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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문학 신인상 응모작품>
장르: 소설
폭염주위보
홍하진
그 해 여름은 유난히 길었다. 한 달 넘게 비가 내렸다. 하늘은 아예 세상을 잠기게 할 듯비를 쏟아 부었다. 사람들도 짐승들도 축축하고 암담한 비의 계절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장마가 지나가자 폭염이 뒤이어 찾아왔다. 낮에는 사정없이 내리쬐는 태양빛에 단단하던 땅이 녹아 내렸다. 가끔씩 약해진 땅의 지반을 밟을 때면 발이 푹푹 빠져드는 뜨거움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나는 낮에는 밖을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람들도 해가지는 저녁때 볼일을 보러나갔다. 마트에 가거나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어떤 회사는 아예 폭염주의보가 내린 한여름 동안은 출근을 저녁에 하기도 했다.
남편은 아직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몇 번이나 목구멍으로 튀어 나올려는 말을 삼켜야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남편은 매일 자기 방에 누워 인터넷 빠져있었다.
“여보, 밥”
“여보, 마실 것 좀 없을까”
“엄마, 얼음물”
남편은 이따금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나를 불렀다. 마침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되었고 내 몸에서는 쉴 새 없이 땀이 흘려 내렸다. 나는 숙련된 웨이터처럼 밀려드는 주문을 받기에 급급했다. 남편은 미식가다운 안목으로 나의 소홀함을 지적했다.
“국이 너무 짠 거 아냐?”
“이 나물은 너무 많이 데쳐 졌는 걸”
나는 일부러 남편이 아끼는 노트북 가까이에 스프를 가져갔다. 남편은 쟁반에 놓인 스프가 엎질러질까 전전긍긍하며 노트북을 사수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누운 채로 상체를 약간 올려 노트북을 끌어안고 손을 뻗어 쟁반위에 있는 스프며 돈가스를 먹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텔레비전 앞에 오랜 시간 눌러앉을 폼으로 먹을 것을 갖다 놓았다. 나는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빼앗긴 채 전쟁에 진 패잔병처럼 말없이 식탁의자에 앉았다. ‘윙~~윙’ ‘웽~~~~~~웽~~’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한여름의 매미소리처럼 귓가에 쩌렁쩌렁 울렸다. 아까부터 냉장고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마치 아마추어가 불어대는 클라리넷 소리처럼 귀에 거슬렸다. 아이들이 차가운 물을 찾기 위해 냉장고 문에 매달리자 사태는 더 심각해 졌다. 냉장고의 냉장실 문이 끼익~~끼익~~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거, 문을 교체하셔야 겠는데요.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냉방이 전혀 안되네요’
20대 초반의 AS직원은 한심하게 냉장고를 쳐다봤다. 나는 AS비용이며 고장 난 부분에 대해 물어 보았다. 남자는 얼른 자리를 뜨고 싶은 표정으로 바지 속에 울려대는 최신형 핸드폰에 신경을 썼다.
‘그냥 냉장고를 바꾸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나는 통장의 잔고를 떠올렸다. 마이너스 통장은 한도를 벌써 초과했고 수중에 남아있는 돈은 이번 달 관리비가 전부였다. 방학이 시작되면 여름 바캉스를 떠나는 피서객들로 고속도로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그 대열에 한 번도 끼여 본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차가운 바다에 발을 담그고 싶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하지만 대학 강사인 남편은 반백수가 되어 할 일없이 뒹굴어야 했고 내 가슴은 날씨와 상관없이 타들어 갔다. 하늘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이 내 머리 위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일사병
햇볕에 장기간 노출되면 심한 두통과 현기증을 동반한다. 일一사事병病이란 한 가지 일을 천직으로 알고 하던 사람이 실직을 함으로써 속에 있던 천불이 머리에 옮겨 붙어 생기는 병을 말한다. 나는 대학생들의 학기말 시험이 끝나는 시점부터 이런 증세에 시달렸다. 심한 두통으로 얼굴이 수시로 붉어져서 매일 두통약을 복용해야 했다. 남편은 남편대로 방학이 끝나가기 전에 어김없이 몸살을 앓았다. 매일 핸드폰의 전화벨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남편은 두 군데 강의를 나갔었는데 이번 해에는 한 곳으로 줄었다. 지금 강의를 나가는 곳도 우연찮게 얻어진 자리라 전화로 다음 학기 강의에 대한 언급을 하기에는 껄끄러운 처지였다. 그렇다고 남편이 말주변이 좋거나 타협과 아부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아니었다. 남편은 정확한 해고 통보조차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전화가 오면 그나만 안도의 한숨을 쉬고 겨우 밥 한술을 넘길 수 있었다. 내일 모레가 개강이었다. 냉장고 소리가 유난히 넌덜이 나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새벽녘에야 팬티바람으로 겨우 잠이 들었다. 나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목욕탕에서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려고 섰는데 초라한 여자가 서있었다. 얼굴은 기미가 잔뜩 끼여 있고 빈약한 가슴은 그나마 짝짝이로 쳐져있다. 배가 어디까지 튀어나와 완전 비호 감이었다. 나는 그런 내 모습에 적잖이 짜증스러웠다. 그런데 밖에서 남편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부리나케 수건 한 장을 두르고 욕실을 뛰쳐나갔다. 남편이 냉장고를 발로차고 있었다.
