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상당산성에서 만난 꽃뱀
김도솔
오월 어느 화창한 봄 날, 작가사상문인회 팀이 산성 탐방길에 나선다.
올 한 해 동안 테마기행으로 산성을 탐방하기로 하고, 문경에 있는 고모산성을 비롯해 할미산성, 제천의 망월산성과 괴산의 미륵산성을 거쳐 다섯 번째로 선택한 곳이 청주에 상당산성이다.
아침 아홉시 경에 문경에서 출발해 연풍을 지나 괴산에서 증평으로 다시 청주로 가서 상당산성까지는 약 한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었다. 보이는 곳마다 산 벚꽃과 도화가 한창이다.
상당산성은 둘레가 4.1km, 높이 2~4m, 면적이 704,609㎡에 달하는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상당이라는 명칭은 백제 때 청주의 지명인 상당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남문 밖에서 발견된 옛 기와의 명문을 통해 통일신라의 서원경과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영호남과 서울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하는 요충지로 크게 주목받았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쳐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군사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충청도의 군사 책임자인 병마절도사는 청주읍성에 있었으며, 그 배후인 상당산성에는 병마우후를 두어 방어하게 하였다.
상당산성에는 대략 3,500명의 병력과 승군이 배속되어 산성의 유지와 보수를 담당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596년)에 수축된 이후 숙종 42년(1716년)부터 영조 23년(1747년)까지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이때 성벽 축조는 물론 성내에 구룡사 및 남악사와 장대사의 3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되었으며, 관아건물과 장대·포루·창고 등이 완성되어 면모를 갖추었고 이후에도 계속 보수되었다.
현재 상당산성은 동문·서문·남문의 3개문과 동암문·남암문의 2개 암문과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남아 있다.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가 30만 명의 병력으로 쌓았다고도 하며, 따라서 김유신 장군의 전적지인 낭비성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상당산성이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596)에 수축된 이후, 숙종 42년(1716년)에서 45년(1719년)까지 충청병사 유성추의 감독으로 대대적으로 성벽에 대한 개축이 이루어졌고, 이듬해에는 성내에 구룡사와 남악사의 2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되었다는 것이 성문 무사석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 후 여러 번의 수축이 이루어져 성내의 여러 시설인 관아사, 군기고, 창고, 수구, 장대, 포루 등이 완성되었다.
현재 상당산성에는 동문인 진동문(鎭東門), 서문인 미호문(弭虎門), 남문인 공남문(控南門)의 3개 문과 동암문 남암문의 2개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있는데,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정비공사로 동·남문루와 동문이 재건되었고 1992년 말에는 동장대 역할을 했던 동화정(棟和亭)도 재건되었다. 또한 1995년도의 발굴조사로 서장대 역할을 했던 제승당(制勝堂)의 규모(15평)와 위치가 확인되었다. (위키백과)
오늘 우리가 들어갈 문은 남문인 공남문으로 올라가는 동안 성문 앞에 넓게 펼쳐진 잔디 광장에는 군데군데 꽃들이 피고, 봄나들이 나온 가족들과 웨딩촬영을 하는 예비부부들의 행복한 모습이 보인다. 남문인 공남문은 상당산성의 정문으로 무지개문 형태를 하고 있으며, 무사석을 다듬어 11단으로 쌓았고 문의 안쪽에는 옹벽이 있고 이 문을 보호하기 위해 좌우에 치성이 설치되어 있다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는 공남문을 지나 왼쪽으로 부터 한 바퀴 돌기로 하고 성벽을 따라 탐방을 시작한다. 조금씩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을 따라가는 동안 왼쪽 성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잔디광장이 가슴이 탁 트이게 넓고 시원하다. 평상시에는 군사들의 훈련장소로 쓰기도 하고 전시에는 적과의 교전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고 선생님께서 설명을 해 주셨다.
