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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8. 19일 중대부중 독서동아리 교사들의 2번 째 문학기행 날이다.
더 이상 내리지 않을 것 같던 비가 가랑가랑 내렸다.
8시에 출발 예정이었던 시간은 40분 남짓 늦었다.
김원희선생님은 연락도 없고, 유경희선생님은 도저히 떠날 수 없다는 통화를 한 뒤였다.
문학기행 자료(31p)는 행정실에서 복사를 했고 한 부씩 나눴다.
차량은 두 대에 나눠 탔다.
1호차는 류주형선생님 차로 며칠 전에 새로 구입한 SM 5였다.
장형임, 김희진, 주상태선생님이 동승했다.
2호차는 주명섭선생님 차로 이정수, 염유엔선생님이 동승을 했다.
7분 중 4분 선생님은 아침을 하지 않았다.
큰 도로로 나가기 전 흑석시장 맞은 편에 있는 ‘빵굽터’에서 총무인 장형임선생님이 빵과 음료수를 사서 차량 두 대에 나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갈 수도 있는 일이나 도로에 차를 몰고 나서면 마음대로 그리 되는 일은 아니다.
앞 뒤 꼬리를 물고 달리다가 2호차가 먼저 앞섰다.
이미 운동장에서 떠나기 전에 ‘망향휴게소’에서 쉬기로 한 것을 알고 있었던 일이다.
10시 13분 2호차가 먼저 ‘망향휴게소’에 도착을 했다.
10분 정도를 기다렸는데도 2호차는 휴게소를 들어서지 않았다. 염유엔선생님이 핸드폰을 했다.
곧 도착할 것 같던 차는 전화를 한 뒤 15분이 넘어서야 들어왔다.
모두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봤다. 장형임선생님 배가 고프신 지 우동을 먹고 가자고 했다. 새우튀김우동 2그릇, 김치우동 한 그릇을 주문했다.
류주형, 김희진, 주명섭선생님은 먹지 않았다.
새우튀김 한 그릇은 장형임, 주상태선생님이 나눠 먹었다.
이 곳 ‘망향휴게소’는 1년 전 첫 번째 문학기행을 떠나던 날도 우동을 먹었던 곳이다. 그 때 함께 했던 문경찬선생님이 아쉽게도 독서동호회를 탈퇴했다.
밖에서 우동을 먹던 문경찬선생님이 생각이 났다.
10시 49분 문학기행의 첫 번째 목적지인 창원군 석곡리의 김기진 생가를 찾아 차량 두 대는 나란히 출발했다.
11시 20분 청원톨게이터를 빠져 나와 김지진 시인의 생가가 있는 석곡리에 도착을 했다. 동네 초입의 팔봉교회 앞에 93년도에 세운 시비가 있었다.
시비를 보던 중 지나가는 동네 아주머니 한 분에게 담에 있던 콩같이 달린 나무의 이름과 덩굴이 올라가 매단 열매에 대해 장형임, 김희진선생님이 물었으나 모른다고 했다.
아주머니와 지나가던 남학생에게 생가를 물었다.
지금은 임헌일씨가 살고 있으며, 동네 초임에서 왼쪽으로 모여 있는 동네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별장처럼 나무로 지은 집 뒤에 어울리지 않은 샷시문을 한 집이 있었다.
저 집이 김기진시인의 생가냐고 물으려 별장같은 집 현관을 두드렸지만 문은 열린 채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별장이 아니라 들에 나간 농민의 집인 듯 했다.
김기진시인의 집 마당에는 고추와 옥수수가 심어저 있었다. 두 마리의 새끼를 몇 주 전에 낳았을 것 같은 어미개(흰 개)도 낯선 우리들을 보고 짖었다.