“냉장고가 왜 이 모양이야. 문도 닫히지 않고 냉장실은 아예 텅 비었네.”
남편은 남편대로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어쩔 거야?”
“뭐가?”
“앞으로 어떠할 거냐고?”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당신은 왜 이렇게 무능해”
순간 남편의 발이 냉장고의 급소를 찔렀고 냉장실문은 퍽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나와 남편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사태를 수습할지 난감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남편은 냉장고 문을 세워봤지만 여의치 않는지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고 오늘 두통약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은 철학전공이었다. 한마디로 밥 굶기 딱 좋은 과였다. 지방 국립대 출신이고 철새처럼 석, 박을 이리저리 옮겨 다녔으니 뒤를 받쳐줄 배경이 없었다. 그리고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서양철학은전공은 그야말로 배고픈 소크라테스였다.
‘유학 갔다 와도 놀고 있는 박사가 수두룩하다고 하더라. 앞으로 우짤끼가?’
엄마의 걱정 어린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트럭이라고 몰고 과일이라고 팔아야 애 셋 키우지 안켄나’
‘엄마 그 사람 장애인이야. 그래서 운전도 못해.’
나는 엄마에게 남편의 사정을 알리지 못했다. 단지 무능한 사위라는 타이틀이 서로에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철학이니 음악이니 문학이니 하는 말들은 무한경쟁 사회인 자본주의에서는 감상적인 단어들이었다.
남편은 고등학교 때 뇌출혈로 한쪽 시야가 좁아졌다. 그리고 천재적인 화가인 고흐와 같은 간질병을 보너스로 얻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재들에게는 삶의 십자가의 형벌이 더 가혹한 법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편이 행복할까’
남편은 세상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안다. 그래서 그의 구두는 세상의 때를 묻힌다.
구둣방 아저씨는 구두를 보자마자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내다본다.
‘노가다 하는 교?’
구두만 봐도 구두주인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파악된다. 남편은 굽 뒤창 한쪽부분만 심하게 마모되었다. 심한 팔자걸음이다.
‘네’
나는 남편의 구두를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새 구두를 헌 구두같이 라는 모토를 달고 데모 판에 구두를 신고 다니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이상하게 구두가 더 편하더라. 운동화가 더 편한 나와 일반적으로 운동화가 편한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아이들은 우리 희망이야. 애들에게 자본주의의 더러운 쓰레기를 먹일 수 없어’
홀로 서울 상경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집회를 나섰다. 새벽녘에 나는 마지막 열차를 타고 오는 남편을 데리고 역으로 마중 나가야 했다. 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는 모른다. 다만 자본주의는 노력한 만큼 잘살 수 있는 사회라고 배웠다. 작은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우체국 말단 공무원이었던 작은 아버지는 퇴직금과 얼마간의 빚으로 치킨 집을 차렸다. 얼마간 장사가 되는 듯 하니깐 치킨집이 여기저기 생겼다. 결국 조류독감으로 문을 닫아야했다. 빚만 떠안은 작은 아버지는 빚쟁이를 피해 집을 나갔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겨울밤 배낭 하나에 모자를 눌러쓴 남루한 모습으로 말이다. 환갑이 갓 지난 작은 아버지에게 자본주의가 유포한 환상은 잔인한 것이었다. 남아있는 생애를 일해도 다 갚을 수 없는 사채 빚과 30년 넘게 해로한 아내와의 위장이혼이었다. 친척들은 모이면 모두 작은 아버지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면서도 내심 궁금한 모양이었다. 노숙자 댄 거 아이가? 팍 어디 가서 죽어뿐나. 사회주의가 조금은 더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대안은 아니다. 우리는 거대해진 파이를 합리적으로 재분배할 새로운 대안이나 체제를 찾아야 한다고 남편이 말했다. 어쨌든 간에 나는 혁명가의 아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택시 값은 세종대왕과 이이가 내 지갑에서 빠져나가야 살 수 있는 수박 값과 맞먹었다. 나는 시원하고 맛있는 수박을 생각하며 차를 몰았다. 역 앞에 서있는 남편의 구두는 그날의 집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최루탄을 등 뒤에 맞았어.
