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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기 부터 곡송초등학교
나는
서기 1954년도에 태어나서
1961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967년 3월에 중학교 입학하고
1970년 3월에 김천고등학교( 일명 김천고보 )에 입학하였다.
1974년 3월에 울산대 입학하여 1978년 2월에 졸업하였다.
나는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양력 11월 6일 토요일( 음력 10월 11일)
(양력은 요즈음 컴퓨터가 있으니 찾기 쉬워요)
대한민국 경상북도 금릉군 감문면 대양리 409 번지에서
1920년생 아버지 서 순재와 1927년생 어머니 김영금의 2남으로 태어 났다.
전쟁이 일어 난 그 해 1950년 8월에 태어난 형님이 한 명 있고
내 뒤로 59년에 태어난 남동생 하나와 61년에 태어난 여동생이 하나 있다.
나의 대한 기억은 국민 학교 가기전까지는 거의 어머니에게서 들은 것이다.
나는 5살 되던 해까지 엄마 젖을 먹었다 한다.
4 살 때인가 베틀에서 떨어져 앞니가 1개 부러져서 젖 빨 때마다 엄마 젖이 아파서
김천에 가서 잇발을 뽑았다 한다.
그 당시 어느 부분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기억이다.
아파서 그랬을까?
세토막이나 기억 난다.
하나는 우리 동네 약간 지나서 개울 따라 아버지가 나를 등에 엎고 가는 것
둘째는 개령까지 걸어가서 트럭 뒷편에 나를 던져 올린 것.
세째는 송치과 갔다가 다시 김천 남산 병원의 문앞에 발이 쳐진 것을 기억하고
도까루 종이에 과자 한운큼 사서 들려 주던 일.
그 다음은 할머니 죽고 그 다음해 빈소 나가던 날 뜨럭에서 머리에 띠두르고 상복입은
엄마 따라 다니던 것,
할머니 살아 계실 때 할머니에게 나를 맡기고 들에 갔다 오니
내가 집 모서리 나무 아래 있는 양잿물 덩어리를 입에 넣고
입이 당나발이 되었는데,
할머니는 손자 죽을 까봐 겁이 나고, 엄마는 엄마대로 걱정을 하고
인근 삼봉에 가서 약을 사 가지고 오고
약사 지시대로 젖은 짜서 그릇에 담아 일주일 정도 주니 차츰 깨어 났다요.
얼마전에 돌아 가신 이웃의 5촌 아주머니가 그러던데 텃밭의 가지 끝이 비물어 없어졌는데,
알고 보니 할머니 따라 그집에 놀러 갔다가 기어 다니면서
내가 입으로 비물어 먹었었다나요.
남동생은 음력 3월 3일(삼짓날) 낳을 때 어렵게 낳은 동생이고
7 살 아래 여동생 낳은 때는 댓병 들고 메뚜기 잡으러 가던 양력 9월 정도 이었다.
6살 때쯤 일이었다.
형이 곡송학교에서 구미 금오산으로 소풍을 간다고 하여
새벽에 이웃의 형님 동기가 '정일아 소풍가자' 하니
배가 아팠는가 어디가 아팠는지 아파서 못간다고 하였다.
그 후 가덕도 고아원에 가면 중학교 까지 졸업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 동네에서 내가 알기로 우리 4촌 형을 비롯하여 4명이 갔다.
참으로 살기 어려운 시절이었는가 보다.
4촌 형은 큰 아들인데도 그랬다.
그렇게 4명이 부산 다대포에서 가덕도 고아원에 갔지만
1명은 소아마비가 걸려서 한쪽 팔을 못쓰게 되어 돌아 왔고
4 촌 형은 중학도 끝나기 전에 몰래 대리고 와서 운전 교육을 받아
운전한지 얼마 못되어 교통사고를 내어 이래 저래 불어난 부채 때문에
부산으로 1967년 우리가 중 3 때 부산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그 때 4촌 동생도 김천중학 1학년 다니다가 학교 중도 포기하고 따라갔다.
그 4촌 동생 요즈음 운전해서 생활한다 들었으며 부인도 몇년전에 죽었다고 들었다.
초등학교 다닐때는 공부도 참 잘한다고 들었는데.
