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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군사관학교 44기(다물회) 원문보기 글쓴이: 고준기_JUNE
본 카페에 "남겨진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몇번 글을 올린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그 글들을 모아서 2013년 성무지에 기고 하였습니다.
분량이 많아 다 실리기가 어려울것 같아 이왕 쓴글 동기생 여러분과 한번 더 읽고 싶어
이렇게 올립니다.
남겨진 그들과 함께한 시간
44기 사관 고준기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분신같은 아이들은 공군과 우리가 책임...”
비행임무중 순직한 동기생의 영결식에서 동기생 대표로 낭독했던 이 한줄의 문구는 그 이후 내
마음속에 무거운 짐이 되었다. 2003년 5월 15일, 故 소령 김상훈님의 영결식에서 눈물을 흘리
며 약속했던 이 말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었다.
1999년 9월 14일 故 소령 박정수님을 처음 하늘로 보내고, 故 소령 김상훈님에 이어 그후로도
4명의 동기생을 떠나보내면서 이 한줄의 문구는 더 이상 쓰지 못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며, 무엇이라도 해야한다는 동기생들의 마음을 모아 그들과의 만남을 시작
하였다. 이제부터 그들과의 만남을 이야기하려 한다.
남겨진 그들과 함께한 시간 1
2012년 1월 14일
오랜시간 바래고 기다렸던 만남이다.
그들의 곁을 먼저 떠나간 우리 44기 동기생 가족과 만나는 날이다.
동기생회에서 주관한 자리지만, 전임 동기생회장이라는 명분으로 자리를 함께 한다.
“다물 후원회”가 첫걸음을 내딛던 날이기도 하다.
3가족(이한기, 김도현, 이재욱 유가족)이 이날 함께하기로 했다.
김도현 동기생 가족과 대전 유성터미널에서 오후 4시 조금 넘어 만났다. 몇 년전 현충원에서 우
연히 본이후 내모습이 많이 변해서 못알아볼뻔 했다는 농담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건우, 태현
이가 훌쩍 커버렸다. 애들은 금방 크는구나 생각했다가, 이렇게 크는동안 힘든시간도 많았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약속시간은 5시라 먼저 현충원에 들러가기로 했다. 꽃집에 들러 꽃을 사고, 차뒷자리에서 무슨
꽃이냐는 애들끼리의 질문과 대화를 뒤로하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묘역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묘역으로 향하는데, 김도현 동기생 가족이 저 멀리에 있는 이한기 동기생 가족을
알아본다. 서로 약속들을 한건 아니었지만, 현충원에 먼저 들렀다가 약속장소로 간다고들 했다
고 한다.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정을 계획하면서, 외지에서들 자가용, 버스로 오니까
만나서 저녁 식사하고, 숙소로 이동하여 담소나누며 쉬다가 다음날 아침식사후 현충원에 함께
가는 일정을 계획했는데, 그들의 생각을 고려하지 못한 생각이었다. 대전에 왔으니 아빠 먼저
보고 밥먹으로 가겠다는 이들의 당연한 마음을 왜 난 몰랐을까.
인사를 나누는 동안 이재욱 동기생 가족도 도착했다. 약속은 5시에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현충원에서 모두 만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후, “찬물도 순서가 있다는데, 저쪽(김상훈 묘비)부터 갔다 올께요”라는 농담
을 건네고, 다른 동기생과 함께 우리 친구들 상훈이, 한기, 도현이, 재욱이에게 처음으로 조금
덜 미안한 마음으로 인사했다. 도현이 아들 건우, 태현이가 따라주는 잔을 받아 현충원에서 처
음으로 절을 했다. 가족들끼리도 서로 묘비를 돌며 인사하는 모습이,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부
르며, 살아있는 사람에게 말하듯 말 건네는 모습은 그들만의 문화가 되어있었다. 재욱이는 커
피를 좋아했다며, 그 앞에는 흔히들 편의점에서 종종사서 마시는 커피가 놓여 있다.
아빠에게 인사가 끝난후 아이들끼리는 뛰어다니며 이름도 없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서
로간 몇 번의 교류로 아이들끼리 형, 동생, 누나가 되어있었다.
