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沈默)의 강 영산강을 따라간다 <1> 용추봉 골짜기 작은 소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바다를 향하고
오늘, 내가 가고 있는 영산강(榮山江)은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용면(龍面) 가마골의 용추봉(龍湫峰)에서 발원하여 서남해로 흘러드는 하천(河川)의 이름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물줄기는 서해에 이르는 동안, 처음 가마골천을 시작으로 마지막 남창천에 이르기까지 모두 190여개에 달하는 본류(本流)와 지류를 통하여 몸을 부풀립니다.
가마골 표지석
하천(河川)의 하(河)는 큰 강을, 천(川)은 작은 강을 뜻하고, 보통 우리는 큰 강을 강(江), 작은 강을 천(川) 또는 수(水)로 쓰거나 혼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비(雨)나 눈(雪)은 일부는 지표면(地表面)이나 수면(水面)에서 증발하고, 다른 일부는 식물체를 거쳐 증산(蒸散 - 잎의 기공(氣孔)을 통한 식물체에서의 수분증발)하여 대기(大氣) 중에 되돌아가고, 또 다른 일부는 지하수가 됩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표류수가 되어 항상 낮은 곳을 향해서 흐르는데, 표류수는 사면(斜面)에서 최대경사의 방향을 따라 흐르므로 자연이 그 흐름의 길(路)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용연 1, 2 폭포 가는 길
이 유수(流水)의 통로가 되는 좁고 긴 요지(凹地)를 하도(河道)라 하고 하도에서의 물의 흐름을 하류(河流)라고 하며, 하도와 하류를 합쳐서 하천(河川)이라고 부릅니다. 하천은 수목(樹木)처럼, 줄기에 해당하는 본류와 가지에 해당하는 지류로 구성되는데 본류에 합류하는 것이 지류이며, 이와 반대로 본류에서 갈라져서 흐르는 것을 분류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영산강 본류의 길이는 115.8㎞이며 유역면적은 2,798㎢로 전라남도 총면적의 2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용소(龍沼) 가는 길 벼랑 위에 걸려 있는 출렁다리
영산강의 예전 이름은 금천(錦川), 금강(錦江), 금강진(錦江津)이라고 부르다가, 신안군(新安郡)에 있는 섬 영산도(永山島) 사람들이 왜구를 피하여 이주하여 나주 근처에 개척한 포구의 이름이 지금의 영산포인데 강(江)도 이 곳의 이름을 따라 영산강(榮山江)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영산강(榮山江)의 시원지(始原地)는 담양군 가마골에 있는 용소(龍沼)입니다. 용소가 있는 가마골은 용추봉(龍湫峰. 523m)을 중심으로 10리 정도의 계곡을 말하는데 규모는 작지만 용연1폭포와 2폭포 등 시원한 물줄기와 철따라 바뀌는 아름다운 경치가 볼만한 곳이지요.
용소(龍沼) 입구에 있는 용연교의 모습
가마골은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삼림이 우거져 사람의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나 6.25 격전지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에 거의 모든 삼림이 그 때 불 타 버렸습니다. 1950년 가을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던 전남,북 주둔 북한의 유격대 패잔병들이 이곳으로 숨어들면서 길고 긴 5년간의 전투가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유격대들은 이 곳 가마골에 노령지구사령부를 세우고 3개 병단이 주둔하면서 유격전을 벌리다 1955년 3월에야 육군 8사단 및 11사단과 경찰합동작전에 의해 완전 섬멸되었습니다.
용소(龍沼) 표지석
이곳 가마골에도 전해 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옛날 담양 고을에 풍류를 좋아하는 원님이 부임하였는데 가마골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곳 경치를 구경하고자 관속들에게 다음낭 그곳에 가겠다는 예고령을 내리고 그 날 저녁에 잠을 자는데 꿈에 백발선인이 나타나 "내일은 내가 승천하는 날이니 오지말고 다음날 오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영산강의 시원지인 용소(龍沼)의 모습
그러나 원님은 신령의 말을 저버리고 이튿날 예정대로 가마골로 행차하였습니다. 어느 못에 이르러, 그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있는데 갑짜기 못의 물이 부글부글 소용돌이 치고 주위에 안개가 피어 오르더니 황룡이 하늘로 솟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황룡은 하늘 끝까지 오르지 못하고 부근의 계곡에 떨어져 피를 토하고 죽었는데, 이걸 본 고을의 원님도 너무 놀라 혼절하여 그대로 죽었다고 합니다.