사람이 찾지 않고 버려진 이곳을 찾아 준 사람들에 대한 고인이 되신 김기진선생님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제 1회 전라도 문학기행에서도 느겼던 일이지만, 이번 문학기행의 첫 장소인 이곳도 문화재가 보존되지 않고 있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12시 4분 차 한 대 들어갈 정도의 길 아래에 심겨져 있는 인삼밭을 보고, 문의문화재단지로 출발을 했다.
2차선 도로를 시원히 달리던 중 길가에 보리밥이라는 간판이 적힌 ‘한울타리’라는 식당에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갔다.
류주형, 이정수선생님은 황태해장국을, 나머지 선생님들은 제육버섯볶음과 명태찜을 시켰다.
제육버섯볶음을 염유엔선생님이 접시에 나눠 담아 주었는데, 정작 주명섭선생님과 먹는 그릇에는 고기가 몇 점 없었다.
주명섭선생님, 평소 제육볶음을 좋아한다고 하자 고기를 몇 점 옮겨주었다.
연한 매실차를 한 잔씩 후식으로 마시고 출발한 차는 1시 21분 문의문화재단지에 도착을 했다.
조성한 지 면 년이 되는 것 같은데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문산각’에서 바라 본 대청호의 경치는 좋았다.
내려오는 길에 밟아 본 야외 공연장의 잔디는 한 번도 행사를 하지 않았는 지 너무도 부드럽고 잔디가 빽빽했다.
야외조각공원을 지날 때의 일이다.
물 속에 10원, 50원, 100원짜리 동전이 많이 던져져 있었다.
주명섭, 염유엔선생님이 100원을 던져 넣었다. 장형임선생님은 두 선생님에게 뒤로 던져 넣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100원을 던져 넣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2시 26분 주차장 영화관에 세워진 차를 타고 출발을 했다.
3시 초정약수에 도착을 했다.
몇 년 전의 물맛과는 달리 옅은 맛이었다.
슈퍼에서 보리스낵 번데기 모양을 과자를 한 봉지 사서 먹으면서 일화공장을 견학하려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돌아섰다.
세계 3대 광천수!
그러나 실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관광객들에게 공개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했다.
3시 30분 이 곳을 출발하여 4시 10분 괴산읍 제월리 홍명희선생의 옛집에 도착을 했다.
11p 자료에 있는 것처럼 <이복기 가옥>이었다.
이복기 문패가 걸려있었다.
군에서 그랬는지 대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었고, 이번 큰비에 비가 샜는지 천막으로 지붕은 덮어져 있었다.
아쉽게도 집안을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4시 35분 이 나라 문화재 보호에 대해 큰 아쉬움과 한탄의 한숨을 쉬고 모두들 한 마디씩 했다.
그나마 흉물스럽기는 했지만, 비에 허물어질 수도 있는 것을 천막으로 쳐 놓은 것만으로도 조금은 안심을 했다.
35분에 차를 몰아 56분에 제월대에 도착을 했다.
이 곳은 20~30대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었다. 논 가에 벽초선생님의 문학비가 5개의 돌기둥의 보호를 받으며 서 있었다.
단체 사진 2컷을 찍었다.
문학비를 보고 있을 때, 장형임, 김희진선생님이 제월대의 ‘고산정’을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들 뒤를 따랐다.
선조 때, 충청도 관찰사였던 유근이 은거생활을 했던 장소였다.
아래로 흐르는 강은 ‘괴강’으로 물살에 세게 흘렀다.
5시 25분, 주차장에 세워진 문학비가 ‘괴강’이 내려다보이는 숲 속에 세워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하며, 다음의 목적지인 화양구곡으로 출발을 했다.
1호차의 류주형선생님이 다음 목적지를 지도상에서 확인을 했다.
한국수력원자력(주)를 오른 쪽으로 낀 비포장도로를 1, 2호차 모두 능숙하게 달렸다. 그런데 달리다가 1호차가 몇 번 멈칫했다.
반대방향에서 차라도 다려오면 낭패일 만큼 도로는 비좁았다.
