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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는 발칸 반도에 있는 본토와 전체 영토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는 200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토는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중부 그리스, 에피루스(Epirus), 테살리아(Thessaly), 마케도니아(Macedonia), 트라키아(Thrace)로 구분되며, 섬 그룹은 스포라데스(Sporades), 북동부 에게 해, 사론(Saronic) 만(灣), 키클라데스(Cyclades), 도데카네소스(Dodecanese) 그리고 에게 해에는 없지만 이오니안(Ionian)으로 구분된다. 한편 에비아(Evia), 크레타(Crete)와 같은 섬들은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다. 면적은 13만 1900km2이며, 그리스 영토 내의 바다가 차지하는 면적은 총국토 면적보다 약 3배가 큰 40만km2이다. 또한 산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특히 북부 지방은 검은 소나무 삼림이 대부분이고 중부와 남부 지방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삼림인 관목 밀생 지대이다. 북쪽 지역에서 갈색곰과 노루를 볼 수 있고, 남쪽 지역에서는 재규어, 야생 염소, 호저 등이 발견된다. 저지는 전체 면적의 4분의 1에 못 미치며 그 대부분이 에게 해에 면해 있는 해안 평야이다. 기후는 지역에 따라 다른데 대개 6월의 연평균 기온은 23~33℃이며 1월에는 6~13℃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남부 그리스는 북쪽보다 4℃ 정도 더 따뜻하다. II. 역사 1. 크레타 문명(미노아 문명) 에게 문명이란 에게 해 지역에서 B.C. 7000~B.C. 3000년과 B.C. 3000~B.C. 100년에 각기 꽃핀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문명을 뜻한다. 에게 문명이 꽃핀 지역은 크레타 섬, 키클라데스 제도(諸島)를 비롯한 여러 섬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중부 및 테살리아를 포함하는 그리스 본토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 지역에서 처음으로 꽃핀 주요 문명은 크레타 섬에서 발달했다. 그후 그리스 본토 사람들은 크레타 문명(Minoan Civilization)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명을 이룩하였다. 크레타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고학자들은 크레타 문명을 초기(B.C. 3000~B.C. 2100), 중기(B.C. 2100~B.C. 1500), 말기(B.C. 1500~B.C. 1100)의 3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초기에는 신석기 시대의 여러 특징들이 지속되어 오다가 B.C. 2500년께 신화적인 인물인 미노스(Minos) 왕의 출현 이후 크레타 문명이라 부르는 새롭고 특징적인 문명을 태동시켰다. 중기에는 금속 세공과 같은 기술을 일구어 내면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그러나 말기에는 도리스(Dorian)족의 침략과 자연 재앙(화산 폭발, 지진, 해일)으로 섬들이 파괴되었으며, 미케네인들과의 과다 경쟁으로 상업적으로나 군사적으로도 쇠퇴기를 걷게 되었다. 크레타 문명은 지중해를 통해 상품을 수출하는 등 해상에서 지배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중기에 나타난 다채색의 카마레스(Kamares) 도자기는 이집트인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B.C. 1700년께 크노소스(Knossos), 파에스토스(Phaestos), 말리아(Malia) 등지에 있던 궁전들이 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크레타인들은 이전보다 더욱 아름답게 재건축하였다. 그것은 복합층 형태를 가진 호화로운 귀족 아파트 접견실, 창고, 서가, 그리고 발달된 하수 시설을 갖춘 거의 미궁과 같은 구조였다. 크레타인은 또한 문화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처음 만든 문자는 이집트의 상형 문자를 닮았다. 2. 미케네 문명 크레타 문명이 쇠퇴하면서 그리스 본토에는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이 출현하였다. 이 문명은 B.C. 1500~B.C. 1200년 사이에 절정에 이르렀고, 이 문명의 이름은 미케네라는 고대 도시 성립 이후 출현하게 되었다. 중앙 집권적 권위 아래서 비교적 평화를 유지해 왔으며, 미케네 문명에서 가장 인상적인 유물은 아테네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금 보석들과 장신구들이다. 미케네인은 후기에는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한편 미케네의 도시 국가들은 트로이(Troy)를 격파하고 흑해까지 그들의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미케네 문명은 B.C. 12세기에 도리스족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고 말았다. 3. 기하학 시대 기하학 시대(Geometric Age)는 B.C. 1200~B.C. 800년에 해당한다. 도리스족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을 무너뜨리고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갔으며 나중에는 크레타와 소아시아(Asia Minor)의 남서부 해변까지 장악하였다. 또한 이 때에 테살리아인(Thessalian)으로 불리는 인도 유럽 민족의 하나가 지금의 테살리아에 정착하였다. 도리스족은 영화를 누렸지만 그리스는 약 400년 동안 암흑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고전 시대 그리스인들은 미케네 문명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뒤부터 B.C. 8세기까지 흔히 암흑 시대라고 부르던 수백 년 동안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도리스족은 철과 기하학적인 모양의 도자기를 전해 주었으며 다산의 여신 대신에 그러나 B.C. 800년께 미케네 시대 형태의 도시 국가들이 재건되었고, 전제 정치 대신 민주주의적인 정부가 부유한 귀족들에 의해 영도되었 다. 이 때 도리스족과 적대 관계에 있던 이오니아족(Ionian)이 세운 가장 유명한 도시로는 아테네가 있었다. 4. 고풍의 시대 고풍의 시대(Archaic Age)는 B.C. 800~B.C. 480년에 해당한다. 이 때는 지방의 농업과 가축 농업이 활기를 띠었고, 그리스의 새로운 식민지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의 시실리, 남부 프랑스와 남부 스페인에 건설되었다. 