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말리는 5시간’, 이렇게 요리하라.
서울대는 2008년 인문계 정시에서 초유의 ‘5시간 논술’ 시험을 치렀다. 3개 세트 형 문항에 8개 논제가 출제됐고, 글자 수는 총 4600자였다. 시험 시간 및 작성할 논술문의 분량 면에서 어른들이 보기에도 가혹하다고 여길만한 수준이다. 뛰어난 실력만 지녔다고 합격을 단언하기 어려운 시험이었다. 성공적인 실전 전략을 구사해야 합격의 여신이 미소를 날려줬다. 시험 전날 저녁 및 당일 오전의 마인드 컨트롤 및 준비, 5시간 동안의 시간 안배, 제시문 및 논제 분석 시간 설정, 글쓰기 패턴 등에 대한 자신만의 세부 전략이 뒷받침 될 때 자신의 실력을 100% 발휘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2차례의 대기시간에만 화장실에 간다는 원칙까지 정해 놓은 합격생도 있었다.
그렇다면 합격생들은 과연 어떤 실전 전략을 구사했을까? 그동안 언론에 보도된 기존의 합격생 수기나 전문가 조언들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평소 논술 학습법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앞의 질문에 대한 직답이다. 서울대 정시 인문계 논술시험의 실전 전략을 합격생들의 생생한 체험을 토대로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슈 & 논술> 아카데미에서 논술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 중 2008년도 서울대 정시 인문계 합격생은 58명이다. 이들 중 일부 합격생들과의 토론회 및 설문 조사(20개 문항) 등을 통해 실전 논술 전략을 세밀하게 조사해 이 글에 담았다. 합격생들의 ‘피 말리는 5시간 전략’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셈이다.
합격생들의 ‘마인드 컨트롤 및 준비전략’은 개인별로 편차가 있지만, 상당수가 ‘치밀한 핵심 전략’을 세워 시험 시작 직전까지 이를 숙지하려고 노력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다수의 합격생은 글쓰기 기술이나 기발한 생각의 과시보다는 ‘논제에 충실한 글쓰기’를 핵심 전략으로 설정, 실천했다. 서울대 정시 논술고사에는 다수의 논제가 출제되고, 논제마다 복수의 질문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논제 이탈을 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법대에 합격한 성시경군(경기 평택고)은 전날 저녁 실전 상황을 예상하면서 필요한 절차 전반에 대해 세밀한 시뮬레이션을 했다. 문제 분석 수순(논제. 제시문의 순서로 통독), 개요 짜기 방식, 논제에 충실한 글쓰기 원칙 등과 같은 포인트들을 10여개 이상 메모지에 적어 머릿속에서 재연했다. 성군은 시험 시작 직전까지 그 메모지를 보면서 시뮬레이션을 했다. 서울대 인문계 정시 논술고사에서는 검정색과 파란색 볼펜만 쓰도록 돼있다. 성군은 이에 맞춰 필기구도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다. 시험 한 달 전부터 자신에게 알맞은 서너 개의 볼펜을 골라서 쓰고, 그 중 2,3 자루를 시험장에 가져갔다. 쓰던 볼펜이 고장이 날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수능 시험 이후 논술 대비를 하면서 썼던 자신의 글을 전날 저녁 정독하는 방법도 권장할만하다. 사범대 합격생인 이혜진양(광주 살레지오고)은 “내가 쓴 글들을 읽으면서 선생님들이 첨삭해준 취약점을 중점적으로 체크했다” 며 “그 취약점들을 노트에 적어서 시험보기 직전까지 계속 읽었던 것이 도움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긴장 이완’을 마인드 컨트롤의 포인트로 여겼던 사례들도 적지 않았다. 시험 전날 충분한 수면 취하기, 시험 대기시간에 주변 학생들과 수다 떨기 등이 합격생들이 꼽은 긴장 이완법이다. 허기를 달래고 긴장을 늦추기 위해 과자를 먹으면서 시험을 봤다는 합격생도 있었다. 감독관은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도 논술에 자신이 없지만 다른 학생도 나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마인드 컨트롤을 강조한 합격생도 있었다. 7,8개의 논제들에 대해 모두 평균적 수준의 답안을 작성하면 승산이 있다는 계산법을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종합적으로 볼 때, 마인드 컨트롤의 종류는 두 가지다. 사전에 치밀한 전략을 수립하고 숙지하거나, 충분을 휴식을 취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필자는 이 두 가지 전략을 병행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본다.
‘5시간 동안의 시간 안배 전략’은 가장 중요하다. 합격생들은 5시간을 빈틈없이 활용하는 ‘시간 아껴 쓰기’에 신경을 기울였다. 사회대 합격자인 우재준군(대구 대륜고)은 “논술에 자신이 없어서 제시문 분석 및 논제별 해결 시간의 데드라인을 정해놓고 이를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며 “시간 안배에 성공해야 부실하게 해결한 논제가 없어지고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도 최악의 상황을 방지한다고 여겼다”고 강조했다.