30분 남짓을 달렸을까, 물줄기가 감춰진 곳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들로 나가는 한 아주머니에게 1호차가 길을 물었다.
넘어가는 길이 없다고 했던가, 그 곳에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살펴서 달리던 길과는 달리 되돌아오는 길은 빨랐다.
먼 길을 달렸다.
2호차가 주유를 하기 위해 잠시 쉬었다.
7시 20분 화암동에 도착을 했다.
이 곳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길가에 몇 몇 아주머니들이 앉아 있을 뿐, 휴가가 모두 끝난 이 곳의 밤은 한적하기만 했다.
숙소로 민박을 둘러봤다.
가장 깨끗해 보이는 집을 들렸다.
큰 방 하나, 작은 방 하나에 8만원을 달라고 했다.
이번 휴가 때 민박을 하기 위해 급하게 지은 집 같았다. 아주머니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열자 습기에 묻은 페인트와 시멘트 냄새 그리고, 휴가 때 잠을 잤던 사람들의 냄새까지 미적거리듯 몰려왔다.
방 2개에 5만원도 아니고, 다른 곳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들을 했다.
8만원이면 여관도 그 가격에 잘 수 있겠다고 했다.
차를 타고 오며 봤던 ‘세느파크’여관으로 갔다.
방은 있었다. 방 하나에 3만원 1명 추가에 5천원을 내라고 했다. 이렇게 계산하면 8만원이다.
김희진, 이정수선생님을 제외한 5분의 선생님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을 구경을 하고 내려왔다.
시설이 좋다며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자고 했다.
장형임선생님이 미모를 앞세워 1만원을 깎았다고 했다.
7시 54분 모두들 배가 고픈 시간이었다.
여관 옆에 매점과 식당이 있었다.
그 곳에서 올갱이국과 도토리묵, 도토리빈대떡에 맥주와 탁주(막걸리)를 반주 삼아 먹었다. 장형임선생님은 문학기행을 떠나기 하루 전에 금강산을 구경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지금껏 줄곧 북한안내원 동무의 어투를 흉내를 냈다.
정부의 지원금 외 본인 부담 20만원으로 3박 4일간 다녀왔다고 했다.
모두들 장형임선생님의 북한 말씨는 애교 있고 정감 있게 느꼈다.
주상태선생님은 맥주 두 병을 비웠다.
음식은 맛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문학기행에 대한 토론 때 먹을 캔 맥주와 과자 몇 봉지를 샀다.
방에 돌아 온 시간은 9시 15분.
50분까지 윷놀이를 했다.
상품은 도서상품권이었다.
1호차와 2호차가 시합을 했다. 1호차의 장형임선생님은 말판을 놓았다.
3판 2승으로 실시되었다.
1호차가 2호차를 2:1로 이기고 윷놀이는 끝을 냈다. 그리고 곧바로 김기진시인과 벽초 홍명희선생에 대한 토론을 했다.
토론은 작가와 문학작품을 동일하게 봐야 하느냐? 아니면, 별개로 봐야 하느냐?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친일파 문학에 대한 각자의 의견들을 나누었다.
이번 문학기행의 인물이 아닌 서정주님과 청록파 시인들에 대한 얘기도 화제에 올랐다. 작가는 시대를 앞서가야 하고, 예술은 시대를 초월해야 하는 것에 대해 공감을 하였으나, 작가와 작품을 별개로 보고, 문학적 내용만을 가지고 식민지 시대의 문학을 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들 했다.
작가는 역사까지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벽초 홍명희선생에 대해서는 이데올르기를 벗어나 제 조명이 필요하다고들 했다.
이 외에 학교에서의 독서지도를 활성화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얘기가 되었다.
각 교과별로 필독서를 정해 1년에 1번은 시험문제로 출제하는 방안과, 학교장의 학교운영방침에 독서의 활성화 문구가 명시되는 것에 대해서도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또한, 언어교육부에서 각 교과별로 독서를 교과와 시험에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와 방안을 제시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토론과 담소는 새벽 1시 30분에서야 끝이 났다.
