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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생경(本生經)
전생엔 부처님 누구였을까
재미난 우화 5백47건 윤회의 가르침 새겨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 때 사슴이었고 코끼리였다. 뿐만 아니라 수행자이기도 했고 왕이거나 도둑이기도 했다. 어떻게 들으면 황당하고 어떻게 들으면 재미있는 이야기다. 물론 불자들은 윤회를 믿기에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로 들을 것이다. 부처님이 카빌라국의 왕자로 태어나 설산에서 수행하여 마침내 성불을 하고 중생 제도를 위해 40년간 설법을 한 뒤 입적했다는 생애는 과거생의 많은 인연들을 바탕으로 이루어 진 것임을 믿는 것이다.
본생경(本生經)은 바로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다. 무려 547편의 전생이야기를 모아 된 것으로 한글대장경 간행 번호 91번부터 95번까지의 5권이다. 본생담이라고 하기도 한다. 파리어 자타카의 한역이다. 이 말은 본래 ‘태어나다’ ‘태어난 자’ 등의 뜻이었으나 ‘태어난 그 때의 일’이란 뜻으로 변했고 다시 불교에서 ‘이승에 태어나기까지의 전생 이야기’란 독특한 의미로 변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라는 특정적인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 자타카란 말이 어디에서 연유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쓰인 것으로 보이며 중인도 바르훗의 석각문에 이미 부처님이 전생에 사슴이었을 때의 이야기와 코끼리였을 때 등 19종의 이야기를 표현한 문양이 확인 됐다.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는 한 순간에 누구에 의해 설해지거나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 긴 세월을 두고 첨삭되며 자리를 잡아 왔으며 이는 인도의 우화 발생과 변화에 그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 알다시피 인도의 우화는 유럽으로 전해지며 ‘이솝우화’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자타카의 정신을 단적으로 말하면 단연 윤회다. 사람이 동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동물이 사람으로도 태어 날 수 있다는 윤회에 대한 긍정이 없이는 자타카가 구성될 수 없다. 지금의 본생경은 파리어로 쓰여 진 것이 아니라 스리랑카의 토속어로 구전 되어 온 것을 다시 파리어로 옮긴 것이란 설이 유력하다. 운문과 산문의 적절한 사용, 거기에 서사시의 격조를 유지하며 전해 오는 이야기도 있어 본생경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담은 이야기책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기본 정신을 이해하고 부처님의 존엄을 느낄 수 있는 본생경은 불교에 처음 입문한 사람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선호되는 경전이다. 출처: http://compassion.buddhism.org/
<부처님 전생 이야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를 적어 놓은 책이 본생담(자타카)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태어나기전 과거 전생에 무수한 세월동안 보살(구도자)로서 남을 이롭게 하는 선근공덕을 심고 보살행을 실천하여, 비로소 현세의 부처님이 되었다고 본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 인행시에 때로는 왕이나 수행자로, 때로는 코끼리, 사슴, 앵무새 등으로 태어나 수많은 보시와 인욕행을닦는다. 상불경보살, 인욕선인, 설산동자 등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는 우리 불자들이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의 좋은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아래는 부처님 전생이야기들이다.
==> 선혜보살은 연등불에게 푸른 연꽃을 공양하다.
과거 연등불 시절 선혜보살은 부처님이 출현나셨다는 소문을 듣고 구리천녀에게 푸른 연꽃을 사서 연등불에게 공양하고, 연등불이 지나가는 진흙투성이 길 위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 땅에 깔아 연등불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그리하여 선혜보살은 연등불로부터 미래의 부처가 되어 호가 석가모니라고 할 것을 수기(授記)받는다.
==> 설산동자가 시 한구절을 위해 목숨을 버리다.