용소(龍沼)에서 흘러 내리기 시작하는 가마골천이 시작하는 모습
그 뒤 사람들은 용이 솟은 못을 용소(龍沼)라 불렀고, 용이 떨어져 피를 토하고 죽은 계곡을 피잿골, 그리고 그 일대의 계곡은 그릇 굽는 가마가 많다고하여 가마곡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가마곡이 가마골로 변하였다고 전합니다.
용소 뒷편에 서있는 용소의 표지석
옛 기록을 살펴봅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 편을 보면 "추월산 동쪽에 두대의 석담이 있다. 아래에 큰 바위가 있고 바위구멍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와 공중에 뿌리고 이 물이 쏟아져 큰 못을 이루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바위구멍은 용이 뚫은 것이라 하는데 마치 용이 지나간 자리처럼 암면이 꾸불꾸불 패여있다. 옛날에 전라도 안겸사가 이곳을 찾아와 용의 모습을 보고 싶어 청하자 용이 머리를 내밀었다. 안겸사와 그를 따라 왔던 기관이 용의 눈빛에 놀라 죽어 용소 아래에 안겸사와 기관이 묻힌 무덤이 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용소(龍沼)와 표지석의 모습
이렇게 시작된 작은 물줄기는 낮은 곳을 향해 흐르면서 수많은 지천들을 보태 그 몸집을 키우고 호남벌을 관통하여 그 곳에 뿌리 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물이 흐르니 자연히 농업이 발달하여 풍요로운 곡창지대가 만들어졌고, 강의 수량이 풍부하니 더불어 어족(魚族)도 풍부하여 강변을 따라 고기 잡아 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강을 따라 뱃길이 열리고, 그 배에는 다른 곳의 새로운 문물이 묻어와 고대부터 찬란한 문화가 꽃피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정서 속에서 다른 어느 곳보다도 풍부한 감성들을 갖은 호남인들은 강변의 고즈녁한 곳에 누정(樓亭)들을 지어 풍류를 즐기고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많은 애환(哀歡)들을 강물 따라 흘려 보내면서 길고 길었던 암울한 세월을 죽였습니다.
용소로 유입되는 작은 폭포같은 물줄기
영산강은 우리나라 4대강 중의 하나 입니다. 강의 몸집으로만 따지면야 저보다 더 큰 강도 있겠지만 그 쓰임새와 기여도로 따지면, 영산강은 너끈히 4대강에 들고도 남았습니다. 영산강의 본류는 다른 4대강인 한강(482㎞), 낙동강(522㎞), 금강(396㎞)에 비해 초라 할 만큼 짧은 편이나 옛부터 주운(舟運)을 이용한 교통의 중요도로는 다른 어느 강보다도 활용도가 높았습니다. 이는 영산포를 지나 상류 25㎞나 되는 지점(목포로부터 73㎞)까지 바닷물이 드나들 만큼 조수(潮水)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줄기는 중간에 구멍이 뚫린 곳에서 솟구치는것 같이 보인다
그러한 사실들은 영산강 본류나 지류가 흐르는 상류지방의 땅 이름에서도 과거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유입됐던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담양습지(潭陽濕地)가 있는 담양군 봉산면 와우리에 있는 해발 40m의 <조수(潮水)고개>가 그렇고, 광주시 하남공단 안청동을 흐르는 풍영정천(風詠亭川)의 해발 30m 지역에 있는 <소금나들이>라는 지명이 그렇습니다.
곧 꽃망울을 터트릴 철쭉 위로 보이는 용소의 물빛이 신비하다
이 밖에도 황룡강가의 광산구 송산교의 <염해평(鹽海平)>들과 장성 삼계 덕산리의 <해평들>, <상선들>, 장성 서삼 송현리의 <바다들>, 장성 북일면 성산리의 <구해(舊海)>, 그리고 지석강으로 유입되는 화순천의 화순읍 다지리의 <잠바댓들>, 이양면 소재지의 <배골> 등은 모두 바닷물과 연관된 지명들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퇴적물이 쌓여 수심은 얕아지고 결국에는 하구둑 축조로 강물의 흐름이 차단되는 바람에 이젠 지명으로만 남은 것이지요.