아침 8시 30분에 출발을 하자고 하고 여선생님 두 분은 307호로 돌아갔다.
여선생님들이 돌아가고 난 후, 남자 선생님들은 세면과 샤워를 했다.
이 곳의 욕실은 윈풀이었다.
첫 번째 윈풀 목욕을 하려고 들어갔던 주명섭선생님이 작동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염유엔선생님이 욕실에 물을 가득 채우자 물살을 일으키며 작동을 했다.
차량을 운전하는 두 분(류주형, 두명섭선생님)은 침대에서 나란히 오래지 않아 내일 운전을 위해 잠이 들었다.
그러나, 주상태, 이정수, 염유엔선생님은 비디오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 8시 30분 모두들 제 시간에 출발 준비를 마쳤다.
39분 시동을 걸고 화암동계곡 매표소에 도착한 시간은 39분이었다.
그 시간에도 매표소는 열려있었다.
200~300m를 달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비는 다로 받는 것 같았다. 우리가 차를 세우자 주차원 같은 청년이 매표소 앞에 앉았다.
주차비는 선불!
류주형선생님은 주차원 같은 청소년을 쳐다봤다.
그러나 주차비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걸어서 운영담(구름의 그림자가 비친 곳), 하마소(대원군이 말을 내리지 않아 패대기를 당한 곳[말을 내리는 곳]), 화양서원(우암송시열선생 제사 지내던 곳), 암서재(송시열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 첨성대(첨성대 모양의 바위)를 보고, 첨성대 앞에 있는 화양 3교에서 암서재를 뒤로하고 단체사진 1컷을 찍고 내려왔다.
10시 25분 주차장에서 출발을 했다.
길을 재촉하다 홍명희선생의 또 다른 생가터를 들렸다. 정원으로 꾸며 놓은 듯한 집터에 비석이 있었다.
옆집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 곳에 사는 사람은 홍명희선생의 당숙이라고 했다. 당숙이라는 사람은 들에 약을 치려 나가려는 지 수돗가에서 일을 챙기고 있었다.
방문이 열린 방 안 책장에는 홍명희선생의 ‘임꺽정’ 소설이 정리되어 있었고, 기왓장에 흙을 담아 화초를 심고 천장에 매단 화분 줄에는 홍명희선생 문학제 기념 패지가 둘 걸려있었다.
몇 년 전가지만 해도 당숙 되는 사람은 어디라도 출타를 하고 오면, 경찰서에서 어디를 갔다왔느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선생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변화가 있다고 했다.
11시 21분 주인은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수박이라도 들고 가라고 했다. 우리들은 정성을 마다하고 출발을 했다.
충주 쪽을 향해 달리다가 도로 옆에 있는 ‘자연가든’ 식당에서 아침을 먹기로 하고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 때 시간은 11시 55분이었다.
메뉴판을 펼쳤다.
선택의 필요조차 없었다.
정식을 먹기로 했다.
1인 1만원이었다.
음식이 나왔다. 직사각형 접시에 담아 낸 반찬은 모두 25개였다. 이 외에 불고기와 된장국, 냉면이 나왔다.
특히, 반찬 중 싸리버섯무침은 별미였다.
반주로 산사춘 2병을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수박과 커피, 수정과를 마신 후, 류주형, 주명섭선생님이 먼저 나갔다.
류주형선생님은 차의 문을 열어놓았고, 주명섭선생님은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켜 놓았다.
1호차 장형임선생님. “회장님 이게 뭡니까....................” 2호차는 에어컨을 틀어놓았는데, 에게 뭡니까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보니 제 날짜에 날씨를 찾은 듯 하늘은 맑았고 무더웠다.
1시 25분 서서히 배부르게 출발을 했다.
다음 목적지는 중앙탑이었다.