설산동자가 히말라야에서 홀로 수행하고 있을 때 제석천이 그를 시험해 보기 위해 나찰로 나타나 '이 세상 모든 것은 덧없으니,것이 나고 죽는 법이라네'라는 시의 앞구절을 외었다. 설산동자는 이 진리의 게송을 듣고 한없이 기쁨을 느껴 나머지 싯구를마저 듣기위해 굶주린 나찰에게 자기 몸을 주기로 한다. '나고 죽는 것이 사라지면, 이것이 고요한 열반의 기쁨이어라.'의 시구절을 듣고 나서 설산동자는 약속한대로 나무에서 몸을 날리자, 나찰은 곧 제석천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공중에서 그를 받았다.
* 부처님께서 과거세에 설산동자(雪山童子)로 보살행을 닦으실 때, 나찰에게 몸을 보시하신 적이 있다. 이는 오로지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이라는 사구게(四句揭)의 게송 한 구절을 듣기 위함이었다.
이때 나찰은 설산동자에게 더운 피와 산 사람의 살을 요구했는데 설산동자는 기꺼이 몸을 보시하여 그 댓가로 이 게송을 들으셨다는 부처님 전생담이다.
==> 앵무새가 수미산의 큰 불을 끄다.
수미산에 큰 불이 났다. 그때 앵무새 한마리가 그 불을 끄기 위해 근처에 있는 연못에 날개를 적셔 숲위로 날아와 몸을 흔들어 물방울을 뿌렸다. 이를 보고 있던 천신이 말했다. "앵무새야. 너의 정성이 갸륵하다만 어느 세월에 저 큰 불을 다 끄겠느냐"
앵무새가 대답했다. "저는 이 일을 죽을 때까지 하다가, 또 다음생에 가서도 계속할 것입니다." 천신이 감동하여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하여 불을 꺼지게 했다.
본생담(자타카)
니그로다 사슴
그 옛날 바라나시에서 브라흐마닷타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보살*¹은 사슴으로 태어났는데, 날 때부터 그의 몸은 온통 황금빛이었다. 그는 오 백 마리 사슴에게 둘러싸여 숲에서 살고 있었다.
그를 불러 니그로다 사슴이라 했다.
그때 브라흐마닷타왕은 사슴 사냥에 미쳐 사슴고기 없이는 밥을 먹지 않았다.
일도 못하게 백성들을 불러다가 날마다 사슴 사냥을 나가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의논 끝에 궁전 뜰에 사슴의 먹이와 물을 마련해 두고 숲에서 사슴 떼를 몰아다 넣은 뒤 문을 닫아 버렸다.
왕은 뜰에 그득 갇혀 있는 사슴을 바라보며 흐뭇해 하였다.
그 속에서 황금빛 사슴을 보고, 그 사슴만은 다치지 않도록 시종들에게 명령했다.
이때부터 왕은 끼니 때가 되면 혼자 나가 사슴 한 마리씩을 활로 쏘아 잡아왔다.
사슴들은 활을 볼 때마다 두려워 떨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화살에 맞아 죽어갔다.
니그로다 사슴은 많은 사슴들이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것을 보고,
이제부터는 차례를 정해 이편에서 스스로 처형대에 오르기로 하였다.
다른 사슴들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 였다.
이 날부터 왕은 몸소 활을 쏘지 않아도 되었고, 자기 차례가 된 사슴은 제 발로 걸어가 처형대에 목을 대고 가로누웠다. 그러면 요리사가 와서 그 사슴을 잡아갔다.
그런데 하루는 새끼를 밴 암사슴의 차례가 되었다. 이런 사정을 안 니그로다 사슴은 "당신은 새끼를 낳은 다음에 오시오. 내가 대신 가겠소"하고 처형대로 나갔다.
황금빛 사슴이 누워 있는 것을 본 요리사는 왕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다. 왕은 뜰에 나와 니그로다 사슴을 보고 말했다.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은 없는데 어째서 여기 누워 있느냐?"
"임금님, 새끼 밴 사슴의 차례가 되었기에 내가 대신 죽으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브라흐마닷타왕는 속으로 크게 뉘우쳤다.
"나는 너처럼 자비심이 많은 자를 사람들 속에서도 보지 못했다.
너로 인해 내 눈이 뜨이는 것 같구나.
일어나라, 너와 암사슴의 목숨을 살려 주리라."