처음에는 현충원을 다녀가는 동안 여기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 생각
했는데, 지금은 우리 애들이 그러고 있다는, 한 가족의 말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어느덧 초등학교 입학하게될 하린이(이재욱 딸), 2학년 태현이(김도현 아들), 3학년 건우(김도
현 아들), 3학년 준후(이재욱 아들), 4학년 하린(이한기 딸)이 이 아이들을 보며, 헤어지는 다음
날까지 이틀내내 가슴이 뭉클함을 감추기가 쉽지 않았다.
2008년 현충일이후 주말에 현충원에 갔다가 재욱이 묘비앞에 있던, “아빠 모하세요, 저는...”으
로 시작되던 편지를 썼던 준후가, 그 옆에 별과 동그라미 등 알수없는 그림을 그렸던 하린이가
이렇게 커버렸다.
현충원을 벗어나, 약속된 뷔페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다른 동기생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했
다. 유가족과의 어색함을 풀어보고자 친분이 있던 다른 동기생과 가족들과 함께 시작한 식사자
리는 처음부터 자리배치는 어떻게 해야하나 어색함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줌마들
이 한 테이블로 모이면서부터 이런저런 아줌마들의 얘기들로 어색함은 사라졌다.
어른들이 따로 챙길걸도 없이 아이들끼리 먹고 싶은거 가져다 먹고, 아줌마들은 아줌마들끼리
즐거운 저녁시간을 가졌다. 새우를 잘먹는 하린이, 식사가 끝나자 닌텐도 게임기를 손에들고
정신집중하고 있는 남자애들, 식사후 엄마에게 다가가서 엄마 디저트 뭐 드실거냐고 물어보는
대견한 큰 하린이, 뷔페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너무 많이 먹어 배부른 배를 보고, 식탐을 후회하
며 자리를 일어나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로 이동하여 오늘의 본론인 다물후원회에 대하여 설명
했다.
♥ 다물후원회 주요내용 : 사망 동기생 자녀 1인당 매년 50만원을 연1회 지원, 고등학교 졸업시까지
설명이 끝난후 준비된 봉투를 전달하고, 내년 부터는 통장으로 입금한다고 설명드리고, 다시
어색해진 자리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자리를 정리했다.
10여년 후배기수에서는 순직 동기생 가족에게 매월 몇십만원씩 지원한다는 얘기를 최근에 들
은 얘기가 생각났다. 흔히들 하는 얘기로 마음과 정성이 중요하다지만, 현실은 생활이 더 중요
하다고 한다. 나오는 연금으로 먹고 사는거야 해결한다지만, 요즘 세상이 먹고사는 것만으로
해결되지는 않으니까....
유가족들을 생각할때마다 김상훈 동기생 영결식에서 읽었던 조사가 생각난다.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분신같은 아이들은 공군과 우리가 책임...” 조사문구는 그 이후로 쓰지
않았다. 동기생회장 하는 동안 4명의 동기생들이 하늘에서 산화하는 사이 상훈이에게 했던 그
약속은 지켜줄수 없다는걸 알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남자아이 3명을 데리고 계룡스파텔에 있는 목욕탕에 데리고 갔다.
벌써 6년이 지났으니, 초등학교 2,3학년인 아이들이 아빠와 목욕탕에 가본 기억이 없을것 같아
혼자 생각해본거다. 언젠가 아이들을 목욕탕에 한번 데리고 가고 싶었다. 남자아이들에게 엄마
가 해줄수 없는, 아빠만이 해줄수 있는 것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서다. 남자아이들을 목욕탕에
데려가겠다고하니, 엄마들은 반기는 모습이다. 한명 한명 비누칠 시키고, 탕에 같이 들어갔다
가, 살살 밀어달라고, 아프다고 엄살부리는 아이들의 등도 밀어주고, 나름 구석구석 닦아주었
다. 목욕탕을 나와 내 어릴적 기억을 생각하며, 시원한 딸기우유나 쵸코우유 사주려고 애들한
테 물었더니, 안먹겠단다. 재차 물었지만, 그냥 가잰다. 내 첫애가 7개월밖에 안된 아빠라 내가
뭐 애들의 마음을 아나. 목욕시키고 우유까지 하나 먹여서 왔으면 좋겠구만 하는 마음은 내생
각일 뿐인가보다.
