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희의 인문산책 2
김흥수와 마광수와 나와 - 2
-지나간 것은 금빛으로 곱슬거리고 나는 아직도 어린 언어로 유영합니다
김종희|수필가, 호모루텐스
문장의 끝말은 또 다른 풍경을 열어줍니다. 산 그림자에서 떨어져 나온 목신하나가 아삭하게 일어섭니다. 금목서 향기도 쏟아집니다. 엉큼하게 월담하여 다리에 감겨드는 능청맞은 남자의 향기 같은 금목서가 관자놀이를 밀어 올립니다. 지나간 시간들은 금빛으로 곱슬거리고 나는 짜릿한 신맛이 자주빛 꿈이 될 때를 기다리며 추상 너머에 있을 세계에 눈을 던져봅니다
추상이란 구상이 가진 형태를 최소화하고 그것이 가진 존재적 의미를 표현하는 양식입니다. 대상이 가진 존재 의미를 작가의 세계관으로 드러내는 것이지요. 추상이 주는 특징은 감상자의 존재감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작품 속으로 감상자가 들어갈 틈을 준다는 것입니다. 작품과 작가에게 지속적으로 말을 건다는 점에서 우리의 의식작용을 증폭시킵니다.
구상의 세계에서 추상을 드러내고, 드러낸 추상을 구상화하는 것이 김흥수의 작품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합니다. 작품 <念> <悟>는 추상의 세계를 구상화하고, 구상이 다시 추상으로 치환되는 알레고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김흥수의 알레고리는 표면적 의미와 이면적 의미를 모두 가지도록 고안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미륵반가사유상의 사유를 여러 형태의 원으로 나란히 배치한 작품 <念>은 미륵사상이 보편화되던 이 땅의 역사와 스승 부처로부터 받아 든 숙제에 대한 미륵의 고민을 추체험케 합니다. 어쩌면 깊은 사유에 빠져든 미륵보살의 의식 속으로 우리의 상상을 끌어들이는지도 모릅니다.
이 땅에 미륵사상이 보편화되던 시기는 한강을 둘러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싸움이 치열하던 때입니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미륵사상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선화공주를 데려가기 위해 서동요를 퍼뜨린 무왕의 설화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미륵사상은 집권자에게는 국력 신장을 이루고 왕권 확립을 도모하는 정신적 바탕이었으며 민중에게는 삶의 고통 속에서 지혜와 희망을 갖게 했습니다.
미륵은 환생하여 미륵보살로 있지만 상생하면 부처로 나타날 미래불이기도 합니다. 미륵은 대 평화, 대 평등의 성격을 지니는데 미륵이 턱을 고이고 반쯤 앉아 있는 사연은 이러합니다. 부처가 열반에 들며 미륵에 이르길, ‘56억7천만년 뒤에도 이 땅에 구제되지 못한 이들이 있으면 미륵아 그대가 중생을 구제하라’는 숙제를 내립니다. 그 말씀에 미륵은 인간을 구제할 고민에 들어가게 됩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데 56억년 뒤의 세계라니.... 미륵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우리는 미륵의 세계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지요.
김흥수의 사유 저변에 불교사상이 있음을 작품 <悟>를 통해서도 볼 수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돈오돈수, 돈오점수로 정의됩니다. 돈오점수란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서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말이고, 돈오돈수란 단박에 깨달음이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점수와 돈수의 관계는 한편,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르는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질적 작품을 병치하여 미적 경험의 증폭을 던져주는 김흥수의 작품의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창조는 모방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서로 다른 표현방식을 한 화면에 담는 김흥수 작품의 출발을 18세기 겸재 정선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과 먹의 번짐으로 표현되는 남종화와 북종화의 세계를 하나의 화면으로 가져온 겸재는 조선의 산천이 가진 아름다움을 주역의 체계로 인식했습니다. 진경은 산천(실경)에 대한 관념적 해석인데 겸재 정선은 그 해석의 틀을 주역 원리에 두었지요.