"임금님, 둘만의 목숨을 건질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슴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좋다, 그들도 구해 주리라."
"사슴들은 죽음을 면했지만 다른 네 발 가진 짐승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좋다, 그들의 목숨도 보호하리라."
"네발 가진 짐승은 안전하게 되더라도 두발 가진 새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좋다, 그들도 보호하리라."
"임금님, 새들은 안전하지만 물 속에 있는 고기는 어찌 되겠습니까?"
"착하다, 니그로다. 그들도 안전하게 해 주리라."
이와 같이 보살은 왕에게 모든 생물의 안전을 간청하여 눈을 뜨게 한 후 다른 사슴들과 함께 숲으로 돌아갔다
죽은소에게 풀을 먹이다
그 옛날 보살은 땅이 많은 한 지주의 집에 태어나 수자타 동자(童子)라고 불리었다.
그가 성년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의 아버지는 부친이 돌아가시자 슬픔에 잠겨 화장터에서 뼈를 가져다 정원에 흙탑을 세우고 그 안에 모셔 두었다.
밖에 나갈 때면 그 탑에 꽃을 올려 놓고 부친 생각을 하면서 통곡을 했다.
그는 목욕도 하지 않고 향유도 바르지 않으며 음식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이것을 본 수자타 동자는 아버지의 슬픔을 달래드리기 위해 어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어느 날 그는 들길에서 죽은 소 한 마리를 보자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죽은 소 앞에 풀과 물을 갖다 놓고 '먹어 어서 먹어'하고 말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수군거렸다.
"수자타는 정신이 돌았나봐. 죽은 소에게 물을 주다니."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죽은 소에게 먹으라고만 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수자타의 아버지에게 전했다.
"당신 아들은 미쳤나 봅니다. 죽은 소에게 풀과 물을 갖다 놓고 자꾸 먹으라고 합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지주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슬픔이 어느 새 아들에게로 돌려져 곧 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떻게 된 노릇이냐? 목숨이 끊어진 소에게 풀을 먹으라고 하다니. 아무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어보아도 한 번 죽은 소는 다시 일어날 수 없다. 이 어리석은 아들아."
수자타가 말했다.
"소의 머리는 그대로 있고 발과 꼬리도 그대로 있으니 소는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할아버지는 머리도 없고 손발도 없습니다. 흙탑 앞에서 울어대는 아버지야말로 어리석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듣자 지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아들은 지혜롭구나. 이 세상 일도 저 세상 일도 환히 알고 있다. 나를 깨우쳐 주기 위해 그와 같은 일을 했구나.'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는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
말 많은 임금님
보살은 재상의 집에 태어나 장성한 뒤에는 왕의 스승이 되었다.
그 왕은 말하기를 몹시 좋아하였다. 그래서 왕이 말하고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은 전혀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보살은 어떻게 하면 왕의 이와 같은 버릇을 고쳐 줄까 하고 궁리를 했다. 마침 그때 히말라야산 밑에 있는 어떤 호수에 거북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 백조 두 마리가 먹이를 찾아와 거북과 친해졌다.
하루는 백조가 거북에게 말했다.
"우리가 살던 히말라야 중턱에는 눈부신 황금 굴이 있는데 우리와 함께 가보지 않겠소?"
"내가 거기까지 어떻게 갈 수 있겠소."
"우리가 당신을 데려다 드리지요, 당신이 만약 입을 다물고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는다면."
"입을 다물겠소. 어떻게든지 나를 그곳에 데려가 주시오."
백조는 나뭇가지 하나를 거북의 입에 물린 후 자기들은 그 양쪽 끝을 물고 하늘을 날았다.
백조가 거북을 데리고 가는 모양을 보고 동네 아이들은 "야, 거북이가 백조에게 물려간다"하고 떠들어댔다. 거북은 아이들에게 욕을 해주고 싶어졌다.
"친구가 나를 데리고 가는데 너희가 무슨 상관이냐. 이 고얀 놈들!"
