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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농어촌목회전문화 원문보기 글쓴이: 우순태
김상준(金相濬) 목사의 생애와 신학
최규명 목사(샤론교회, 성결교회 역사자료연구소장)
1. 김상준의 생애
김상준은 1881년 11월 11일, 평남 용강군 오신면 구룡리 296번지(의성 김씨의 집성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김중현 씨와 모친은 진주 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살던 집은 독립투사 김붕준 씨의 뒷집이었다. 아버지는 유교적 전통에 충실한 한학자(漢學者)였으며, 어린 김상준은 6세에 부모님의 인도로 한학을 공부하면서 남다른 영특함을 보여 주었다. 김상준은 한문을 깨우치는 일에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하였다. 그는 영흥 의숙(義塾)에서 공부하였다. 그의 성격은 곧고 강직하였으며, 양보심과 동정심도 많았다. 동정심이 많은 그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잘 베풀었고, 후일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를 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를 거절하리 만큼 자립정신이 투철하였다.
김상준은 안동(구룡리 안동들)에 소재한 10,000 여평 가량 되는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 이를 복음전도 활동에 모두 사용하였다. 민족적인 교회 설립, 영혼을 사랑하는 복음전도, 지칠 줄 모르는 학문연구, 틈만 나면 돌아보는 역사탐구 중에서도 그는 매일 7-8시간 동안 조용히 성경을 묵상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등, 영적인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897년에 그는 연안 이씨의 이성녀와 결혼하여 7 남매를 두었다.
김상준은 1901년 평양 시내에 부모의 심부름 갔다가, 평양에서 전도하는 자들의 전도를 받고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예수를 영접하였다. 당시에는 일본의 개화 바람이 평양에 거세게 몰아치고 있을 때였다. 예수를 영접하여 기쁨이 충만한 그에게 부모의 핍박은 날로 더 심하여갔다. 그러나 김상준은 이런 어려움을 잘 이겨 나갔다. 그의 부친은 유교에 심취하였으므로 아들이 믿는 종교를 박해하였다. 더욱이 김상준은 외아들로 자라고 있었다. 부친은 가혹한 행위를 해서라도 아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였다. 부친은 기독교를 고유한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파괴하고 우리 민족의 유교적인 전통을 해치는 종교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를 영접한 김상준은 상투를 자르고 조상제사를 폐하였다. 완강한 부친과 새로운 힘으로 충만한 김상준 사이에는 갈등의 골만 더욱 깊어갔다. 부친은 집안 일을 도와주던 일꾼들의 힘을 빌어 아들에게 가혹한 행위를 하기에 이르렀다. 일명 멍석말이를 통하여 아들의 항복을 받아내려 하였던 것이다. 이런 슬프고 비극적인 여건 중에서도 김상준은 기도하면서 시련을 견디었고, 멍석말이에 동원되었던 일꾼들에 의하여 간신히 몸이 풀려나게 되었다. 위기에서 탈출한 김상준은 또 다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다.