한편 그리스 알파벳 발명과 호머의 시, 신전의 설립 등은 여러 도시 국가 주민들에게 그리스인으로서의 공동체성을 처음으로 심어 주게 되었다. 도시 국가는 높은 지대에 요새화된 아크로폴리스(Acropolis)로 건설되었으며 이 곳에는 신전, 보물이 보관되었고, 외부 민족의 침입 때는 피난처로도 제공되었다. 성채 밖에는 아고라(Agora:시장)가 있었으며 그 뒤쪽은 거주 지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도시 국가들은 자유로운 자치권이 있는 국가들이었지만 이로 인해 말다툼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도시 국가들은 전제 군주의 지배를 폐지하고 집정관이 이끄는 민주적인 형태의 정부를 가졌다. 5. 아테네와 살론 아테네 및 그 주변 지역인 아티카의 광대한 면적과 유리한 지형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과는 남다른 것이었다. 아테네는 자체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아크로폴리스도 갖고 있었다. 이런 자연적 이점들 덕분에 아테네는 일찍부터 중앙 집권 정체(政體)를 세울 수 있었다. 아티카는 천연의 방어선을 이루는 4개의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아티카의 긴 해안선은 에게 해로 튀어 나와 있었다. 그러나 배를 만들려면 부족한 목재를 대량으로 수입해야 했으며, 이것은 아테네가 제국주의적 사고 방식을 갖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인구가 크게 증가하자 아테네는 경작지를 얻기 위해 제국주의적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한편 B.C. 594년 집정관에 임명된 살론(Salon)이 지향한 사회는 여전히 상류층의 단결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계급 사회였지만 그는 좀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살론은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으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특권의 세습을 폐지하였고, 부에 근거해서 네 가지 계급으로 정치 권력을 개편하였다. 즉 첫번째와 두 번째 계급만이 지배자(관리인)가 될 자격이 있고, 네 가지 계급 모두 행정 장관을 선출할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그의 개혁은 민주주의의 선구적인 것이었다. 6. 스파르타 펠로폰네소스에는 여러 도시 국가가 스파르타(Sparta)라는 형태 안에서 존재하였다. 이것은 다섯 개 마을로 이루어진 그룹이었으며 전제 정치가 남아 있는 몇몇 도시 국가들 가운데 하나인 스파르타는 두 명의 왕이 통치하였다. 그들은 도리스족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B.C. 9세기의 입법가 뤼쿠르고스(Lycurgus)에 의해 정해진 엄격한 군사적 규정에 따라 운영되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은 검사를 받아야 했으며, 만일 허약하다고 판명되면 산 꼭대기에 갖다 버렸다. 7세의 소년들도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으며 소녀들은 군사 훈련에서는 제외되었지만 튼튼한 아들을 낳기 위해 건강을 유지하도록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7. 페르시안 전쟁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대결은 B.C. 500년께 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에서 일어난 이오니아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이 사건 이후 페르시아는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에 적대감을 갖고 보복을 결심했다. B.C. 519년 점차 세력을 팽창하던 페르시아 제국의 왕좌에 등극한 다리우스(Darius) 1세는 아테네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스파르타에게 뒤에서 아테네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 역시 그리스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거절하였다. 페르시아 군대가 B.C. 490년 마라톤(Marathon)에 상륙하자 1만여 명에 불과한 아테네 병사들은 뛰어난 지략으로 페르시아 사수들과 기병대를 격파하였다. 페르시아가 64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아테네군의 사상자는 192명에 불과했다. 마라톤 전투는 당장 신화적인 사건이 되었고, 그 당시의 모든 예술가들은 이 전투에 찬사를 바쳤다. 한편 다리우스 1세가 계획을 달성하기 전에 죽자 왕위는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에게 넘어갔다. B.C.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전 지역에서 장정들을 모아 육군과 해군을 조직하여 그리스를 침입하였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는 이 페르시아 제국의 병사 수를 거의 500만 명으로 추산하였다. 초기의 전세는 그리스 쪽에 불리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지원과 숙련된 기동 작전을 펼쳐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함에 따라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1년 후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Pausanias) 장군 밑에 있던 그리스인들은 플라테아(Plataea)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전멸시켰고,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이오니아인들의 도시 국가들도 해방시켜 주었다. 8. 고전 시대(B. C. 480~B. C. 338) 페르시안 전쟁을 거친 후 여러 도시 국가들이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의 목적은 페르시아에 점령되어 있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구출하고, 또 다른 페르시아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대규모의 해군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한편 페리클레스(Pericles:B.C. 461~B.C. 429)의 영도 아래 아테네인들은 문화, 예술, 과학의 황금 시기를 맞이하였다. 그것은 대개 소아시아에 있는 이오니안 도시들 안에서 싹텄으며 해외 무역과 함께 호화로운 물결을 타게 되었다. 아테네인들은 영토를 더욱 팽창하기 위해 서쪽을 관망하기 시작하였고 본토에 있는 도시 국가들에 대항하려 하였다. 