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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리산문학관 원문보기 글쓴이: [함양]인산시인
현대시조의 안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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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
1. 현대시조의 위상이 문제라는 점은 시조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라면 두루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전통적인 정형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동시대 삶의 의식을 포괄할 수 있는 주제의 자유로움을 확보해야 한다는 외견상 모순된 시적 목적론이 현대시조를 조건지우고 있는 근본적인 정황임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태생적으로 이미 자유시의 씨를 내장하고 있던 사설시조가 사라져 버린 데 반해 평시조가 여전히 확장과 변용을 거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현상은 그 자체로 일단은 긍정적이지만, 그 구체적인 형상들이 얼마만큼 현대성에 값하는 세계를 확보하였는가 하는 점은 그래서 여전히 현대시조를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인 것이다. 1965년 시조로 등단하여 1974년 첫시집 《청산곡》을 상재하고, 이후 《내 조국아 하늘아》(1977), 《호롱불》(1984), 그리고 《대숲에 사는 바람》(1994) 및 《고향에 내리는 눈》(1999) 등 다섯 권의 시조집을 낸 임종찬의 시조집은 이 점에서 현대시조의 현 단계를 파악할 수 있는 적절한 예가 되어 준다고 할 수 있다. 최남선과 가람, 이은상 등에 의해 시조의 현대적 중창이 이루어진 뒤 또 한 세대를 건너 뛴 세대의 시조시인으로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는 임종찬의 시조는, 형식이 요구하는 바 전통의 압력과 세대적 종차를 현격하게 보여 준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확보한 시조 작법의 독특성으로 인해 오늘날 시조의 위상을 살펴보기에 아주 적합한 것이다. 임종찬의 초기 시조는 《청산곡》(1974)으로 대표된다. 《청산곡》의 세계는 다소 정적인 풍경화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사대부의 안정된 유가적 세계관을 담아내던 평시조가 강호가도의 은일의 시학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엘리트 중심의 전원시풍의 전통을 계승했던 만큼, 조선심의 부활로 평가되었던 현대시조가 그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일종의 동양적 수묵화의 세계를 지향했던 것은 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임종찬의 초기 시조들은 바로 이런 풍경들에 근사하다. 〈귀뚜라미〉와 〈고향생각〉이 그러한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취해 앉은 강산인데 가을은 포도 시렁에 빈 하늘만 얹어 놓고 한 마리 벌레를 울려 야윈 밤이 깊어라. ― 〈귀뚜라미〉의 일부 보리밭에 새 길 나듯이 목화꽃 달 뜨는 밤에 허술히 상복(喪服)을 입고 국화는 목이 마르고 별빛이 그은 하늘 길 기러기 떼 또 날겠네. ― 〈고향생각〉의 일부 위 두 편의 시조에서 보듯이, 임종찬의 초기 시세계는 그의 선배 시조시인들의 세계와 그다지 확연히 구별되지 않는다. 그의 초기 시조들은 자연과 인간 삶의 조화로운 세계를 한 폭의 동양화처럼 그려내고자 하는 의욕의 소산으로서, 인간의 정취는 다소간 배제되거나 후경으로 물러나 앉아 있고 자연의 이법을 구현하는 세목들이 전경에 드러나 있다. 왜곡된 근대화의 피로를 상쇄할 만한 정신적 풍경의 창조가 현대시조 부흥의 한 중요한 몫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임종찬의 초기 시조는 비교적 그 정신사적 위상을 옳게 이어받은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임종찬의 시조는 이미 초기에서부터 일종의 주제적 확장을 기도한다. 그것은 바로 시인 자신이 배태되어 나왔기에 무척 친근하나, 현대시조에서 별로 구현된 바 없는 한가한 시골 농촌의 풍경들을 가능한 한 시조의 맥락 속으로 끌어들이려 한 점이다. 고향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은 이후로도 줄곧 지속되지만, 초기 시조에서부터 임종찬은 농촌의 구체적인 일상적 세목들을 과감하게 시조에 끌어들인다. 특히 〈농경〉과 〈영농기〉, 그리고 〈모를 심으며〉라는 시편들에서 보듯 그의 관심은 농삿일의 일상적 풍경 속에 매몰되어 있는 인간 삶의 비의를 포착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주변 인물들의 삶의 흔적이 새로이 평가되어 자리를 잡는다.
