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I. 르포 - 서울 '압구정 점술밸리'와 '미아리 점성촌'을 가다
답답할 때 점집 찾는 신자들 많아 꺼림칙하면 고해성사 보면 그만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점술밸리’와 성북구 미아동의 ‘점성촌’은 서울의 대표적인 점술 타운이다. 경기가 불황이라지만, 점집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노인들이나 정치인들만 찾는다는 것은 옛말.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공무원, 사업가, 연예인 등 남녀노소 구분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점술문화의 신구(新舊) 메카라 불리는 두 지역을 다녀왔다.
# 점집의 현대식 진화, 압구정
5월의 마지막 금요일 오후. 서울에서도 ‘젊음의 거리’라 손꼽히는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를 찾았다. 화려한 명품매장과 즐비한 고급 카페에는 신세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붐비는 거리를 뒤로 하고 작은 모퉁이 길에 들어섰다. 속칭 사주골목이라 불리는 곳이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마다 ‘사주카페’라고 적힌 큰 간판만 4개가 줄지어 있다. 1989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며 ‘원조’임을 밝히는 곳도 있었다.
골목 중간 3층에 위치한 한 카페에 들어섰다. 깔끔하다. 푹신한 소파와 아기자기한 테이블을 보니 여느 고급 카페와 다를 바 없다. 20대로 보이는 연인들과 여대생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분위기만 보면 특별히 사주카페라 불릴 이유가 없어 보였다. 다른 점이라면 테이블마다 작은 간이 의자가 하나씩 붙어 있는 것. 역술인의 자리다.
사주를 보겠다고 밝히자 10여 분이 지나 30대 후반의 남자 역술인이 다가왔다. 대뜸 “사주가 처음이냐”고 묻는다. “성당에 다녀 이런 데 오기가 꺼려진다”고 하자 “천주교는 제사도 지내고 절도 하는데 뭐가 어떠냐”고 웃으며 반문했다.
흰 종이에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時)를 적으라고 했다. 종이를 건네받고는 손때가 반지르르 흐르는 낡고 두터운 책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곧이어 세세한 점괘풀이와 조언을 풀어놓는다.
꽤 구체적이다.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사나운 팔자인데, 시대가 변했으니 상관없다고 했다. 어머니가 사주가 좋으니, 덕 좀 본단다. 그러면서 어머니한테 효도하라고 덧붙였다. 어머니 사주도 안보고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책에 다 나와 있다”고 했다. 너털웃음이 새어 나왔다. 씁쓸했다.
사주풀이가 끝난 후 역술인과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올해 서른아홉의 그는 1992년부터 이 일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처음엔 손님들이 많아,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는 “당시엔 월 평균 400만원 정도는 거뜬히 벌었다”고 귀띔했다. 옛날에는 무언가 절박한 심정으로 찾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엔 재미와 심심풀이로 찾아온다고 전했다. 상담을 받은 손님은 대부분 6개월 안에 다른 친구 손을 잡고 꼭 다시 찾아온다는 것.
단골손님이 많은 이유다.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려 하자 그는 시간이 다 됐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곳에선 여대생 최모(21)씨와 김모(23)씨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칭 ‘점 매니아’ 들이다. 처음엔 언제쯤 애인이 생길지, 결혼을 할지 궁금해 시작한 점집 나들이가 이젠 월례 행사가 됐다. 오늘은 각각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와 끝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와 “대학원에 진학해야 하나 유학을 가야 하나” 조언을 얻고자 찾아왔다고 했다. 그들은 “확실히 종로의 포장마차 점집 보다는 사주카페가 더 친절하고 실력도 좋다”며 예찬론을 폈다.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갔다. 종업원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메모판에는 역술인들의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 카페에만 서너 명의 역술인이 상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복비 2만원에 커피 값 만원을 더해 3만원을 내고 나왔다.
# 40년 전통의 최대 점성촌, 미아리
미아리로 발길을 돌렸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역에서 길음동 방향으로 100m 남짓. 미아리고개를 향하는 고가도로 양편으로 70여 곳의 역술원과 점집이 몰려있다. 사주, 작명, 궁합, 신수 등 여러 종류의 점을 본다는 간판이 즐비하다.
골목 어귀의 구멍가게에 들러 어느 집이 용하냐고 물었다. 가게 주인은 “젊은 사람이 이런 곳엘 왜 왔냐”면서 길 건너 첫 번째 골목의 ‘계룡산’ 보살을 찾아가보라 했다. 설명대로 찾아가자 가정집 같은 주택 2층에 작은 간판이 보였다. 붉은 깃발에는 선명한 글자로 ‘신점 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문을 열자 주부로 보이는 여성들이 여럿 기다리고 있었다. 방에서는 대화가 한창이었다. 먼저 와 기다리던 한 여성과 쉽사리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역시 같은 내용으로 운을 띄웠다. “성당에 다녀 이런 데 오기가 꺼려진다”고 하자, 그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나도 천주교 신자에요. 요 근처 성당 다녀요”라고 답했다.
“천주교 신자들도 여기 엄청 많이 온대요. 점보는 건, 성당 다니는 거랑 다른 문제 아닌가요? 힘들고 답답한데 하소연 할 곳도, 풀어줄 곳도 없으니 여기라도 와야죠. 좀 꺼림칙하다 싶으면 신부님께 고해성사 보면 되요”
잠시 후 방에 들어갔다 나온 그는 “딸아이가 사귀는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당장 집에 가서 추궁해봐야 겠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차례가 됐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진한 향내가 코를 찔렀다.
압구정동 사주카페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석가모니상을 비롯해 단군상, 삼신할머니상, 최영장군상, 북두칠성상이 줄지어 모셔져 있었다. 환갑은 훌쩍 넘어 보이는 노인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피로회복제 한 병을 건넸다. 성씨와 생년월일을 적어 보이자, 잠시 기다리라던 그는 무언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로 변한 그는 “뭣 때문에 네가 여기 왔는지 다 안다”며 호통을 쳤다. 뜨끔했다.
쌀알을 몇 번 만지작거리던 그는 올해는 이사하지 말고, 내년 생일 이후로 날짜를 잡으라는 엉뚱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올 여름에는 특별히 차 조심과 물 조심에 신경 쓰라고 했다. 먹어야 할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도 알려줬다. 삼신할머니가 곧 아들을 준다고도 했다. ‘팔자’가 좋고 ‘관운’을 타고 났으며 ‘돈복’이 있으니 사업을 해보라고 권했다.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생년월일만 보고 이 모든 것이 나오는 것일까. 운세풀이와 호통, 훈계는 30분이나 계속됐다.
끝나는 분위기가 감지될 즈음, 복채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신점은 5만원은 받아야 하는데, 젊은이가 인상이 좋아서 특별히 4만원만 받겠다고 했다. 즉석에서 20% 특별 할인을 받은 셈이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나서는데, 그가 갑자기 맨발로 따라서 뛰어나왔다. 그리고는 “힘든 일 생기면 언제라도 또 찾아오라”며 뭔가를 손에 쥐어줬다. 명함이었다. 김보살 010-###-****. 꼭 예약하고 오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진지하기보다 차라리 유쾌했다.
곽승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