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할머니의 사랑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유년기의 기억들은 단편적이다.
그중에서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부분은 할머니와 관련된 것이 유독 많다.
지금도 지역에 따라 남아선호도가 높게 나타나지만 60~70년도엔 지역과 상관없이 남아선호사상이 크게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집안에 아들이 없으면 양자라도 받아들여 아들로 삼았다. 그럴 형편이 안 되면 가문의 수치로 여기던 때였다. 그러니 집집마다 어른들은 노심초사 고추 달린 사내아이가 태어나길 고대하였다.
할머닌 매일 밤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손자가 태어나길 치성으로 빌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았을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모르긴 해도 초조와 근심에 쌓여 지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고추 달린 사내아이가 우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야말로 경사였다. 할머니에게 나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진귀한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날마다 당신의 치마폭으로 날 감싸고 금이냐 옥이냐 하며 사셨다. 그땐 너 나 할 것 없이 배고프게 살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흰쌀밥을 먹는다는 건 부자 집이 아니고선 언감생심이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할머니에게만큼은 매 끼니마다 쌀밥으로 봉양하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 조부께선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할머닌 당신의 밥공기에서 쌀밥을 퍼서 내 입에 먹여주셨다. 밥 한 숟가락 입에 떠 넣고 물에 빤 김치를 손가락으로 쪽쪽 찢어선 밥알이 다 삼켜지기도 전에 내 입에 쏙 넣어주셨다. 거기다 할머니만 잡수시던 생선에서 제일 좋은 살을 발라 내 입에 넣어주셨다.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보며 꼴 보기 싫어한 사람이 있었으니 먼저 태어난 누이들이었다. 꽁보리밥에 김치쪼가리로 삼시 세끼를 먹어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에 비해 고추 하나 달랑 달고 세상에 태어난 사내가 뭐라고 매일 흰쌀밥에 고기반찬이라니 생각만 해도 한 대 콕 쥐어박고 싶었을 게다.
할머니가 돌아기시기 전까지 나는 늘 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지낸 기억이 나질 않는 거로 봐서 어지간히 클 때까지 난 늘 할머니와 함께 컸던 것 같다. 그 당시 할머닌 해소천식이란 질병을 앓고 계셨다.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치료약이 있겠지만 당시엔 그저 민간요법 정도가 전부였다. 아마 도시에 있는 큰 병원엘 갔었더라면 적절히 치료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시골에선 아프면 적당한 민간요법을 쓰다가 그도 듣질 않으면 무당을 불러와 푸닥거리를 하였다. 그것도 안 먹히면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아야 했다. 할머니의 병세는 나날이 악화되었다. 긴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시다가 한 번 기침을 시작하면 얼굴이 새파랗게 변할 때까지 숨 넘어 갈 듯 기침을 해댔다. 말미에 짙은 가래를 뱉고서야 겨우 안색이 돌아왔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난 할머니가 그저 기침을 하는구나 하는 정도였지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도 못하였다. 할머닌 늘 내 머리를 벅벅 긁어 주시며 귀애를 하셨다. 늙어 꼬부라진 몸인데도 날 등에 업고 낮잠을 자게 하셨다. 그러다 잠이 들면 할머니 자리보다 더 따듯한 아랫목에 날 눕혔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엘 가도 이가 바글바글 했다. 그러니 늘 머리를 긁고 등짝을 긁고 고무줄이 끼워진 허리를 사정없이 긁어댔다. 그럴 때마다 할머닌 괄 키 같이 굽은 손가락으로 내 머리며 등이며 다리를 시원하게 긁어 주셨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잠이 스르르 왔다.
부모님께서 할머니에게 잡수시라고 사다 드린 황도통조림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할머닌 당신의 입에 황도를 한쪽 드시곤 나머질 모두 내게 먹여주셨다. 과일이라곤 제삿날이나 명절 아침에만 그것도 겨우 한두 쪽 맛보면 그만이었는데 달콤한 황도를 그것도 통째로 먹을 수 있다니 이런 횡재가 세상에 또 있었을까 할머니가 아프든지 말든지 내 입만 즐거우면 그만이었다.
어느 날 병풍 뒤에 편안하게 누워 계신 할머니를 보았다. 아버진 누런 상복을 차려입고서 나를 부르셨다. 병풍 앞엔 술잔 하나가 얹힌 채 작은 소반이 놓여있고 상의 왼쪽엔 놋대접이 하나 있었다. 아버진 내게 주전자를 내주며 빈 잔에 술을 따르라고 하셨다. 그것을 따르자 이번엔 병풍을 향해 세 번 절을 올리라고 하셨다. 난 도무지 어떤 상황인지 깨닫지를 못했다. 할머닌 왜 대낮인데 병풍 뒤에 누워계신 거며 사람들이 왜 이렇게나 많이 우리 집에 모였는지 그리고 아버진 왜 이상한 복장에 지팡일 집고 연신 아이고 아이고 하는 건지 몰랐다. 그러더니 할머니를 실은 꽃상여가 산으로 힘겹게 올라갔다. 그 뒤를 따라가는 많은 사람들과 상여를 따라가며 우는 누이와 찬바람에 펄럭이는 만장과 딸랑딸랑 종을 흔들며 구성지게 노랠 부르는 요령잡이를 그저 신기하게 바라봤다. 내 눈에선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이게 할머니와 나와의 마지막 갈림길이라는 걸 나는 정말이지 그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