‘요즘도 최루탄이 등장해?’
나는 신입생 때 화염병을 만들던 선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80년대나 90년대 초반에나 사용되던 추억의 최루탄을 우리의 경찰들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최루탄과 함께 떠오르는 것은 같은 학번이었던 철진의 모습이었다. 학교는 달랐지만 친구가 되었다. 녀석은 지금도 회자되는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멋모르던 신입생인 그를 선배들이 서울로 데려갔다. 그는 처음 보는 서울도 신기했지만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격렬한 경찰과의 몸싸움에서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머리로 가리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은 훈장처럼 그 날의 사건을 신이 나서 떠들어 대며 마지막에는 이마를 들쳐 보이는 레퍼토리를 잊지 않았다. 나는 수험생활의 실패로 소위 삼류대학을 다녔고 열패감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중고등 학교 때 태백산맥을 뒤적이며 분단과 이데올로기에 대해 고민하던 생각 많은 아이었다. 그 당시 대학생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일. 내가 일류대를 가지 못해서 느끼지 못하는 대학의 패기와 낭만에 대해 생각하던 때였다. 그래서 나도 선배를 따라 서울을 가게 되었다. 겨울이었고 달이 무척 투명하고 서늘했다. 남편은 큰 키에 약간 긴 머리를 하고 바바리를 입고 있었다.
‘술 한 잔 할래요?’
방에 들어갔던 남편이 나온다. 아무래도 냉장고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냉장고 문짝은 이미 떨어져 나간 뒤였고 냉장고 안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내비쳤다. 먹다 남은 깡통 고등어 통조림, 쉬어터진 김치, 유통기한의 알 수 없는 햄 조각, 네모난 통에 들어있는 정체모를 음식들-아마 안에서 곰팡이로 잘 발효가 되었을 거다. 발효는 한국음식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하는 비법이 아니던가. 김치, 된장, 홍어. 잠깐, 홍어는 발효 식품이긴 하지만 특정 지역에 한에서 애용되는 음식이다. 시댁은 전라도라 홍어를 즐겨 먹었다. 처음 시집을 갔을 때는 홍어를 통째로 잡아 식탁에 내오곤 했었다. 경상도가 고향인 나는 홍어의 톡 쏘는 특유한 냄새에 기절할 뻔 했다. 하지만 갓 시집온 새색시다운 면모를 보여야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홍어의 질과 양은 떨어져 갔다. 한동안은 홍어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기까지 했다. 급기야 이번 명절에는 포장홍어까지 등장했다. 날개 살과 몸살로 구성된 아르헨티나 산이었다. 자본주의와 세계화는 우리 식탁에 아르헨티나 홍어까지 입성시켰다. 어쨌든 시어머니는 홍어를 먹게 돼서 기뻐했고 무엇보다 궁색한 형편을 내비치지 않아서 다행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이거 뭐야”
네모난 뚜껑을 열어보던 남편은 기겁을 한다.
“홍어잖아. 아주 썩었군.
“홍어는 썩어야 맛이잖아”
남편은 눈을 치켜뜨고 노려본다.
“아르헨티나 산이야”
그제야 남편의 화가 수그러들었다. 철학을 공부해서인지 남편의 지성은 지극히 이성적이었고 소비에 있어서도 실수가 없었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생존의 방식이었다. 남편은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삼겹살보다는 돈가스를 된장찌개보다는 스튜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최저생계비만을 겨우 유지하는 경제력은 그의 의지와 능력과는 무관한 일들이었다. 밤새 남편은 냉장고문과 씨름했다. 둔하고 느린 몸으로 청 테이프를 붙이고 망치를 찾으러 이방 저 방을 돌아다녔다. 남편은 한번 하면 끝장을 봐야하는 성미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남편은 노동에 지쳐있었다. 도저히 손 쓸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AS센터에 전화를 한다.