거북은 말을 하고 싶어 물었던 나뭇가지를 생각없이 놓아 버리자 그만 땅에 떨어져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때 백조는 빠른 속력으로 궁전 상공을 지나가던 참이었다. 왕은 궁전 뜰에 떨어져 조각난 거북을 보고 보살에게 물었다.
"스승님, 어떻게 해서 거북이 떨어져 죽었습니까?"
"거북과 백조는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백조가 거북에게 히말라야로 데려다 주겠다고나뭇가지를 물리고 하늘을 날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거북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 무엇을 지껄이려 하다가 나뭇가지를 놓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공중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말이 많은 사람은 언젠가는 이와 같이 불행을 당하는 법입니다"
그 후부터 왕은 말을 삼가게 되었다.
<석가보살의 용맹심>
옛날 바라나시에 한 왕이 있었는데 석가보살은 한 마리의 명마로써 왕궁에서 지냈다. 그런데 주변국 왕들이 바라나국을 탐내고 전쟁을 걸어왔다. 일곱 명의 왕들이 한꺼번에 군사들을 몰고 온 것이다.
왕은 장수들을 불러서 이 전쟁에 대한 대처방안을 상의 했다. 그중 한 용감한 기사가 석가보살의 화신인 명마를 데리고 전쟁에 나간다면 일곱 왕과 그들의 군사들을 무찌르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 용감한 기사는 그 보살명마를 타고 번개불의 속도로 달려가서 첫 번째 진영을 쳐부수고 왕을 생포해서 끌고 와서는 성안의 군대에게 넘겨 주었다. 그 기사와 보살명마는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반복해서 다섯 명의 왕들을 모두 생포해 왔다.
여섯 번째의 왕을 쳐부수었을 때 그 보살명마는 부상을 입게 되었다. 몸과 발에서는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내렸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보살명마를 괴롭혔다. 보살명마는 몸을 길게 늘이고 누워 헐떡거리면서 눈을 껌벅였다. 그러는 중에도 생각에 잠겼다.
'이 기사가 용감하기는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말을 데리고 나가서는 일곱 번째 나라의 군대를 쳐부수고 왕을 사로잡아 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한 일은 헛수고가 되고 저 용감한 기사마저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바라나국 왕도 적에게 항복하고 말 것이다. 일곱 번째 왕을 무찌를 수 있는 말은 나밖에 없다.'
보살명마는 부상한 나머지 천근만근으로 느껴지는 몸을 일으켰다. 그 용감한 기사를 태우고 일곱 번째 진영을 쳐부셨다. 사람들은 보살명마를 왕궁으로 데려왔다.
보살명마는 왕에게 말했다.
"대왕이시여! 일곱 명의 왕을 죽이지 말고 다시 전쟁을 걸어 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한 후 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공을 세운 저 용감한 기사도 잘 보상해 주십시오. 왕께서도 보시를 행하고 도덕을 지키십시오. 또 공정하고 평등하게 왕국을 다스려 주십시오."
이 말을 마치고 보살명마는 숨을 거두었다. 보살명마의 부탁대로 왕은 공정하고 평등하게 왕국을 잘 다스렸다. 모든 백성들이 행복해 했다. 그 왕은 목숨을 마칠 때에 자신의 업보에 따라 세상을 떠났다.
부처님은 이 이야기를 마치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아, 과거의 구도자들은 절망의 상태에 놓일 경우에도 용맹정진을 실천하였다. 나의 전생의 몸인 저 보살명마는 심한 부상을 입으면서도 체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대들은 생사를 여의기 위해서 출가했으면서도 어찌하여 용맹정진할 마음을 내지 않느냐?"
이어서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하신다. 그리고 부처님은 이야기의 끝을 맺기 위해서 수행시절의 전생과 현재를 관련지어 설명하셨다.
“그때 국왕은 지금의 아난이었다. 그때의 용감한 기사는 사리불이었고 보살명마는 바로 지금의 나였느니라.”
팔정도에서 용맹정진은 계정혜 삼학의 기본을 이룬다.