아테네는 또한 스파르타에 의해 주도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속해 있었던 무역 지대를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9.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아테네가 본국 도시인 코린트(Corinth)와 케르키라(Corcyra)의 논쟁에서 케르키라를 지지하자 코린트는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발발한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B.C. 431~B.C. 421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전쟁은 본래 코린트와 아테네의 싸움이었고, 스파르타도 이따금 개입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아테네가 유리했지만 아테네는 육지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아티카(Attica)를 넘겨 주고 해군력으로 펠로폰네소스를 봉쇄하였다. 이로 인해 쌍방은 분명한 활로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불안정한 정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아테네에게 포위를 당했던 스파르타는 B.C. 413년에 아테네 함대와 보병을 격파하면서 그 포위망을 뚫었다. 아테네인들의 군대와 돈과 배들은 점점 고갈되어 갔고, 서서히 굶주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시실리(시칠리아)와 그리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주시하고 있던 페르시아 제국은 스파르타에 물자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제국에게 소아시아의 이오니안 도시 국가들을 반환해 준다고 약속하였다. 결국 B.C.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넘어가고 말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여러 도시 국가들이 파괴되었으며 오직 스파르타만이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에 대항했던 도시 국가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준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무시하고 과두 정치를 통해 강압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에게 해의 도시 국가들은 점차 옛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스파르타에 대한 반감이 전반적으로 드높아지기 시작해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지도적 지위를 잃어버렸다. B.C. 378년에 발족한 제2차 아테네 동맹은 스파르타를 주요 적국으로 규정했고 재건된 아테네 해군이 낙소스 전투(B.C. 376)에서 스파르타를 물리친 뒤 새로운 도시들이 동맹에 가담했고 아테네는 해양에서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역사의 무대는 이제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세력 부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0. 마케도니아의 부상과 알렉산더 대왕 그리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많은 국력을 소비할 때 마케도니아는 북쪽에서 힘을 모으고 있었다. 마케도니아는 오랫동안 그리스의 발전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으나 육상과 해상의 통신 수단과 더불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발전된 문화를 수용하였다. 한편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는 테베(Thebes:그리스의 도시 국가 가운데 하나)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적이 있지만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로부터 군사 전략에 관해 충실히 배웠고, 후에 보병 부대와 창기병 부대를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서서히 그의 입지를 주변 도시 국가들로부터 강화시키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카이로네이아(Khaironeia) 전투에서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여러 도시 국가들을 연합 동맹 형태로 묶어 페르시아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336년에 암살당함으로써 페르시아를 무너뜨리려는 그의 야망은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병대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던 20세의 알렉산더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세계의 질서는 크게 변모하게 되었다. 학문적 소양이 높고 빈틈이 없으며 야심적인 알렉산더는 그의 아버지가 추구했던 사업을 계승하려 하였다. 그는 국내의 질서를 회복한 후 페르시아를 목표로 B.C. 334년에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출정하였다. 페르시아와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알렉산더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파라오임을 선포하고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또한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관을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고 B.C. 331년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제국을 격파하는 동안 다리우스 3세는 동쪽으로 후퇴하였다. 또한 알렉산더는 150년 전 아크로폴리스를 약탈한 것에 대한 복수로 페르시아 궁전을 파괴했으며, 왕의 보물들을 압수하였다. 그 다음해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Bactria)인의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알렉산더는 계속해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으로 진출하였지만 그의 병사들은 무리한 원정으로 지쳐 갔기 때문에 결국 B.C. 324년에 메소포타미아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정착해 남쪽의 아라비아(Arabia)에 대한 정복을 꿈꾸었지만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1. 