그 당시 의성 김씨의 집성 마을인 구룡리에서는 외국유학이 빈번하였다. 많은 젊은이들이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미국, 일본, 중국 등으로 떠났다. 김상준도 부모의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에 가기로 결심하였다. 1902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기독교 복음에 심취하여 자신을 이끌어 줄 사람을 찾으려고 일본 전역을 돌아 다녔다. 특히 동경을 중심으로 배회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다. 그런 와중에서 김상준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인물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는 바로 박스톤의 제자이면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일본 교계의 훌륭한 인물 나까다 목사였다. 나까다 목사가 미국에서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고 이를 일본에 전하려고 돌아온 바로 그 때였다. 나까다를 만난 후, 김상준의 마음은 안정을 되찾았고, 나까다를 열심히 따라 다니면서 실천신학적인 분야에서 열심히 실습하며 배웠다. 그리고 그는 나까다의 일을 도왔으며, 나까다는 김상준을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이 무렵 나까다는 동경성서학원을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하였는데, 김상준이 성서학원에 입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나까다를 만나면서, 사중복음(四重福音)과 성령충만, 실천적인 복음전도, 홀로 서기를 통한 자립정신, 성결한 생활로 사랑하는 마음이 김상준의 마음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1903년의 봄에 김상준은 나까다의 안내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였고, 그가 공부하고 있을 때 한국인 정빈이 1905년 7월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일본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김상준은 박스톤, 사사오, 카우만, 길보른, 레티 카우만, 나까다 등 여러 교수들로부터 말씀중심적인 삶과 영혼 구원을 위한 열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김상준은 나까다 목사가 인도하는 전도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기도 하였으며, 나까다 목사를 도와 함께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김상준은 고향의 부모와 조국을 걱정하였고, 특히 일본의 침략으로 주권을 빼앗긴 조국을 위하여 언제든지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불타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 단체가 많이 결성되었는데, 1905년 겨울에는 관서지방의 유학생을 중심으로 "태극학회"라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 모임은 일본어와 학문 연구를 중심으로 한 모임이었지만, 사실은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자는 애국청년 단체였다. 김상준은 이 단체에 참여하여 학회의 발전을 위하여 헌금을 하면서, 조국 독립운동의 싹을 틔우기 시작하였다. 일본 유학생활이 정착되어 갈 무렵, 김상준은 고향으로 소식을 보내 일본 유학을 권하였으며, 이리하여 1906년에 김혁준, 강태온이 일본으로 건너와 동경 성서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해 11월에 일본에서는 동양선교회가 조직되었다. 김상준과 정빈이 졸업할 해(1907년)에는 김상준과 정빈 외에도 이장하, 김두혁, 김혁준, 강태온, 안동원 등도 입학하여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1907년 3월에 김상준은 정빈과 함께 고향 평양으로 돌아왔다. 고향을 떠날 때 부모로부터 받은 핍박을 모두 잊은 듯이, 그는 부모에게 귀국인사를 드리고 재산의 일부를 정리하여 물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상준의 끈질긴 요청에 못 이겨, 부친은 자식과 부인을 위하여 재산의 일부를 정리하여 아들에게 주었지만, 그 돈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새로운 용기를 얻은 김상준은 1907년 5월에 서울의 종로에 집을 얻어 본격적인 전도를 시작하였다.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김상준은 부친을 졸랐고, 부친은 결국 구룡리의 1만 여평의 모든 땅을 정리하고 고향을 떠났다. 김상준은 일본의 카우만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였고, 카우만은 복음 전도관을 구입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양자의 협력 아래 본격적인 한국전도가 시작되었다.
1907년 5월 30일, 이 땅에 사중복음의 소식이 번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힘이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무리들이 김상준의 설교를 들으려 무교동 전도관을 찾았고, 김상준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하여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성결교회의 시작이다. 김상준은 최초의 복음 전도관을 설립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으나, 자신보다 나이가 3세가 많은 정빈에게 선임자의 자리를 양보하였다.
이들은 직접적인 선교 방식을 사용하였다. 즉 이들은 무교동의 복음 전도관에서 북을 들고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기만 하오", "예수를 믿기만 하오" 외치면서 거리를 돌았다. 이들의 적극적인 전도가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적인 전통이 깊은 우리 국민들에게 거부감을 갖기에도 충분하였다. 급기야 이들의 복음전도가 신문에 보도되어 비판받기에 이르렀다. 이런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이들은 북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몰려온 사람들에게 김상준은 비유를 통해 종교적이면서 애국적인 내용의 설교를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복음 전도관은 은혜가 넘치는 뜨거운 곳이 되었다. 왜 이렇게 김상준의 설교가 인기가 있었을까? 그것은 당시 서울에는 박력 있게 설교하는 한국인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상준의 설교는 자연히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던 이들에게 복음전도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1908년 겨울, 서울 종로 염곡에서는 성령의 역사(役事)가 크게 일어났던 것이다. 경성의 교역자들과 선교사들이 모여 기도를 하던 중,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곳에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나, 무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찬송을 부르고 손뼉을 치며 춤을 추었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장로교회 부흥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일부 장로교회의 성도들이 성령의 역사로 성결을 체험하여 후일에 목사가 되곤 하였던 것이다.