공부만 잘한다고 모든게 잘 되는게 아닌가 보다.
주위 환경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믿는 사람들의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야 한다.
가덕도에 간 4명중 한명만 중학 졸업하고 부산의 성지공고를 졸업하고
객지에 있다가 고향에 25 세쯤 돌아 와서 농사를 짓고 있다.
우리의 모교 곡송학교는 1929년 4년제로 출발 하였다.
그 전에 학구열이 있는 사람들은 6-8 킬로나 떨어진 아포나, 개령으로 걸어 다녔다 한다.
국민학교만 나와도 면서기 정도는 할 정도였다.
그 당시 지금의 감문면은 곡송면과 위량면으로 나누어져 있다가
1930 년대 행정 구조 개편으로 감문면으로 합쳐 졌다.
예전에는 곡송학교와, 위량학교의 이름이 왜 생겼는지 궁금 하였다.
아버지는 1920년 생이니까 10 살쯤 되어 곡송학교 1 기생으로 들어 갔지만
2년인가 다니다가 월사금을 못내어 중도 포기한 모양이다.
그래도 한글은 깨쳐서 읽는데 지장 없고 쓰기도 맞춤법은 맞지 않아도 그냥 쓴다.
어머니는 여자이고 거리도 8킬로 정도로 멀어서 학교는 생각 안했는데,
일제 말기에 위량학교에 1, 2년 다니면서 일본어를 조금 배운 것 같다.
선생들이 교장을 비롯하여 일본인들이 많았다 한다.
내가 학교에 들어 가기전에는 형이 가져온 이승만 홍보용 책자도 있었다.
2010 년 의 모교의 본관 모습
우리가 다닐 때는 일제시대에 지은 벽이 나무로 된 단층 건물이 있었고
본관 외에도 본관 왼편에도 흙 바닥인 교실이 있었고
본관 뒷편에 언덕에 2층 3층 이라고 불렀던 교실들이 있었지요
1961년 3월 초 어느 맑은 날
드디어 서정선의 역사가 벌어진 날 이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6촌 영국이는 아버지가 따라가지 않고
우리 아버지를 따라 나와 같이 곡송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동네를 벗어나자
앞서 가면서 흰두루마기 입고 따라 오시는 아버지 보고 빨리 오라고 독촉한 기억이
새로운데 벌써 48 년이 지난 일이었다.
1학년 때 부터 6학년 때 까지
2학년 때 3 반 으로 나누어 공부한 것 외에 전부 2반으로 나누어 공부했다.
남자 76 명, 여자 55명 정도 이었다.
4학 년 때 부터는 남, 여 2반 으로 나누어 공부 하였으니
요즈음으로 이야기 하면 2반이 한반 교실에서 공부 했다.
3학 년 때는 옆에 여자들이 2명 있었다.
그런대로 사이좋게 지냈다.
그 여자 애들 중학은 다녔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먹고 살기가 힘든 시절 이었다.
지금은 손자들 마이 컸겠지.
일찍 시집들을 갔다면.
입학하고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네모로 접어서 얼마동안 달고 다녔다.
어느 날 그 손수건에 코를 닦으니 형이 그라지 마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코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마 이름 석자도 적지도 못하고 학교에 갔을 것이다.
1에서 10까지는 물론 모르고
맨 처음에 배운게
아버지
어머니
순희야
영희야
철수야
바둑아 나하고 놀자
이래 저래 학교 다니는 것은 재미 있었다.
숙제도 없고
나 보다 공부 못하는 애들도 상당히 있었으니까?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게 아니라
놀이터에 놀러 가는 것처럼 다니면 되었다.
학교 가는 길에는 검문소가 2, 3군데 있었다.
학교와 같은 동네인 태촌, 그리고 암마 고개 넘어 북성이다.
항상 그러는 건 아니지만 학교 갔다 지나가면
"끄뜰"하면 그곳으로 가야 한다.
대체로 나보다 4,5년 선배들인데
집에 노니까
이래저래 시간 떼우는게 그렇다.
불려가면 쓰잘데기 없는 훈시나
풀같은 것 뜯어 주는 심부름도 해야한다.
요즈음은 학교도 마이 다니고 고향 근처 동네에 젊은이는 구경도 하기 힘들다.