숙소로 돌아와 다른 가족들과 함께 유성에 있는 아침식사 잘나오는 기사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
었다. 애들은 아침부터 셀프로 가져다 먹는 떡복이를 잘도 먹는다. 엄마들도 잘나오는 밑반찬
싹쓸이에 셀프로 가져다 먹는 숭늉까지 한 대접씩으로 마무리한다. 비싸고 분위기 있는 아침식
사는 아니었지만, 다들 맛있고 배부르게 먹은 표정이다. 그들과의 이틀 동안의 짧은 만남을 뒤
로 한 채 우리는 헤어졌다.
헤어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틀내내 가슴 뭉클함을 애써 감추었지만, 집으로 오는 차안에선
눈가엔 눈물이 스쳤다.
그들을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아쉬워하며, 다음에 또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져야하는데, 그
렇게 했는데 왜 마음은 가볍지 않은건지.
헤어질때 활짝 웃으며, 손 흔들던 막내 하린이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재욱이가 떠날 때 돌 지났다던 하린이가 올해 학교에 입학한단다.
다물후원회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눈물을 훔치던 희정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겨진 그들과 함께한 시간 2
2012년 2월 7일
늦겨울 찬바람에 아직은 몸이 움츠려드는 날씨에 오랜만에 부산행 KTX 기차를 탄다. 대전역에
서 기차를 타서 서울에서 출발한 곽병창 동기생과 합류하여 동백섬, 부산갈매기 등등을 생각하
며 기차타는 동안 여행의 기분을 잠시 느끼며 창밖의 겨울을 감상한다.
지난 1월 대전에서 동기생 유가족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던 김상훈 동기생 가족과 만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가는 길이다. 김상훈 동기생 가족을 생각하면 동기생 유가족중 미안한 마음이 가장
크다. 상훈이는 내가 동기생 회장을 하면서 처음으로 순직한 동기생이었고, 박정수 동기생에
이어 두 번째 순직한 동기생이지만, 아내와 딸을 남기고 먼저 갔다. 상훈이 영결식장에서 내가
말했던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분신같은 아이들은 공군과 우리가 책임...” 조사문구를 또한번
떠올리며 부산역에서 만나기로한 상훈이 가족과 딸이 지내왔을 시간을 생각한다.
벌써 9년이 흘렀다. 2003년 예천의 영결식장에서, 대전 현충원에서 안장식이후 연락도 만남도
처음이다. 딸 주은이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상훈이가 떠날 때 주은이가 태어난지 몇 개월 되지
않았었다고 들었다.
부산역에 도착했다. 상훈이 가족과 통화후 만나기로한 장소로 걸어가는 중 병창이와 저앞에 있
는 어느 평범한 30대 중반의 여성을 보며, “맞는거 같다”를 중얼거리며, 9년만에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9년만에 얼굴을 보며,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 미안함, 안도의 한숨, 궁금함 등등이 나
를 당황스럽게 한다.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줘서 해운대에서 점심식사 하기 위해 이동하며, 근황을 물어본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주은이를 보고 싶었는데, 사정이 있어 데려오지 못했단다. 해운대의 바닷가가
보이는 식당에 앉아 점심을 하면서 그간의 얘기들을 시작한다.
다물후원회의 이야기, 지난달 대전모임, 그간의 근황들...
상훈이 가족은 2년전쯤 재혼했다. 여기 오기전 알고는 있었다. 지금은 창원에서 재혼한 남편과
함께 남편의 딸 한명과 상훈이 딸 주은이와 재혼해서 낳은 아이와 5명의 가족이 함께 살고 있다
고 한다.