“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냉장고 문이 떨어졌는데요”
“그러세요 고객님, 냉장고위에 있는 제품번호를 불러주시겠습니까?”
“네? 단종이요?”
남편의 얼굴은 바깥날씨보다 더 붉어졌다. 그의 감정지수는 아마 폭염주의보를 넘어 폭염특보상황이다. 남편은 전화기를 쾅 소리 나게 놓았다.
“그럼 어떡해?”
“그냥 써”
남편은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밖의 소란에 아이들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목이 마르는지 아이들은 냉장고로 향했다.
“엄마, 엄마”
“냉장고가 왜 이래?”
아이들은 놀란 표정으로 호들갑이다.
“어떻게 된 거야?”
“문이 떨어졌어.
“아빠가 그랬지?”
첫째와 셋째가 사건의 전말에 대해 우왕좌왕하는 사이 둘째가 사건의 정황을 정확히 집어냈다.
“아니야, 아빠가 돈도 없는데 냉장고문을 발로차서 부수겠냐?”
“그건 그래. 하지만 아빠는 성질이 더럽잖아?”
“응, 그렇긴 해”
“그럼 우린 앞으로 어떻게 해 냉장고도 없이”
막내는 당장 시원한 물과 음식들이 걱정인 모양이었다. 아이들도 좀처럼 목격하기 어려운 황당한 상황에 열심히 머리를 쥐어짰다. 본드로 붙일까. 아냐 본드는 문을 떠받치고 있기엔 힘이 약해. 그럼 시멘트로 아예 발라버려? 그럼 굳어서 문이 안 열리겠네. 이참에 새로 사지머 그래도 냉장고 아래 문만 떨어져서 다행이야.
남편이 들어오자 애들은 하나같이 모른척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냉장고문을 부수는 성질 더러운? 아빠이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무슨 생각인지 다시 전화를 들었다.
“아니, 대책도 없이 오래된 제품이라 단종 시키면 어떡합니까? 뭐 이건 새 제품을 사라는 공갈협박이나 다름없잖아요”
남편은 하루 종일 굶었다. 성가신 일이 있으면 그 일이 끝날 때까지는 밥을 입에 대지 않았다.
“밥 먹어”
나는 하루 종일 인터넷만 붙잡고 있는 남편의 노트북위로 음식을 내밀었다. 남편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당장 나가”
‘소비자가 먹여살려주는 대기업은 이대로 좋은가? 제품을 팔아먹을 줄만 알지 제품에 대한 향후대책은 미비한 실정이다. 폐냉장고를 처리하기 위한 비용은 얼마인가. 폐냉장고의 고철 덩어리들이 제대로 처리되고 있는가, 우리는 환경과 자본의 효율성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남편은 하루 종일 소비자불만센터나 시민단체, 환경단체에 글을 올렸다. 남편이야 말로 바로 이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이다.
냉장고는 변함없이 웽~~웽 돌아가고 있었다. 문짝이 떨어진 냉장고를 보니 하루 종일 심란했다. 밖은 여전히 발을 떼어놓기가 힘들게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밥을 먹을 때 식탁에 앉아 냉장고와 인사하는 것은 내 차지였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문짝이 떨어져 나간 냉장고를 보니 우울한 모양이었다. 문이 없이 돌아가는 냉장고의 전기세를 생각하니 걱정이 들었지만 연일 뉴스에서 떠들어 대는 폭염주의보로 식중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돌아가는 선풍이 앞에서 24시간 뉴스채널을 보았다. 세계경제 불황, 청년백수, 정규직 인력 축소, 고위공무원 비리, 빈부격차 가시화, 지구의 이상고온. 총체적인 위기에 대한 보도들이 나를 차라리 위로했다. 냉장고문이 나간 현실은, 친정 언니에게 아쉬운 소리하며 빌린 돈은, 밀린 전화세는 차라리 행복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남편과 나는 벼룩시장이니 교차로니 백수들이 즐겨 찾는 신문을 구독? 했다. 내가 아침마다 신문이 배달되는 시간을 딱 맞춰 직접 가지고 왔다.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남편은 과와 운전면허증, 기타의 흔하디흔한 컴퓨터 자격증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게 흠이었다. 나 또한 대학을 졸업하자 결혼했기 때문에 직장생활은 전무했고 기업이 원하는 효율성과 스피드를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둘 다 무능했다. 혁명을 소리쳐야하는 이유가 철학을 해서도 아니고 의식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배가 고파서였다.