로마의 통치 알렉산더 대왕이 동쪽에서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 내는 동안 로마인들은 서쪽으로부터 세력을 팽창시켜 그리스를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B.C. 168년에 마케도니아가 패하고 소아시아도 점령당하더니 결국 그리스 대부분의 지역이 로마에 넘어가게 되었다. B.C. 31년에는 해상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승리를 거둠에 따라 로마의 첫번째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그후 300년 동안 로마 제국의 한 지방이 된 그리스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전례 없는 평화의 시대를 구가했으며,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예술, 문학 그리고 철학을 존경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를 아테네에 있는 학교에 보내기도 하였다. 12. 기독교화와 비잔틴 제국 로마의 평화는 395년에 서고트족(Visigoths), 반달족(vandals), 480년의 동고트족(Ostrogoths), 500년의 불가르족, 540년의 훈족(Huns) 그리고 600년 이후의 슬라브족의 대이동에 의한 침략으로 붕괴되어 간다. 한편 이 시기 동안 기독교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 전파됨에 따라 로마 황제의 개종과 비잔틴 제국의 형성을 불러일으켰다. 324년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1세는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그 곳을 콘스탄티노플로 개칭하였다. 4세기 말 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동·서로 분할되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동안 비잔틴 제국은 1453년 터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 힘과 부를 증대시켰다. 한편 394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는 기독교를 그리스의 공식적인 종교로 만들었고 그리스 로마신에 대한 숭배를 금지시켰다. 13. 십자군 전쟁 비잔틴 제국의 멸망이 동방의 이교도와 북쪽의 이민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가속화되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 십자군 전쟁은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창궐한 이슬람교로부터 성지(The Holy Land)를 해방시킨다는 목표 아래 1095년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후 십자군 전사들은 종교적인 열정만큼이나 탐욕적인 면이 많아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쇠약해진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한편 베네치아인들은 크레타 섬을 포함해 전략상 중요한 항구들을 손에 넣었고, 지중해에서 강력한 무역 국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요인으로 인해 비잔틴 제국은 크게 약화되었고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14. 오스만 터키 제국의 지배 13세기 말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오스만 터키 제국이 14세기 중엽부터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비잔틴 제국은 위기를 맞게 된다. 또한 서유럽은 100년 전쟁에 휩싸이고 있었기 때문에 의존할 곳이 없었다. 결국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은 터키 제국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후에도 그리스는 터키 제국과 베네치아 간의 전쟁 무대로 변모됨에 따라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에서는 이오니아 섬들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오스만 터키 제국의 일부분으로 바뀌었다. 터키 제국의 통치 기간에 나타난 악습 가운데 하나는 터키의 근위병, 술탄의 개인 경호원으로 그리스인 가정에서 남자 어린이 한 명을 차출하는 것이었다. 근위병의 대부분은 오스만 터키 제국의 보병이 되었지만 영리한 자는 고관 대작을 포함한 높은 관직에 발탁되기도 하였다. 때때로 그리스 여성들은 술탄의 후궁으로 차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터키 제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1571년 레판토(Lepanto) 해전에서 터키 제국의 해군이 베네치아와 스페인 연합 함대에게 격파당함으로써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였다.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무능한 술탄들이 오스만 터키 제국의 쇠퇴를 재촉하였고,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지역 가운데 하나가 러시아에 있는 오데사(Odessa)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과 키예프(Kiev)에 있던 교회 성직자들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함락당하자 러시아의 대주교는 모스크바를 기독교의 진정한 계승자인 `제3의 로마'라고 선포한 뒤 남쪽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1820년 술탄에 대항한 알리 파샤(Ali Pasha)의 반역은 그리스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기운을 북돋아 주었고 점차 그들은 터키 제국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터키인들과의 충돌은 본토와 많은 섬들로 단계적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결과 그리스인들은 테베, 트리폴리스타(Tripolista), 나바리노(Navarino), 메솔론지(Messolongi), 모넴바시아(Monemvassia), 나폴리온(Nafplion) 등을 되찾게 되었다. 1824년에는 펠로폰네소스에서 터키와의 충돌이 발생하여 혈전을 거듭하던중 서유럽(러시아, 영국, 프랑스) 함대가 개입하여 터키 함대를 격파하였다. 15. 그리스 국가의 탄생 전쟁의 승산이 없어짐에 따라 술탄은 결국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스는 카포디스트리아스를 그들의 첫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펠로폰네소스에 있는 나폴리온을 수도로 정하였다. 