2년전 현충일 즈음에 현충원 상훈이 묘비에서 상훈이의 외삼촌을 만난적이 있다. 상훈이 묘비
앞에서 50대 후반의 중년의 부부가 한참동안을 기도하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다가가서 얘
기를 나누다 보니, 상훈이 외삼촌이었다. 그때까지도 상훈이 가족에게 연락을 해본적이 없어서
근황을 물었더니, 잘 모르신다고 하시면서 명함을 건네주며, 상훈이 어머니에게 물어보고 연락
을 주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일주일후 전화가 왔고, 상훈이 가족이 좋은사람 만나 재혼했으니,
상훈이를 알던 사람들이 이제는 상훈이 가족을 잊어달라는 어머님의 말씀이 있으셨다고 하셨
다. 재혼을 해서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고, 뭔지 모를 아쉬움도 들고, 다물후원회 추진하는 과정
중에는 일부 동기생들이 대상에서 제외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도 듣고 했다. 그후 다물후원회
를 준비하기까지 상훈이 가족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이 많았다. 어머님 말씀대로 정말
연락을 안해야 하는건가 등등의 고민...
2시간 넘게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11년의 시간들을 듣게 되었다.
상훈이를 처음만나 떠나보내기까지 2년의 시간, 그리고 지금까지 9년의 시간들.
2001년 여름즈음, 지인의 소개로 상훈이를 처음만나 결혼하기까지 6개월 연애기간 동안의 상훈
이에 대한 기억들, 주말마다 예천과 부산을 오가며 연애하는 시간이 아까워 빨리 결혼하자던
상훈이, 장인어른이 너무나도 좋아했다던 상훈이의 얘기를 하는 지선씨의 얼굴은 지난 순간 행
복했던 기억속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상훈이를 처음만나 떠나보내기까지 2년의 시간, 너무도 행복했던 시간들은 그후 한참동안 삶을
힘들게 했다고 한다. 주은이와 함께 부산의 친정부모님 곁으로 돌아와 방황했던 시간들을 얘기
하는 동안의 얼굴은 다시 현실속으로 돌아와 있었다. 상훈이를 떠나보내고 삶의 목적을 망각하
며, 딸 주은이를 잘 보살피지도 못했고, 해운대 바닷가를 아무생각없이 걸어다니며 방황했던
시간들을 얘기할때는 방금전까지 밝게 웃던 얼굴의 두눈에 눈물이 가득차 있었다.
재혼한 지금의 남편은 2년전쯤 다니는 교회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고, 개인사업을 하
고 있어 창원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재혼을 하게 되어 본인은 자격이 되지않아 유족연금으로
받던 연금은 주은이가 성년이 되기전까지만 주은이 이름으로 받는다고 한다. 주은이 앞으로 나
오는 연금은 쓰지 않고 주은이 통장을 만들어서 적립하고 있고, 나중에 주은이에게 주자고 지
금의 남편과 상의하여 결정하였다고 한다.
새로운 남편과 시댁에 대해서 얘기를 듣던중 남편이 했다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주은이가 아
빠(상훈이)를 기억하면서 살게 해주고 싶다고, 그리고 주은이 아빠 동기생들이 창원에 올 기회
가 되면 같이 만나서 식사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고마웠다. 정말 말이라도 고마웠다.
늦겨울 해운대 바닷가를 바라보며 저멀리 바람을 타고 날고 있는 갈매기들의 날개짓으로 움찔
거리고 있는 마음을 다독거려본다.
주은이를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9년만에 만나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다.
오늘에서야 상훈에에게 빚진듯한 마음을 조금 덜게 된다.
다시 바래다주겠다는 지선씨를 만류하며, 택시를 타고 부산역으로 향했다.
상훈이를 떠나보내고 가슴아팠던 시간만큼 앞으로 더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주은이도 건강
하고 행복하게 커가기를 바란다. 아빠를 기억하기를 바라며...
남겨진 그들과 함께한 시간 3
2012년 3월, 어느 따사로운 봄날 오후
경기도 안성에 다녀올일이 있어서 대전에서 출발하며, 아직 평택에 살고있는 박준범 동기생 가
족에게 전화를 했다. 준범이 떠난후 한번 찾아보겠다고 했는데, 평택에 일부러 갈 시간이 만들
어지지 않아 미루다가, 오늘에서야 서둘러 약속을 잡는다.