저 석가보살명마처럼 전쟁에 나가서 죽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각오와 그와 같은 용맹정진의 마음으로 궁극의 깨침을 위해서 달려들지 않으면 우리가 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도가 우리의 형편없는 기백을 구경하게 될 것이다. 마치 텔레비전을 보던 사람이 졸게 되면 사람이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이 사람의 얼굴을 보듯이 말이다.
<소의 경험담>
부처님이 제타바나에 계셨을 때였다. 수행이 부족한 한 비구가 함부로 남을 매도하는가 하면 욕설도 서슴치 않았다. 어진 비구들은 이 사실을 부처님께 사뢰었고 부처님은 대중들에게 그것이 사실인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는 그 비구를 호되게 꾸짖었다.
“잔혹한 말이란 동물들도 꺼리는 말이다. 나의 전생 수행시절에도 한 동물이 자기에게 험한 말을 퍼붓는 주인에게 천금이나 손실을 입힌 일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전생 이야기를 설했다.
옛날 석가보살이 수행할 시절에 어느 장자 집의 송아지로 태어났다. 주인은 그 송아지를 친자식처럼 잘 먹여주고 보살펴 주었다. 그 송아지는 자란 다음에 생각했다.
‘이 장자는 고생하며 나를 길러 주었다. 이 세상에서 나처럼 힘이 센 소는 없다. 내 힘을 보여 주어 이 장자의 은혜를 갚아야 하리라.’
어느 날, 소가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이시여, 돈 많고 욕심 많은 고을 유지에게 가서 ‘내 소는 백 대의 수레를 동시에 끌 수 있다.’고 말하고 천금의 내기를 거십시오.”
장자는 돈 많은 이에게 가서 자신이 가진 소는 100대의 수레를 동시에 끌 수 있다고 자랑했다. 돈 많은 이는 장자가 허풍을 떤다고 생각하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다. 장자가 계속 우기자 돈 많은 이는 내기를 하자고 했다. 장자의 소가 수레 백 대를 끌면 돈 많은 이가 장자에게 천금을 주어야 하고 끌지 못하면 장자가 돈 많은 이에게 천금을 주기로 한 것이다. 장자는 백 대의 수레를 일렬로 세워서 서로 연결시킨 후에 수레마다 돌을 가득 실었다. 그리고 맨 앞의 수레에 석가보살인 소를 매었다. 그리고 장자는 보살인 소를 채찍으로 두들기며 소리를 질렀다.
“가자. 이 허풍쟁이야. 끌다가 죽을지라도 너의 허풍에 책임을 져.”
석가보살인 소는 ‘이 사람은 허풍도 떨지 않은 나를 허풍쟁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며 꼼짝도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날의 시합에서 장자는 졌고 천금을 돈 많은 이에게 주어야 했다. 천금을 날려 버린 장자는 억울함과 속상함을 가누지 못해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소는 장자에게 다가가서 어찌하여 누워 있느냐고 물었다. 장자는 천금을 잃은 것이 속상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자 소가 장자에게 말했다.
“주인이시여, 내가 이 집에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무슨 물건이든 하나라도 부순 적이 있습니까? 혹은 마구 짓밟고 다닌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함부로 아무 곳에다 오줌이나 똥을 눈 적이 있습니까?”
장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답했다. 소는 장자에게 힐문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허풍쟁이라고 불렀습니까? 그것은 주인의 잘못입니다. 이제 2천금의 내기를 거십시오. 그러나 말을 조심하십시오. 함부로 허풍쟁이라고 부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장자는 소가 말하는 대로 돈 많은 이에게 가서 이번에는 2천금을 걸었다. 이번에는 소를 쓰다듬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가자, 슬기로운 자야. 끌어라, 현명한 자야.”
석가보살인 소는 백 대의 수레를 힘도 안 들이고 끌었고 장자는 2천 금을 받아서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장자는 석가보살인 소로 인해 엄청난 재산을 손에 넣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부처님은 남에게 즐거운 말을 하고 불쾌한 말을 하지 말라고 다시 한 번 당부했다. 그리고는
"그때의 장자는 지금의 아난이고 그때의 소는 지금의 나이다.“ 라고 말하면서 전생과 금생을 관련지었다.