김상준은 일본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교재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중복음"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시대가 너무 악해 감을 본 그는 종말의 도래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는 신자들을 각성시키고 회개케 하여 사회를 개혁하고자 함에서였다. 그는 처음에는 순수한 복음을 전하다가, 한국의 사회가 타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교리적인 설교에서 종말론적인 설교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신자들에게 시대의 분별력을 주기 위해 김상준은 다니엘서와 계시록을 가르치고자 하였으나, 당시 가르칠 마땅할 교재가 없음을 발견한 그는 일본에서 배운 강의 내용과 세계적인 학자들의 글을 토대로 하여 "묵시록 강해집"을 집필하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김상준은 교파와 지역을 초월하여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특히 신의주 근방에서 선교하였고, 새문안 교회에서도 종종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는 부흥설교였고, 민족과 개인 그리고 국가와 인류사랑, 회개를 촉구하는 호령이 세례 요한과도 같았다 한다. 그의 설교는 감화력이 강하였고, 행동을 촉구하기보다는 마음을 뜨겁게 하는 방법을 썼다. 개성, 평양, 서울 등 전국의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김상준은 영혼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유롭게 전도하는 활동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그의 뜨거운 구령열은 수많은 결실을 맺게 되었고, 한국 기독교계를 이끄는 교역자와 지도자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김상준은 성결교회뿐만 아니라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오가며 집회를 인도하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자비량 부흥사로 열심을 다하였다.
온갖 비방 속에서도 김상준은 시대를 분별할 능력 있는 신자들을 양육하고 교육하기 위하여 1911년 3월에 복음전도관 안에서 성서학원을 시작하였다. 한국에 와서 선교를 시작한 지 불과 4년만의 일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성결교회가 신학교육을 통하여 신자를 육성하고 지도자를 체계적으로 교육하려는 의도의 발로였다. 1912년 3월에 서대문 밖의 아현동(애오개) 마루턱 농장에 성서학원이 신축되었고, 김상준은 무교동 교회를 목회하며 신학교 교수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1914년 4월 22일에 김상준은 드디어 한국 성결교회의 제1호 목사가 된다. 목사가 된 그는 무교동 시대를 마감하고 아현동으로 자리를 옮겨 교회와 신학교를 돌보게 된다. 신학교의 교수로 있으면서 갈등도 있었지만, 그는 사랑으로 갈등을 극복하였으며, 1915년에 아현교회를 사임하고 고향 인근의 개성교회를 개척하였다. 그 동안 그는 학생들의 교재를 위해 집필하던 "묵시록 강해집"을 출간하였다.
1918년 9월에 김상준은 경상도 밀양에서 복음전도 사역을 도왔다. 이 지역에 교회가 개척되기 전 20 여일 동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전도한 결과로 많은 결신자들이 생겨났고, 그해 10월에 그곳에 성결교회가 세워졌다. 그곳에서 사역을 마치고 다시 개성으로 돌아온 김상준은 동생인 독립투사 김붕준의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함께 일을 하였다. 당시 김붕준은 지역 농촌경제 발전을 위하여 수로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고, 소득증대를 위한 농촌계몽 운동을 하였다. 이들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진남포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김상준과 김붕준은 1919년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김상준은 평양 형무소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0년 3월 1일에 길보른 선교사의 도움으로 그는 형무소를 나왔다. 형무소에 있는 동안 그는 사중복음의 신학적 정리를 위해서 집필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1921년 6월에 성결교회의 최초의 체계적인 교리서 "사중교리"가 출간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해 이명직 목사로부터 활천(活泉) 발행 소식을 듣고 축하의 글을 기고하였다.
