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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4-14 예수님의 탁월함을 보라 찬송: 2, 25, 260장 교독문: 골 1:9-23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성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난주에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믿음에 굳게 서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성숙하다는 것은 현실의 삶이 변화한다 할지라도 그 변화로 인하여 삶이 휘둘리지 않고 꿋꿋하게 믿음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요, 이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이 고백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는 “예수”라는 이름에 담긴 그분의 본체, 즉 본질에 대한 것이요, 또 하나는 “그리스도”라는 직분에 담긴 그분의 직임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은 제2위격의 성자 하나님으로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직임을 감당하시는데, 그분은 구약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직분인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서의 직무를 감당하시며 성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분이시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복음의 증인으로부터 이 복음의 내용을 받은 때가 언제이며, 이 내용을 믿음으로 고백한 때는 언제이며, 또 이 고백을 계속 유지하며 살고 있느냐를 항상 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우리가 믿음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다가 주일에 와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라는 고백을 한다는 것은 이 고백에 근거한 삶을 유지하지 못했음에도 거짓으로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강조하여 말하느냐 하면, 이 히브리서 편지를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들은 1차 증인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은 2차 증인들이다. 여기에서 1차 증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함께 기도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인 12명의 사도들과 여러 다른 120여명의 성도들이다. 이들을 통해 예루살렘에 최초로 교회가 세워졌고, 이 교회를 통해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이 퍼져 나갔고, 여기에서 더 멀리 이방 지역인 안디옥에 교회가 서게 되었다. 이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을 받았고, 이 두 사람을 통해 소아시아 지역, 즉 튀르키예 서부 지역에 복음이 전해졌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바울과 실리와 디모데를 유럽으로 보내셔서 복음이 유럽으로 건너가도록 이끄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처럼 1차, 2차, 계속되는 3차 증인들을 통해 복음이 로마 제국 내에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문제는 2차, 3차 증인들이 복음을 받은 그대로의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들은 세상의 유혹과 환난과 박해로 인하여 그들의 믿음을 정확하게 세우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때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인 A.D. 70년 이전으로 한 세대를 30년으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이제 겨우 한 세대가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복음의 역사가 쇠퇴하게 되었을까? 바로 이 부분을 안타까워 하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이전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이 많이 있었다. 유대교 신앙은 그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열심히 하게 만들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방법과 태도를 통하여 그들 자신을 스스로 성결하게 만들어 갔는데, 복음을 들은 후에 이 모든 것은 과거의 일이고,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그들로 아무런 대책이 없이, 즉 무언가 기댈 것이 없게 만드는 이상한 상황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유일신 사상을 유지했는데, 여기에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증언을 들으니 여기에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절대 신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그분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면 그분은 위대한 선생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였을 뿐이라는 사상이 그들에게는 더욱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 부분을 안타까워 하면서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님께서 과연 우리의 참 구주이시요, 참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하기 위해 펜을 들었고, 우리 손에 이렇게 히브리서가 들려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늘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한 하나님이시요, 또 하나는 예언대로 이 땅에 오셔서 그리스도의 직분을 감당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직분 가운데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충실하게 감당하신 하나님이시자 인간이신 분이시다. 그렇다. 히브리서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셨음을 선언하는 유일한 편지이다.
이제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가 왜 1장에서 예수님을 천사와 비교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왕적 메시아라는 것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정확하게 인지할 것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히브리서 1장을 받은 이유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천사와 예수님을 비교하여 예수님의 탁월성을 증명한다. 이 증명은 인간의 행위를 통한 증명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시인 구약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예를 많이 들고 있다.
첫째, 4절을 보면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셨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이름”은 뛰어난 이름으로, 탁월한 위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곳은 바로 하늘 보좌를 상징한다. 즉 예수님은 왕이시란 선언이다.
둘째, 5절에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약속과 성취를 위해 오신 분이라고 증명한다. 여기에서 시 2:7과 삼하 7:14을 인용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시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메시아 왕국을 수립할 영원한 왕이시라고 증언한다.