그리고 괴롭히는 자들이 있으면 일러 주면 된다.
집에서 학교 까지 거리가 대충 3 킬로 정도 된다.
겨울에는 눈과 매서운 바람과 싸워야 한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니던 길보다 더 먼 길을 학교 같다 오는 길에 접해야 한다.
암마 고개 마루에 올라서면 책보는 등에 어깨와 허리 사이에 비스듬하게 둘러 매고는
집 근처 까지 달음질 하기도 많이 했다.
100 미터 달리기는 잘못해도 장거리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여름철에는 길 가다가 봇도랑에서 세수도 하곤 했다.
집에서는 엄마가 물동이로 물을 퍼다 나르기 때문에 밥해먹는것 밖에 안한다.
소 먹는 물도 가끔 물지게로 져다 나른다.
나만 그러는게 아니다.
비슷한 또래들은 그렇게들 하고 살았다.
3 학년 정도 되니까 아버지가 조그만 지게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그것 지고서 흙도 파다가 소마구나 거름짜리에 퍼다가 붓고 나무도 하러 갔다.
나는 그런게 나름대로 재미 있었다.
동네 애들 끼리 모여서 새끼도 꼬고
망태기 가지고 풀베는 것은 당연하다.
소도 풀 먹이러 많이 대리고 다녔다.
고향에는 재옥이 고향에 어모 냇가 정도 되는 이터 냇가가 있다.
폭은 직지천의 2/3 정도 되었다.
그 곳은 나의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래도 곱고 보더러웠다.
선배들과 어울려 편 갈라서 씨름도 하고,
넓이 뛰기도하고
꼴 한움큼식 뜯어 놓과 낫 던져서 꼿히면 풀 가져가기 내기도하고,
여름철 물 많이 내려간 뒤에는 헤엄도 하고 고기도 잡고.
헤엄은 방천 아래 30 평 정도 크기의 둠붕에서 배웠다.
소도 대리고 들어가서 씻어 주기도하고
물속으로 누가 많이 가는지 시합도 한다.
학교의 2000 평 정도의 운동장 청소 구역은 동네별로 할당된다.
토요일날이 청소 날인데 집에서 대나무 빗자루 안들고 가면
동네에서 1킬로 떨어진 곳에서 책보로 눈 감겨 놓고
돌아 가면서 대빗자루 손잡는 곳을 잡고 한대씩 돌아 가미 때린다.
고향 동네 거리도 날잡아서 국민 학생들이 모여서 한다.
우리는 동네가 작아서 남자가 10명 정도 밖에 안되었다.
많은 동네는 30, 40 명씩 되었다.
동네 청소 할 때 집집마다 다니면서 닥달하곤 했다.
늦잠꾸러기는 항상 말썽이었다.
소풍은 배시내 냇가(감천)가 백사장이 단골 메뉴이고
맛배기로 개령 절, 백운산, 이선호 고향 근처 소재 지나서 대원수리기 등이다.
3, 4 학년 어느 때 배시내 냇가로 소풍을 갔다.
엄마가 알미늄 도시락에 찐빵을 손으로 만들어 싸 주셨다.
기득 넣어 주셨다.
한 10 개 정도 될 것이었다.
5개 정도만 먹고 나머지는 그냥 집으로 가지고 와야 하는데
감천냇가를 향해서 돌 집어던지듯 다 집어 던졌다.
엄마가 그것을 알았다면 얼마나 화 났을까?
바쁜 와중에 만들어 준 것을 냇물에 다 집어 던졌으니.
참 철이 없기는 철없는 시절 이었다.
6학년 때는 고향에서 30 킬로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한 직지사로 수학 여행을 갔었다.
요즈음 같아서는 당일치기 해도 남음이 있을 테지만
그 당시에는 돈 적게 들여 간다고
6학년 전부가 학교에서 8 킬로 가까이 떨어진
구미역 바로 다음역인 아포역까지 걸어 갔다.
가다가 자기 짐이 무겁다고 4 킬로 정도 운반해주면 10원 준다고 했다.
10원이면 어느정도 가치가 된 돈 이었다.
내 짐과 합하니 꽤 무거웠다.
