜령 / Jeon Hye Ryeong(20######20)이(가) 5월 8일 오후 6:38에 편집
pm 2:285월 12일 오후 2:28
중국은 적서 차별이 크지 않습니다. 특히 아들은 더 적어서, 우리나라 홍길도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 당연히 과거 시험 자격도 있고, 상속도 받고, 족보에도 오릅니다. 첫째 부인 말고 다른 부인들도 다 족보에 오르고 사당에도 단은 크고 높게 차이를 두지만 위패가 모셔집니다.
영조의 경우는 왕족이므로 계승 문제가 있으니 별도 사안입니다. 조선에서 서얼은 확실히 차별을 받았으니, 과거 시험 자격도 없고 결혼 등 각종 사회적 위신/행사에서도 차별이 컸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위 토론 접기심지은 / Jieun, Sim(90######25)
일요일5월 8일 오후 8:20
조선 말에는 족보를 사고 팔게 되면서, 사실성이 부족하거나 거짓된 내용이 많습니다.
물론, 민간이 편찬하였지만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책에 내용에 따르면 한국이 가계 기록을 위해서 소비된 종이의 양이 젤 많다고 하며
오늘날에도 대량의 족보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의 사회에는 신분제 사회도 아니고, 족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변하면서 족보에 대한 집착이 적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현재에도 대량의 족보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는지 의문입니다.
pm 2:315월 12일 오후 2:31
아마 세대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작년에 돌아가신 저희 시부께서도 몇 년 전에 엄청나게 두꺼운 족보를 제게(일단 맏며느리라서) 특별히(!) 주시면서, 대대손손 보관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계속 태어나니까 족보라는 것이 주기적으로 최신판을 내야 하거든요. 당연히 종친회에서 주도하고 족보 가질 사람들이 아~주 비싼 돈을 갹출해서 공동 출판하는 것입니다. 족보에 제 이름, 우리 아이들 이름까지 다 올라와 있는 최신판! ㅠㅠ 한국에서 대량의 족보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ㅎㅎ
다만 그 족보, 어디에 두었는지 본인도 기억을 못하니, 우리 윗세대까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위 토론 접기김지민 / Kim Jimin(20######79)
일요일5월 8일 오후 8:30
저자는 동아시아의 집약적 도작을 언급하면서 대경영과 소경영의 문제를 꺼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영국의 사례를 언급해 대경영보다 소경영이 일반적인 방식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도 언급했듯이 자본주의 초기에는 농촌에서도 대규모 경영이 나타나고 있고, 그것이 자본주의 초기에 나타나는 형태일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영국처럼 초기에는 대경영식 농업이 나타나고, 후기로 갈수록 변화하는 것일 수 있으며, 또 다른 관점에서는 동아시아 3국에서는 서양과 달리 대경영이 계속해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을 무시하고 책에서는 대경영이 없었다는 구체적인 자료 없이 획일화된 시선으로, 또는 연구가 더 필요한 것을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pm 2:365월 12일 오후 2:36
기존 학설에서는 무조건 대경영이라야 선진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예를 들어 영국 인클로저 운동 전후의 대규모 농장 경영이나, 오늘날 미국의 기계화를 이용한 대규모 농장 경영을 "선진" 내지 "근대"로 보았지요. 그런데 최근의 스마트팜이나 부가가치가 높은 맞춤형 농업은 이쪽이 최신식이고 부가가치가 높지만 오히려 농장 경영 규모가 작습니다. 그래야 시세에 대응하기 편하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중국도 역사적으로 화북 농업을 보면 진한 시대 국가가 인민에게 균등하게 토지를 나눠주는(물론 지배계급은 더 주지만) 형태에서 귀족제가 발전하면서 대규모 장원 경영, 또 대형 농기구와 소, 말과 같은 대형 가축을 이용한 농업을 하는데, 오히려 송대 이후 소농경영이 확립되면서 분할됩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획일적으로 근대 전후의 동서양 비교만 해서, 대경영이면 선진 소경영이면 후진이라는 식으로 대입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반론을 하면서, 대와 소가 선진성의 기준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위 토론 접기박예지 / Park Yeji(20######09)
일요일5월 8일 오후 8:34
제 2부 제 3장에서 우에다 마코도의 지적 중 중국의 가족, 친족제도에 있어서 '형용사적' 관계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형용사적 관계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 마지막 부분에서 오늘날에도 대량의 족보가 계속해서 편찬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적어서 오늘 날에도 족보가 편찬되고 있는 국가에서 족보가 가졌던 가치, 기능이 다른데 그렇다면 현재에는 각국의 족보가 어떠한 가치 때문에 계속하여 작성되는 것인지 그리고 현재까지도 작성되는 족보가 어느 정도의 양인지 또한 궁금합니다. 또 제 2부 제 3장에서 이누마 지로가 세계의 농업을 기후조건에 따라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는 부분 중 중세유럽과 동아시아의 경우를 두고 일본의 봉건제론이 그 차이를 무시한 부분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박예지 / Park Yeji(20######09)이(가) 5월 8일 오후 8:47에 편집
pm 2:565월 12일 오후 2:56
다 어디에서 본 부분인데 제2부 3장에서 찾을 수가 없네요. 페이지를 알려주기 바랍니다. 족보 답변은 위의 답변들 참조!
