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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이 낳은 ‘영담 김어수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서
신대식 시조시인
우리 영월은 북면의 마차 탄광과 상동의 대한중석 광업소 그리고 옥동의 탄광이 왕성하게 산업지역으로 발전 했을 때 영월의 미래를 설계하지 못했었다. 결과 적으로 땅속에 매장되어 있는 광물은 고정 광물임을 삼척동자도 아는 것을 마냥 끝도 없이 펑펑 쏟아져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결국 석탄은 화석연료(석유)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하는 시대적 환경에 밀려 하나, 둘 탄광들은 폐광을 하였으며 직업을 잃은 영월 군민은 썰물처럼 영월을 떠나간 게 어언 3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선거 철 마다 영월을 살리겠다는 지사들은 무수 했으나 영월군민은 이제 4만을 오르내리는 딱한 현실이 되었다.
그때 그 시절에는 영월이 제천, 평창, 정선, 횡성 등 강원도에서 선두 주자의 위치에 있었는데 지금은 타 지역에 비해 볼 때 서글픔 마져 드는 게 필자만의 심정이 아닐 것이다. 영월군은 수년 전부터 천혜의 자연을 이용해 아주 조용히 역사와 문화 예술을 접목하면서 새로운 영월을 키워나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나라가 국민 의식을 빼고는 이미 경제 10위권에 들어가는 경제 대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장차 우리 영월은 머지않아 영월을 찾기 위한 관광객들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며 이 가운데 가시적으로 김삿갓 시인이 점차적으로 전국에 재 조명되어있어 매년 김삿갓 유적지를 찾는 개인이나 단체들이 늘고 있으며 또한 영월의 절경에 인접한 곳에 박물관들이 하나 둘 늘어가면서 이제는 박물관 고을로 조금씩 인식 되어가고 있는 것은 고무적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월군도 시와 별을 타 지역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노력들은 먼 훗날 미래 브랜드를 튼튼히 하는 것이기에 더욱 힘써야 될 줄 안다.
필자가 수년전부터 영월이 낳은 영담 김어수 시인을 방송과 지역신문, 향토지와 문학지 등 12회에 걸처 시인을 상세히 알리는 한편 김어수 시인의 선양 사업의 필요성을 수차 발표하였다. 타 지역에서는 브랜드가 없어도 무언가 만들고 노력들을 하는데 우리 영월은 김어수 시인의 역사와 모든 자료가 다 충족 되어 있는데 무엇을 찾으려 하는지 안타깝다. 김어수 시인이 영월을 떠난 것은 90년 이상이 되었는데 출생지인 영월군에서는 어떤 내력을 찾으려고 하는지 궁금하다.
오늘날의 시대는 브렌드가 좌우 하는 시대인데 김어수 시인의 역사와 시인의 자료가 확보되어 있는 지금 무엇을 더 요구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필자의 솔직한 심경이다. 김어수 시인의 일대기를 살펴보신 영월 문화원 유성목 원장님은 영월인으로 이만한 일생을 살다가신 분이 없다고 하며 선양사업의 필요성을 말씀해 주셨다. 영월군이 올해 선양사업을 시작해 김어수 시인 탄생 100주기가 되는 2009년에는 선양사업의 구체적인 사업내역을 기획하여 전국에 알리는 큰 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지금 부터 발빠른 행보가 있어야 될 줄 안다.
다시 한번 김어수 시인의 연력과 남긴 저서 등을 발표해 보면서 영월군민들의 미래 브랜드로 가치가 있는 김어수 시인이 고향인 영월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힘을 보태주시길 간곡히 바란다.
1. 김어수 시인 의 약전
김어수 시인은 영월이 낳은 한국 현대 문학의 큰 스승이며 더욱이 시조시의 거장이며 불멸의 발자취를 문단에 남겼으며 또한 불교계의 큰 스승이었다. 그의 아호는 영담, 본명은 소석이며 어수는 불문에 출가하여 받은 법명이다. 훗날 이 법명은 자연스럽게 필명이 되었으며 소석은 주민등록상에 서만 쓰인 이름으로만 남았다.
그의 고향(출생지)은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 직동리이며 그의 부친은 김정호는 대대로 선비 가풍이었고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애국지사로 청빈낙도의 삶을 살다가 한일 합방이 되자 일인들의 눈을 피해 고향산천을 뒤로하고 어린 소석을 대리고 남으로 남으로 이주해서 지금의 부산 범어사 인근에서 살게 되었다.
13세에 범어사에 출가하여 25년간 승려생활을 하던 중 일본에서 5년제의 하나소노(화원) 중학을 졸업 했으며 1938년 불교 전문대(지금의 동국대 전신)를 졸업, 불가에서 환속하여 한때 동아일보 기자로 잠시 생활 하다가 부산 경남 일원에서 중고등 학교의 교사·교감·교장 등 25년간 교육 사업에 몸담아 후학들을 지도했다. 퇴임 후에는 대한 불교 조계종에서 포교사로 전국을 돌면서 불교의 산지식을 설파 했으며 한국 문인협회 초대 시조 분과 위원장을 역임 하였고 또한 현대 시조 시인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아 한국 문학사에 족적을 남겼다.
2. 김어수 시인의 문학세계
시인은 범어사 학인시절 문예잡지를 애독하면서 시 공부를 하였으며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조시를 발표하여 등단하였으며 그 때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충청일보, 경향신문, 불교신문과 문학잡지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널리 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때 교우한 문인들로는 김동리 선생, 서정주 시인 등 당시에 한국 현대 문학을 이끌어온 주역이었다. 시조에 남다른 정열과 발표한 공으로 제 5회 노산 문학상을 수상 하였다.
3. 영담 김어수의 저서
1) 조집 (희귀선의 꽃구름) 신진 문화사 1976년 출판
2) 필집 (달안개 피는 언덕길) 신신 문화사 1975년 출판
3) 시조집 (햇살 쏟아지는 뜨락) 건양 문화사 1987년 출판
4) 법구경 번역 보성 문화사 1979년 출판
5) 반야심경 해설서 (스님에게서 온 편지) 미래사 1983년 출판
6) 시조집 (이 짙은 향기를 어이 하리) 보림사 1983년 출판
7) 수필집 (가로수 밑에 부서지는 햇살) 한국 출판사 1983년 출판
8) 불교의 참 얼굴은 하산에 (도중하차의 넋두리) 1981년 발표
김어수 시인은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후학들에게 늘 조언을 하였고 매일 시를 써서 부처님에게 시 공양을 하였으리 만큼 시에 온 정력을 다 바치고 1985년 1월 7일 77세로 선종한 대 시인이 었다. 영월군과 영월 문인협회의 빠른 용단으로 선양사업이 추진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