그 밖에도 김상준은 감리교의 최병헌과 함께 문서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 당시 유명한 인쇄소인 기독교 창문사에서 주필을 맡아 일한 것은 성결교회와 감리교회가 형제적인 입장에서 함께 손을 잡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발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상준이 교단의 대표자가 아닌 개인의 입장으로 참여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창문사에서 일하면서, 그는 장로교회의 신문인 기독신보사와도 왕래가 빈번하였는데, 1925년 9월9일에 기독신보에 "신앙의 사죄"라는 설교를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김상준은 활천의 단골 필자가 되었고, 그의 글은 교단홍보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타 교단에서도 활천을 구독하는 열풍이 일어나 초교파적으로 사랑을 받았다. 그의 집필활동은 1933년까지 계속되었다.
김상준은 성서학원의 사감으로 학생들을 돌보는 일에도 학생들을 섬기는 자세로 먼저 본을 보이는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학교 전체를 총괄하는 신학교 원감의 일을 보면서, 그는 무교동 교회를 사임하고 1915년에 아현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 전국 순회 집회를 멈추지 않고 질주하는 사이, 김상준의 몸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자신의 몸이 쇠약함도 잊은 채, 그는 1933년에 부산 수정동 성결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으며, 1933년 6월 12일의 집회 후에 쓰러져 고향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누운 지 4개월이 지난 1933년 10월 12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구룡리 동창의 선영(先塋)에 누운 김상준은 지금 거기서 부활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2. 김상준의 신학
1914년에 목사가 된 김상준은 성서학원에서 교수로 가르치면서 무교동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는데, "김상준 목사의 영력 있고, 성령 충만한 설교와 그의 명석한 두뇌에서 나오는 성경진리의 명쾌한 가르침, 은혜를 체험한 실제적인 간증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은 그의 생동감 있는 메시지에 감동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이명직 목사는 말한다. 1907년에 복음전도관(교회)을 시작하면서 그의 살아있는 메시지가 장안을 소란하게 만들었다. 한편 그와 성결교회를 비판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내려가고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게 되고, 그들을 위한 집회 모임이 계속되었다. 김상준은 거듭남의 체험을 이루는 회개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죄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성도들을 향해서 성결성(聖潔性)의 유지를 강조하였다. 이런 성결성의 유지는 다시 오실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준비라고 그는 설교하였다. 김상준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기회는 단 한번이라로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규모 있게, 계획 속에서 살면서 연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성서학원에서 김상준은 "사중교리"에 심취하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전하려고 하였다. 자신에게 사중교리를 가르쳐 준 나까다의 "사중교리"보다 먼저 "사중교리" 책을 출판하여 성서학원의 교재로 사용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만약 여러분이 "성결교회는 어떤 교회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답변을 하겠는가? "성결교회도 신학이 있는가?"라고 한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나는 김상준이 1921년에 발행한 "사중교리"를 선물하고 싶다. 이 책은 김상준이 평양 형무소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일본에서 자신을 가르친 카우만, 나까다, 박스톤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자신의 입장에서 구상하고 정리하여 내놓은 성결교회의 조직신학서이다. 이 책을 통하여 김상준은 정신적 혼미 중에 방황하는 신자들에게 진리의 방향성을 제시하려고 하였으며, 아울러 신자들의 영혼을 지도할 목회자들에게 신학적 체계를 제공하려고 하였다. 성결교회가 한국 땅에 개척되어 자리를 잡은 지 15년만의 일이었다. "사중교리"는 비단 성결교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도 귀중한 신학적 유산이다.