<단발령망금강>, <장안사>
1711년(36세), 《신묘년풍악도첩》.비단에 옅은 채색36ⅹ37.4cm, 국립중앙박물관
숙종 2년(1676년) 1월3일에 한성부 유란동(지금의 경복중학교와 청운중고등학교가 있는 청운동 89번지 일대)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14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급격하게 기울어 가는 가세로 인해 과거시험을 볼 희망은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이 오히려 새로움을 발견하는 길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 진경을 열고 완성한 겸재 정선입니다.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진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농사짓는 일 외에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할 수 없었지요. 절박했던 가난 속에 과거 대신 畵道에 발을 들이면서 만난 스승이 바로 삼연 김창흡입니다. 노론의 영수 김수항의 셋째 아들인 김창흡은 『주역』의 주석서를 쓸 만큼 학문의 세계가 깊었으며 조선의 산천을 발견하는 진경시를 열었습니다. 정치적 부침에 따른 현실정치의 한계를 본 그는 끝내 관료사회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김창흡에게 정선을 소개시킨 인물이 사천 이병연이었습니다. 이병연은 김창흡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그림에 조예 깊은 스승에게 정선을 소개합니다. 마침내 금화현 현감으로 부임한 이병연은 스승과 벗을 초청하여 금강산을 오르는데 그때가 정선 나이 서른다섯이었습니다.
겸재의 성공적 요인에는 스승과 친구가 있었으니, 스승은 제자의 학문적 정신적 지주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의 명성이 중국으로 널리 퍼지게 되는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병연은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자’는 약속 아래 서로의 작품을 비평, 격려하여 조선 예술사상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워 냈습니다. 이병연의 시가 없으면 정선의 그림이 무색해지고, 반대로 정선의 그림이 아니면 이병연의 시가 빛을 잃었으리라 생각될 만큼 두 사람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춰주며 성장합니다.
옛 거장은 한 점 작품을 남기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산천을 걸었습니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 山河를 체화하여 마침내 자기만의 독특한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닮되 사진을 찍듯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가진 본질을 재해석해 낸 것이지요. 김흥수 하모니즘 뿌리를 겸재 정선의 진경에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예술의 역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술사는 인물사이기도 합니다. 미술은 그것을 창조한 사람이 딛고 선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피어난 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에 살다 갔는지. 그가 살았던 나라의 대내외적 정세는 어떠했는지, 누구와 교유했는지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예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예술가의 면면을 알지 못하는 아쉬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가 남긴 황홀한 예술작품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 예술가에 대하여 알 수 없을 때 우리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높아집니다. 지적 호기심은 먼지 앉은 책장을 넘겨갈 것이며 오래된 기억의 우물을 첨벙거리다 마침내 조각으로 흩어진 퍼즐을 맞춰갈 때의 놀라움은 희열로 다가옵니다. 시대를 아우르는 힘을 예술이라 할 때 한 사람의 예술을 통해 우리는 천년의 세월을 추체험하며 때로는 그 속에 다양한 삶을 만나고 인간적인 고뇌를 보기도 합니다.
앞선 사람이 걸어간 시간은 유물로 남고, 기억엔 이끼가 자리를 잡습니다. 지나간다는 것은 경계에 서는 일이고, 지나간 것은 경계를 넘어선 일입니다. 경계에 서서 나는 아직도 어린 언어로 유영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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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희 | 경북 선산 출생으로 철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으며 인문학 강사로 활동 중이다. 199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사이펀》 편집위원, 빈빈문화원 대표이며 국제신문에 인문칼럼을 연재 중이다. 저서로 수필집 『나는 날마다 신화를 꿈꾼다』, 『돌탑에 이끼가 살아있다』, 『사랑도 기적처럼 올까』, 『슈만의 문장으로 오는 달밤』 인문채록집 『기억 장소 그리고 매축지 1, 2』, 『구술생애사로 경험하는 인문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