그러나 카포디스트리아스가 암살당하고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또다시 개입하여, 그리스는 군주 정치를 해야 하며 그리스가 권력 투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왕위를 비그리스인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바이에른 출신 오토 1세가 1833년 왕위를 계승했으며 수도를 아테네로 옮겼다. 그러나 그 역시 정치 스타일이 독재적이었고 독립 전쟁 지도자들과도 많은 갈등을 야기시켜 결국은 해임되고 말았다. 한편 1866~1868년 사이에 터키의 지배하에 있었던 크레타에서 터키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1881년 러시아터키 전쟁의 결과로 그리스는 테살리아와 에피루스의 일부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1896년 과거 그리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모든 영토는 그리스에 다시 귀속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전의 비잔틴 제국을 재건하자는 대그리스주의)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1897년 크레타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그리스는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이것이 터키와의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터키 군대가 아테네를 흡수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열강들의 중재에 따라 크레타는 그리스에 반환되었다. 16. 발칸 전쟁 20세기 초에 터키 제국은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마케도니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새롭게 형성된 발칸 국가인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마케도니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영토에 대한 갈등이 두 차례에 걸친 발칸 전쟁을 초래하였다. 1차 발칸 전쟁 때는 1912년에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가 터키에 대항해 싸웠고, 1913년의 2차 발칸 전쟁에서는 세르비아, 그리스가 불가리아와 싸웠다. 이 전쟁의 결과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남부, 에피루스 일부분 그리고 몇몇 에게 해 섬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17. 양차 세계 대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리스는 중립으로 남아 있을 것을 주장했으나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압력으로 연합국측에 가담하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초기에는 그리스를 지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요구를 거절하여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독일 군대는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1941년 4월 그리스를 침공했는데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는 나치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그리스인들의 나치에 대한 저항 운동은 계속되었다. 저항 단체로는 ELAS(Ellinikos Laikos Apeleftherotikos Stratos), EAM(Ethnikon Speleftherotikon Metopon), EDES(Ethnikos Dimokratikos Ellinikos Syndesmos)가 있었는데 ELAS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창립되었지만 모두가 좌익은 아니었다. 이에 반해 EAM은 그리스를 공산화하려는 스탈린주의자들로 구성되었고, EDES는 우익과 군주 정치 지지자들로 구성되었다. 독일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오자 ELAS와 EAM은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1944년 여름에 임시 정부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1944년 10월 좌익과 우익 양 진영은 서로 나뉘어 내란을 벌였다. 18. 시민 전쟁 1944년 12월 경찰이 신타그마(Syntagma) 광장에서 공산주의 데모대를 향해 발포함으로써 좌익과 우익 사이의 싸움은 시민 전쟁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이 간섭하여 ELAS와 EAM의 승리를 막았고, 1946년 공산주의자들이 보이콧한 선거에서 왕정 지지파들이 승리하였고 게오르기오스 2세가 국민 투표에 의해 왕위에 복귀하게 되었다. 10월에 좌익 군대가 창설됨에 따라 시민 전쟁은 계속되었다. 좌익 군대는 수천 명을 모아 게릴라 전법으로 활동했지만 소련의 영향력 확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미국이 반(反)공산주의 연합 정부를 지원함에 따라 승리는 반공산주의 그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스는 시민 전쟁으로 인해 2차 세계 대전 때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수천 명의 주민들이 집을 잃었고 감옥에 끌려가거나 추방되었다. 19. 재건과 쿠데타 시민 전쟁 이후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새롭게 결성된 우익 그리스 연합(Greek Rally)이 승리하였다. 그후 그리스는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하였고, 미국이 그리스에서의 우익 정부를 지원함에 따라 그리스의 생활 수준은 향상되었다. 한동안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다가 1967년 4월 파파도풀로스(Papadopoulos)가 주도한 육군 대령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가 성공함에 따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임시 군사 정권이 성립하였다. 1972년 6월에 파파도풀로스는 그리스를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 공언했지만 1973년 이후 임시 군사 정권에 대한 반대 시위가 계속되었다. 