"사중교리"의 역사적 기원은 영국의 요한 웨슬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성결운동은 감리교회를 탄생시켰고, 영국의 부패한 사회를 정화하고 잠든 영혼을 깨우는 역할을 하였다. 1900년대를 전후한 미국에서 일어난 오순절 성결운동은 사중복음 혹은 오중복음 운동을 통하여 미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런 운동에 참여하여 헌신을 다짐한 사람들이 동양 선교회(OMS)를 조직하였고, 이를 통하여 사중복음은 동양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나까다는 미국 유학 중에 사중복음을 접하였고, 그의 요청에 따라 카우만 선교사 일행은 일본에 건너와 사중복음을 가르치게 되었다. 김상준은 그들의 가르침 속에서 사중교리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이를 조국에 전하는 최초의 전령이 되려고 하였다. 김상준의 사중교리는 1925년에 발행된 최초의 헌법에 교리로 정착하여, 지금까지 한국 성결교회 신학전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김상준은 신자들에게 종말론적인 생활 자세를 강조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종말론적 역사관의 중심을 이루는 "계시록 강해집"과 "다니엘서"를 집필하였다. 감리교 신학대학의 교수와 학장을 지냈던 고(故) 김용옥 교수는 김상준의 한국교회 최초의 계시록 강해집을 성결교회의 목사가 출판하였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 성결교회에는 학자가 없던 줄로 알았던 그 시대에 김상준의 묵시록 강해는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학생들을 위하여 책을 만들었지만, 학생들에게는 가르치지 못하고 일반 목회자들을 위해 한국교회에 내놓은 것이다. 감리교의 거두인 최병헌은 "김상준은 탁월한 성서적 식견으로 성결성을 겸비한 교역자라고" 칭찬하면서, 그가 "여러 학자들의 글을 참고하여 저술하였다"고 하였다. 특히 그는 묵시록 강해가 "명확한 논증과 대조한 조리가 자세하고 명확하여, 말하자면 배우는 이의 나침반이요, 나루터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의 사랑스러운 안내자"라고 하였다.
서문에서 김상준은 이 강해집은 박해받는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라고 했다. 또한 신자들이 일년에 한번씩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하였고, 계시록을 읽지 아니하고 회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비판의 소리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는 비판을 받아들여 더 좋은 책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훌륭한 학자였다. 이 책에서 계시록을 해석할 때, 그는 미래적 해석법을 따랐으며, 공중 재림설을 확고히 믿었으며, 천년왕국설 중에서도 전(前)천년설의 입장에서 서 있었다.
3. 나가는 글
김상준은 한 시대를 살다간 평범한 인생이었지만, 그가 가고 난 지금도 우리는 그의 부활을 느끼게 된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그의 사상과 그가 남겨놓은 글들은 성결교회와 한국교회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 있다. 그는 성결교회의 개척자로, 조국독립을 외치며 투항한 독립투사로, 교단의 신학적 방향을 제시하고 혼란한 한국교회를 바르게 인도하는 교계의 지도자로, 경건한 삶을 위해 자신을 바친 성숙한 성결인으로, 쉴틈 없이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려는 복음전도자로 인생을 분주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그를 목회자와 전도자, 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그가 남긴 다양한 흔적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성결교회를 창설한 자요, 교단을 지키며 최후까지 복음을 전하다 쓰러진 순교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김상준 목사가 서울신대(성서학원)의 교수로 재직한 사실을 자랑으로 여기며, 욕심을 버리고 자기를 희생하는 신학자가 아쉬운 이 때, 그의 생애와 사상을 대하면서 머리 숙여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고백한다.
참고 문헌
1. 기성역사편찬위원회,「성결교회사」
2. 김상준,「다니엘서 강의」, 1932.
3. 김상준,「4중교리」, 1921.
4, 김상준,「묵시록강의」, 1918.
5. 이명직,「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약사」, 1929.
6. 이응호,「한국성결교회사1」, 1992.
7.「활천」, 1922-1933.
8.「태극학보」, 1906.
9. The Korea Mission Field, v.9-10.
10. 김상준 후손 대화녹취,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