우리가 부처님의 전생수행담을 듣고 직접적으로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나쁜 말을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본인이 없는 데서 남의 흉을 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더 나아가 앞에서나 뒤에서 남의 장점만을 드러내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우리의 불도 수행은 더욱 성숙해질 것이다.
불법을 입으로 선전하지 않고도 자신의 인격으로 불법의 위대함을 알리게 될 것이다.
<토끼의 소신공양>
부처님이 제타바나에 계실 때, 한 장자가 부처님과 스님네를 초청해서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맛을 골고루 갖춘 공양을 7일간이나 올렸다. 공양뿐만 아니라 500명 비구스님네의 생활용품도 보시하였다. 공양을 받은 마지막 날, 부처님은 그 장자의 공양공덕을 찬탄하고 비구들의 청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전생담을 설하셨다.
석가보살이 한때 삼림 속의 토끼로 태어났다. 그 토끼는 수달 . 들개 . 원숭이 등과 같이 살았다. 토끼는 그 친구들에게 계율과 포살(布薩)과 보시의 공덕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 어느 날, 토끼는 하늘을 바라보고 보름이 다가온 것을 알았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내일은 포살하는 날이다. 너희들 세 마리도 계를 받고 포살회에 참가하거라. 계를 굳게 지키고 보시를 행하면 좋은 과보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걸식하는 비구스님이 찾아오면 그대들의 음식을 꺼내어 공양 올리도록 하여라."
그 세 마리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고 각자의 거주지로 돌아갔다.
다음날 새벽, 수달은 먹이를 찾아 강가로 갔다. 어부가 모래 속에 숨겨 둔 물고기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이것의 주인이 있습니까?” 하고 세 번을 소리쳤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수달은 물고기를 자기가 사는 곳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식사 시간에 먹기 위해서 숲속에 감추어 두고 자신의 행위가 계에 어긋났는지를 반성한 다음 잠이 들었다.
들개도 먹이를 찾아서 농가의 마을로 내려갔다. 농부의 오두막에서 고깃덩어리와 우유를 찾아냈다. “이것의 주인이 있습니까?”하고 세 번 외쳐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들개는 먹을 것을 가지고 자기의 처소로 돌아왔다. 식사 시간에 먹기 위해서 먹을 것은 숲속에 감추어 두고 자신의 행동이 계에 어긋났는지를 반성한 후에 잠이 들었다.
원숭이는 망고 먹이로 열매를 주워 가지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식사 시간에 먹기 위해서 망고를 숲속에 감추어 둔 후 계에 대해 반성하고 잠이 들었다.
한편 석가보살의 화신인 토끼는 식사 때가 되면 풀을 뜯어먹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자기 처소에 누워서 다짐했다.
‘나에게 온 걸식승에게 풀을 대접할 수는 없다. 만일 걸식승이 온다면 내 몸을 주어야겠다.’
그때, 자재천신(自在天神)이 걸식 탁발승으로 변장하여 네 마리 짐승들의 보시정신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변장한 탁발승은 먼저 수달에게 가서 먹을 것을 부탁했다. 수달은 자신의 식사로 감추어 둔 물고기를 선뜻 내놓으면서 먹으라고 권했다. 자재천신인 탁발승은 다시 들개에게 가서 공양할 음식을 부탁했다. 들개도 선뜻 자신의 식사로 준비해 둔 고기와 우유를 내놓으려고 했다. 탁발승으로 변장한 자재천신은 토끼에게로 갔다. 토끼는 탁발승의 방문을 받고 기뻐했다.
"스님, 잘 오셨습니다. 오늘은 제가 지금까지 내놓은 일이 없던 음식을 보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님은 살생을 하지 않을 것이니 불이 지펴진 후에 제가 불속으로 뛰어들어 충분히 구워지면 고기를 드시고 출가인의 도를 실천해 주십시오."