중앙탑을 중앙에 두고 넓게 잔디가 깔려있었다.
그리고, 잔디의 끝자락에 펼쳐진 남한강 물에 고무보트를 타고 있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화로운 공원 분위기였다.
중앙탑 앞에는 50명 남짓 군복을 입은 신명들이 안내원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중앙탑평리칠층석탑은 국보 6호다.
자원봉사자인 박선예님의 설명을 들으며 탑 주변을 돌았다.
이 탑은 비전문가인 일본인이 다시 쌓았으며, 박정희대통령 때는 갈라진 부분을 횟가루로 발랐다고 했다.
충북대학교에서 5개월 교육을 받고 자원봉사 일을 하고 있다는 박선예님은 문화재의 보존에 대해서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에게는 이 분이 함게 해 준 탐에 대한 설명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문화재를 설명해 주는 자원봉사자 활용한 이와 같은 운영은 충청북도가 참으로 잘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류주형선생님 퇴직하면 이런 일을 해 보고 싶다고 했다.
잔디 위에는 조각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곳엔 남한강 수석전시관이 있었다.
3층의 건물로 2층까지 수석이 전시되어 있었다.
남한강에서 나온 수석들을 수석인들로부터 기증을 받아 전시를 해 놓은 곳이었다.
수석을 취미로 하고 있는 내 눈에 비친 전시물들은 좋은 작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기자기하게 전시를 해 두었다.
류주형, 김희진선생님은 수석을 보는 눈이 있었다.
2시 55분 수석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음료수를 한 캔씩 사 먹었다. 종류에 관계없이 모두 1천원이었다.
장형임선생님 7천 원에서 500원을 깎았다.
주명섭선생님 방금 전 중앙탑을 설명해 준 자원봉사자가 고마웠는 지 식혜를 1병 갔다 드렸다.
장형임선생님 왈 “예쁘니까 작업들어갑니다..................”
자원봉사자는 우리를 보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류주형선생님 손을 흔들어 답례를 했다.
장형임선생님 “회장님 작업 들어갔습니다........”
2시 37분 출발을 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차는 안전지대에 시동을 걸어 놓은 채 주차를 하고, 길가의 보관되어 있는 중원고구려비를 찾았다.
비는 마모가 심해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한자를 풀어서 설명을 해 둔 것에도 마모 대문에 파악이 어려운 한자에 대한 풀이에 대해서는 칸으로 비워 두었다.
3시 16분 목계장터로 출발을 하기 위해 차를 탔다.
장형임선생님 2호차에 남은 빵을 먹지 않을 거면 달라고 했다.
흑석동 ‘빵굽터’에서 사서 먹고 남은 빵! 어제 저녁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것이었다.
3시 30분 목계나루터에 도착을 하였다.
그 곳엔 횟집이 들어서 있었다.
신경림시인의 ‘목계장터’ 시비는 2002. 7. 25일 11시 30분 목계나루터비와 함께 제막식이 있었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지금가지 본 시비 중 가장 잘 만들어 놓은 ‘목계장터’시비였다.
시비 앞에서 단체 사진 1컷을 찍고 서울로 향해 출발을 했다.
3시 50분 달리던 1호차가 길옆에 섰다.
복숭아를 사기 위해 차를 세웠던 것이다.
문학기행에 참가한 선생님들에게 한 봉지씩 복숭아를 담았다.
4시 12분 1호차가 주유를 했다.
이제 목적지는 중대부중 운동장이다.
학교로 도착한 시간은 6시 56분이었다.
모두들 피곤했다.
오늘은 ‘자연가든’에서 먹은 것이 전부였다.
저녁은 집에 가서 먹기로 하고, 류주형선생님 차에 주상태, 염유엔선생님이 탔고, 장형임선생님은 운동장에 세워 둔 차를 탔다.
김희진선생님은 집에서 마중을 나오기로 하였고, 이정수선생님은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