아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문이라고 해봐야 특단의 조치로 두꺼운 비밀을 잘라 덧대었을 뿐이었다. 아이와 함께 학용품을 사러 갔다가 책상 위나 식탁위에 유리대용으로 쓰던 두꺼운 비닐을 발견했다. 임시방편으로 나마 그걸 냉장실 위에 붙여 천막처럼 위로 들치고 음식을 꺼낼 수 있게 했다.
“이게 뭐야?”
담배를 피러 나갔던 남편이 하얗게 변한 얼굴로 들어왔다. 남편의 손에 관리비 고지서가 들어있었다. 나는 남편의 시선을 따라 금액을 읽어갔다. 전기세가 전달보다 배가 넘게 나왔다.
“냉장고 꺼”
남편은 냉장고 전원을 뽑아 버렸다. 아이들이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그냥 침묵했다.
당장 냉장고의 음식이 걱정이었다. 35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김치와 몇 가지 밑반찬은 반날전만 지나도 상해 시큼해질 것 같았다. 나는 위층에 있는 미애 엄마를 생각했다. 이웃집이라고 해도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지만 며칠간은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애 엄마, 냉장고가 갑자기 망가져서 말이야.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 좀 맡길 수 없을까?”
“그래? 우리 냉장고도 그리 여유가 있는 건 아닌데…….일단 가져와봐. 요새 같은 날에는 음식을 밖에 둘 수 없잖아?”
나는 아이들을 대동해 음식 통을 날랐다. 나를 선두로 첫째, 둘째, 셋째가 그 뒤를 따랐다. 숲속에 있는 비스킷 조각을 집으로 나르는 개미들의 행렬 같았다.
사람은 하루에 왜 세끼를 먹을까? 미애 엄마는 끼니때마다 집을 들락거리는 내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어서 도로 가져갔으면 하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나는 뻔뻔함으로 버텼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냉장고 수요가 딸리나 보더라고 며칠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미애 엄마는 못 믿는 눈치였지만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갔다. 닷새가 지나자 미애 엄마는 눈이 띄게 짜증을 냈다.
“냉장고가 비좁아서 말이야. 수박을 못 넣겠더라고. 아는 사람이 전자제품 대리점 하는데 알아봐 줄까?”
“미안해요. 며칠만 더 신세질게요”
나는 핸드폰에 저장되어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생각했다.
저녁을 먹고 반찬통을 들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그때 하필 미애 아빠랑 딱 부딪혔다. 미애아빠는 샤워를 하고 욕실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팬티며 런닝이 놓여있었다.
아~~~~~~~~~~~~~~·
누구의 비명소리가 더 컸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열무김치를 쏟아버렸다. 비명소리에 소리의 파장을 느낀 현관문이 모두 덜컥거리며 열렸다.
“무슨 일이야?”
수십 개의 눈들이 미애네 현관 앞으로 몰려들었다. 바닥에 처참하게 엎어져있는 열무김치를 보며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질퍽거리는 바닥을 용케 피해 가며 사람들은 한마디씩 했다.
“냉장고 좀 사지. 냉장고가 얼마나 한다고”
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저녁 반찬이 걱정이었다. 열무김치에 밥을 비벼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얼마나 맛있다고. 나는 무슨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손으로 열무김치를 주워 담았다. 열무김치의 불그스름한 물이 하늘에서 내리붓는 폭염 같아 아찔했다. 나에게는 태양에서 쏘는 빛은 잔인한 비의 향연일 뿐이다. 순간 머리가 어질하고 투탕 투탕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일사병이다.
시아버지 생신이라 시댁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시아버지는 어쩐지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나는 아는 언니가 하는 화장품 집에서 남성용 화장품 세트를 외상으로 가져왔다. 부엌에 있는 나를 시아버지가 불렀다.
“에미야, 나 좀 보자”
시아버지가 안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하얀 봉투를 내 손에 쥐어줬다.
“쯧쯧,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소리도 안하냐?”