우수(憂愁)의 갈잎을 모아 긴 그림자 앞세우고 이삭 줍던 외할머니 그 시름 은실로 풀어 어디쯤에 누으셨나 ― 〈모시밭에서〉의 일부 임종찬 시에서 자신이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시절’에 대한 연구는 그의 시조의 한 주제를 이룰 정도로 흘러넘친다. 위의 시조에서 보듯이, 자신에게 삶의 한 본(本)을 실연해 주었던 노동하는 어머니, 할머니의 존재가 바로 그 시절에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서마지기 논을 갈고/돌아서는 장신(長身)의 바람//길들인 고운 계절이/머리채를 흔들건만//감춰 둔 십 리 근심은/봇도랑에 넘친다”고 하면서 농촌살이의 구체적인 현실을 집중적으로 묘파하는데, 이런 작법은 그가 농촌의 힘겨운 나날이 결코 시조의 정제된 틀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일반의 상식에 도전하면서 현대시조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증거가 되기에 족하다. 그 이전에 자연의 물상이 미시적이거나 제한적으로 시조의 소풍경으로서 예외적인 자리를 인정받았다면, 농촌살림의 구차한 세목들은 임종찬의 시조에 와서 별도의 변용 없이도 나름의 정신적 특성을 지닌 존재로 시조의 영역에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임종찬 초기 시조의 이런 풍경은 그러나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한다. 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청산곡》 이후 펴낸 《내 조국아 하늘아》(1977)와 《호롱불》(1984)에 수록된 시조들은 초기작에서 애써 발견했던 그만의 풍경이 사라지고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시인의 자아가 차지하는데, 그 풍경은 안쓰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어떤 경우 그것은 외적 정황의 직접적 묘사에 자신의 심정을 결부시키는 기계적인 완결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시기에 쓰인 그의 시조로는 아래의 작품이 그 많은 특징들을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천수답(天水沓)의 금 간 몇 평(坪) 근심들이 잔잔한 못물로 잡혀 귀향(歸鄕)하는 계절이면 이승의 아픔을 모아 꽃이여 또 피는가. ― 〈꽃〉의 일부 위의 예에서 보듯이, 이 시기에 발표된 그의 시조는 초기 시조와는 달리 추상적인 개인의 아픔이라든가 모호한 관념들을 직접적으로 시조에 담아내고 있다. 생경한 관념은 비유를 동반하지 않은 채 돌출되기 일쑤이며, 그러한 관념으로 대표되는 분위기는 어떤 모호한 배경막을 형성하면서 시조 속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의 음영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두 대상의 긴밀한 조응이 불가능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로, 자연스럽게 이 시기에 발표된 임종찬의 시조들은 문형 측면에서도 의문법이 전경화되어 있다. 시적 자아가 시의 외부 현실로 상정되는 것에 대해 건네는 이러한 의문의 형식은 시적 자아가 자기 주변의 현실을 깊이 있게 보아 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현실이 그러한 평화로운 직관의 작동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는 두 가지 가능성을 알려 주는데, 그로부터 시조의 평면성이 비롯된다. 그리하여 그의 시조는 “이 세상은 오래 전에/평화(平和)를 죽였다//숲속 나무들조차/인간을 닮아서인지//저들도 저들끼리 서로/살육(殺戮)하는 기색이다”(〈숲속의 내란〉)와 같은 비시적인 표현도 서슴없이 내보인다. 시조의 구성원리가 초장에서 중장, 그리고 중장에서 종장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대상과 인식의 비약, 그리고 그에 결부된 존재의 비약 내지 각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쓰인 임종찬의 시조들은 초기 시조와는 달리 어떤 공감각적 비유를 통한 입체적 풍경의 직조와는 거리가 멀게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너무나 평면적이어서 시로서의 어떤 긴장감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메시지의 축조보다는 맥락에 대한 시인 자신의 직접적인 환기와 절망이 지배적인 정조를 띠고 있는 것이다. 