11월에 학생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여 약 2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파파도풀로스는 요아니디스(Ioannidis)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후 군부는 그리스의 혼란 상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파리에 있던 카라만리스(Karamanlis)를 불러들였고 그의 신민주당(New Democratic Party)은 1974년과 1977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개인적 인기는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그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1981년 유럽 공동체에 그리스를 가입시킨 것이다. 1981년 10월 선거에서 PASOK(범그리스 사회당)가 승리함에 따라 그리스는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부를 인정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난이 심화되고, 전화 도청과 횡령죄 등 여러 사건에 지도부가 연루됨에 따라 인기는 급강하하였다. 20. 1990년대 1990년의 선거에서는 신민주당이 승리하였다. 높은 인플레와 지나친 정부 지출 등의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서 정부는 일련의 긴축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1991~1992년 사이에 공공 부문에서의 파업을 불러일으켰고, 정부는 알바니아 피난민들의 유입과 구유고슬라비아의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마케도니아라는 명칭 사용에 대한 논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후 1993년 선거에서 PASOK가 170석을 차지함으로써 신민주당을 누르고 재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III. 정치 한편 의회 선거는 4년마다 실시되고, 대통령은 의원들에 의해 선출되며 5년 임기에 재임이 가능하다. 대통령 선거 후보자는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며 3차 투표에서는 5분의 3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당선된다. 만약 후보자가 이것을 확보하지 못하면 보통 선거를 통해 다수표를 획득한 후보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초기의 헌법은 대통령에게 상당한 권력을 부여하였지만 1985년에 PASOK 정부가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는 수정안을 제시하였고 1986년에 비준을 받게 되었다. 현재 주요 정당으로는 신민주당(New Democratic Party), 범그리스 사회당(Panhellenic Socialist Movement), 사회당(Communist Party), 좌익과 진보주의 그룹 연합(Coalition of Left and Progressive Forces)이 있다. 현재의 정국은 신민주당과 PASOK의 대결 구도로 짜여져 있으나 PASOK가 우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스는 현재 UN(국제 연합), EU(유럽 연합),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 유럽 평의회, NATO, WEU(서유럽 동맹), OSCE(유럽 안보 협력체), BSCE(흑해 경제 협력체)에 가입하고 있다. IV. 경제 그리스는 1980년대 사회당 정권이 민간 기업을 무더기로 국유화하고, 노사 분규가 생기면 기업주가 정부에 기업을 매각하는 풍조가 생겼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부실(不實)의 늪에 빠져 있었다. 안이한 경영으로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990년 4월에 출범한 신민주당 정권은 국가 경제를 좀먹는 국영 기업들을 정리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매각을 실행하였다. 또한 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해 투자 촉진법을 제정, 각종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국가 예산 지출을 줄이고 인플레를 잡기 위한 정부의 긴축 정책은 공공 부문에서의 대규모의 파업으로 이어지고 1993년 선거에서 예전의 PASOK가 다시 집권함에 따라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났다. PASOK 등장 초기에 1980년대와 같은 지나친 국가 예산 지출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지만 PASOK 정부는 이전 정부의 안정화 조치를 따랐고 정부·노동자·고용주 사이에 3자간의 사회 계약을 협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95년 4월에 인플레는 10% 이하로 떨어졌는데 이것은 2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IMF(국제 통화 기금)도 1995년도 결산에서 그리스 경제는 향상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회계 정책에 있어서의 쇠퇴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리스에서 관광업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해운업이다. 관광업은 외화 획득에 있어 첨병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1994년에는 무역 적자의 28.9%에 맞먹는 약 4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1994년의 관광객 총수는 1100만 명을 넘었고 총외화 벌이 액수는 국내 총생산의 6.8%에 해당했다. 한편 우리 나라의 대 그리스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 타이어, 가전 제품, 직물, 조선, 신발 등이고 수입 품목은 알루미늄 제품, 엽연초, 철강 제품, 대리석 등이다. 우리 나라는 1990년에 선박 수출에 힘입어 수출액이 1억 5961만 달러에 이른 반면 수입은 7682만 달러로 우리 나라의 수출 초과 현상은 여전했다. 이같이 무역 역조 현상이 뚜렷하자 그리스측은 우리 나라에 적극적인 수입을 촉구하고 있으나 그리스에서 구매할 상품이 별로 없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그리스 시장은 인구 1050만 명의 소규모이므로 몇 명의 유력한 바이어를 통한 수출이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결제 통화로는 달러보다 마르크화를 선호하며 바이어와의 거래 성사 여부는 품질, 가격 조건 이외에 인간 관계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V. 문화와 생활상 그리스에는 전통적인 관습이 넘쳐흐르고 있다. 명명일(생일 대신에 축하함), 결혼식, 장례식 등은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명명일에는 집을 개방하고 선물을 들고 축하하러 온 손님들에게 간단한 음식들을 대접한다. 