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길은 1897년 3월 29일 전라북도 고창군 공읍면 덕암리에서 오윤팔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상황은 동학군이 패망한지 3년 밖에 되지 않아서 주민들은 가뜩이나 울분에 차 있었다.
주민들은 동학형명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외세에 있다고 보았기에 그 동리에 전도하러 온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동리 장정들에게 얻어맏고 쫓겨나는 등 봉변 사건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아락 선교사는 남다른 집념으로 덕암리에 뛰어들어와 전도를 했다.
이 선교사는 덕암리에 모여사는 오씨 가문과 접촉을 했다. 오씨들은 비교적 깨어 있었고
진취적이었던 것이다.
당시 이 선교사에게 신앙을 고백하고 덕암교회를 개척한 멤버는
오청언, 오병희, 오윤팔, 오동근 등 이었는데 그 가운데
오윤팔 집사가 바로 오병길 전도사의 부친이었다. 아버지가 교회 개척자가 되다보니
아들인 오병길은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선교사는 그런 오병길을 아꼈다.
오병길이 서당에서 한문을 읽고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을 때였다.
이 선교사가 오 집사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오병길 선생은 아까운 수재입니다.
훌륭한 재목도 썩히면 조각들 못한다는 것이 동양의 사고 아닙니까?”
오병길 선생을 광주로 데려가 공부를 가르쳐 사도 바울같은 전도자로 만들겠습니다.
인재는 만들어지는 것이지 스스로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선교사님이 미련한 저의 아이를 그렇게 아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제 아이가 사도 바울같은 전도자가 될 수 있다면야 주님이 저에게 내린 크나큰 은총이겠지요“
”아닙니다. 오병길 선생의 눈에서 풍기는 총명기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오병길은 이 선교사를 따라 광주로 나왔다. 그리고 그는 광주 숭일중학교를 입학했다.
물론 선교사가 대 주는 학비로 말이다. 선교사는 학비를 대 주면서도 공짜가 없다.
그는 학교를 마치고 양관에 거주하는 선교사 집으로 가 청소도 하고 잔디도 깎으면서
학비를 벌었다.
이 선교사는 학기 초때면 그를 불러 공책 등을 사주면서 등을 두드려주었다.
”포올(이 선교사는 오병길의기독교 이름을 바울이라는 영어식 발음으로 포올이라고 불렀다)
포올의 어깨엔 무거운 사명이 지워져 있어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원한다면 미국 유학도 보내 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교사님“ 오병길은 숭일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 성경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정 코스가 그랬다.
대개의 경우 중등학교를 마치고 전문대학을 가거나 성경학교로 진학했는데 학자가 될 사람은
전문학교로 빠지는 경향이 있고 목회자가 되거나 신학교에 입학할 사람들은 거의가
성경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광주성경학교 3학년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예정대로라면 평양신학교로 진학했어야 옳다. 그런데 그는 신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교역자로 첫발을 내 딛었다.
그의 첫 교역지는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에 소재한 섬교회인 야월리교회였다.
이곳은 육지와 달리 무속신앙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야월리도 마찬가지였다.
주민들 대개가 고기를 잡아서 생활을 해야 하기에 배들이 고기를 잡으러 떠날 때면
풍어제를 드리고 고기가 많이 잡히기를 기원했다. 돼지 머리를 상위에 차려놓고
울긋불긋 차려입은 당굴네가 휘이휘이 춤을 출 때면 온 동리 사람들이 나와 한 통속에
놀아났다. 그리곤 제례가 끝나면 그 날은 잔칫날이 된다. ”워이 훠이 악귀야 물러가라.
남해에 사는 용왕님이여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걸리게 하소서. 이 술 한 잔 받으시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그물을 끓어 올리소서“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무속에 취한 거대한 힘앞에 온 동리가 일렁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주 앞에 더 엎드렸다.
”주여! 당신은 할 수 있나이다. 무속에 취한 저들도 당신이 원하시면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실 수 있나이다.“ 그는 매일 동리를 돌아치며 전도를 했다.
병, 약국이 먼 동리여서 그는 의사, 약사까지 겸직했다.
그런데 그에게 특별히 나타나는 것은 말씀의 능력과 함께 신유의 은총이었다.
야월리는 신속하게 복음화가 되어갔고 그가 부임한지 2년 만에 온 동리가 복음화되었다.
그래서 배들이 출항할 때 드리던 풍어제는 없어지고 대신 오 전도사가 배로 나아가
기도해 주고 출어하였다.
”주여, 제자들이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았지만 주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명령하시므로 그물이 터지게 고기들이 잡힌 것을 기억합니다.
주여! 야월리가 풍어로 말미암아 물질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하옵시고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깨달아 더 주님께 나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미신에 속아 무당에게 굴종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우리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사나 죽으나 당신만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오 주여 감사합니다.
당신은 일등 어부이시며 없는 데서도 있게 하시고 모자람도 풍성함으로 채워주심을 믿습니다“
물질을 나가는 성도들은 소리높여 아멘을 열창했다.
그들은 대해를 바라보며 찬송도 힘있게 불렀다.
오병길 전도사는 야월리 교인들에게 일체화를 심어주었다. 그의 목회의 비결이 여기에 있었다.