담임 선생님이 끙끙거리는 것 보고 무슨 짐이 그렇게 많느냐고
그런 말도 기억 난다.
하지만 그 운임비는 받지 못했다.
그렇게 기차타고 대신, 김천역을 지나서 직지사 역에 도착했다.
직지사역에서 직지사 까지 또 4 킬로 가까이 걸어 갔다.
그 당시 직지사 절뒷산에 소나무 위에 백로들이 하얕게 있었다.
하지만 그 백로들 몇년 뒤 다 없어지고 말았다.
하룻밤 직지사 바로 아래 여관집에서 잤다.
우리 학년 중에 벙어리도 한명 있었다.
천태성 이라는 친구인데 그 애와도 한번은 같이 앉아 봤다.
벙어리와 의사 소통도 별로 힘든것은 아니다.
손발로 하다가 안되면 글로 적어 가면서 하면 되니까.
그리고 벙어리 이지만 공부는 중간 이상이다.
학교 가는 길 북성에는 길 옆에 대장간이 있었다.
가게에서 과자도 좀 팔고.
나는 대장간 풍경이 참으로 신기했다.
낫이나, 호미, 부엌 칼, 괭이 등을 만들거나 날이 무딘 것 벼린다.
대장간 한 족 구석에 조개탄을 넣고 밑에서 풀무로 저으면 불이 벌겋게 달아 오르고
그속에 작업 할 재료들을 벌겋게 달군다.
벌겋게 달군 쇠붙이를 머루 위에 올려 놓자 말자 그 집 아들과 딸이
해머를 쾅! 쾅! 쾅! 두드린다.
아버지는 집게로 잡은 물건을 계속 잡고 돌리고.
참 요즈음 생각하면 놀라 잡아질 풍경이다.
처녀가 망치도 아니고 어른들도 들기 힘든 오해머질을 해 대었으니.
그 여자 살아 있다면 지금 60 대 중반 되었겠지요.
우리 동네에 같은 학년으로 남자는 6촌 영국이, 4촌 영복이, 7촌 순배 이렇게
그리고 여자는 숙희, 순단 두명 있는데
영복이, 순단 는 등너머 있고
내가 사는 곳에 4명 있었다.
숙희 하고는 같이 많이 다녔다.
그래도 내가 좀 믿음직 했나 보다.
그 집 어머니가 거리가 머니 같이 다니라고 했다.
가끔 학교 근처에서 둘이 걸어 오면 다른 애들이 놀려대서
숙희더라 먼저 멀찌감치 가면 내가 따라 가겠노라 한 경우도 있었다.
3학년 때 쯤 교실 컵같은 비품을 동네별로 사오라 한거 같았다.
5원씩 거두는데 순단이는 10 원을 가지고 왔다.
잔돈이 없어서 즉시 못주고 가지고 있다가 잊어 버렸다.
순단이는 잔돈 달라 조르고 돈은 없고 한 동안 애를 먹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집에는 예전에 제사가 6번 정도로 좀 많았다.
무엇 때문에 바빠서 그런지
경제적 사정도 힘든 시기 였으므로
학교 마치고 배시내 장터에 가서
김하고 뭐를 사오라 그랬다.
그래서 친구들과 학교에서 3 킬로 정도 우리집 방향과 반대 방향인
배시내 장터에 가서 사가지고 책보에 싸가지고 돌아 오는 길이 었다.
북성 근처에서는 삼봉에 있는 감문중학교에 다니는 선배들과
우리들과의 방향은 반대 방향이므로 서로 마주치는 거리가 500 미터 정도 되었다.
우리형 친구들도 나를 보고는 동생이라는게 금방 표 나는가 보다.
만나면 '정인'이 동생 이라고 반갑게 맞는다.
그런 지점에서 배시내 갔다가 오다가 선배 여학생 두명을 만났다.
왜 그런지 잘 모르지만 그 선배들에게 우리 친구들은 약 올리기 좋아한다.
나는 약 올리는 축에 안낀다.
그 날도 친구 3명과 배시내에서 올라오다가 보니 그 여학생 선배들과 마주쳤다.
친구 3명이 약 올리며 도망 갔다.
나는 약을 올리는 축에 끼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 냥 걸어서 지나가는데
갑자기 내 옆으로 들이 닥쳐서 내 책보를 낚아채 갔다.
