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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의 찬양예배 사역
본 글은 신,구약 성경에서 보여주는 찬양예배 사역과 모델을 이해하고 특히 신약교회가 지지하는 예배사역모델을 확인하는데 있다. 또한 성경적 사역 원리에 의해 오늘날의 찬양예배 사역을 평가하고 교회 안(특히 중소교회)에 적용하기 위한 사역의 노하우를 전수 받는데 있다.
1. 구약의 찬양예배 사역
- ‘성막의 변천사’를 통해 우리는 구약의 찬양예배 사역을 확인할 수 있다.
- ‘성막의 변천사’를 살펴보기 전에, 모세의 성막 이전 우리는 단 시 대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 에덴동산에는 성막이 없다. 왜? 죄가 없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하느 님을 뵈올 수 있었다.
- 죄를 짓고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하느님은 그들에게 가죽 옷, 곧 희생을 통해 하느님과의 제한적인 만남을 허용하셨다.
- 이미 이때부터 피 흘림이 없이는 즉, 희생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 다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1) 모세의 성막
-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은 성막을 세 울 것을 B.C. 1445년 지시하심
- 성막의 설계는 하느님이 직접 하셨으며, 길이가 45M 넓이가 22.5M 높이가 4.5M 담장 높이가 2.25M 사용된 금의 무게가 약 1.65톤 은이 4.85톤이 사용됨
- 성막은 장례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상징)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히브 9:1-10 잘 설명하고 있다.
-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오시면 새로운 방법으로 하느님의 임 재를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 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예식과 절차들이 필요했고 희생물 도 필요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성막에서 일어나는 모든 희생과 대속물을 친히 담당하셔서 이제는 성막이 아닌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나타내신다.
- 성막이 다 완공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큰 영광으로 나타나셨다. 그 런데 하깨 선지자는 "지금 짓는 이 성전이 예전의 성전보다 더 영 화로울 것이다."(하깨 2:9)고 예언을 한다. 이는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실 예수님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2) 다윗의 장막
-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 사이에 40년간 존재하던 장막(성막의 일종)이었다.
- 하느님의 임재로 상징되는 법궤가 없는 성막이 존재하던 112년의 기간이 있었는데 솔로몬의 성전을 완성되었을 때까지 법궤가 있었 던 장막이 다윗의 장막이었다.
- 성막과 법궤가 분리되었던 시대. 기브온에는 성막이 있었으나 법궤 가 없었다.
- 초대교회 이방인들의 구원과 입교를 위한 회의였던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인들의 입교를 공인하면서 다윗의 장막의 회복을 선언하였다.
- 그리스도와 신약교회를 상징한다. 이곳에는 일회적으로 희생제사가 드려졌고, 휘장이 없었으며 법궤 앞에서 노래와 연주, 외침(환호성) 과 춤, 기쁨 등이 4000명의 사제들과 레위인들에 의해 시행되었다.
- 역대기상 9장 33절에는 다윗은 이를 위해 레위 족장을 택하여 골 방에 들어가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하느님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 효가 이백 팔십 팔인이었다(1역대 25:7).
- 역대기(상)와 시편의 배경이 된다.
(3) 솔로몬의 성전
- 법궤는 솔로몬의 성전이 완성되자 성전의 지성소로 옮겨졌다. 이때 부터 솔로몬의 성전으로 제의중심이 되었다.
- 해마다 대 속죄일에는 이스라엘달력으로 7/10 대제사장에 의해 집 례 되었다.
- 솔로몬의 성전은 BC587년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다.
2. 신약의 찬양예배 사역
(1) 성전
- 신약시대 성전과 회당 그리고 교회가 공존하던 때가 있었다.
- 제2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헤로데의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에 의 해 파괴되었다.
(2) 회당
- 구약 성전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바빌론 유수기간에 유대인 공동 체 안에서 하느님을 말씀을 보존하고 전하려고 형성된 것으로 추 정된다.