“냉장고 새것으로 하나 장만해라”
아이들이 할아버지 무릎 위에서 한참을 떠들어 대더니 기어이 냉장고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퇴직을 하고 연금으로 생활하시는 시아버지는 얼굴에는 며느리에 대한 미안함이 묻어있었다. 내가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급히 나가시는 시아버지의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나는 갑자기 울컥해서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금 울었다.
“홍어는 왜 없어?”
시아버지가 기세 좋게 소리를 냅다 질렀다.
“그게, 너무 비싸더라고요”
“아르헨티나산 있잖아”
“환율이 올라서요”
시어머니는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남편과 아이들은 마냥 신나했다. 파리 한 마리도 얼쩡거리기 싫은 냉장고를 가진 집에서의 끼니란 너무 보잘 것 없었다.
나는 일주일을 달걀 후라이에 김치로 겨우 버티다가 집근처의 식당에서 아줌마구함이라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었다. 아이들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집을 나섰다. 7시를 넘는 시간인데도 더위는 꺾일 줄 몰랐다.
‘식당에서 일한 적 있어요?’
‘아뇨’
‘집에만 있었던 모양인데, 식당일이 생각보다 힘들어요. 그리고 장사가 잘되지 않아 파트타임으로 점심2시간 저녁 2시간씩 일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일단 며칠 해봐요. 하는 것 봐서 다시 얘기하죠.
나는 남편과 아이들 몰래 며칠 식당에 나갔다. 손님 주문에 맞춰 재빨리 물이며 반찬을 가져다 줘야했다. 설거지도 만만치 않았다. 식당주인은 내 시원찮은 음식 솜씨와 시간을 정확히 채우고 나가는 내 태도가 조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저녁 준비를 위한 재료들을 다듬어 주고 가기를 원했지만 나는 아이들과 남편 때문에 마음이 바빠다. 일주일째 되던 날 손에 만 원짜리 12장을 쥐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에 돌아오는 가로등 불빛이 참 아름다웠다. 청계천 8가가 떠오르는 밤이었다.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야만 하는 사람들의 죽을 확률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생존율이 1%가 되더라도 건너야하는 길인 것이다. 나와 남편 아이들의 생존율을 알 수 없다. 특히 자본주의 상위 1%센트를 만들기 위한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냉장고 문짝이 떨어지고 직업란에 해당 사항 없음, 혹은 실업자라고 적어야하는 아이들의 서글픔이 느껴졌다. 나는 손에 쥐고 있는 지폐를 꼭 움켜쥐었다. 내 발걸음은 마트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 아이들은 먹고 싶다던 돼지 삼겹살을 실컷 구워 먹었다.
시댁을 나서는데 시어머니가 부엌으로 불렀다.
“애들한테 들었다. 냉장고 사는데 보태라. 얼마 안 된다”
환갑이 넘어 주름진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울고 싶은 표정이다. 나는 시어머니 돈을 받았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서로의 속내를 내비치고 민망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때로는 모르는 게 더 나은 진실도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새벽녘에 막내가 배가 아프다고 울면서 거실에 나왔다. 나는 열대야로 잠을 이루지 못해 심야영화를 보고 있었다. 시댁에 다녀온 다음날 우리는 냉장고를 구경하러 갔다. 아이들은 냉장고를 구경하면서 신기해했다. 냉장고의 종류는 생각보다 다양했다. 컵을 입구에 대면 얼음이 먼저 나오고 그 위에 물이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남편은 가격과 성능을 비교하고 적당한 냉장고를 골랐다. 남편이 아이들을 둘러보자 아이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고른 냉장고의 색깔이 두 종류였는데 그게 마침 매장에 없었다. 들어오는 데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마침 내일이 냉장고가 오기로 한날이었다.
나는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아침에 먹은 김치찌개가 말썽인가. 아침에 먹고 데워두긴 했는데 요즘같이 35도를 넘나드는 폭염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도 있었다. 갑자기 첫째, 둘째도 배가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며 나왔다. 나와 남편은 택시를 잡아타고 응급실로 향했다.
“식중독이네요”
우려했던 사실이 진실로 판명되었다.
