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 : 1 - 12절
“다른 이름이 없음”
프랑스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학자이자, 철학자이자, 신학자이기도 한 파스칼이 한 번은 무신론자인 그의 친구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파스칼에게 “자네, 설마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라고 빈정거렸습니다. 그러자 파스칼은 빙그레 웃으며 “자네는 설마 예수가 부활한 사건을 그저 일종의 신화나 제자들의 조작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라고 친구의 질문을 되받은 뒤 덧붙여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기독교가 예수의 부활을 허위로 선전했다면 말 일세 예수가 죽은 지 약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세계 곳곳에서 그 이름이 전파되고 숭배되어지는 것이 더 미스터리가 아니겠나?” 이랬다고 합니다.
파스칼이 말한 것은 이미 성경을 통해 증명된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를 했더니 그 일을 통해 한 번도 걸어 보지 못했던 병자가 낫게 되었고 베드로는 그 사건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고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과 이름 때문이라고 설교를 했더니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남자만 약 오천 명이나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이 나타나니 예수님을 죽인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예’자를 꺼내는 것도 싫었던 것입니다. 2, 3절을 보세요.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천 명이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서 선포해야 할 이름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이어야 합니다. 부활절에 잠깐 부활의 의미와 능력을 생각하는 믿음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가질 수가 없습니다.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분이 아니라 살아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사도행전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만화로나 책으로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나는데 그 줄거리를 대충 보면 알리바바는 동생이고 형은 카심입니다. 두 형제가 우애 좋게 잘 지내다가 형은 부잣집으로 장가를 가서 우애를 저버리고 혼자 잘 먹고 살게 되었고, 동생은 가난한 아내를 얻어서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동생 알리바바가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산에 갔다가 40명 정도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오는 것을 보고는 급하게 숨게 됩니다. 숨어서 보니까 두목을 포함해서 딱 40명의 사람들이었는데 동굴을 막고 있는 바위 앞에 서더니 “열려라 참깨”(open sesame)하니까 동굴 문이 열리면서 그 안으로 40명이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동굴에서 나와서 다른 곳으로 가자 호기심을 가지고 “열려라 참깨” 하니까 문이 열리는 겁니다. 들어가 보니까 그 동안에 볼 수 없었던 온갖 금은보화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는 일단은 금화 한 자루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여 주면서 이 금화를 달아 보게 형네 집에 가서 저울 하나를 빌려 오라고 시켰는데 지질히도 가난한 동생네 집에서 저울을 빌리러 오니까 이상하게 생각한 형수가 그 저울에 꿀을 발라서 보냈습니다. 나중에 저울을 받아 보니까 금화가 저울에 붙어 있던 것입니다. 형은 당장에 동생을 찾아가서 “무슨 도적질을 하고 다니기에 금화를 저울로 달 정도냐?”고 다그치니까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욕심 많은 형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당나귀 12마리에 상자 두 개씩을 실고서 금은보화를 가지러 그곳에 가서 신나게 금음보화를 담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나쁜 형이 신나게 담다가 동굴을 열게 하는 주문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열려라 참깨” 한 마디면 나와서 그 모든 금은보화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그 한 마디를 잊어버려서 결국은 나오지 못하고 도적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동굴 안에 있던 형인 카심의 모습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열려라 참깨” 그 주문만 외우면 나올 수 있었는데 그 주문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도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우리가 믿어야 할 이름은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라는 소설의 내용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만화에 보면 그 형이 별 소리를 다 합니다. “열어 주세요.”부터 시작을 해서 “똑똑” “한 번만 살려 주세요.” “열려라 남대문” 별 소리를 다 해 봅니다. 그런데 끔적도 하지 않습니다. 오르지 그 문이 열릴 수 있는 길은 “열려야 참깨” 그 한 마디밖에 없기 때문에 그 주문이 아니고서는 절대 그 문이 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천국의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서 우리에게 물어 보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그 이름을 아느냐 모르느냐? 그 이름을 위해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며 승리하였느냐? 이것이 문제이지 다른 이름으로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전에 김수환 추기경이 강연을 하러 와서 너무 유명한 분이시기에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을 소개하면서 총장님이 직접 소개를 해 주셨는데 재치 있게 소개를 한다고 이렇게 소개를 했습니다. “오늘 추기경님하고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을 가지고 있다가 천국 가면 천국에 그냥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농담처럼 소개를 했었습니다. 그 정도로 추기경님이 영적으로, 또 하나님의 나라에서 대단한 분이시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는데 소개를 받은 추기경님들이 “그 사진 가지고 가면 더 못 들어 갈 걸요.” 이렇게 겸손하게 말씀을 하셨던 일이 기억이 납니다. 