아 마지막은 찾았음.
농사를 지으려면 보수(땅이 습기를 잘 머금고 있는 것, 지력이 좋아야 한다), 제초(잡초를 제거하는 것) 두 가지가 필요함.
휴한은 삼포제처럼 땅을 경작을 하지 않고 놀려서 쉬게 하여 지력을 회복하거나 잡초를 없애는 것이고, 중경은 경작하는 중에 지력 보완(비료를 주든가 하여)과 잡초 제거(김매기를 하던가)를 하는 것이므로 땅을 놀리지 않고 계속 연작하는 것임.
즉 농업 형태로 보면 일본도 휴한제초의 중세 유럽과 완전히 달리 한국이나 중국처럼 중경제초 농경에 속하는데, 유럽 중세와 같다고 주장한다는 뜻.
강진아 / Kang Jin A이(가) 5월 12일 오후 3:44에 편집
하위 토론 접기김경이 / Kim Gyoungyi(20######62)
김경이 / Kim Gyoungyi(20######62)
일요일5월 8일 오후 8:50
제3장에서 17세기 이전의 족보는 여계의 자손도 모두 수록하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서술하며 그 이유로 여계의 자손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높지 않은 신분의 여계 자손까지 모두 기록하였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혼인 상대가 어디의 누구인가를 족보에 기대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그 기재가 공란인 경우 일족의 위신이 의심 받았다는 서술을 보아 아마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의 여계 자손은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4장의 경우 아시아 농업의 특징으로 토지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반면 노동생산성은 극단적으로 낮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하여 궁금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노동생산성에 대한 낮은 지표가 유럽의 농업과 비교했을 때 후진적이라 판단되어지는 이유가 궁금하였습니다. 물론 노동생산성을 중시하는 견해의 한 전형으로서 프란체스카 브레이가 제시한 농구의 발달 문제가 서술되어 있는데 이외에 노동생산성과 관련하여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 후진적이라 판단되어 지는 또다른 이유가 궁금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pm 3:015월 12일 오후 3:01
여계 자손의 정확한 범위는 시대마다 지역마다 좀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나라별로 일괄하기는 족보 형태 역시 다양합니다. 아시아가 노동생산성이 극히 낮은 것은 경작지는 거의 늘지 않았는데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기 때문입니다. 유럽은 조방적 농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땅에 비해 인구가 적어서 경작지가 계속 늘어났거든요. 나중에 비슷하게 한계에 처했을 때는 "아메리카"!를 GET하여 해결합니다. 예전에는 그래서 아시아 농업은 1인당 생산성이 낮다고 후진적이라고 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주어진 땅에 노동력을 더 투입하는 방식으로(집약농업) 어쨌든 같은 땅에서 나오는 생산량을 크게 늘립니다(높은 토지생산성). 그랬기 때문에 또 사람들을 먹여 살려서 좁은 땅으로도 늘어난 인구를 먹여살렸다는 것이죠.
오늘날도 중국 땅 사이즈 = 유럽 땅 사이즈, 중국 인구 14억, 유럽 인구 7억. 한국은 중국보다 인구밀도가 더 높습니다....
하위 토론 접기천성주 / Chun Seongju(20######79)
천성주 / Chun Seongju(20######79)
일요일5월 8일 오후 9:18
3장에서 저자가 양반 자녀들이 양반으로의 지위를 계승할 수 있었기에 19세기 양반 급증 현상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야기 조선 후기에 신분제 사회가 동요하면서 하층민들이 족보를 위조하거나 양반 신분을 매입하는 일이 일어나 양반의 수가 늘어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또한, 중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족보가 존재해 왔는데 중국과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조선의 족보 이외에도 고려나 그 이전에 우리나라에 족보가 존재 했는지 궁금합니다.
pm 3:035월 12일 오후 3:03
네 저자 역시 그 두 가지를 다 인정한다고 봅니다.
중국도 족보가 보편화되는 것은 송대, 특히 명대 이후입니다. 물론 귀족제 사회였던 위진남북조, 수당대에도 족보가 있지만, 그때는 "명망 있는" 대단한 가문이나 "황실" 족보가 위주였습니다. 고려 족보는 문외한이라 모르겠네요.