어째서 그렇게 당했는지 알수가 없다.
그것도 여자들에게.
내가 따라가니 도망 가 버린다.
그렇게 하다가 내가 책보를 포기 하는 것처럼 하고는 그냥 오다가 보니
선배들은 책보를 가지고 가다가 내 버리지 않고 그냥 가지고 갔다.
난 몹시 황당했다.
비록 김하고 두가지 정도 제수용품도 책보에 쌌는데.
한참 만에야 우리동네 여학생 선배가 책보속에 있던
제수용품만 들고 왔다.
아마도 엄마한테 많이 혼 났을 것이다.
그 다음 날 가니 신기 하게 책보가 교실에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동기 우석태 누나 였다.
아마도 석태가 나한테이야기도 안한걸 보니 좀 미안해서 그런것 같다.
지난해 우석태 남동생을 만나서 이야기 하니 작은 누나가 좀 별나다 했다.
책보는 나와는 별로 친하지 않은가 보다.
또 한번 5학년 때 겨울이었다.
학교 오가는 길에 보모들 몰래 성냥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방천 둑에 불을 놓고 끄는 재미도 있었다.
불놀이는 나름대로 재미 있었다.
그러다가 책보를 방천 곡대기 두고 밑에서 불을 놓는데 갑자기 불이 와르르
하고 방천 위로 치솟았다.
순식간에 책보 한 쪽 모퉁이를 태워 먹었다.
엄마한테 혼날 일이 태산 같았다.
새로 구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엇다.
며칠동안 엄마 몰래 방 구석에 갔다 놓고 다니다가
갇 시집 온 영국이 숙모에게 부탁해서
재봉털로 수선 했다.
조금 자세히 보면 금방 표가 난다.
며칠 후 엄마한테 들켜서 혼이 많이 났다.
또 6학년 때 금릉군 체육 대회가 고향 감문 중학에서 있었다.
6학 년이라 중학교 입학 시험 때문에 공부 마치고 걸어가다가
책보 가지고 다니기는 힘들것 같아서
친구들 3명과 같이 중학교 근처 길 밑의
물빠지도록 설치한 흄관에 넣어두고 가려 했다.
그런데 나는 관안에 넣지 않고 조금 보이도록 놓고 갔다.
그날 여러 국민학교들이 참가 했는데
우리 모교가 우승했다.
그래서 해가 지고 어둡도록 중학교 운동장 체육 선생님을 선두로
목이 터져라
"흰구름이 감도는 백운산 아래
닉동길의 선산 가도 앞을 가로한
그 이름도 훨씬 곡! 우리 곡송교!
만세 만세
영원히 만세 "
교가 부르면서 2-3 바퀴 돈 다음
돌아 오게 되었다.
돌아 오다가 책보 놔 둔 곳에 오니 책보가 보이지 않았다.
집까지 2킬로 가까이 되는데 야단 맞을 생각 때문에
친구집에 가서 성냥 빌려서 그 곳에 가서 성냥불 켜고 찼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밤 9시 가까이 되어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니
중간에 형이 마중 나왔다.
학교 갔다가 밤 9시가 되도록 집에 돌아 오지를 않으니 걱정이 많이 되었으리라.
문제는 그 당시 중학교 입학시험 때문에 6권 정도 되는 책을 다 가지고 다녔는데
몽땅 잃어 버렸으니
그 다음날은 전과와 도시락만 싸가지고 학교에 갔다.
며칠 뒤 형이 김천에 가서 국어와 산수책만 사왔다.
다른 책은 없어서 못 샀다.
가을 운동회 연습 시간에 1962 년 당시
불려지었던 5.16 혁명 주제가가 엠프로 흘러 나왔다
"동트는 새아침에 어둠을 뚫고
찬란히 밝아 오는 혁명을 뚫고
죄악을 뿌리 뽑고 웃음을 심자
새 나라 새살림을 호령하려나
아!아! 아!아 감격의
새날이다. 오! 새날이다."
이 때 부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패를 뿌리 뽑는다고 하는데
많이 개선 되었지만 50년이 지난 아직도 부패는 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가보다.
인간들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부패를 뽑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학교 때 가장 기억의 남는 것들은 가을운동회이다.