셋째, 6절에서 예수님은 천사에게 경배를 받으실 분이라고 증언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시 97:7을 인용하는데, 벧전 3:22에도 인용되어 있다. 시 97:7은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본문과 비교하면, “너희 신들”은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로, “여호와께”는 “그에게”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그에게”는 바로 예수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구약에서 지시하는 왕적 메시아이심을 이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의 의미이다. 이 부분을 잘못 해석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육신을 입고 오신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다시”는 6절 맨 앞으로 이동하여 “또”와 같은 의미이다. 즉 5절의 설명에 이어 한 번 더 구약을 인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앞부분에 “맏아들”이란 표현이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 즉 제2위격의 하나님이심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넷째, 7-9절에서 천사는 종으로 사역하지만, 예수님은 메시아의 사역, 즉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한다고 선언한다. 이 세 구절에서 저자는 천사와 아들을 비교하는데, 아들은 분명히 예수님이시고 하나님의 맏아들이시다. 천사들은 바람과 불꽃으로 상징되는 사역자들이다. 히 1:14을 보면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처럼 천사들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 심판의 정령일 뿐이다. 그러나 아들은 누구이신가? 시 45:6-7을 인용하여,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그분의 보좌는 영영하며,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분이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셨다고 선언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천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 자신으로, 아버지와 함께 영원토록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 비교를 하는가? 그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는 천사 숭배 사상이 민간에 많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예수님도 천사 중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는데, 이런 영향을 받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대한 스승일 뿐, 천사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의 사역은 십자가에 달려서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기댈 가치가 없다고 말하며 신앙에서 떠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자는 본문에서 “감히 천사와 예수님을 비교하지 말라!”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비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천사와 절대 비교되지 않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요, 제2위격의 하나님이시라고 강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다섯 째, 10-12절에서 저자는 시 102:25-27을 인용하여 태초에 땅의 기초를 놓으신 하나님이시며, 천사는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여섯 째, 13-14절에서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한 왕적 메시아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시 110:1을 인용하는데, 시 110편은 메시아 시로 분류된다. 즉 구약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세 직무 가운데 왕의 직무를 맡아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면서 육신을 입으시고 왕의 직무를 감당하시며,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천사는 누구인가? 단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다. 감히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 선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는데, 이 성육신은 바로 구약의 예언대로 왕으로서의 메시아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천사와 비교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바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해야 할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히브리서 저자가 천사와 예수님을 비교하는가를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육신으로만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하나님으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메시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와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며,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창조주이시며 영원한 왕이실 뿐만 아니라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왕이 되시기 위해 선택하신 백성의 구원 사역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메시아, 즉 그리스도이심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가진 믿음이 구약과 이어짐으로 해서 참으로 귀하고 정확한 것임을 깨달아 유지할 것을 권면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유대교 전통과 구약성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알 것을 권유받은 것이다. 그들이 민간으로부터 들었던 천사 숭배사상을 버리고, 예수님은 감히 천사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자 인간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이 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구약의 구절들을 많이 인용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구약이 예수님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구약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가 알고 있는 구약 성경이 누구를 지시하는가를 바르게 깨닫고 그분을 바라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에서 저자가 의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본문에서 우리의 구원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어떤 내용으로 가득한가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굳게 세울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열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내가 무엇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있는가를 찾지만, 그것은 예수님과 나의 열심을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인 천사라도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열심을 어떻게 내세울 수 있을 것인가?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었으며,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대로 우리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부르시고 그 안에 거하면서 그분의 통치를 받게 하시고, 그분의 보호와 다스리심을 받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 안에 있으며, 이곳은 참으로 안정된 곳이요, 아름다운 곳임을 고백한다. 바로 이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성도의 본분이다.
그래서 다음주에 살펴보겠지만, 히 2:3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앞의 1:1-14에 기록된 예수님과 천사의 비교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이토록 귀한 것임을 깨닫고 그 믿음에 바르게 서 있으라는 권면이다.
성도의 믿음은 이처럼 귀하고 뛰어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믿음의 선물로 우리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얻고 그분의 나라의 기업이 되었다(1:4). 우리의 신분이 이렇게 귀하고 확고한데,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잠깐 살아갈 때, 무엇을 두려워하며, 세상의 염려와 환난과 박해로 인해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원래부터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을 뿐임을 알아야 한다(히 6:4-6).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탁월함을 바라보라.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으신 참 인간이시다.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으로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감당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고 안아주신다. 여기에 우리의 확고한 믿음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의 구원과 믿음을 굳게 붙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