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정신/ 화랑도
신라시대 화랑을 중심으로 한 청소년 수련단체. 청소년 집단으로서 교육적·군사적·사교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조직〕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화랑은 전 역사를 통하여 모두 20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화랑도는 시대에 따라 몇 개의 단체가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였다.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1 명과 승려 약간 명, 그리고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었으며, 낭도의 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많을 때는 1000명이 되기도 하였다. 화랑은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직하며 사교성이 풍부한 진골귀족 가운데서 낭도의 추대를 받아 뽑혔다. 승려는 주로 지적·정신적인 면에서 화랑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다.
〔성격·역할〕
화랑도는 그 독특한 무사도로 유명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시기에 는 화랑뿐 아니라 낭도나 일반 명사들까지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무사도 정신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화랑 출신의 장군들이 모범을 보였다. 660년 김유신(金庾 信)장군 인솔 아래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인 화랑 관창(官昌)·반굴(盤屈) 의 용맹과 672년 김유신의 아들인 화랑 원술(元述)이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당(唐)나라 군 사와의 싸움에서 보여준 용맹함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진평왕 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제정한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신라 화랑의 지도 이념을 대표하고 있다. 충(忠;事君以忠)·효(孝;事 親以孝)·신(信;交友以信)·용(勇;臨戰無退)·인(仁;殺生有擇)의 5계 가운데 그들이 특히 소중하게 여긴 덕목은 충과 신으로서, 이것은 시대적으로 화랑도의 제정부터 삼국통일까지가 신라 역사상 국난기였던 것과 관련이 깊다. 화랑도는 삼국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진흥왕 때 제정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가지 크게 활기를 띠었다. 화랑도의 정신은 한민족 고유의 전통과 이념의 발로로서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면면히 계승되어 국가 유사시에는 독립·애국정신의 상징으로서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존속되어 왔다.
관창 645~660(선덕 여왕 14~무열왕 17)
신라 무열왕 때의 화랑. 신라 좌장군 품일의 아들. 어려서 화랑이 되어 수련을 쌓아 15세 때에 이미 말타기.활쏘기에 능했다. 660년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칠 때 황산벌(지금의 충청 남도 논산군 연산)에서는 신라군과 백제군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이 때 백제의 계백 장군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뛰어난 전략으로 대항해 왔다. 신라군은 용기를 잃고 여러 장군이 모여 걱정만 하자 관창이 나서서 싸우기를 자청하였다. 그러나, 장군들은 그가 나이가 너무 어려 들어 주지 않았지만 자기의 굳은 결심을 여러 번 주장하여 허락을 받고 적진에 뛰어 들었다가 사로 잡혔다. 계백은 관창의 용맹과 나이 어림을 생각하여 살려 보냈다. 그러나, '결코 이기지 못하고 살아 돌아와서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교훈을 생각하고 다시 적진으로 돌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다시 잡혔다. 계백은 그의 용맹과 애국심에 감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목을 베어 그의 말 안장에 얹어 돌려 보냈다. 이를 본 신라 군사 들은 크게 감동하여 백제의 5천 결사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싸움에 이긴 신라는 전사한 관창에 급찬의 관위를 내리고, 예의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 주었다.
김유신 595~673(진평왕 17~문무왕 13)
신라 시대의 장군. 김 수로왕의 12대손으로,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629년 (진평왕 51) 아버지와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 공격에 참가했을 때,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목을 베어 옴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더 높여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644년 상장군이 되어서 백제에 빼앗겼던 일곱 성을 되찾았으며, 돌아올 때 백제군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가 크게 무찔렀다. 647년 왕족인 신하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반란군을 토벌하였으며, 진덕 여왕이 왕위에 있는 동안에도 백제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660년(무열왕 7) 상대등이 되고,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끄는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문무왕 8) 나.당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서울인 금성에 남고, 김인문과 김흠순 등의 장군을 보내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세상을 떠난 뒤에 흥무 대왕의 칭호를 올리었다.