탁발승으로 변장한 자재천신은 그 말을 듣고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만들었다. 그러자 석가보살인 토끼는 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불은 자재천신이 토끼의 보살정신을 시험해서 만든 것이므로 토끼는 털끝 하나도 태우지 않았다. 자재천신은 토끼의 희생적인 보시정신을 기념하기 위해서 달 속에다 토끼의 그림을 넣었다. 수달 . 들개 . 원숭이 . 토끼는 서로 의좋게 지내다가 각자의 업에 따라 전생(轉生)하였다.
이 법문을 듣고 7일 동안 스님네께 공양 올린 장자는 크게 기뻐하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은 “그때의 수달은 지금의 아난이요, 들개는 목련이요, 원숭이는 지금의 사리불이며 토끼는 지금의 나다.” 라고 말했다.
보시가 좋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공덕을 말하지 않고도 여러 가지 교리적인 이유가 있다. 현실의 집착과 미혹과 고통의 원인은 탐욕에 있다. 그 탐욕을 다스리는 길은 탐욕의 반대인 보시를 실천하는 길 밖에 없다.
또 불교의 근본은 정신적인 깨달음이든지, 물질적인 것이든지 무엇이든 베푸는 데 있다. 한 곳에 물이 고여서 썩지 않도록 계속 흐르게 하는 데 있다. 해탈의 최대 장애물인 탐심을 제거하는 이유로 보나, 베푸는 원칙을 실천하는 것으로 보나, 보시는 불도를 구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든 세상 사람의 믿음을 얻으려면 저 토끼처럼 남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받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무량겁을 거치면서 자신의 몸을 던져 보시하는 수행을 지침 없이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곳곳마다 있는 기회>-1
<본생경>의 두 편의 이야기 중에서 한 전생이야기는 변덕을 부리는 사람에 관한 것이고, 다른 이야기는 모든 기회가 공평하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사리불존자가 한 비구를 지도하게 되었다. 그 비구는 평소에 온순하고 말이 없으며 사리불존자의 지시를 잘 따랐다. 사리불존자는 비구를 데리고 멀리 탁발을 떠났다. 그런데 탁발하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비구는 갑자기 사리불존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비구는 사리불존자의 모든 말에 대해서 반발했다. 다시 부처님이 계신 수도원으로 돌아온 다음에 그 비구의 태도는 일변해서 예전처럼 온순하게 되었다. 사리불존자는 그 비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순간에는 아주 온순하고 다음 순간에는 고집스레 말을 듣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알 수가 없어 사리불존자는 그 사실을 부처님께 사뢰었다.
부처님은 그 비구의 전생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옛날에 석가보살은 한 부호로 태어났다. 이 부호에게는 돈이 많은 장자 친구가 있었다. 그 장자가 나이가 많은 데 비해 그의 아내는 젊었다. 연로한 장자와 젊은 부인 사이에는 한 아들이 있었다. 장자는 자신이 죽은 다음을 걱정했다. 재산을 그대로 두고 죽으면 젊은 부인이 그 재산을 다 차지한 다음 다른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자는 한 하인을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의 재산문서와 보배들을 다 파묻고 하인에게 말했다.
“내가 죽은 다음에 내아들이 크면 이 재산을 그에게 알려 주기 바란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장자는 죽었다. 아들이 성장한 다음,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했다.
“너의 아버지가 하인과 함께 집안의 모든 재산을 땅속 어디엔가 묻어버렸으니 하인과 같이 가서 그 재산을 찾아 다시 집안을 일으키도록 해라.”
아들은 하인에게 재산에 관해서 물었다. 하인은 재산이 그대로 묻혀 있다고 말하고 땅을 팔 연장을들고 재산이 묻힌 숲으로 아들을 안내했다. 그 하인은 재산이 있는 곳에 이르자마자 갑자기 거만한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주인집 아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멍청한 녀석아, 이런 곳에 무슨 재산이 있겠느냐?”
아들은 하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하인은 다시 전과 같이 온순해졌다. 그리고는 다시 재산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고 말하며 그 자리에 가기만 하면 재산을 파낼 생각은 아니하고 욕설하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 그런 일이 열 번쯤 있은 후, 아들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석가보살 부호를 찾아가서 사정을 아뢰었다.