하위 토론 접기오현빈 / Oh Hyunpin(20######55)
일요일5월 8일 오후 9:46
p272
"화중 화남 지역에서는 대만과 같은 형태의 발전 가능성이 잠재적으로는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에서 대만과 같은 형태의 발전이 정확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pm 3:055월 12일 오후 3:05
대만처럼 토지생산성, 노동생산성 둘 다 다 높은 발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뜻. 일본, 대만 두 나라가 농업에서는 가장 선진적입니다. 경작지도 제한적인데 토지생산성도 노동생산성도 높으니 대단하지요. 그 바탕이 된 것은 그린 레벌루션(녹색혁명)이라고 불리는 20세기 초기 일본 육종학의 발전입니다. 노벨상 수준이니... 그래서 이승만 정권 때에 어머니는 일본인 아버지는 한국인이었던 저명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를 초빙하여 육종학을 적극 육성하고(그 씨 없는 수박을 샘플로 한국인에게 보여주신), 박정희 정권 때에 서울대 농대 허문회 박사 주도로 통일벼 개발에 성공하여 한국 농업의 생산성 역시 급성장합니다. 덕분에 1970년대 중반 이후 마침내 식량 자급에 성공합니다. (이때 아시아 후진국가들, 중국, 한국, 북한 등은 일단은 식량 자급이 최우선 목표였음). 지금은? 식량자급율이 절반 이하, 특히 곡물자급률은 20% 이하입니다. 왜냐! 다른 산업이 발전해서 사 먹기 때문이죠. 산업고도화의 산물이지만, 코로나 사태처럼 글로벌 공급체인이 무너지거나 전쟁이 나면 큰일 나겠지요....
우장춘 박사 이야기 나왔으니 몇 자 더 적자면, 우장춘 박사 아버지가 별기군 출신의 무장으로 김옥균 등 개화파를 지지했던 우범선입니다. 우범선은 김옥균이 상해에서 암살 당해 시체는 양화진에서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을 보고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민비 살해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후 다시 대한제국의 자객에서 암살 당합니다. 망명 기간 동안 만난 일본인 여성과 사이에 우장춘 박사가 태어났는데 그래서 한국어도 잘 못했다고 합니다. 일본인 어머니가 우장춘 박사를 조선인으로 줄곧 키웠고, 처자식도 일본에 놔두고 한국에 와서 한국 육종학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데, 어머니가 위독한데도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갔다가 안 올까봐 여권을 안 주어 우장춘 박사는 어머니 임종을 못 지켰다는..... 부인과도 죽기 직전에 부인이 한국에 몰래 와서 만났음. ㅠㅠ 여러분 과학사 수업에 이것저것 물어보세요.
강진아 / Kang Jin A이(가) 5월 12일 오후 3:29에 편집
하위 토론 접기홍준휘 / Hong Junhui(20######78)
일요일5월 8일 오후 10:47
저는 동아시아의 족보를 다룬 2부 3장의 내용에서 의문이 들었던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족보라는 명칭은 동아시아 내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정작 편찬할 때는 족보가 아닌 중국은 종보, 한국은 세보, 일본과 류큐, 그리고 베트남은 가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족보라는 명칭은 어떻게, 그리고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또한 족보가 현재는 동아시아 국가들 중 우리나라에서만 가장 대량으로 편찬되고 있다는 내용이 3장 마지막 부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류큐와 일본에서는 정부가 족보를 편찬했었기에 현재는 편찬되지 않는다고 해도,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 족보 편찬의 주체가 민간인데다가, 아무리 중국과 베트남은 족보가 대내적인 기능이 우세했을지라도, 이에 따른 대외적 기능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인데, 왜 현재는 각 민간에서 편찬하는 족보의 양이 적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pm 3:305월 12일 오후 3:30
넵. 위의 족보 관련 답변 참조 부탁합니다.
하위 토론 접기배형주 / Bae Hyungjoo(20######47)
배형주 / Bae Hyungjoo(20######47)
일요일5월 8일 오후 10:51
1. 중국의 종족은 조상부터 계산하여 동일 세대에 속하는 인물 사이에서 이름의 한 자를 공유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한국에도 비슷하게 ‘돌림자’라는 개념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돌림자 또한 중국으로부터, 혹은 성리학개념에 따라 생긴 것일까요? 어떤 연유로 등장하게 된 것이며, 세대 마다 쓰이는 돌림자가 다른데, 단순히 불규칙하게 다른 것인지 규칙적이게 다른 것인지, 어떤 것인지 그 원리가 궁금합니다.
