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이 흑인인 이유
200년 전 원주민은 스페인 군인이 전원 살육하고 아프리카에서 노예 상인들에게 강제로 실려온 흑인들을 사탕수수 농장이나 커피농사 등등 강제노역을 시키다 미국외 여러나라로 골라 팔고 남겨진 노예들의 후예이다
당시는 불란서의 속국이였으나, 1803년 독립하였다. 카리브해에는 여러 섬나라가 있지만 하이티는 유일하게 흑인으로만 이루어진 국가다
더욱 중요한 일은 이 민족은 조상이 누구인줄 조차 모르며 다만 당시 아프리카에서 노예상인들에게 끌려온 노예들의 반란으로 프랑스에서 독립하여 흑인 국가를 이룬 흑인 최초의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들에게는 조상들의 전통도 없으며 다만 하루살기에 온힘을 다 할뿐이다
국민생활은 오랫동안 통치자들의 독제와 무수한 구테타로 인하여 국민은 어려워지고 빈부의 격차가 심하며 GNP 300$미만 ,임금은 건설노동자 일일 우리화페로 2000원 기능공 8000원정도이며 공단노동자 월급은 100불미만이다 시멘트 40KG 한포에 6500원정도이니 국민생활이 어떠한지 알 수가 있다. 세계에 어려운 나라는 무수히 많으나 이 나라 같은 비운의 나라는없다
교통편
1. 인천공항 ( 대한한공 ) 뉴욕 캐네디 공항 - 뉴욕 1박 - 뉴욕(아메리카항공) - 아이티[포토프랭스 공항]도착
2. 인천공항 (아메리카항공)일본나리타 .-뉴욕공항1박-위와 동일
항공요금 : 때에 따라 변동함 [요금은 2항이 저렴하다]
자 연
아이티란 원주민의 말로 <산이 많은 나라>를 뜻한다.
평지는 국토의 17%에 불과하고, 북부의 산니콜라스반도에는 도미니카로부터 이어지는 북부산맥이, 남부의 가늘고 긴 자크벨반도에는 오토산맥과 라셀산맥이 연이어 있다. 산맥 사이에는 북부평야· 아르티보니트평야· 중앙평야 등으로 산간분지가 있어 주요한 경제활동의 무대가 되고 있다.
기후는 열대에 속하며 여름에는 남동무역풍이, 겨울에는 북동무역풍이 불고, 우기(4∼5월, 8∼10월)와 건기(6∼7월, 1∼3월)로 나뉜다.
연강수량은 지역에 따라 다르며 무역풍이 불어가는 쪽에 있는 포르토프랭스에서는 약 1250㎜이다. 연평균기온은 해안지대에서는 27℃, 산간지대에서는 18∼22℃이며, 포르토프랭스의 기온은 앤틸리스제도의 도시 가운데서 가장 높다.
늦여름부터 가을까지는 허리케인이 항상 내습한다.
역 사
히스파니올라섬은 1492년 C. 콜럼버스의 제 1 차 항해 때 발견된 뒤 에스파냐인의 식민이 처음으로 시작된 섬이다.
최초의 항구 라나비다를 비롯한 몇 개의 항구 건설이 섬의 서부에서 시도되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도미니카공화국의 산토도밍고가 건설된 이후 관심은 섬의 동부로 향했다.
17세기 초 토르튜섬은 프랑스인과 영국인의 해적기지가 되어 에스파냐로 운반되는 금·은을 약탈하고 있었는데, 17세기 후반 이후로는 차츰 섬의 서부지역에 정주하게 되었다. 프랑스인은 영국인을 쫓아낸 뒤 에스파냐인과도 충돌했는데, 1697년 라이스와이크조약에 의해 프랑스가 섬의 서쪽 1/3 영유권을 차지했으며, 이 식민지를 산도밍구라고 불렀다.