가을 운동회 준비는 여름 방학이 끝나고 얼마 않아서 시작된다.
4,5,6 학년 여학생들은 공부 끝나고 남아서 매일 1시간 정도씩 마스게엠 연습을 한다.
남학생들은
덤불링과 곤봉체조 기마전 등을 연습한다.
우리동네에서는 저녁 먹고 음력 7월의 달빛을 받아 가며
마을 입구에 남학생들이 모여서 편갈라 100 미터 달리기 연습을 하였다.
그렇게 연습한 사람들 중에 나중에 금릉군 대표로 발탁된 이도 있었다.
무엇이나 재능이 있으면 스스로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딴딴따! 딴따딴! 딴따 딴따
딴따다 딴따다 딴딴딴!
우리가 학교 다닐때 본관 쪽에 위치한 엠프에서
울려 나오는 행진곡.
아침 일찍 검정 빤스에 흰 런닝 입고
가을 아침 추위에 발발 떨면서
모여서 학교로 향한다.
1,2 학년 때는 소운동회 한다고 하면 잘 몰라서
상급생들에게 물어 보면 소몰고 가서 하는 경기라 해서
그런건가 생각 한적도 있었다.
집집마다 소가 있고 또 소들을 몰고 다녔으니까.
운동장 상공에는 높다랗게 걸린 휘황 찬란한 만국기들이
비취빛보다 더푸르른 가을 하늘을 배경 삼아 펄럭 거리고,
미술 선생님이 직접 그려 만든 개선문은
글씨체며 개선문 양쪽 옆의 그림이
지금 파리의 개선문 보다 더 멋있고 웅장했다.
우리가 국민학교 다닐 때 운동회는 단순한 운동회만
치러 지는 것이 아니요
주위 사람들이 모여서
젊은이들은 연애질 하고
좀 나이가 들면 국밥집에 둘러 앉아서 막걸리 마시면서 여담하고,
친척들 만나서 안부들 물어 보고.
점심 시간 직전의 바구니를 두개 엎어서 만들어 매단
어머니들의 오자미로 밥통 트뜨리기도 재미있다.
그 중에서도 동네 별로 하는
릴레이
줄다리기
등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
그 때만 해도 젊은이들이 동네 마다 넘쳐 났으니.
경기 하다가 서로 맞다고 말다툼도 해가면서
그 중에 동네별 릴레이는 가관이다.
우리 곡송 같으면
소재(지금은 구미로 편입), 월유(이형근), 대조(김경덕), 완동, 신풍,
새터(우정화, 임용환),
암마(우석태), 배시내(이일우, 김태근,김동훈), 천동(서정선), 북성 등
동네별로 4명씩인가 대표를 뽑아가지고
달리는데
꽹과리며, 북 온갖 응원 장비가 다 동원된다.
운동회 참석 인원도 대단하다,
학생이 900 명 가까이 되니 학부모, 인근 동네 어른들 합하면
족히 2000 명은 넘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넓게 보이던 운동장인데
요즈음 가보니 채 2000 평도 안되는 곳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인산 인해이었다.
거기에다가 뻥티기 장사, 국밥장사, 뽑기, 가판상점들,
솜사탕 장수, 풍선 장수,빵 부는 날라리 장사 등
장사들이 운동장 가에 돌아 가면서
빽빽히 진을 친다.
운동회도 재미 있지만
부모님 쫄라서 5원, 십원 타가지고 나름대로 사먹는 재미가
더 즐거웠지.
남 사먹고 노는 구경도 하구,
1원 주고 카라멜 "또"뽑기도 하고, 풍선도 뽑구,
그런데 큰풍선 그것은 왜 한번도 안뽑혀,
돌리서 마추기도 함해보구.
그런데 응원은 지겹다.
청군 백군 나누어서
한쪽에 앉혀 놓고 계속 응원가를 불러 대며 노래를 한다.
그 때만 하더라도 팜플렛이 없으니
마이크에서 외치는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글쓰기와 달리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기억 하기론 3등만 해도 공책이 있는데
3형제와 여동생 도합4명이 공책 타는걸 못 기억 하니까.
어쩌다가 한번은 남동생이 장애물 경기에서 공책 탄 기억 만 난다.