결혼식은 매우 즐거운 축제이며 춤과 축연이 베풀어지고 주연은 며칠 동안 계속되기도 한다. 또한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싶다면 지정된 누드비치(Nude Beach)만큼 좋은 장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는 전통적으로 예의를 중요시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예절에 벗어나는 일은 삼가야 한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하여 남자들의 대부분은 직접 축구를 하거나 아니면 관중으로 축구장에 들르곤 한다. 농구는 축구 다음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한 아이들과 함께 그리스를 방문하면 많은 환영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리스인은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1. 인구와 민족 공식적인 그리스 인구는 1995년의 인구 조사에서 105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아테네의 인구는 약 250만 명이지만 아테네에 포함된 지역까지 합치면 337만 명에 이른다. 다른 대도시로는 테살로니카가 40만 명, 피라에우스(Piraeus)가 50만 명, 파트라스(Patras)가 14만 명 그리고 이라클리온(Iraklion)에 10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스 내에 거주하는 가장 큰 소수 민족으로는 트라키아에 30만 명, 브리톤스(Britons)에 10만 명이 거주하는 터키인이다. 그 외에 5000여 명의 유태인, 에피루스에 있는 블라흐족과 사라카차니 양치기들이 있고 최근에는 알바니아인이 많이 유입되었다. 2. 종교 그리스인 가운데 97%가 그리스 정교를 신봉하고 있다. 나머지는 카톨릭, 개신교(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 유태교,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지방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신앙심이 매우 깊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세속적인 것에 더 관심이 많다. 동방 정교회 기독교는 많은 교파를 형성하고 있지만 아래와 같이 편의상 세 가지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구교(카톨릭과 동방 정교회). 동방 정교회는 중근동 지역(그리스 등)을 비롯해 구공산권 각국에 퍼져 있는 반면, 카톨릭은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유럽 남부 대부분과 남미를 비롯해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② 종교 개혁 이후 루터와 칼빈의 신조를 이어받아 온 유럽 북부 여러 나라의 프로텐스탄트 각 교파. ③ 주로 앵글로색슨 계통에서 전개한 프로테스탄트.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의 종교가 여기에 속한다. 이 가운데서 특히 동방 정교회(또는 동방 교회)는 크게 그리스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의 두 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두 나라 외에도 루마니아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 등 동구권을 비롯해 세계 각지로 흩어져 있다. 동방 정교회라는 명칭은 카톨릭이 서방 교회라는 것과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원래 동방 정교회와 서방 교회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었는데 이처럼 나누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 제국이 395년 동로마 제국(또는 비잔틴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양분된 것과 때를 같이하고 있다. 교회는 이처럼 분열의 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최종적인 양분은 1054년에 일어났다. 이 때부터 그리스 신학과 라틴 신학의 두 신학 체계를 형성하며 분열되었는데 그리스 신학은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희랍 철학의 영향을 받았고, 라틴 신학은 라틴어를 바탕으로 하는 라틴 민족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동방 정교회는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이며 지성적인 특징을 가진 반면, 서방 교회(카톨릭)는 윤리적이며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동방 정교회는 카톨릭과 달리 이콘(Icon:그리스도와 마리아, 성인들의 화상 畵像)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카톨릭의 포도주나 빵과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나 집안에 들어갈 때면 이콘에 입을 맞추며, 작은 이콘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렇듯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에 비해 신비적인 면이 강한 편이지만 동방 정교회의 입장에서는 카톨릭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지나치게 율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 다. 3. 언어 그리스어는 4000년의 구술(口述) 전통과 약 3000년의 문자 전통을 가진 가장 오래된 유럽 언어이다. 4000년 이상 진화된 그리스어는 다음과 같은 시기를 겪었다. 그리스어는 아테네의 황금 시대에 힘을 발휘했고,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 혼성 상업어로 쓰였으며 헬레니즘 시대(B.C. 330~A.D. 100)에는 동쪽, 즉 인도까지 퍼지게 되었다. 그후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의 언어로서 아람어(셈어) 대신 채용되었고 로마 제국에 속한 동부 지역 국가들도 공식 언어로서 채택하였다. 380~1453년 사이에는 비잔틴 제국의 공식 언어로 선포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그리스어는 그 위상을 유지해 왔으며 계몽주의 시대 동안에는 과학과 학술 용어에서 객관적인 언어 실체로 인정받았다. 현재 대부분의 그리스 지역과 해외에서 사용되는 그리스어는 남부 그리스 방언이다. 현대 그리스어는 그리스의 방언들 즉 크레타어, 키프로스어, 마케도니아어와 고대 그리스 어휘를 조합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4. 