식민지경제의 기반은 커피·카카오·마류(麻類)·사탕수수이며, 사탕수수의 플랜테이션(栽植農業)은 북부해안의 카프프랑세(지금의 카프아이시앵)로부터 아르티보니트평야· 중앙평야에까지 확장되었는데 프랑스식민지 가운데서도 가장 발전되어 손꼽히는 사탕수수 수출지역이 되었다. 그 노동력 확보 수단으로는 프랑스· 아프리카· 카리브해지역의 삼각무역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가 수입되었다.
18세기말에는 백인은 3만 6000명인데 비하여 흑인노예는 50만 명으로까지 늘어났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물라토(흑인·백인의 혼혈아)와 해방노예가 1791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은 독립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1804년 독립운동 지도자 J.J. 데살린을 황제로 하는 흑인제국으로서 독립을 선언했으며, 국명을 아이티로 정했다. 1806년에는 공화제로 이행했으나 내분 때문에 국토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그 뒤로도 내란이 계속되다가 20년에 부아이에 대통령에 의하여 통일되었으며, 22년에는 히스파니올라섬 동부의 도미니카의 독립을 진압하고 점령했다.
그러나 44년 도미니카는 독립을 달성했다. 독립 후 1세기 동안 아이티의 역사는 독재와 반란이 반복되었다. 1915년에 미국은 자국민 보호를 명목으로 군사간섭을 감행, 34년에 F. 루스벨트 대통령의 선린정책이 등장할 때까지 점령하였다. 57년 대통령으로 뽑힌 F. 뒤발리에는 근대화정책을 추진하여 국민의 신망을 모았으나, 차츰 <시민의 용병>이라는 이름으로 끌어 모은 뒤발리에의 친위대(비밀경찰)를 이용하여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독재제도를 확립했다.
언론통제·집회금지 및 반뒤발리에파 투옥 등 각종 독재수법으로 경찰국가를 형성하고, 64년에는 헌법을 개정한 다음 스스로 종신대통령이 되었다. 뒤발리에가 죽은 뒤인 71년, 아들 J.C. 뒤발리에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독재체제를 이어갔다. 그는 취임 당시 20살이었으며, 당초 부친의 대통령시절 측근의 정치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차츰 장 클로드이즘이라고 하는 흑인·백인·물라토의 협력과 경제개혁을 시책으로 하는 정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국가인 기본적 성격은 변함이 없었으며, 85년 12월 수도 북쪽 150㎞ 지점인 고나이브에서 식량과 직업을 요구하는 대규모 데모가 일어난 것을 계기로 누적되었던 사회불만이 폭발함으로써 시위는 전국적으로 번졌다. 정부는 소란상태를 회피할 수가 없었으며, 86년 2월 대통령일가는 미국 군용기로 탈출, 프랑스로 망명함으로써 29년에 걸친 독재정치는 무너졌다.
정 치
독재정치의 붕괴로 인해 E. 낭피 육군참모장을 의장으로 하는 국가각료평의회가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87년 6월 노동조합의 총파업, 88년 6월 의회해산, 9월 P. 아브릴 육군중장의 쿠데타 등으로 혼란이 계속되었고, 이어서 89년 4월 군인들의 쿠데타와 90년 3월 시민들의 시위 등으로 결국 아브릴대통령은 사임했다. 그 후 E.P. 트루이요가 뒤발리에 독재정권이 무너진 뒤 첫 민간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12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J.B. 아리스티드가 당선되어 91년 2월 취임하였다.
의회는 양원제이며 주요정당은 진보국민민주연합(RDNP)·국가발전동맹(MDP) 등이다.
외교의 기본은 친미·반공이며, 중국·쿠바와는 국교가 수립되어 있지 않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한 프랑스어 사용국가이기 때문에 주변 여러 나라와의 관계는 긴밀하지 못하며, 특히 이웃 나라인 도미니카와는 역사적으로 대립관계가 심각하다.