나도 6학년때는 장애물에서 한번 공책 따겠다고 노력 했으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
장애물에서 띰틀은 기본이구.
가로막이 나무.
우리들이 직접 손으로 꼰 새끼로 만든 그물망 등이 있어는데
나는 그물망 통과를 기회로 잡고 있었는데
무릎에 왠 부스름이 나서
그곳을 통과 할려면 각개전투 낮은 포복으로 통과 해야 하는데
다 핑계이겠지만
마지막 공책 탈 기회를 또 잃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나는 꼴지는 아니다. 6명 달리면 5등, 잘하면 4등
아!아! 그 때는 왜 학생들에게 무거운 모래들기 같은 종목은
왜 없는지. 그런건 했으면 2-3등 할것 같은데.
운동회 하면 달리기 때문에 항상 마음 졸인다.
등수도 등수 이지만
모든 경기는 응원석에서 바로 옆에 서있는
개선문 뒤에서 준비 했다가
개선문을 통과하여 나도 돌고 되어 있었지.
달리기!!!
준비! 탕 하는 총소리가 더 무섭다.
가끔 가다가 화약이 떨어져서 호루라기를 사용하면
그처럼 반가운게 없다.
달리는 폼들도 여러 가지이다.
항상 6-7명 중 한 두명은 모자 창이 뒤로 가도록 쓰고 달린다.
한 반에서 10 팀정도 달리다 보면 모서리 도는 데서
꼭 한 두명은 넘어지기 마련이다.
응원 구호도 1-2 학년 때는 너무 원색적으로 했지.
뭐 전쟁 끝나고 얼마 안되어서 그런지
"울로 먹자 청군"
"알로 꺼져라 백군"
등으로
그러다가 언젠가 그런 구호는 않좋다고 바꾸어 버렸지.
남자들은 기마전도 재미있었지
5,6 학년쯤 되면 전부다 한다.
물론 어찌 보면 너무 위험하고 전투적이다.
상대편 애의 등에 밟고 올라가서 떨어 뜰리려고 하니.
요즈음은 부모들이 그런것 보면 당장 못하도록
항의 할 것이다.
곤봉 체조도 한동안 유행 했지요.
나는 못해 봤지만.
고난도 덤부링도 있었구.
점심시간 직전에는 밥통 터뜨리기가 항상 있었지.
길다란 대나무 장대 끝에다가 크다란 대소쿠리 두개를 포개서
만들어 그 속에는 색종이 테이프와 꽃가루 종이
가끔씩은 비둘기도 잡아다 넣었지.
청백 나누어서 엄마들이 오자미로 던져서
일찍 터뜨리는 팀이 이기지.
그것이 터지면 오색 색종이 테이프는 바람으로 소용돌이 치고
색종이 꽃가루는 바람에 날리고
평화의 상징 비둘기는 창공으로 날아가고.
그것을 끝으로 점심시간이다.
점심 시간이 가장 재미 있지.
집에서 엄마들이 싸가지고 온 점심을 친척들, 아니면 이웃들과
죽 둘러 앉아서 먹는게 명절 이상이다.
반찬도 꽤 많고
고구마는 기본이고,밤이나 땅콩 등 희귀한 음식을 챙겨 오는 집도 있고.
애들은 용돈 탄 것 가지고 응원석에 앉아서 재대로 구경
못한 것 구경도 하고 사먹기도 하구.
또 크다란 공굴리기가 단골로 있었지.
청 백 나누어서.
5,6학년 여학생들이 하는 마스게임은 우리들 눈에 신기 하기만 했지.
9월달은 개학 하면 얼마 않있어 매일 운동회 연습이 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여러 친구들도 아다 싶이 공부를 독촉 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먹고 살기가 더 급했으니까.
그 때 그 학생들이 다 도회지로 빠져 나가서 지금 도시는 만원을 이루고
그 때 어른들은 하나둘 자꾸만 저쪽 세상으로 향해 가니
요즈음은 곡송 초등 유치원생 포함해서
전체 90명도 안되는것 같으니.
재미난 운동회가 있기는 있는가 모르겠군요.
그리그리하다가
6년이 지나고
그 해 가을에 학예회도 재미 있었다.