초기 시조와 비교할 때,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시간적으로도 한밤중에 고착되어 있으며, 공간적으로도 어떤 불가피한 흐름의 현장에 고정되어 있다는 두드러진 특징을 보인다. 물론 시인은 그러한 시공간에 자신이 서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대상이 되는 어떤 움직임을 뒤쫓거나 의심하는 최소한의 역동성은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그의 시조에서 일종의 안으로 내화하는 열정의 의도적인 감춤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런 정황을 설명할 길은 현재로선 당시의 시대적 정황밖에는 없어 보인다. 서정시의 죽음이 불가피하게 몇 개의 민중적 상징의 포화상태를 조장했던 당시의 문학적 정황까지를 함께 고려해 본다면 이런 해석 또한 그리 무리한 것은 아닐텐데, 안타깝게도 그가 이러한 혼돈의 소용돌이를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극복했는지를 소상히 알려 주는 작품들은 드물다. 그러나 세 번째 시조집 《대숲에 사는 바람》(1994)과 네 번째 시조집 《고향에 내리는 눈》(1999)에 오면서 임종찬은 이전의 혼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초기 시조에서 스스로 내디뎠던 가능성의 영역을 다시금 탐색해 들어간다. 일 예로 그것은 그의 시조의 주된 공간이랄 수 있는, 고향을 노래한 시편을 보면 단적으로 확인된다. 떨어진 밥알을줍듯 하지감자 두둑을깨고 앞서 인용했던 시조와 비교해 보면, 〈논길〉이란 작품의 세계가 얼마나 안정된 것인지를 금방 알 수가 있다. 생경한 관념과 추상적인 비유들은 자취를 감춰 버리고, ‘밥알’이라든가 ‘알감자’처럼 구체적인 사물이 비유로서의 생생한 힘을 얻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구체성은 감각의 구체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시간을 거슬러 유년기의 체험을 돌올하게 그려낸다.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임종찬의 시조들은 대체로 이런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바깥의 풍경을 그리더라도 초기 시조처럼 어떤 객관적 정물의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오가는 발랄한 행보를 보이는가 하면, 오래토록 자신의 내면에 간직되었던 기억과의 대면도 어떤 마찰음 없이 자연스러운 결합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시인은 자신이 미처 몰랐던, 혹은 자연의 물상에서 자신이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어떤 전언을 발견하고 새삼 놀라는 경이의 포즈를 취하는데, 이는 최근 두 편의 시조집의 지배적인 어조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그리하여 이런 경이의 순간에 뒤이어 시인은 삶을 관조하는, 선배 시조시인들의 의식의 경계 속으로 훌쩍 넘어오는 것이다.
명멸하는 산자락에 파산(破産)한 명함들만 집채같이 쌓이는데 일박(一泊)의 휴식도없이 채근하는 물소리여. ― 〈바다 구경〉의 일부 범어사에 가보니 입은옷이 무겁더라 둥지하나 재산으로 틀고앉은 멧새처럼 넉넉히 또한가볍게 중을닮고 싶더라. ― 〈범어사에 가보니〉의 일부 바다와 대면한 자리에서 수유로서의 인생을 성찰하고, 멧새의 행태에서 삶의 무거움을 느끼는 이런 시선은, 시조만이 확보할 수 있는 영탄에 실려 소박한 삶에 대한 부끄럽지 않은 욕망을 나직이 전달한다. 초기 시에서 단아하게 그려지는 동양적 정취의 풍경과 그 발견이 다소간 앞선 시조들에 대한 추수적 영향의 결과라고 한다면, 이즈음의 임종찬의 시의 풍경은 초월적인 것과의 의사소통이 기운 흔적 없이 자유롭고 매끄럽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삶을 관조하는 이런 그의 세계가 바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오랜 우회로를 거쳐 발견한 것임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순리〉와 〈못〉, 그리고 〈낚시를 하며〉와 〈차를 달이며〉, 그리고 〈산등성이에 올라〉와 같은 시편의 제목과 그 내용에서 분명하게 확인되듯이, 임종찬의 최근의 시편들은 삶의 비의를 캐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도 낚시를 한다든가 차를 마신다든가 하는 일상적인 행위의 과정 속에서 삶을 관조하는 지혜를 발견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물론 이런 발견의 과정에는 동양의 고전에 대한 독서체험이며 다도와 조도, 풍악, 그림과 같은 예술적 취향이 함께 하고 있다. 