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역사도시
진주는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다. 남강 유역의 발굴로 이 지역은 수만년 전 구석기시대로부터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삼한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살아온 국내 최대의 유적지임이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남성동·이현동·유곡동에서 마제석기와 무문토기 등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에 걸친 유물이 발견되었다. 수정봉·옥봉의 산등성이와 상봉동·중안동의 언덕에 비교적 규모가 큰 고분군이 있었으니 이는 가야시대에 유력한 정치세력이 이곳에 형성되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었던진주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惠恭王) 때에 청주(菁州)로 개칭하였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40(태조 23)년에 강주(康州)를 진주라 고치고, 983(성종 2)년에는 12목(牧)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晉州牧)으로서 서부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 23부제 실시에 따라 진주는 진주부(晉州府)가 되고, 진주목은 진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896년 도청소재지가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晋州面)이 되었다가 1925년 도청소재지가 부산으로 이전되었다. 1931년 진주면이 읍(邑)으로 승격한 데 이어 1938년에는 진주군 도동면(道洞面)과 평거면(平居面)의 5개리와 나동면(奈洞面)의 1개리가 편입되었다.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가 시(市)로 개칭되었으며, 1974년에는 진양군 정촌면(井村面) 가좌리(加佐里)와 호탄리(虎灘里), 나동면의 귀곡리(貴谷里)를 이관받았다.
1995년 1월 진주시와 진양군이 합쳐 도농복합형(都農複合型)의 통합시가 되었다. 현재 진주시는 구(舊) 진주시의 망경·강남·칠암·성지·중앙·봉안·상봉동·상봉서·봉수·옥봉·상대1∼2·하대1~2·상평·초장·평거·신안·이현·판문·가호의 21개동, 진양군의 문산읍, 내동·정촌·금곡·진성·일반성·이반성·사봉·지수·대곡·집현·미천·명석·대평·수곡의 1읍, 15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2. 교육도시
진주는 교육 도시이다. 진주향교는 고려 성종 6년(987)에 창건되어, 국자감에서 경학 및 의학박사를 파견하여 교육하였고, 조선 태조 7년에는 문묘를 창건하고, 성균관에서 훈도, 교관, 교수 등을 파견하였다. 하연(河演)의 사교당기(四敎堂記)에 의하면, 은렬공 강민첨이 여기에서 배웠으며, 그 후로 인재가 더욱 성하여 문경공 강군보(姜君寶), 원정공 하즙, 어사대부 하윤원, 청천군 하을지, 참찬 정을보 및 조선초의 문충공 하륜, 문정공 정이오(鄭以吾), 양정공 하경복 등 수많은 인재들이 여기에서 공부하고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전국 인재의 반은 영남이요, 영남 인재의 반은 진주’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
명종 21년(1566년)에는 진주목사 박승임(朴承任)이 부임하여 동서남북 각 면에 서재(書齋)를 설치하였는데, 문산면 서지골에 동면서재, 수곡면 대천리 서지골에 서면서재, 정촌면 대축리 딧재서지먼당에 남면서재, 집현면에 북면서재, 정촌면 가좌리에 가좌촌서재, 원당리에 원당서재가 있었다.
서원은 광해군 2년(1610년) 수곡면 사곡리에 대각서원(大覺書院)이 창설되었고, 숙종 20년(1694) 정촌면에 정강서원(鼎崗書院), 숙종 28년(1702년) 금산면 가방리에 임천서원(臨川書院), 숙종 36년(1710년) 집현면에 신당서원(新塘書院), 영조 48년(1772년) 금산면 장사리에 경림서원(慶林書院)이 건립되었고, 헌종 4년(1838년)에 도동서원(道東書院), 헌종 4년(1841)에 평천서원이 건립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크고 작은 서원과 재실, 서당이 건립되었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896년 경상남도공립소학교가 설립된 것을 시초로 1909년에 금성초등학교의 전신인 진주심상소학교가, 1910년에는 봉래초등학교의 전신인 진주사립봉양학교가 개교하였다. 또한 같은 해 지금의 진주산업대학교 전신인 진주공립실업학교가 개교하였다. 1923년에는 경상남도공립사범학교가, 1925년에는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가 개교하여 중등교육이 실시되었다. 1948년 지금의 경상대학교의 전신인 도립진주농과대학이 설립되었다.
