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y
산길
유병근(시인, 수필가)
숲속에서 새가 운다. 새소리를 따라 나뭇잎을 흔들고 가는 즐거운 바람 소리도 있다. 마침 계곡 물소리가 도란도란 건반을 치는 것 같다. 삼중주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산이 갑자기 울리는 소리를 한다. 묵직한 테너 목소리를 듣는 느낌이 있어 사방을 둘러본다. 산은 소리로 된 큰 악기란 말이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나는 그 울림에 귀를 대며 서 있다. 산울림은 어쩌면 정적이 터지는 소리다. 수목과 수목 사이, 바위와 바위 사이, 바람과 바람 사이에 고여 있던 정적이 일제히 숨 쉬는 소리가 산울림이라는 생각을 한다.
무엇을 야단스럽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산울림은 산울림이고, 나는 나다. 발길에 밟히는 풀잎은 뜻밖의 발길에 깜짝 놀라는 기색을 하는지도 모른다. 나무와 바위 그리고 풀잎의 조화가 빚은 산길에서 나뭇가지 틈새로 비치는 하늘을 본다. 쪽빛과 푸른빛의 조화에 끼어드는 하얀 구름이 있다. 이쪽 나무 우듬지에서 저쪽 나무 우듬지로 이동하는 것이 있다고 다시 구름을 본다. 나도 실은 움직이는 무엇이다. 산을 찾은 주제에 무슨 주인공처럼 거들먹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아니 맞다.
나는 나를 모르는 바보다. 누가 말했다. 바보는 즐겁다고, 산을 찾은 나는 이런저런 나무를 보고 나무를 쓰다듬으며 즐거워한다. 나는 바보다. 아니 산이 바보인지도 모른다. 하기에 바보는 바보끼리 즐겁지 아니한가.
언젠가 또 산길에서의 일이다. 저만치 앞서가던 젊은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등에 진 가방을 앞으로 끌어당긴다. 무엇을 꺼내는 듯하다. 나는 슬그머니 걸음을 늦춘다. 어떤 두려움이 일어 뒤를 돌아보는데 아무도 없다. 산길에는 앞서 걷는 젊은이와 나 단 둘 뿐이다. 젊은이는 무엇인가를 손에 쥔다. 그것이 궁금하다. 날카로운 것인지 혹 모른다. 아니 뭉텅한 것인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것과 뭉텅한 것 사이일 것이다. 날카로운 것은 예리하게 찌르는 힘이 있다. 그때다. 고개를 살짝 뒤로 재낀 젊은이는 손에 쥔 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 같다. 젊은이는 물을 마셨을 것인데 당치도 않는 생각을 하는 나는 겁에서 벗어난 듯 덩달아 목이 마르다.
오래전에 들은 뉴스가 머릿속을 친다. 어느 노인이 산길에서 죽임을 당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젊은이의 주먹질에 쓰러진 것이다. 이런 위험성 말고도 갖가지 끔찍스런 사고 조짐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세상이다. 아무 힘도 지혜도 없으면서 나는 일행도 없이 산길을 걷는다. 걷지 않으면 될 일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도 없는 생각이 들어 걷는다. 무엇이 되고 되지 않을 일인지 그건 모른다. 모르면서 걷는다. 나는 영락없이 허술하다. 너무 똑똑해도 탈이란 말은 가끔 듣는다. 똑똑한 척 날뛰다가 오히려 실수하거나 실패한다는 말도 듣는다. 물론 나를 지목해서 하는 말은 전혀 아닌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스스로 똑똑하다는 어이없는 착각을 한다. 눈치라고는 전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눈치가 없으면 요령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나는 굼뜨다. 지하철을 탈 때도 잽싸게 발을 옮겨야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데 나는 번번이 실패한다. 나를 위안하는 소리가 내 안에서 들린다. 굼뜬 자는 굼뜬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고.
산에서만은 굼뜬 것이 걷는 마음을 편하게 한다. 방금 저쪽으로 날아간 새 울음소리는 피리 소리를 닮았다. 풀벌레 소리가 찌리찌리 들리는 산길은 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계절을 지나가는 합창단의 연주회를 연상케 한다. 그런 소리가 좋아 계곡물을 만지면서 산을 탄다.
공중 높이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도 좋을 것 같다.
-유고 수필집 『횡포가 나를 키운다』(근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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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근
1932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1954년 <신작품> 동인으로 활동하다 19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절차를 마쳤다. 수필집으로 『협주곡』, 『허명놀이』, 『꽃이 멀다』, 『아이스댄싱』, 『아으 동동』 외의 수필집과 시집 『돌 속에도 꽃이 핀다』, 『설사당꽃이 떠나고 있다』, 『통영벅수』, 『꽃도 물빛을 낮가림한다』 외 많은 수필집과 시집을 남겼으며 2021년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