예술 고대부터 예술은 그리스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 여름 동안에는 옛부터 있었던 고대 극장에서 연극이 상연된다. 시각 예술은 현대 유럽 예술의 조류를 따르고 있으나 자수, 짜기, 벽걸이, 융단과 같은 전통 민속 예술은 아직도 계승되고 있다. 부주키(bouzouki)는 가장 민중적인 악기이며, 지역마다 각자 고유한 악기와 소리를 가지고 있다. 가난과 고통을 주제로 한 렘베티카(Rembetika)음악은 군사 정권하에서 금지되었으나 다시 부활되었다. 고전 시대, 헬레니즘 시대, 로마 제국의 통치 시대 동안의 건축은 세 가지 독특한 기둥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단순하고 깨끗한 도리스 양식, 가느다란 이오니아식, 화려하게 장식된 코린트식 등이다. 음유시인 호머는 서사시 `오디세이'와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인 `일리아드'를 지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가장 헌신적인 제자였으며, 그의 작품으로는 『공화정』이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콘스탄틴 카바피(Constantine Kavafy:1863~1933)는 개인적이며 회화체적인 스타일의 시를 그리스에 도입함으로써 대변혁을 일으켰다. 또한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20세기 그리스 소설가 중 가장 유명했으며,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는 유럽과 미국의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한 유명한 프리마돈나였다. 5. 축제 부활절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축일인데 이 때는 촛불을 들고 행진하며 축제와 함께 불꽃 놀이가 벌어진다. 또한 수많은 지역 축제들이 1년 내내 개최된다. 많은 문화 축제들은 여름에 개최되는데 가장 유명한 축제로는 희극, 오페라, 무용극, 고전 음악 연주회가 상연되는 아테네 축제이다. 이 축제는 고대 그리스 드라마가 에피다우루스(Epidaurus) 극장에서 상연되는 에피다우루스 축제와 함께 개최된다. 다른 문화 축제를 벌이는 도시로는 이오아니나(Ioannina), 파트라스(Patras), 테살로니카 등이 있다. 6. 언론 매체 가장 널리 보급된 그리스 신문은 『에트노스 Ethnos』, 『타 네아 Ta Nea』, 『아포예프마티니 Apoyevmatini』이다. 영자 신문은 daily Athens News, Weekly Greek News가 있고, 영어 잡지로는 Greece's Weekly, Odyssey가 있다. 7. 건강과 음식 수도꼭지에서 받은 물은 일반적으로 마셔도 괜찮은 편이다. 건강상 조심해야 할 점은 태양열에 의한 화상과 열사병, 탈수증이며 밤에 곤충들이 극성을 부리기 때문에 방충제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또한 독이 있는 뱀은 살무사뿐이지만 대개 드물고 그리스의 유명한 양치기 개는 대부분 짖기만 할 뿐 물지는 않는다. 그리스의 전통 음식 가운데 유명한 것은 수블라키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숯불 갈비에 해당하며 생선이나 육류를 쟁반 모양으로 잘라 수십 장씩 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을 총칭하는 말이다. 육류로는 돼지고기와 양고기가 널리 쓰이는데 간이 음식점(타베르나)에서는 양고기를 주로 쓴다. 간은 소금과 후추로만 한다. 그리스 양고기는 육질이 곱고 느끼한 맛이 거의 없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리스의 기후는 포도 재배에 적합하기 때문에 그리스의 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와인의 종류만도 수십 가지가 되지만 대개 레치나와 나머지 것들로 구분된다. 레치나는 송진을 넣어 가미한 것인데 독특한 맛이 난다. 레치나가 아닌 다른 와인 중에는 파트라스의 데메스티카와 아테네 근교의 이미토스가 있다. 지방의 와인으로는 북부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나는 부타리나우사 적포도주가 유명하다. 또한 맥주도 그리스의 명물로 손꼽힌다. 독일이나 네덜란드의 맥주 회사까지 이 곳에 많이 진출해 있다. 그리고 그리스의 커피에는 그리코(단것), 메트리오(보통), 스케토오(블랙)의 세 종류가 있다. 8. 관광지 그리스 관광의 가장 큰 매력은 고대 유적들을 방문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들의 유적지 주위를 돌아다닐 수 있으며 고대 그리스와 라틴 문화의 잔재들을 볼 수 있다. 또한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 외에 베니스풍의 건축물, 터키식 성, 이슬람교 성전 등 이민족들에 의해 남겨진 문화 유산들도 볼 수 있다. 에게 해의 앞바다에 있는 섬들 가운데 남쪽에서 가장 큰 섬은 크레타 섬이다. 고대 크레타 문명을 꽃피웠던 이 곳에는 B.C. 2000년에 건축된 크노소스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은 3400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고 한 영국 귀족에 의해 발굴되었다. 방만 1200여 개, 2~4층으로 구성, 미로처럼 얽힌 복도들, 여왕의 방 옆에 있는 욕조, 수세식 변기 시설 등은 4000년 전에 지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섬의 남쪽 패스토스에도 크노소스와 비슷한 궁전 유적이 있으며, 크노소스에서 동쪽으로 34km 떨어진 곳에는 말리아 궁전이 있다. 이 세 궁전은 크레타의 3대 유적지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에게 해에는 신화와 신비에 쌓인 수많은 섬들이 있다. 불의 섬 테라, 비너스상이 발견된 밀로스, 장미의 섬 로도스, 피타고라스의 고향 사모스, 누드비치로 유명한 미코노스 섬, 히포크라테스가 탄생한 코스 섬, 면세 천국 칼림노스 등이 해당된다. 한편 그리스 정부는 최근 170여 년 전에 프랑스에 넘어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밀로의 비너스상을 되돌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테네에서 유명한 곳으로는 B.C. 480년에 완공되었으며 우아함과 조화를 겸비한 파르테논 신전 유적지가 남아 있는 아크로폴리스(The Acropolis), 고대 광장(Ancient Agora), 모나스티라키 교회(Monastiraki), 아테네 대성당(Cathedral of Athens) 등이 있다. 펠로폰네소스에서는 민속 박물관, 팔라미다(Palamida) 요새가 볼 만하며, 중부 그리스에서는 아폴로 신전이, 북부 그리스에서는 페라마(Perama) 동굴, 판타레이몬(Pantaleimon) 수도원, 아토스 산, 올림푸스 산이 유명하다. 특히 그리스 정교의 성지인 아토스 산은 휴가철에 관광객들로 붐비는데 참선을 통한 구도와 고행, 철저한 수도원 생활로 유명한 아토스 산 일대는 수백 개의 수도원이 바다와 접한 절벽과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색다른 기분을 누릴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