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4살 정도에 그 당시의 가요를
휘파람으로 불고 돌아 다니니
동네 어른들이 자주 시켜 보면서
신동이라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제 기억에도 5~6살 때에
어머니 품에 안긴채
어머니의 노래를 따라
휘파람불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이 지나 마산공고로 진학을 하고서
하숙했던 집의 주인 형이
송창식의 "날이 갈수록"을 기타를 치며
부르는데 엄청난 울림 같은 것이
가슴을 치더라구요
그 때부터 그 형 한테 기타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작사가의 마음과 작곡자의 마음을 이해해서
그 느낌을 상대에게 전하는것"이
노래이겠구나 싶었습니다
누가 알려 주지는 않았지만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할때 최대한 그 느낌을 전달하려
애썼습니다
이 느낌도 내 밖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내 안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것이 나오면 난 그대로 행했고
내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이유로 고등학교 시절에
같이 하숙하던 친구와 음악시간에
선생님께 불려나가서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듣기가 괜찮았나 봐요
그러니 자꾸 시키더라구요
기타에 미쳐서 하루종일 기타를 치며
시간을 보낸 적도 꽤 됩니다
그 당시는 악보도 귀했고
학원도 또한 귀했습니다
기타 잘 친다는 사람이 있다면
좇아가서 배우기도 했구요
기초도 제대로 없이
작곡을 한다고 설치기도 했고
악보의 원리를 파악하려고
애도 많이 썼습니다
어느덧 경남대학교 기계공학계열에 입학했고
첫 MT에 기타를 들고 갔더니 야단이
났었습니다
미쳤나 봐요 그 때 주변에 모인 친구들이랑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대학때 기타학원 강사도 해 봤고
술집에서 노래도 조금 불러 봤고
타 학과에 졸업환송페스티벌 같은데도 가서
통기타로 노래를 불러 준 적도 있었습니다
아내가 생전 그런 소리를 않더니
"철학과 졸업환송 페스티발"에 초청되어서
딕훼미리의 "작별"을 불러준 적이 있는데
"집에 돌아와서 그 순간을 떠올리니 눈물이
나더라"라고 하더라구요
집사람에게 "제 노래의 진심이 통했구나"하고
생각하니 참 행복했습니다
요즘도 노래가 나오는 방송을 보면서
진한 감동을 받아서 눈물이 막 나올 때
행복하지요
저도 타인에게 이런 감동을
느끼게 하는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음악을 하면서 헛 짓은 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전 사실 이 느낌을 위주로 살아 가고 있습니다
내 안의 소리에 민감하고
그 울림이 제 삶의 목적이고
전부임을 알고 있으니까요
음악에 미쳐서 잠잘때 라디오를 켜놓고 자면
아침에 비몽사몽간에 듣는 음악이란~~^&*
그 맛은 안 겪어 보면 모를 것입니다
음악의 내용이 현실같은 꿈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한번 시도해 보시길 바랍니다
대학시절엔 정품이 나오기 전에
반응을 보기 위해 파는
일명 "빽판"을 사기 위해
마산의 창동일대를 헤메다가
레코드가게 사장하고
폭행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
barclay james harvest의
"poor mans moody blues"라는 곡을
찾아 나섰었는데 하루종일 돌아다니다
마침내 그 레코드를 찾았지만 주인은
안판다고 했습니다
내가 찾는 그 곡이 아니래요
아니어도 괜찮으니 팔라고 했죠
그 땐 제목을 몰랐습니다
음을 흥얼거리면서 찾고 다녔으니까요~~@
변명할게 없으니 "귀한 거라며 안된다"고 해서
쌩욕을 퍼부었더니 죽일듯 달려들더라구요
옆의 사람들이 말리지 않았으면
큰사고 칠뻔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늙어가니
그 때의 정열이 그립습니다%
서클대항 체육대회에서는
붓글씨동아리인 "한묵회"에 속해서
급하게 3인조그룹을 만들어서 리허설도
제대로 못해보고 연주라고 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일생일대 대 사건이 그 날 터졌습니다
교내 방송국장이던 형이 저 보고
"서클의 밤"행사의 "노래자랑" 코너에
기타반주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약 36개정도 동아리가 있었는데
당일 오후에 부탁을 받았고
저는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각 서클에서 신청곡을
미리 준비한 줄 알았는데
그냥 순서대로 나와서
노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노래가 시작되었고
그 사람의 key를 찾아서
minor, major를 찾고
끝음을 먼저 생각하며 쳐 나갔습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끝났지만
저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그 선배라는
방송국장은 그냥 맡겨 놓으면
되는 줄 알았나봐요
아무도 그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을 못 했고
저도 급하게 땜질하듯 해 버렸으니까요
상대방의 key에 맞춰 code를 맞추는 것은
아마도 제정신으로 한 것은 아니겠지요
하여튼 그 이후에 학교에서 저를 알아 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취업을 위해
기계공학과 1,2학년을 모아
"스터디그룹"을 만들어서
도서관에 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공부로 전향하게 된 동기가
학점을 주지 않더라구요
공고시절 기계제도를 전공했고
인문계나온 친구들이 대부분이라
설계Report의 원본은 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리는지도 모르는 친구들이
제 것을 똑 같이 베껴서 그려서는 제출했는데
제가 학점이 D가 나온 것입니다
조교 형에게 따지러 갔더니 학점을 3점이하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안 줬다는 것입니다
제가 과대표였고 제가 원본인 줄 아는
조교형의 말을 듣고 너무 배신감이 들어
스타디그룹을 7개 만들어서
도서관에서 나머지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조금 이해가 됩니다
제가 너무 강성이라 대학측에서 총학생장이
될까봐 그랬다는 후문이 들리더군요
그 뒤로 취미로 조금씩 치다가
남과 싸워서 그리고 운동하다가
손가락을 다쳐서
지금은 손도 못대고 있습니다
아니 이건 핑계고 사실 흥미를 잃었습니다
어릴 때 병에 찔려 왼 손의 엄지손가락이
쥐는 힘이 약해서
기타를 오래치면 피로가 많이 왔고
노래는 높은 음역대를
소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능력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계를 안다는 것은 어쩌면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놓치고 살지만
한계를 알면 돌아섭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직업이 바뀌게되는 것도 부부관계도
다 이렇게 끝이 보여서 더 이상 미련이
없어져서 방향을 튼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이 날이 갈수록
직업이 늘어가는 이유도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복잡해지는 이유가
되겠지요~~^&*
♬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Nazareth의 love hurt 입니다
♬ 제가 제일 좋아하는
국내가수는 "여진"입니다
대학시절에 이 가수의 레코드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들었습니다
아마도 수천번은 들었을겁니다
"꿈을 꾼 후에", "그리움만 쌓이네"등
참 좋았습니다
"김연숙"도 좋아했습니다 "그 날"은
대학시절 통기타로 18번이었습니다
대중한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 부터 말이죠
♬ 남자가수 중에는
"유익종"이 맘에 들더라구요
"안녕 내 사랑"은 통기타로 18번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제가 기타로 부르는 좋아했어요
♬ 얼마전엔 "김광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김새별"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한번씩 듣고 있어요
시간이 가면서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는
또 다르게 변해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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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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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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