약속장소에 미리 도착해 잠시 있으니, 준범이 가족이 도착했다. 장례식장에서 한번밖에 보지
않아 얼굴이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가게에 들어오는 순간, 서로가 누구인지 알수 있었다. 5개월
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안정된 모습이었다.
2011년 10월 15일, 토요일 아침 6시, 전날 조금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가 있어서 토요일이고해
서 늦잠 좀 자려는데, 아침부터 핸드폰에서 문자 왔다는 음악이 들린다. 몽롱한 상태에서 무거
운 눈꺼풀을 들면서 확인한 문자에는, 박준범 동기생이 오늘 새벽 죽었다는, 그리고 평택의 어
느 장례식장에 빈소를 마련했다는 내용... 깜짝놀라 문자를 다시 보았지만 꿈이 아니었다. 문자
를 보내준 동기임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고 집에 있다가 심장발
작을 일으켜서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렇게 되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아침 8시 넘어 도착한 빈소에는 준범이 가족과 어머니, 형님 가족들, 부대분들 몇분이 계셨다.
벌써 마련된 빈소의 영정사진을 보며, 또한번 오랜만에 눈물이 흘렀다. 그날 처음보는 준범이
가족을 보며 두손을 붙잡고 무슨말인지도 모를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잠시 오래전 기억속에 잠
겼다. 20년전, 럭비부에서 함께 운동하며 럭비구장에서 심장이 터질듯 함께 뛰던 기억들, 운동
이 힘들어도 궁시렁거림 없이 묵묵히 뛰던 그 친구. 그 친구가 심장마비로 떠났단다.
목요일 저녁 당직후, 금요일 근무off를 해야하는데, 부서에 업무가 많다보니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서 저녁먹고 TV 보다가 피곤해서 안방에 들어가 먼저 자겠다고 들어가고, 막내가 아빠랑
자겠다고해서 아빠옆에 막내를 눕혀주고 나와서 준범이 아내는 거실에서 잤는데, 새벽 2시쯤
안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들어가 보니, 준범이가 심장발작을 일으키며 아무말도 못하고 신음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동물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119에 신고하고, 알고있는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119를 기다렸다던 준범이의 가족. 아빠가 떠나
고 있는 그 순간 그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아이들.
살려달라는 절규와 같은 울부짖는 준범이의 소리를 들으며, 어떻게든 뭔가 해보겠다며 심폐소
생술을 하며 마지막 이별을 준비한 준범이의 아내, 그리고 그옆의 아이들.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정확한 사인을 알기위해 부검까지 하였지만, 심장비대에 의한 심장발작만 확인될뿐 그 이상의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여려보였던 아이 3명을 키우는 준범이 가족은 이제 거친세상에 당차게 맞
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댁인 달성, 고향인 춘천,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이다, 평택에 정착하
기로 했고, 보상금 등으로 평택에 아파트를 장만하여 8월에 입주할 계획이란다. 나또한 민간인
으로 사회 경험도 부족하면서, 준범이 가족에게 본인이 혼자 직접 부딪혀야할 사회생활의 이것
저것을 당부한다. 물질적 도움은 못주더라도, 어떤 도움이 필요하거나, 무언가 물어봐야 할 일
들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를 달라고 얘기했다.
그간 준비한 일들을 들으며 얘기를 나누는 동안, 왠지 당차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당차
져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동기임원을 하는 동안 준범이 결혼 소식을 들은적이 없었다. 준범이 가족에게 자초지정을
물으니 결혼을 할때쯤 양쪽 집안 형편이 어려움이 생겨서 결혼식을 안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동기회에도 연락을 안한것 같다. 1년전쯤 준범이가 예도를 문의한적이 있었다. 결혼할 때 동기
회에 연락하지 못해 예도를 못 받았는데, 지금이라도 줄수 있는지 물었다.
전역후 바쁘게 일을 하고 있을때라 미루다 보니, 전달하지 못했다.
이제 결혼 예도는 어떻게 해야할까?