부호는 그 아들에게 하인이 욕하는 것에 관심 갖지 말고 욕하면서 서 있는 그 자리를 파면 그곳에 재산이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아들은 보살부호가 시키는 대로 해서 재산을 찾고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 그리고 보살 부호의 가르침을 따라 덕행을 쌓았다.
이 이야기를 마친 후, 부처님은 “그때의 장자의 아들은 사리불이요, 하인은 지금의 변덕스러운 비구이며 부호는 바로 나이니라.” 하고 전생과 금생을 연결 시켰다.
이 전생이야기는 우리의 변덕을 극단적으로 과장해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는 좋은 사람으로 행동하던 시간과 나쁜 사람으로 행동하던 시간 사이의 간격은 좁지만 이 시간을 좀 길게 확대하면 우리의 변덕과 큰 차이가 없다.
-2-
모든 일에 있어서 기회는 공평하다는 교훈을 주는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를 한 편 더 보기로 하자.
석가보살이 500대의 수레를 가진 상인으로 태어났다. 지방마다 남는 물건과 부족한 물건을 조사해서 부족한 물건들을 수레로 이동시키면서 돈을 벌었다. 그런데 보살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상인이 있었다. 보살 상인은 고가품의 물건을 500대분을 사들여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고 하자 그 소문을 들은 라이벌 상인도 500대분의 똑같은 물건을 사서 같은 날 떠나려고 하였다. 그래서 보살 상인은 라이벌 상인을 만났다.
“만약에 500대와 500대가 합한 1,000대의 수레가 한꺼번에 길을 지나간다면 길은 견디지 못할 것이. 또 식수, 연료, 소를 위한 풀도 얻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시간 간격을 두고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먼저 갈것인지, 뒤에 갈 것이지 선택하시오.”
라이벌 상인은 생각했다.
‘내가 먼저 간다면 수레바퀴의 자국이 없는 길을 갈 것이며 소는 아무도 먹지 않은 풀을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흙탕물을 일으키기 전이므로 식수도 깨끗할 것이다. 또 먼저 도착했으므로 물건을 비싼값으로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계산하고 먼저 가겠다고 말했다.
라이벌 상인은 보살 상인이 떠나기로 한 날짜보다 먼저 떠나겠다고 말하자 보살 상인은 여행계획을 수정해야 했지만 섭섭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이점을 생각했다.
‘먼저 간 수레들은 울퉁불퉁한 길을 평평하게 만들 것이다. 앞에 간 소들은 뻣뻣한 풀을 먹겠지만 뒤에 가는 소들은 새순을 먹게 될 것이다. 앞에 간 사람들은 물을 얻기 위해 땅을 파야 되겠지만 뒤에 가는 사람들은 이미 파놓은 우물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앞에 간 이들은 값을 결정하는 데 신경을 써야 되지만 뒤에 가면 이미 결정한 값으로 물건을 넘기기만 하면 될 것이다.’
보살 상인이 예측한 대로 먼저 간 상인은 여행 중에 고생만 하고 중간에 산적을 만나서 모든 물건을 뺏기게 되었다. 반면에 늦게 출발한 보살 상인은 앞의 실패를 경험삼아 더욱 꼼꼼하게 준비해서 여행을 안전하게 할 수 있었다.
이 부처님의 전생 수행이야기는 성공의 기회가 한 곳에만 몰려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 다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
이 이야기에서는 석가보살이 상대에게 양보하고 수레여행을 뒤에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석가보살이 앞서 갔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로 성공했을 것이다. 모든 시기에 똑같은 비율의 기회가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포착하고 살리느냐에 성공의 관건이 달려있지 시기 자체에 좋고 나쁨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공사상이나 성구사상을 말하지 않고 <법화경>의 일체 사사물물(事事物物)에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 그대로 나타나있다는 사상을 전해준다. 모든 시기에 성공의 기회가 균등하다는 생각은 모든 사람, 모든 장소, 모든 선택의 기회가 균등하다는 말이 된다.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이라는 말의 뜻과도 통한다.
출처 - 재가불자도량 -진리의 여행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