1개월 이상 방과 후 준비해야 했다.
나는 지나가는 행인 역을 한 번 맡았다.
물론 아버지 두루마기와 모자 가지고 왔었다.
그리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쳐야 했다.
담임 선생 나우엽 선생님 말로는 동일계 고등학교 무시험이라는 제도가 생겨서
고향 감문 중학교에 가면 대학 진학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이 었다.
하지만 원서 적는 날 아버지가 오셔서 '감문중학' 이라 하고 돌아 가셨다.
밤새도록 고민하고 감문중학 졸업하고 집에서 일하는 형님과 같이 아버지를
설득하여 바꾸기로 하고 학교에 갔다.
하지만 김천 중학은 안된다 했다.
'금릉 중학 내 보라 하신다'
그래서 내가 금릉중학 가게 된 사유이다.
내 혼자 갔다.
참고로 공부순으로 상위 모두 김천중학 간 것은 아니었다.
1,2,3 등은 다른 곳으로 갔다.
1등을 자주 하고 급장도 여러번 한 장대수는 가정 형편상 감문중학에 갔다가 나중에
유한고등학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대구에 있다 한다.
2등을 자주하던 권용조는 집안이 경제적으로 좀 뒷 받침이 되었는지
대구 계성 중학교에 원서 내었다가 떨어지고, 영남 중학교 들어 갔는데
나중에는 고려대 졸업 했다 들었다.
학교 근처의 우석태는 서울교대 졸업하고
서울에서 초등학교 선생 하다가 10년도 전에 고향 근처에서 교통 사고로 이 땅에 없다.
석태 동생이 내 대학교 후배 이다.
지금 대구의 귀 금속 하는 우정화는 고향 감문중학교 졸업하고
김천 고등학교에 왔다.
우정화네 집은 우리가 국민 학교 다닐 때부터 고향에서 철공소 하는 곳이었다.
정화는 나와는 좀 친한 편이었다.
한두번 철공소 구경도 하러 놀러 갔었다.
올해에도 졸업하고 처음으로 전화하고 대구에 놀러 갔었다.
임영환이는 아버지가 선생님인 관계로 5 학년 때인가 곡송국민학교로 전학 왔었다.
영환이는 경북대 수학과 졸업하고 계속 공부하여 지금 서울 모대학 전자과 교수이다.
고향 친구 한 명을 비롯하여 몇명은 6 년간 다녀도 한글도 못깨쳤다.
하지만 친구는 친구이다.
다들 어떻게 살아들 가고 있다.
가정 형편상 중학교도 못간 친구도 몇명되며, 여자 아이들은 여러명 된다.
겨울 방학 전에 사은회도 가졌다.
동네별로 떡도 해오고,
빵도 굽어 오고
부침게도 해오고
돼지도 잡고 하였다.
그리하여
"눈비를 이기고 닦아 온 여섯해
오늘은 보람있는 영광의 졸업날
언니여 ,형들이여, 얼마나 기쁘셔요
빛나는 앞길을 축하합니다 "
로 시작되던 노래는 우리 5학년 때 막내리고
"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잘 하여
우리는 언니(형님)뒤를 따르렵니다.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나라의 새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이라는 노래를 끝으로
6 년간 수련장이 이었던 곡송국민학교 시대를 마감한 것이다.
교정에 운동회 때마다 그늘로 사용하던 아름들이 수양버들은 사라진지 오래다.
오로지 거대한 은행 나무 두 그루만 지금 가지 그 때 그 자리에서
곡송학교의 역사를 뽐내며 버티고 서있다.
2010년 7월 5일 찍은 것
졸업 (1967년 2월) 하고 40 년이 지나니
학교 다닐 때의 모습이라곤 저 두 그루 은행나무 밖에 없다.
1961 년에 입학 했을 때도 아름들이 되었으니
아마 1929년에 개교 후 조금 있다가 1930 년대나 1940 년 대 초에 심은 것 같다.
저 은행 나무 아래에서 5,6 학년 운동회 때는 전교생 900 명 가까이가 응원을 했었다.
그 전에는 저 나무와 50 미터 떨어진 곳에 수양버들이 있었는데
그 나무들은 사라진지 벌써 20 년도 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