현재 교육기관으로 유치원 65개소, 초등학교 44개소, 중·고등학교 41개소, 대학교 6개가 있다. 학생수는 전체 진주 인구의 33.4%인114,000여명인데, 초등학생이 24.6%, 중학생이 13.5%, 고등학생이 19.7%, 대학생이 34.1% 등이다. 공공도서관으로는 시립연암도서관, 서부도서관, 진양도서관이 있고, 좌석수는 총 3천여석이다.
3. 문화예술도시
진주는 문화예술 도시이다. 진주에는 국보인 청곡사 영산회괘불탱을 비롯하여 보물 7점, 천연기념물 2곳, 사적 2곳, 중요무형문화재 1개, 도유형문화재 24점, 도무형문화재 5개, 도기념물 11점, 도민속자료 1점, 도문화재자료 28점 등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진주검무, 진주삼천포농악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인 진주한량무, 포구락무, 교방굿거리, 장도장, 연관장이 있다.
그리고 진주오광대는 탈을 쓰고 한바탕 어우러지는 춤판으로서 1997년에 복원되었다. 또 매년 10월 초에는 개천정신을 계승하고, 진주성 대첩을 기리기 위한 개천예술제가 열리고 있는데 이는 지방문화행사의 효시이다.
진주성 안에 위치한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임진왜란 유물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이 있다. 보물 제637호인 차륜식토기, 제858호인 중완구, 보물 제885호인 현자총통을 비롯하여 비격진천뢰 등 3,500여점을 소장하고 있는 최초의 전문박물관이다.
경남문화예술회관은 전통문화창달을 위한 종합문화예술의 전당으로 대공연장(1,496석)과 소공연장(280석), 옥상공연장 등을 갖춘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이다. 예술회관 주변에는 남강의 빼어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범문화예술거리로 지정된 남가람 문화거리가 있어 전통문화를 재현하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예술단체로는 전국예술인총연합회 진주지부가 있으며, 시립예술단등 많은 문화예술단체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 외에도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1곳, 소공연장 3곳이 있다.
4. 호국충절의 고장
진주는 호국충절의 고장이다.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는 왜군과 두 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임진년(1593)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의 하나로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하며, 다음해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죽음으로 알려진 싸움이다.
임진년 제1차 진주성 전투는 1592년(선조 25) 10월 5일 진주성을 공격하는 왜군 약 2만여명과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하는 3,800여 명의 민관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왜군은 6일간 치른 대접전 끝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물러갔다. 이 전투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 지역을 방어하고 최대 곡물생산지인 호남지방이 왜군에게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다.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제1차 전투에서의 참패를 설욕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내린 명령에 따라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이 6월 19일 37,000여 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진주성에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이끄는 3,400명의 병력과 7만여명의 민간민이 있었다.
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치열한 공방전 끝에, 29일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7만여 민관군이 이 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지금 진주성 내에는 김시민 장군 등 39분의 위패를 모신 창렬사, 순절한 여러 장수들과 병사들의 충의를 새긴 촉석정충단비, 김시민 장군의 전공(戰功)을 새긴 김시민장군 전공비, 의기(義妓)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인 의기사, 김시민장군 동상, 당시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7만여명의 영령들의 충혼을기리기 위한 제단인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과 촉석루 밑 남강 가에 의기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의암사적비,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순국한 바위인 의암 등이 있다. 또한 효종 3(1652)년에 건립되고 현종 8(1667)년에 사액된 충민사(忠愍祠)가 있어,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위패를 모셨으나 고종 5(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