- 성전 예배와는 차이를 보이나 그리스도교예배에 가장 큰 영향을 미 친 것으로 보여 진다.
- 모임은 신앙고백, 기도문낭송, 토라낭독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 신앙고백은 하느님에 대한 의무, 상벌의 원리, 성결의 삶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 ‘테필라’라는 낭송조의 기도는 하느님에 대한 찬송, 지혜의 간구, 죄용서, 이스라엘의 회복 등이 내용이다.
- 마지막으로 ‘토라낭독’은 유대인의 가장 큰 의무라고 보는 일로 해 석과 적용을 위한 설교로 되어 있다.
(3) 교회
- 초대교회 중 최초의 교회 가장 원형적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 도 2:42 등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혹은 설교), 교 제, 성찬식, 기도 등이 표현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성시와 찬양은 구 애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만들어지기도 하고 또는 일정한 형식으로 고정되어 예배 때마다 반복되어 불린다. 1고린14:26, 에베5:19 등 에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함으로 하느님을 찬양 하는 내용이 등장.
- 이외에도 죄의 고백, 평화의 입맞춤, 계시와 방언, 신앙고백, 축복 과 회중의 아멘, 송영, 성경낭독, 세(침)례, 봉헌 등이 기록되어 있다.
(4) 개인
- 히브13: 하느님이 받으실만한(기뻐하시는) 세 가지 예배에 대해 기 록 하는데 개인의 예배를 설명하는데 적절할 것
- 첫 번째는 찬미(찬양)의 제사 이는 입술의 열매, 두 번째는 선(착한 일)을 행하며 세 번째는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않는 것이다.
- 신학교를 가게 된 것 찬양예배 사역에 대한 부르심 때문, 학부 1,2 학년에는 제자훈련에 깊은 헌신이 되어 훈련을 받음 그러다가 3학 년에 올라가 구체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대학내에 목요 찬양모임을 만들고 역동적인 사역이 일어날 때 두 번째와 세 번째 예배를 이해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 간증
3, 교회의 본질과 사명
(1) 예배
(2) 선포(전도)
(3) 구제
(4) 섬김
- 선포(전도), 구제, 섬김 등의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있지만 본질 중 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배이다.
- 선교 또한 예배가 그곳에 없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4. 교회 안에서의 찬양예배 사역의 원리
- 사도행전 2장을 통해서만 7개의 사역 원리를 찾아보자.
(1) 하느님이 주도하시는 사역이 되게 하자
-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약속을 기다릴 것을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기도하며 기다렸다. 오순절 마 르코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제자들 가운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시고 불의 혀 같은 것이 그들의 머리위에 임하더니 그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각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방언) 이들 스스로가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사역을 시작한 것. 그 사역은 바로 찬양사역!
- 사도 2:11 이 방언을 들었던 사람들 적어도 10개국 이상에서 모여 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기록했는데, 그들은 "도대체 어찌 된 영문 인가?"
- 할렐루야라는 말 중 찬양을 뜻하는 ‘할랄’이란 동사는 자랑하다, 칭 찬하다는 뜻을 가짐
- 찬양이란 하느님의 훌륭하신 점을 고백해서 하느님 높이는 것!
(2) 반응을 두려워하지 말라(사도 2:12-13)
- 사역을 하다보면 두 가지의 반응을 보게 된다. 즉 부류의 사람들을 대하게 된다는 것
- 한 부류는 ‘이 어찌된 일이냐’, 결국 이런 이들은 37절에서와 같이 "형제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또 한 부류는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
(3) 지도자들과 함께 서라
- 베드로는 열한 사도들과 함께 서서
- 우리의 찬양사역은 지도자들과 함께 서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4) 하고자 하는 일들을 자세하게 설명하라
- 과거 우리는 교회나 지도자들이 이해를 안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 과거에는 이것이 현실, 그러나 지금도?
- "유다 동포와 예루살렘 시민 여러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 몇 명의 사역자들과 함께.