다음에는 아이들과 같이 만나 맛있는 고기 사겠다고 약속하면서 헤어졌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면 하지 말아야 하지만, 꼭 한번은 그러고 싶다.
그 아이들에게 이제는 아빠가 없으니까...
남겨진 그들과 함께한 시간 4
2012년 9월14월
대전 현충원 故 소령 박정수님의 묘비 앞에서 정수의 어머님을 만나기로 했다.
2주전쯤 아주 오랜만에 전화를 드렸고, 정수 기일에 대전에 오신다고 해서 맛있는 점심 사드리
겠다고 말씀드리고 정수 앞에서 뵙기로 했다.
정수의 이모님, 외숙모님과 세분이서 먼저와 계셨다. 아버님은 일이 생겨서 못오셨다고 한다.
정수 어머님은 정수를 얘기할 때 아직도 공부하러 갔다고 말씀하신다. 정수가 저 멀리 미국으
로 공부하러 가서 오랬동안 공부하고 있다고, 그러면서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젖어있는 묘비를
마른수건으로 연신 닦으신다. 정수가 담배를 좋아했다며, 오다가 사오신 담배 한갑을 여기저기
한참동안 찾으시다 꺼내 놓으신다. 담배에 불을 붙여 묘비에 올려 놓으신다.
정수 어머니는 정수를 유학보내고 나셔서 2가지를 배우셨다고 한다.
운전과 컴퓨터.
정수를 유학보냈다 하시면서, 정수를 보려고 10년동안은 한달에 한번씩 현충원에 오시고, 기일
에는 현충원에, 생일때는 예천에, 또 지나가다 한번씩...
지금은 매달은 못오신다고 하신다.
처음에는 아버님이 운전하셨지만, 어머님 생각에 아버님이 연세가 더 드셔서 아버님이 운전을
못할실때쯤 정수보러 가기 어려울것 같아서 어머니가 운전을 배우셨단다. 오랬동안 정수를 보
러 대전으로, 예천으로 다니시기 위해서. 이제는 정수보고 집으로 가시는 길에는 아버님은 소
주한잔 하시고, 어머니가 운전하신다고 하신다.
어느 자식이 돌아가신 부모에게 1년에 열 번을 넘게, 그것도 10년동안 찾아갈수 있을까.
3년전 정수 10주기 추모식이후 곽병창 동기생과 함께 춘천에 정수 부모님 집에 방문한적이 있
다. 정수 10주기때 병창이와 함께 두분을 모시고, 1박2일의 여정으로 대전현충원과 예천비행단
에서 정수의 추모식에 동행하고서, 두분께서 춘천에 꼭 한번 오라고 하시면서, 비싼거는 못사
줘도 집앞에 맛있는 닭갈비 식당이 있다며, 꼭 오라고 하셨다. 그후 춘천에 방문하여 아직도 그
대로 있는 정수의 방을 구경하고, 집앞의 식당에서 닭갈비를 먹으며, 그렇게 그분들과 잠시 정
수를 대신하며 아버님께 소주 한잔을 기울여 들였다.
그날 정수방에서 보았던 3cm이상 두께의 제본된 두권의 편지. 정수어머니가 컴퓨터를 배우게
된 이유다. 정수가 보고싶을 때마다 편지를 쓰시기 위해 컴퓨터를 배우셔서 지금은 인터넷 메
일도 보낼줄 아신다고 하신다. 정수 관련 자료들을 모두 컴퓨터 파일로 관리하고 계신다고 하
시며, 자료 가져가라고 해서 주신 자료를 받으며, 그때 10주기 추모앨범을 만들어 드리겠다 약
속했는데, 아직이다.
가져온 파일 자료를 보다보니, 정수를 생각하며 일기같이 쓴 편지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
다. 예천부대에 갔다가 상훈이 만난 얘기, 근원이가 결혼할 사람이랑 인사왔다는 얘기, 근원이,
상봉이 등등의 결혼식에 다녀오셨다는 얘기, 공군의 비행사고가 날때마다 마음 아파하셨던 얘
기들...