서울대는 당초 2008년 정시 논술고사 시간표를 오전 9시 시험장 도착 완료, 1시간 대기시간, 오전 10시 시험 시작의 순서로 일정을 잡았었다. 그러나 당일 폭설로 인해 지각생들이 늘어나자 전체 일정을 1시간씩 순연했다. 따라서 수험생들이 1번 문항 문제지를 받은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수험생들은 1번 문항(총 3개 논제)을 전반 2시간 동안 풀었다. 이어 1시간의 점심시간 및 1시간의 대기 시간을 거친 후 2,3번 문항(총 5개 논제)을 3시간 동안 풀었다.
대부분의 시험 감독관은 1번 문항을 배포하기 10분 전에 답안을 작성할 원고지를 미리 나눠 주었다. 그 10분 동안 합격생들은 논제별 글쓰기 분량에 맞춰 원고지를 체크하는 데 활용했다. 우선 원고지 한 줄에 몇 자이고, 한 장에 몇 자인지를 계산했다. 그 다음에 논제별 분량에 따라 원고지를 끊어 놓았다. 1번 문항의 경우 논제 1,2,3의 분량은 각각 800자, 400자, 600자였다. 일부 감독관은 시험 시작 10분전에 원고지와 문제지를 함께 배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지를 미리 보는 행위는 저지했기 때문에 원고지 체크가 유일한 10분 활용법이다.
이어 문제지를 받아들고 ‘문제를 해결했던 수순’은 합격생간에 편차가 있다. 대부분은 논제부터 읽고 그 속에 담긴 요구 사항들을 표시한 후, 제시문 속에서 요구사항의 답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논제를 해결했다. 반면에 제시문을 먼저 읽고 논제를 나중에 본 합격생도 있다. 그는 “통합 교과형 논술은 제시문을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할 것을 요구한다”며 “논제를 먼저 보면 논제의 시각에 사로잡혀 창의적으로 제시문을 독해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도표를 먼저 보면 논제와 제시문의 방향이 쉽게 감지된다는 사례도 있었다. 이 같이 다양한 방식 중 가장 안전하고 검증된 것은 논제부터 읽는 것이다. 제시문을 먼저 보는 방법은 ‘논술의 고수’에게 적합한 방식이다.
합격생들이 선택했던 ‘효율적인 답안 작성법’은 두 갈래다. 우선 한 개 문항 내의 논제들을 순차적으로 완성하는 방법이다. 문항 1번의 경우 20분 정도 제시문 전체와 논제를 통독한 후, 3개 논제를 개별 분석하면서 그 답안들을 각각 20~30분에 걸쳐서 작성하는 식이다. 논제별 글자 수에 따라 답안지 작성 시간을 차별화한 합격생도 있었다.
이와는 달리 한 개 문항 내의 논제들을 한꺼번에 완성하는 방법도 있다. 고려대 법대 재학 중 서울대 경영대를 지원해 합격한 오유찬군(대원외고)은 “1개 문항이 3개의 논제로 나뉘어져 있다고 해도 3개의 논제들 전체가 하나의 글이 돼야한다”며 “1번을 써 내려가면서 ‘2,3번은 이런 내용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오른다”고 주장했다. 한 개 문항에 딸린 논제들에 대한 답안을 한꺼번에 작성해야 유기적인 연결이 이뤄진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합격생도 “1번 문항의 경우 2시간 중 1시간 20분 동안 3개 논제간의 유기적 답안 작성을 설계했다”면서 “마지막 40분 동안 3개 논제 답안을 한꺼번에 써내려갔다”고 말했다. 개별 논제들을 차례로 해결한 합격생들도 20분 정도 통독의 시간을 가졌지만, 논제 간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답안을 쓰기 위해서는 한꺼번에 완성하는 방식이 효율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개요짜기’는 학교나 학원의 논술교육에서 강조되지만, 정시 고사장에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사항인 것으로 확인됐다. 전체적인 글의 틀을 머리 속으로 구상했다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대 수시 2 방식인 1개 문항 2500자 통글 논술고사와는 달리 정시 논술고사는 8개 논제가 주어졌기 때문에 개요를 짤 시간이 없었고 그 필요성도 크지 않았다는 게 합격생들의 설명이다. 인문대 합격생 이아로미양(광주 풍암고)은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에게 개요 짜기 용으로 1개 문항 당 2장의 메모용지를 나누어 주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면서 “평소에도 개요 짜기에 서툴렀고 실전에서도 머리 속으로 전체적인 틀만 생각하면서 문제를 풀었다”고 밝혔다.
또 “실전에서 시사이슈, 고전지식, 교과지식 중 무엇이 가장 중요했느냐”는 질문에 합격생들 대부분은 ‘글쓰기 능력’이라고 다소 엉뚱한 답변을 했다. 이는 통합교과 형 논술고사의 본질이 문제해결 능력 자체를 평가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2500자 통글 논술시험에서 시사 현안 등이 주요한 논거로 활용될 수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학생의 창의성이 발휘될 공간은 거의 소멸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합격생들은 정시 논술고사에서 성공한 비결을 한마디로 요약해달라는 요구에 대해 ‘자신감’이라고 입을 모았다. “통합교과 형 논술 시험에는 정답이 있다”는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오히려 합격 답안을 작성하는 길인 셈이다.
이태희 <이슈& 논술> 콘텐츠 개발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