임종찬 시조의 이런 특징들이 그의 시조를 안빈낙도하고 안분지족하고 유유자적하는, 동양적 삶의 지고한 경지를 꿈꾸는 초월적 시편으로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여기서 유념할 점은, 동양적 관조의 서정이라고 하는 것이 시조가 마련하고 있고 또 많은 시조시인들이 꿈꾸는 일종의 선험적 목적지라는 점에서, 그것은 자칫 시인 자신의 독자성을 무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양날의 칼처럼, 어떤 시적 경지를 확보하는 데 유익한 반면 시적 자아의 개별성을 지워 버리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스스로에게나 남에게나 통용될 수 있고 또 의당 그래야 하는 삶의 순리에 대한 강조는 자칫하면 의사-달관의 아우라 속에 시인을 가둘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시인은, 특히 시조시인들은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임종찬의 시조가 살펴본 것처럼 감당할 수 없는 현실과의 맞대면에서 빚어졌던 내적·외적 갈등으로 인한 우회를 거친 만큼, 현재 그가 이른, 그리고 그가 이루어 낸 동양적 관조의 풍경화의 진실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시편들이 한편으로는 초기 시조에서 활발하게 작동했던 공감각적 울림을 상당 부분 결하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시력으로 따져서 반 세기에 이르는 임종찬의 시작 활동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결된 것도 아님은 물론이다. 임종찬 시인은 〈순리〉라는 시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연도 잠시일뿐 아침이슬 머문자리 흔적없이 지워지듯 삶이란 순리(順理)를 위해 증언하고 가는거다. 위의 시조에서 시인이 도달한 인식이 힘겨운 탐색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시는 자칫하면 시인의 시조를 교조적으로 만들 공산이 없지 않다. 임종찬 시인이 초기 시조에서 견지했던 화려한 색채 실험과 그것을 통해 이제는 다시 살아올 수 없는 고향의 풍경을 축약적으로 포착해 내는 특장은 여전히 유효하며, 또 현재 그가 시조를 통해 도달한 삶에 대한 인식과 양립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아마도 그의 시조의 갱생력은 바로 이런 몇 국면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의 시조에 명시된 것처럼 그가 증언할 삶의 현실이 어떤 강호의 그것이 아닌 현대의 삶의 공간으로 다시금 귀착될 때, 그의 시조는 현대시조에 부과되어 있는 현대성 확보라고 하는 목적에 그만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식으로서의 시조의 현재성을 유지하면서 정신의 현대성을 동시에 담아내는 작업이 현대시조의 존재이유이자 나아갈 방향이라고 할 때, 그러한 작업은 임종찬 시인처럼 양식에 대한 인식이 체화되어 있고 시조라는 틀을 통한 관찰법이 굳건히 다져져 자기화된 시인들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시조연구학회 회장 임종찬교수의 6번째 시조집 <<논길이 보이는 풍경>>에서 나름대로 간추려 시조방에 올리니 회원분들의 시조창작에 좋은 거울이 될것으로 믿어 마지 않습니다. 임교수님은 경남 산청출신으로 일직 20대에 부산일보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작으로 등단하시고 평생대학 교수를 하시면서 시조연구에 몸담그어 오신 분이십니다. 성파시조문학상, 오늘의 시조문학상, 부산시문학상 등 수상경력도 화려합니다. 이 분의 연변사랑과 연변의 시조시인들에 대한 정은 각별합니다. 시조집의 첫 시조를 맨먼저 올려 봅니다. 귀뚜라미 적막도 잔이 넘쳐 취해 앉은 강산인데
가을은 포도 시렁에 빈 하늘만 얹어 놓고
한 마리 벌레를 울려 야윈 밤이 깊어라
오동 장롱에 감춰 둔 한 뙈기 황토빛 수심
어머님 반지고리엔 어스름만 쌍혀 오고
간직한 내 꿈의 창호에 집을 짓는 귀뚜라미
또 하나의 걸작 시조 해바라기를 올려 봅니다. 해바라기 어젯밤 내 발목에 광란하여 일던 그 어둠
넌 눈 먼 독수리 해일을 밝고 서서
밀리는 파도 소리를 귀로 외어 재운다
어쩌면 불타는 궁전 어쩌면 잘 닦인 동경
한 길 정적을 심어 정오르 겨눴는데
사념은 씨았을 몰고 금빛으로 익는다
누가 놓은 매이더냐 발톱에 열토를 잡았다
누가 던진 팔매더냐 쟁그렁 거울이 깨진다
전치라마 울리는 함성 활활 깃발이 탄다 이제 이 아래에 한세 임교수님의 시조를 육속 올리려하오니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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