용소의 윗쪽에서 바라 보이는 시원정과 출렁다리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하는 고대문화권은 경주를 중심으로하는 신라문화권과 부여를 중심으로하는 백제문화권에 가려 상대적으로 소홀이 취급되고 있지만 BC 1세기부터 AD 3세기에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에 분포한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마한(馬韓)의 독자적인 문화가 영산강 유역을 따라 곳곳에 형성 되었습니다.
용소로 유입되는 가마골천의 모습
정확한 고증은 아니지만 마한의 54개국 중에서도 영산강 상류지역인 장성군 진원면 일대를 중심으로 토착적인 세력기반을 유지하면서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 존속하다가 3세기 중엽 백제에 복속되어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이 된 구사단오국(臼斯烏旦國)이 있었고,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조에 파로미(巴老彌)라고 표기한것을 근거로 할 때, 664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당나라가 백제에 구획한 주(州), 현(縣) 가운데 대방주(帶方州)의 속현인 포현현(布賢縣)을 파로미(巴老彌)라고 했다고 합니다.
가마골천 위로 늘어진 벚꽃나무에는 아직 꽃망울이 싱싱하게 붙어있었다
즉 파로미(巴老彌)는 발라(發羅)로서 지금의 나주시를 지칭합니다. 백제 때는 발라군, 통일신라 때는 경덕왕이 금산(錦山)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시대 때는 나주목이 된 불미국(不彌國)이 있었으며 그밖에도 고해국(?卑離國), 벽비리국(?卑離國), 불운국(不雲國) 등 좁은놋단검(細形短劍)문화를 배경으로 한 다수의 정치집단들이 산재해 나름대로 문화의 꽃을 피웠을 것입니다. 그 유물로 나주와 영암, 함평, 담양, 화순, 장성, 해남, 무안군 등 8개 시군의 영산강 유역에는 대형 옹관(甕棺)고분, 고인돌 등 독특한 문화유적들이 대거 출토되고 있고, 이밖에도 신석기(新石器)와 청동기(靑銅器), 철기(鐵器), 원삼국시대 등 고대문화를 꽃피웠던 다양한 유적들도 출품 되었습니다.
가뭄인데도 가마골천에서 용소로 유입되는 수량은 제법 많았다
영산강 유역의 또 다른 특징은 무등산 자락에서 흘러나온 증암천(甑巖川)을 따라 발달한 누정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치가 수려한 곳에 벽이나 문을 설치하지 않고 높게 지은 다락식 집을 누각이라고 하고 누각보다 약간 규모가 작은 정자를 누정이라 하는데 영산강 유역에는 이런 누각과 누정들이 500여개 이상이나 산재해 있다고 합니다. 특히 자미탄(紫薇灘)이라고도 불렸던 증암천가에는 대표적인 조선시대의 정원인 소쇄원(瀟灑園)을 비롯하여 이 땅에 화려한 가사문학을 꽃피운 산실이 되었던 누정들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용소로 흘러 내리는 계곡물이 마치 용이 지나간 자국을 따라 가는 것 같다.
물론 다른 지방에도 강줄기를 따라 많은 누정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의 누정들이 다른 지역과 다른점은, 보통 현직에 있던 관료나 지방의 유지들이 스스로의 업적을 과시하거나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건립한 것에 비하여 영산강 주변 누정은 벼슬을 마치거나 군주에게 버림 받은 선비들이 낙향하여 남은 생을 정리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다시말해 다른 지역의 정자들은 주거를 겸하며 학문을 가르키는 생활공간으로 만들어졌기에 그 규모가 컸으나 이 곳의 누정들은 홀로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여생을 정리하는 공간이었기에 그저 조그만 방 한칸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폐쇄된 공간 속에서도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의 교류가 이어지고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어 조선시대의 가사문학이 화려하게 개화되었던 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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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tsnh0330 원문보기 글쓴이: 김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