“식중독 될 만한 음식을 먹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글쎄요. 요즘같이 기온이 높을 때는 음식을 만든 즉시 드시는 게 좋습니다. 남은 음식은 꼭 냉장고에 보관하셔야 하고요”
냉장고라는 말을 듣자 남편의 눈이 갑자기 충혈 된다. 의사의 말을 다 듣지 못하고 남편은 밖으로 나갔다. 남편은 병원 밖에서 별을 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
“미안하다. 내가 당신하고 애들한테 미안해”
남편은 울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남편을 달래지 않았다. 목에 가시가 박힌 것 같아 말을 할 수 없었고 위로의 말을 건네면 엉엉 아이처럼 울어 버릴 것 같아서였다.
아이들은 며칠 치료를 받기로 했다. 아이들은 처음해보는 병원 생활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병실에서 밀린 방학 숙제를 했다.
“엄마, 허생전에 대해 조사해야 하는데 알아?”
허생전. 나는 한때 묵적골에 사는 허생이 남편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허생의 아내는 나같다고. 허생은 아내는 허생의 행동을 참다보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당신의 평생 과거를 보지 않으니, 글을 읽어 무엇 합니까?’
‘나는 아직 독서를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박사학위 받을 수 있게 논문 써야 하지 않아?’
‘아직 박사 논문 쓸 정도로 책을 읽지 못했어’
‘그럼 장인바치 일이라도 못하시나요?’
‘장인바치일은 본래 배우지 않았던 것을 어떻게 하겠소?’
‘좋아, 박사고 교수고 그런 거 안 바라니깐 생활만 유지할 수 있게 해봐’
‘취직하기도 힘들고 논술은 입시제도가 바꿔서 수요가 없어. 장사를 하려고 해도 수중에 돈이 있어야지? 공사판에서 일하려고 해도 내 몸으로는 무리잖아?’
나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허생과 남편은 똑같이 선비였지만 조선시대의 허생은 남편보다 능력이 있었다. 운종가에 사는 변씨에게 돈을 꿔서 매점매석을 하지 않았는가? 조선시대에 살던 허생이 지금 이 시대에 살았다면 틀림없이 재벌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만 허생의 아내이고 싶다.
“엄마, 허생전 아냐니깐?”
“음...허생은 말이지. 경제학 박사였어. 시대와 돈의 흐름에 탁월했지. 그래서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율도국을 세웠어”
옆에서 내 말을 듣고 있던 남편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들을 다 망치는군”
퇴원을 하던 날 나는 남편에게 시아버지가 준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아이들은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동안 냉장고에 대해 질문했다. 엄마 냉장고 도착했어? 매장에서하고 똑같아? 냉장고 바로 쓸 수 있는 거야. 마트를 가야겠어. 냉장고가 텅 비었잖아. 남편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리쬐는 해가 너무 뜨거웠고 택시는 냉방장치가 고장 났는지 시원찮았다. 택시에 부착된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일주일이 넘게 계속되는 폭염주의보로 인명과 가축 피해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경남 창원에서는 80대 노인이 일사병으로 사망을 했고 충청북도 옥천에서는 닭과 가축 50마리가 폐사하였습니다.’ ‘뇌물혐의로 구속되었던 국회의원 김모씨가 자신의 자택에서 뛰어내려 숨졌습니다. 책상위에서 친필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우리는 택시 안에서 오존층이 파괴되어 온실효과에 시달리는 지구처럼 잔뜩 시들어 있었다. 나는 손차양을 만들고 창을 통해 이글거리는 해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내일은 중고 냉장고를 알아봐야겠다.
폭염주의보는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신인상당선소감/ 홍하진
밖의 날씨는 연일 불볕이고 내 마음도 녹아내린다. 그런 시간들이 정말 너무 길었던 것 같다. 가슴속에 자꾸 물이 차오르는데 그 물을 비어내지고 못하고 스스로를 그 물속에 수장시키는 나날들이었다.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잠시 멍해졌다. 꿈을 꾸었는데 깨고 나면 기억나지 않는 슬픔 꿈처럼 아득한 느낌이 든다. 소설가란 숙명처럼 자신의 우물물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채워가는 사람들이다. 사람냄새가 나는 글을 쓰고 싶다. 하늘보다 땅을 보고 살고 싶고 땅에 사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런 내 글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단비처럼 촉촉한 기쁨의 눈물을 땅에 뿌리고 입맞춤 할 것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가능성으로 채워주신 심사위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늘 나를 사랑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부모님들과 남편과 아이들에게 이 기쁨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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