추기경 사진이나 이름이나 친분으로도 안 됩니다. 설사 교황이랑 특별한 친분이 있어도 천국에서는 전혀 통하지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이런 찬양을 부르지 않습니까? “오직 예수 다른 이름은 없네 주 이름만 우리에게 주셨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이름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 이름의 가치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1절 말씀에 보면 건축자들이 건축하는데 있어서 쓸모없다고 생각을 해서 버린 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돌들처럼 생각했던 이름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가 믿을 때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고, 세상을 이길 수 있고, 우리의 모든 기도가 응답을 받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이름이기 때문에 아무리 머리가 나쁜 사람도, 아무리 기억력이 안 좋은 사람도, 아무리 교만한 사람도,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은 예수님이라는 그 이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모르면 그 이름을 믿음으로 부를 수가 없습니다. 어느 스승이 한 제자에게 돌멩이 하나를 주며 말했습니다. "이것을 시장에 가지고 가서 팔아 보아라. 다만 누가 돌에 관해 묻거든 계속 거절하면서 그 가격에는 절대 팔지 않겠다고 말 하거라." 제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스승의 말대로 시장에 나가서 보자기를 펴고, 그 위에 돌멩이를 올려놓았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아무 가치 없는 흔한 돌을 가지고 나왔다며 제자에게 핀잔을 주며 비웃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노인이 다가와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여기 동전을 줄 테니 그 돌멩이를 나한테 팔게나!" 하지만 제자는 스승의 말에 따라 그 가격에는 팔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제자의 단호한 행동에 노인은 그 돌을 귀한 것으로 생각했고 처음보다 가격을 높여 말하며 다시 팔라고 했지만 제자는 또다시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노인이 돌을 사기 위해서 흥정하는 모습에 그 돌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였고 그렇게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제는 서로 그 돌멩이를 사겠다며 말했고 그렇게 돌멩이의 가치는 꽤 많이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흥정하는 동안 제자는 돌을 보자기에 싸서 다음에 오겠다면서 태연하게 돌아갔습니다. 시장에서 돌아온 제자에게 스승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제 알겠느냐? 때로는 사람들이 정하는 가치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세상 사람들이 가치 없다고 생각을 해서 버린 이름이라고 우리도 가볍게 여기거나 우습게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죽어도 기억을 하며 마지막 순간에도 내뱉을 수 있는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이름을 말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이름을 말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제 이름을 말 하면 가중처벌을 받습니다. 오로지 그 이름밖에 없고 그 이름 외에는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이 두 쪽이 나도 절대 바뀌지 않는 절대 진리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우리의 마음 판에 잘 새겨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 초기에 청렴함의 대명사이었던 맹사성이 잠시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가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맹사성은 허름한 차림으로 개천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선비가 저 멀리서 걸어왔습니다. 젊은 선비는 강에 다다르자 맹사성에게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노인. 지금 건넛마을에 급한 일이 있는데 보다시피 내가 새 버선에다 새 도포를 입어서 개천을 건너기가 곤란하니 나를 좀 업어서 건너가게 해주시오. 그러면 오늘 낚시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돈은 주겠소." 맹사성은 선비에게 말했습니다. "난 노인네라 기운이 모자라지만 어디 이리와 업히시오." 맹사성은 끙끙대며 그 젊은이를 업어서 건너 주었습니다. 그리고 선비에게 어딜 가는 중이냐고 물었습니다. "여기 맹사성 정승 대감이 부친 친구이신데 벼슬자리를 부탁하러 가는 길이오." 그러자 맹사성이 다시 말했습니다. "젊은 양반 헛수고하러 가지 마시고 그냥 지금 돌아가시오." 선비가 왜 그러냐고 하자 맹사성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선비는 멀리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참 어리석은 선비의 모습인데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이름, 예수님을 모른 채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선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유일한 구원의 통로가 예수님의 이름인데, 이 이름을 우리가 늘 기억하지 못한다면, 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지 못한다면 그 이름을 확실하게 믿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그 이름을 오늘 하루 종일 부를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기뻐해야 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고 천국이 약속된 사람이고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인데 어떻게 감사하지 않고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이름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사랑과 권세와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보다 더 큰 복과 은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 그 이름을 말할 때마다 그 이름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은혜가 크고 놀라움을 믿으시고 감사함으로 기뻐함으로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그 이름을 높이기 위해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