(인턴십 1000명과 1500명 모이는 교회의 사역자가 되어)
(5) 모든 사역에는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 사도 2:3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 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 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 모든 구원 뿐 아니라 용서와 회복과 치유와 자유의 근원이 예수 그 리스도가 되시기 때문이다.
(6) 반응을 다둘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 치밀한 전문가라는 말보다 성숙한 사제가 되라고 말하고 싶다.
- 사역철학은 목양론 관점에서 사역하고 하게 하자는 것
- 다윗을 평가하면서 그의 마음의 성실함으로 그 손의 공교함으로 사 역했다는 말이 있다.
- 사도 2:37,28에서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 까?" 이에 베드로는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 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 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 그 결과 3천명이 주님께로 돌아옴
- 찬양사역과 말씀사역은 같이 가야 한다.
(7) 생활예배(혹은 사역)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사도 2:42)
-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 믿음 사람들이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함.
5. 세계 교회에서의 찬양예배 사역모델(가장 주목받고 있는 교회들)
(1) 새들백교회 - 침례교(복음주의)영성, 구도자예배
(2) 힐송교회 - 하느님의 성회(오순절주의)영성, 임팩트
(3) 빈야드교회 - 오순절주의영성(예수운동), 구도자예배로 시작 지금 은 개인적인 깊은 예배
6. 한국 개신교회에서의 찬양예배 사역모델
(1) 사랑의교회 - 예배를 위해 정해진 시간 15분전부터 경배와 찬양 모든 예배에서의 주요한 위치
(2) 온누리교회 - 전 예배가 현대 예배화되어 가고 있다.
(3) 지구촌교회 - 통합적 모델(전통과 현대가 조합된 이머징예배)
7. 현대문화의 위험요소들
예배에서 현대문화의 수용이 불가피하다고 해서, 모든 문화가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현대 문화에는 예배에 해를 끼치는 요소들이 많이 있으므로,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문화에 대하여 경계해야할 것으로는 문화적 저급성, 개인주의, 소비주의, 세속적인 악의 개념 등이다.
첫째, 문화적 저급성을 경계해야한다.
저급한 문화는 예배의 가장 큰 방해꾼이다. 왜냐하면, 저급한 문화는 회중들 속에 있는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을 최선을 다해 사용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과 하느님의 선물들이 저급한 문화로 표현될 때, 하느님에 대한 아름다움의 이미지가 파괴되므로, 하느님께 불경스러운 일이다. 여기서 저급한 문화를 정확히 규정짓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대개 창조성과 아름다움이 결여된 예술과 인식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창조성과 아름다움이 결여된 문화가 보여주는 특징들이 있는데, 조잡함, 무질서, 부조화. 모방성, 서투름 등이다.
이런 것들은 역동성이나 자연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예배인도자들 중에는 예배를 역동적으로나 자연스럽게 이끌기 위해서 이러한 저급한 문화들도 그대로 수용하는데, 이는 창조성과 아름다움이 담긴 문화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예배인도자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창조성과 아름다움은 오히려 사치스럽고, 비본질적인 것들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 싶다.
그럼에도 저급 한 문화를 정당화시켜주는 배경에는 실용주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실용주의는 절약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조잡함, 부 조화, 모방과 서투름을 합리화시켜주며,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을 도구로 전락시킨다. 실용주의에 뿌리를 둔 예배자는 예배에서 창조성과 아름다움은 부차적이고 사치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예술이나 매스미디어 등 현대문화매체들은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예배실도 아름다움보다는 보험회사나 자동차회사의 사무실처럼 전도목표나 실적을 전광판으로 표시하여 회중들에게 전도사 명을 각성하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플래카드의 색감의 미적 조화나 창의성 있는 언어에 대해서는 논의할 여유조차 없는 분위기라면, 현대문화를 수용하는 것이 더욱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를 도구로만 보고 수용하되, 조잡하고, 모방하며, 무질서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최근, 복음송이나 소위 열린 예배에 대하여 어떠한 준비나 연구 없이 이웃 교회의 모습만을 모방하려는 시도들도 이런 위험에 빠질 가능성은 매우 많은 것이다.