경 제
기간산업은 농업이며, 국내총생산의 40%, 수출의 24%, 노동인구의 75%를 농업이 차지하고 있다.
커피·사탕·카카오·쌀·옥수수가 주요 생산품이고 그중에서도 커피가 최대의 수출상품이다. 산허리 비탈진 곳에서 자라는 커피나무는 사람의 손이 거의 가지 않는 야생이어서, 독특한 향기를 지니므로 프랑스에서 귀하게 여겨 주로 프랑스에 수출되고 있다.
농업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농업국이지만 식량은 완전한 자급을 하지 못하여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과거에 프랑스인들이 경영하던 사탕수수플랜테이션은 1791년의 아이티혁명 이후로 파괴되었으며 대농지가 농민들에게 분할되고 내란이 계속되면서 아이티의 농업은 쇠퇴해졌다.
공업은 최근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향상되고는 있으나, 여전히 경공업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출을 위한 공업(야구용품·전기기기·전자부품)과 국내수요를 위한 공업(식물성정유·신발·금속제품)으로 나누어지며, 수출을 위한 공업은 미국으로부터 원재료를 사들여 완성품을 주로 그 나라로 수출하는 조립공업이다. 그 성장요인으로 미국과 아이티의 지리적 근접성, 세제상의 특별대우조치 및 풍부하고 값싼 저임금노동력 등을 들 수 있다. 미국에서 사용되는 야구용품인 경구(硬球)·소프트볼의 대부분이 아이티에서 만들어진다.
건설업부문도 70년대 후반에는 상당한 성장률을 달성하였는데 공공투자와 외자에 의한 조립공장 건설로 인해 유도된 것이다. 광업도 농업과 나란히 중요한 수출부분이기는 하나, 그 대부분은 보크사이트가 차지하고 있다.
사회/문화
소수의 엘리트층이 전통적으로 프랑스문화를 지향해 온 것과 달리(오늘날에는 미국·캐나다의 영향이 크다) 대다수의 농민은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아프리카적이고, 특히 부두교(아프리카의 원시종교)가 널리 보급되어 있다.
언어면에서도 공용어는 프랑스어이지만, 아프리카언어가 혼합된 크레올어가 일상어로 되어 있다.
흑인이 90%를 차지하며 물라토가 10%, 백인은 1% 미만이다. 흑인과 물라토의 세력배분이 정치의 근본을 이루어왔다. 이 인종구성은 이웃 나라 도미니카와 상대적이다.
최근 도시화가 급속히 추진되고 있기는 하나, 인구 2만 이상의 도시인구비율은 35%이며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최하위에 속하고 있다.
국민의 약 80%가 연간소득 100달러 미만이고, 미국 플로리다주 방면으로 가는 난민이 끊임없이 뒤를 잇고 있다.
교육제도는 프랑스로부터 도입되었으며, 초등교육이 의무화되어 있기는 하나 문맹률이 80%에 육박하고 농촌에서 특히 높다.
한국과의 관계
아이티는 1949년 9월에 한국을 승인하였고, 62년 9월에 국교를 수립한 이후 국제무대에서 늘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으며, 북한과의 수교를 거부하고 있다. 한국은 1956년과 69년에 친선사절단을 아이티로 보냈으며, 72년에는 경제협력사절단도 파견하였다.
아이티에서도 82년에는 내무국방장관이, 84년에는 외무장관이 각각 한국을 방문했다.
2001년 아이티수출은 의류·전선·철강제품부문에서 867만 달러에 이른다. 한국은 아이티와의 실질협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1973·78·84년에 아이티로부터 기술연수생 4명을 초청하여 연수시킨 적이 있으며, 또 경운기 35대, 픽업트럭 6대, 순찰차 10대, 앰뷸런스 5대, 완구제품·어린이용의류·의약품, 태풍피해에 대한 구호금 등을 보낸 바 있다. 2001년 교민수는 3명, 체류자수는 6명이다.
출처 : 엠파스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