화랑제도(花郞制度)
[의미] 신라 때 청소년으로 조직되었던 수양 단체. 국선도(國仙徒)·풍월도(風月徒)·원화도 (源花徒)·풍류도(風流徒)라고도 한다.
[설치 목적]
《삼국유사》에는 ‘무리를 뽑아서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을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요(大要)를 삼는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처음에 군신(君臣) 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거용(擧用)하려 하였다’ 하고, 이들은 ‘서로 도의를 닦고, 서로 가악(歌樂)으로 즐겁게 하며, 명산과 대천(大川)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고 그 설치 목적과 수양 과정을 적고 있다. 이로써 화랑도의 설치는 인물을 양성하여 그 가운데 인재를 가려서 국가에 등용함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소 기(所期)의 성과에 대해 《삼국사기》는 ‘현좌(賢佐:賢相)와 충신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하였다.
[설치 연대]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37년(576)이라 하였으나, 562년에 이미 화랑 사다함 (斯多含)이 대야성(大耶城 : 高靈)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신라는 이때에 이르러 이전부터 있었던 미비된 상태의 청소년 집단이던 화랑도를 국가조직 속에 편입시켜 무사단의 성격으로 강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기원 및 구성]
화랑도는 처음에 남모(南毛)·준정(俊貞) 두 미녀를 뽑아 이를 원화(源花)라 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300여 명의 무리가 모였으나, 이 두 여단장은 서로 시기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 강물에 던져 죽여버렸다. 이 일이 발각되어 준정도 사형에 처해지고, 그 무리들도 화목을 잃어 해산하였다. 그 후 나라에서는 귀족 출신의 외양이 잘생기고 품행이 곧은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받들게 하자 무리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이로써 화랑도에는 그 지도자에 화랑이 있고 그 밑에 낭도가 있었는데, 초기의 화랑도는 조직도 미미한 것이었으나 576년 이후 국방 정책과 관련하여 이를 관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총지도자에 국선(國仙: 源花·花主)을 두고 그 밑에 화랑이 있어 각각 문호(門戶:編隊)를 맡았다. 화랑도의 총지도 자인 국선은 원칙적으로 전국에 l명, 화랑은 보통 3∼4명에서 7∼8명에 이를 때도 있었으며, 화랑이 거느린 각 문호의 낭도는 수천 명을 헤아렸다.
[의의]
원시 시대 이래로 촌락 또는 부족 단위로 일정한 연령층의 청소년들이 모여 가무와 무예를 익히던 연령급단조직(年令級團組織)이, 신라의 국세(國勢)가 팽창하여 부족 집단의 규모를 넘어선 정치·군사조직으로 발전하자, 확대된 영역과 인구를 지닌 새로운 국가적 발전에 뒷받침 될 인재의 양성을 목적으로 재편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귀산(貴山)·취항(項)' 두 화랑에게 주었다는 세속오계(世俗五戒 : 事君以忠·事親以孝·交友以 信·臨戰無退·殺生有擇)가 화랑의 정신적 기저(基底)를 이루어 신라의 삼국 통일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타난 대표적 화랑으로는 사다함 (斯多含)·설원랑(薛原郞)·김유신·죽지랑(竹旨郞)·호세랑(好世郞)·관품(官品)·부례랑(夫 禮郞)·기파랑(耆婆郞)·김응렴(金膺廉) 등이 있다. 신라 말에 이르러 화랑이란 말은 쓰이지 않고 대신 선랑(仙郞)·국선(國仙) 등으로만 불렸다. 화랑도는 그 창설로부터 삼국 통일이 완성된 문무왕에 이르는 약 l 세기 동안 융성하여, 삼국 통일의 어려운 시기에는 강한 무사도 정신으로 나타나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통일 후 나라에 태평 시대가 계속 되면서 쇠퇴하여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그 정신은 소멸되지 않고 고려와 조선에 이어 내려오면서 국난을 맞을 때는 의병 등의 의기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