2. 세표도는 세대 내에서 출생 순서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구조라고 합니다. 조선과 같이 유교가 성행한 나라는 장유유서 또한 중요시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혈연집단 내에서 장유유서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출생의 순서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세표도가 중요할 것 같은데, 이를 어째서 족보에서 제외시켰는지, 그 자세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배형주 / Bae Hyungjoo(20######47)이(가) 5월 8일 오후 10:52에 편집
pm 3:315월 12일 오후 3:31
위의 답변 참조~
하위 토론 접기배성빈 / Bae Seongbin(20######14)
배성빈 / Bae Seongbin(20######14)
일요일5월 8일 오후 11:20
우리 나라의 이전 국가들에서는 족보나 성씨의 변동이 자주 있었던 것으로 배웠다. 왕의 성씨를 따라가기 위해 자신의 성씨를 바꾸거나, 족보를 구입하여 새로이 가문을 시작하는 경우, 혹은 새롭게 노예였던 자가 성씨를 얻는 경우 등 신분의 변화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자신의 조상을 바꾸는 일'이 빈번했다고 알고 있는데, 타국에서, 특히 신분제 사회가 강고했던 일본과 류큐에서도 위와 같은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또한 그런 변화에 국가 체제나 다이묘가 대처했던 방법이나 성씨나 족보를 바꾼 사람이 받았던 부정적 경험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pm 3:345월 12일 오후 3:34
류큐는 모르겠고, 일본은 농민들은 성이 없었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에야 성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성이 다 다나카(밭 가운데), 야마다(산 밭), 야마모토(산 아래)... 이런 식인겁니다. 유럽에서 성이 골드스미스 이런 것과 비슷합니다. 일본은 절에서 출생부터 사망까지 철저하게 인구를 등록하여 관리했기 때문에 한국, 중국처럼 가짜 만들기가 사실상 매우 어려웠다고 보면 됩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능력을 발휘해서 괜찮은 집안에 양자로 입적하는 방식, 혹은 돈을 많이 주고 사무라이 집안에 양자로 입적하는 것으로 이것은 많습니다.
하위 토론 접기김용우 / Kim, Yong Woo(20######73)
김용우 / Kim, Yong Woo(20######73)
일요일5월 8일 오후 11:24
저는 이누마 지로의 기후조건에 따른 세계 농업의 구분에 대한 내용이 어려웠습니다.
휴한과 중경의 구별, 보수와 제초의 구별에 대한 내용과 그 구체적인 차이와 관련한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았고,
일본의 '봉건제론'이 이러한 차이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라는 내용의 구체적인 의미가 궁금했습니다.
pm 3:435월 12일 오후 3:43
농사를 지으려면 보수(땅이 습기를 잘 머금고 있는 것, 지력이 좋아야 한다), 제초(잡초를 제거하는 것) 두 가지가 필요함.
휴한은 삼포제처럼 땅을 경작을 하지 않고 놀려서 쉬게 하여 지력을 회복하거나 잡초를 없애는 것이고, 중경은 경작하는 중에 지력 보완(비료를 주든가 하여)과 잡초 제거(김매기를 하던가)를 하는 것이므로 땅을 놀리지 않고 계속 연작하는 것임.
즉 농업 형태로 보면 일본도 휴한제초의 중세 유럽과 완전히 달리 한국이나 중국처럼 중경제초 농경에 속하는데, 유럽 중세와 같다고 주장한다는 뜻.
하위 토론 접기옥선승 / Ok Seonseung(20######59)
옥선승 / Ok Seonseung(20######59)
일요일5월 8일 오후 11:37
3장 내용에 관한 질문은 민간에서 족보를 만들 때 몇 년을 주기로 작성을 할 것이고 일족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텐데 정보를 조사하는 과정이 궁금하고 조선의 경우 대외적 기능을 중요시하는데 그렇다면 족보를 남에게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혼인 관계를 증명했을까, 아니면 단지 기록만 해놓고 끝 했을까? 그게 궁금하였습니다.
pm 3:455월 12일 오후 3:45
그건 잘 모르겠네요 ^^
하위 토론 접기한예원 / Han Yewon(20######38)
일요일5월 8일 오후 11:37
저자는 동아시아가 서양에 비해 농기구의 발달 정도와 노동생산성이 낮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토지생산성이 높고 중요했기 때문에 서양보다 농업의 발전이 덜 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책에 실린 1987년 기준 자료에는 토지생산성도 유럽이 아시아보다 우수한 것으로 통계가 나와있습니다. 동아시아가 아닌 아시아 전체를 기준으로 통계를 내서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일 수도 있으니 동아시아 기준으로도 유럽의 토지생산성이 더 높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서양에 어떤 변화가 있어서 토지생산성이 증가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 토지생산성에서도 동아시아보다 서양이 우위를 점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한예원 / Han Yewon(20######38)이(가) 5월 8일 오후 11:56에 편집
pm 3:465월 12일 오후 3:46
위의 답변을 참조 바랍니다. 유럽도 역시 경작지 정체와 인구 증가를 겪으면서 토지생산성까지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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