그는 생활 전체를 주민들과 함께 했다. 굶주리는 교인이 있으면 내일 당장 전도사 자신이 끼니를
못 끓이고 굶주리는 일이 있더라도 나누어 주었다. 아플 때는 뛰어가 기도해 주고,
상비약을 준비했다가 아픈 환부에 발라주었다. 한 번은 전도사를 급히 불러 구급 약통을 들고
뛰어갔더니 음식을 잘못 먹고 설사를 하고 있었다. 소화제가 있는가 살펴보니 다 떨어져 있었다.
그는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은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의사이십니다.
이 사람의 배의 병도 안찰하시면 고쳐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구했는데 이튼날
깨어 나고보니 멀쩡했다. 그 성도는 동리에 간증하므로 널리 알려졌다.”
식중독을 일으켜 땅바닥을 대굴대굴 굴렀는데 전도사님이 기도해 주고 약 발라주어 나았다는
소문도 전해졌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
오 전도사의 이런 기도는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이는 하나님이 야월리 지역 주민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였다.
야월리교회는 성장했고 전도사 이하 온 동리 성도들이 일체화된 가운데 예수 동리로 바뀌었다.
더 놀라운 것은 오 전도사가 기도한 후 출어를 나가는 것이 굿판을 벌이고 나갈 때보다도
고기잡이가 더 잘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놀라운 증거는 6.25가 터져 공산군이 야월리교회 교우들에게 배교를 강요할 때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저항하다 65명이 순교한 것으로도 입증이 된다.
섬 마을에서 65명이면 온 동리 주민 전체의 숫자이다.
오 전도사는 전도 밖에 모르는 외골수 전도인으로 통했다. 왜냐하면 오전도사의 특징이
미자립교회를 자립하게 만든 후 또다시 미자립교회를 찾아 떠나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다.
오전도사는 2년 후 야월리를 예수촌으로 만들어 놓고 떠났다.
그는 그후 고창군 부안면 용산교회, 홍덕면 홍덕교회, 해담면 동호교회를 돌보았다.
그러다 백산면의 평교교회에 부임했다.
오전도사가 당시로서는 숭일학교와 고등성경학교라는 정식 코스를 밟고도 왜 신학교를 이수해서
목사가 되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게 한다.
그것은 아무래도 해방 전야의 깜깜한 정국 때문이 아니었는가 추론할 수 있다.
1938년 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총회적으로 가결되고 오 전도사는 크게 실망했다.
썩고 오염된 사탄의 회와는 상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관심은 목사가 되는데 있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불신자들을 회개시켜 주의 백성으로
만드는데 있었다. 오로지 전도에만 집념했던 그는 매일같이 미숫가루 봉지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전도하다가 식사 때가 되면 그는 물 한 그릇을 얻어 미숫가루로 끼니를 때웠다.
어려웠던 사회적 형편에 밥 한끼도 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오전도사의 배려였다.
그러나 1950년 그가 평교교회에 사역할 때 6.25가 터졌다.
백산은 1950년 7월 하순 공산군이 점령했다.공산군은 제일 먼저 교회를 징발해 내무위원회로 썼다.
그들이 교회를 징발한 이유는 전투기가 포격을 해도 교회 십자가가 붙어있는 건물을 피하고
지나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오전도사는 교회를 빼앗끼고 고향 동리를 찾아들었다.
고향 덕암리에는 큰 아들 오주환 집사 내외가 살고 있었다.
그는 아들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부엌을 파서 지하 예배실을 꾸몄다. 남포불로 불을 밝히고
예배를 드렸고 찬송을 불러도 소리도 새지 않았다. ”이곳이 우리 기도실이다“ 오 전도사는
아침 저녁으로 그곳에서 식구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렸다.
1950년 9월 하순으로 들어서던 어느 날이있다. 그날도 오 전도사는 식구들과 예배를 드리다가
발각되어 내무서원들에게 끌려갔다. 고개를 넘을 즈음이었다.
가족들이 찬송을 부르자 더 이상 못 듣겠다는 듯 내무서원 한 사람이 총을 쏘았다.
”땅 따당“ 그 소리를 신호로 또 한 사람의 공산당이 손에 돌맹이를 들더니 오전도사의 머리를 짹었다.
순식간에 유혈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주여! 감사합니다“ 피를 흘리는 오전도사의 입에선
감사가 터져나왔다. 이 소리가 인민군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놈들은 쥐고 잇던 죽창으로 오전도사의 전신을 난자했다. 오전도사의 심장에서 붉은 피가
하늘로 치솟았다. 이들에게서 흘러내리는 피냄음이 9월의 풀섶에 흩어졌다. 53세때였다.
아버지를 잃은 오주환과 오세환도 공음면 분주소에서 이튿날 인민재판을 받았다.
”너희들은 예수 안 믿고 사회주의 국가를 위해 충성하겠지?“ 인민원장이 정다운 목소리로
회유를 할 때였다. 두 아들은 한 목소리로 죽기를 자처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를 따라 같이 죽겠소“ 두 아들도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이로서 덕암교회에서는 삼부자 순교자가 탄행했다. 덕암교회에서는 비정한 공산당의 난동으로
22명이 한날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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