오른쪽으로는 성내에 아름드리 소나무와 숲이 어우러져 있으며 성벽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그동안 흔적만 겨우 보아오던 다른 성들과는 달리 옛 성벽을 제대로 볼 수 있어 좋았다. 한참을 올라가자 성벽 외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치성이 나왔다. 성벽위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려고 해도 아찔하기만 하던 성벽 외곽을 성안에서도 이렇게 쉽게 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보통 성벽은 굽이굽이 휘어져 있어서 치성이 필요 없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이곳은 성벽을 직선으로 길게 쌓았기 때문에 성벽을 감시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해 치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오월이라고 해도 오르막을 한참 올라왔더니 등에 땀이 차고 목이 마르던 차에 딱 그쯤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소나무 밑에 앉아 달콤한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히는 맛이 그만이다.
여기서 부터는 경사가 완만한 성벽 길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멀리 청주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바로 밑에는 경사가 급한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성벽위에서 키가 십 미터도 넘는 소나무의 윗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편편한 접시처럼 둥근 모양에 이제 막 연둣빛으로 돋아 난 새 잎에 수술과 암술의 향연이 눈 시리다. 심심치 않을 만큼 적당히 관광객들이 오고 간다. 가는 내내 야생화도 보고 선생님께 여러 가지 설명을 들으며 도란도란 가는 길이 정겹다. 앞서가던 내 눈이 갑자기 커다랗게 떠지고 멈칫 발길을 멈추었다. 반가운 손님을 만난 것이다. 봄 햇살에 따뜻하게 몸을 데우고 있던 유혈목이 화려한 빛깔을 드러내고 성벽 위 돌 위에 길게 늘어져 있다. 깜짝 놀라 멈춰 섰던 마음도 잠시, 반가운 마음에 급하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셧터를 누르자, 한가롭게 볕을 쬐고 있던 녀석이 놀라 이내 돌 틈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동료들과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작은 사건에 우리의 이야기꺼리는 한동안 끊일 줄을 모른다.
군데군데 성벽을 보수한 곳도 있고, 지금도 계속 공사가 이어지고 있는 곳도 있지만, 대체로 잘 정돈된 성곽이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져 있다. 우리나라 석성들은 초기엔 산봉우리를 감싸는 테뫼식(발권식-鉢卷式)이 많았지만 나중엔 이렇게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는 포곡식(包曲式)이 많아졌다. 구불구불 곡선이 완만한 길이 계속 이어지는데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지고, 보이는 곳마다 다른 풍경과 쉽게 볼 수 없던 자연이 함께 있어 좋다.
점심시간이 되어 가까운 산으로 들어가 적당한 자리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고 각자 그동안 써 놓았던 시를 가지고 합평을 하며 두어 시간 동안 공부를 했다.
어느새 세 시가 훌쩍 넘어 서둘러서 짐을 정리하고 다시 성곽을 따라 간다. 서문 쪽은 공사를 하는 중이라 바로 동문 쪽으로 발길을 서두른다. 동문을 지나 그리 가파르지 않은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을 반복하여 걷다보니 동장대가 나왔다. 보화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정자 모양의 장대에는 지휘관들이 모여 군사들을 훈련시키거나 지시를 내리는 곳으로 쓰였다 한다.
이제 산성 안에 자리한 산성 마을로 내려오자 중앙에 산성저수지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이 저수지는 본래 수문이 홍수로 없어진 후 1943년에 다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저수지를 빙 둘러 자리하고 있는 산성마을에는 닭백숙을 비롯해 두부요리 등 토속음식을 파는 한옥마을이 나타났다. 대부분 식당으로 개조되어 한옥의 멋을 찾아보기 힘든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산성을 한 바퀴 탐방하고 온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우리가 들어왔던 남문을 향해 산길을 올라간다.
산길을 따라 남문으로 올라와 산성마을을 내려다보니 분지처럼 아늑한 곳이 말 그대로 천해의 요새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겠다. 긴긴 세월동안 이 땅을 지켜주고, 이제는 관광객과 청주 시민들의 휴식의 공간이 되어 주는 곳. 아낌없이 내어주는 자연 앞에 아웅다웅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자꾸만 부끄러워지는 오늘이다.
ㅡ문예지『작가 사상』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