정수한테 물려준 담배가 다타들어가는거를 보면서 어머니는 정수에게 또 인사를 하신다. “정수
야 공부 잘하고 있어, 엄마가 또 올게. 오늘은 널보러 준기도 와줘서 엄마가 기분이 좋구나. 정
수야, 엄마 갈게. 잘 있어...”
나쁜놈. 엄마한테 담배사오게 하는 나쁜놈.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그말이 새삼 떠오른다.
현충원 앞의 돌솥밥집에서 조촐한 점심을 사드리고, 다음에는 춘천가서 닭갈비 먹으며 아버님
이랑 소주한잔 하고 오겠다고 약속하며 헤어졌다.
대전에 오실때면 꼭 연락주시라고 말씀드리며...
어머님께 약속했던 2가지를 올해를 넘기기전에 지키려고 한다.
정수 10주기 추모앨범을 가지고 춘천에 가서 닭갈비를 먹으며, 아버님과 소주한잔 할거다.
병창이와 근원이가 함께하기로 했다.
그들과의 만남을 시작하며 만남후 그날 적어두었던 글들을 모아보았습니다.
그들과의 만남이후 앞에 글들에서 약속했던 일들을 이제는 하나씩 지켜가고 있습니다. 2012년
11월 29일, 정수의 40번째 생일에 춘천의 정수부모님을 찾아 뵙고 10주기 추모앨범을 전해드렸
고, 닭갈비를 먹으며 아버님과 소주한잔 하고 왔습니다.
어떤 동기생은 7년동안 그들의 곁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동기생도 있습니다. 서울에 근무
하는 동안은 한달에 한번씩 서로 오가며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에 동기생 한명은 본인
의 가족들을 데리고 춘천에 사시는 동기생 부모님을 찾아 뵙고 2일동안 찜질방도 같이가고 소
주한잔에 식사도하고 했던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사진만 보면 한가족 같아 보였습니다. 할아버
지, 할머니 같고 아들같고, 손자, 손녀 같았습니다. 두분의 얼굴에 행복의 웃음이 보였습니다.
2013년에는 9명의 아이들이 조금 더 크기전에 얼굴을 자주보려고 합니다.
지난 1월에는 김도현, 이재욱 가족들과 다른 동기생 가족들과 함께 스키장으로 1박 2일 여행도
하고, 1월 17일 이재욱 동기생 아들 준후의 생일에 수원에 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생일도
축하해 주었고, 평택, 부산에 사는 다른 가족들과도 한번씩 만났습니다. 출장가는 길에 수원에
들러 아이들만 데리고 나가 점심도 함께 먹으며 아빠 노릇을 대신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막내
하린이와는 올가을 학교 운동회에 삼촌이 아빠대신 꼭 가겠다고 약속도 했습니다. 소소한 일들
이지만 우리가 할수 있는 일들인것 같습니다. 이제는 지킬수 있는 약속을 하고 지키려고 합니
다. 44기 동기생들이 마음을 모아 적극 동참해주는 “다물후원회”가 있기에 이런 만남을 계속해
서 이어갈수 있을것 같습니다.
“하루아빠 되어주기” 2013년 다물후원회의 슬로건입니다. 다물후원회 인터넷 카페도 운영하고
소식지도 만들어 다물후원회의 후원자인 동기생들에게 가족들의 소식도 전했습니다. 조만간 아
빠가 타던 전투기를 보러가려고 합니다. 아빠가 떠난후 아직까지 한번도 아빠가 있던곳에 가보
지 못한 아이들을 데리고 가보려고 합니다.
올해는 2003년 순직한 2명의 동기생들의 10주기가 되는 해가 됩니다. 아빠가 떠날 때 너무 어
렸던 아이들이라 아빠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아빠의 기억을 만들어 주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
다보니 잠시 잊고 지내기는 하지만, 우리의 기억속에 지워지지 않았음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올해 2월에 SBS 방송 “식사하셨어요”에 출연했던 동기생 가족의 영상입니다.
나눔은 나눌수 있는 것을 가진 사람이 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눌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할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다물 44기 동기생 여러분,
그리고 공군사관학교 선후배님 모두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오늘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하여 가족과 함께 할수 있는 이 시간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