둘째, 개인주의를 경계해야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 중의 하나가 다원성이라는 환경 안에서 개인의 개성의 인정과 개인 즐거움과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문화형성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과거의 문화와는 다른 모습을 갖게 한 것이 사실이다. 예배회중은 각자의 믿음 표현에 있어서도 각자가 느끼는 대로, 과감히 표현하고 싶어 하는데, 예를 들면 찬송을 부를 때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든지, 일어서서 손을 흔들기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청년예배에서 영상물을 제작하여 광고를 할 때도 제작자의 특별한 시각으로 편집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적극적인 예배참여와 자발적인 믿음표현이라는 면에서 기존 전통적인 예배에 신선한 도전을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믿음의 표현을 개인의 감정과 느낌에 전적으로 의존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공동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공동체의 믿음표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비록 느낌이나 감정이 없어도 의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공동예배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예배가 공연장처럼 관람하면서 감동 받으려는 분위기이다. 내가 감동 받아야 은혜스럽고 참된 예배이지 그렇지 않으면 형식적인 예배일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큰 문제다.
현대 문화를 수용하는 것이 개인의 감동을 창출하고 효과 있게 하려는 것이라면, 크게 우려해야할 일이다. 이러한 위험을 막 기 위해서는 회중 전체가 공감하고 인정하며 자연스럽게 참 여할 수 있도록, 현대문화의 수용은 약간은 보수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셋째, 소비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현대문화의 창조성과 예술성이 소비주의를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비쌀수록 아름답다거나, 많이 투자해야 창조적인 것 이 나온다던가하는 논리에 빠져서는 안 된다. 위에서 지적한 서툴거나 조잡하지 않기 위해서 많은 물질과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는 확신도 위험하다. 창조성이나 예술성이 귀족들만의 소유는 아닌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오히려 창조성과 아름다움은 일반 서민층으로부터 나왔다. 여기서 경계하는 것은 물질을 우상하고 탐욕을 조장하는 소비주의에 대한 것이다. 물질만능, 소비지상주의는 하느님의 대적자이며, 예배의 방해꾼이기 때문이다.
예배복장으로 깨끗하고 조화되는 옷을 준비하기 위해서 비싸고, 화려한 옷을 사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예배실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서 순금과 옥으로 치장할 필요는 없다. 문화를 실용적 입장에서만 보는 실용주의를 경계해야하는 것처럼, 문화라는 이름으로 사치와 향 락을 정당화하려는 소비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넷째, 세속주의화된 악의 개념을 경계해야한다.
예배자들이 가장 혼돈하기 쉬운 부분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악의 모습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동성애주의 자들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는 부부, 가족에 대한 신개념이나 혼전 섹스 등은 현대문화라고 해서 수용할 수 없는 개념들이다. 또한, 컴퓨터의 발달로 이야기되는 사이버교회(cyber church)도 경계해야할 대상이다. 혹자는 사이버교회가 공동체에 대한 신개념이라고 예언적으로 설명하지만, 끝까지 거부 해야 할 악의 개념이다. 시공을 초월한 주님의 몸으로서의 공동체로 생각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현재 함께 하는 공동체가 없는 교우에게는 시공을 초월한 공동체가 있을 수 없다. 또한, 사이버교회가 장점으로 세우는 무시간성이야말로 공동예배를 시간성의 중요함을 상실한 것이다. 예배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듣고 싶을 때 꺼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한자리에서 들을 때 이해되고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성찬 또한 함께 한자리에 서 나눌 때 비로소 주님의 임재를 확인하고 의식할 수 있는 것이다.
8. 실천적 방안
예배에서 현대문화를 어느 정도 수용해야 좋은 가에 대 해서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문화에 대한 지역교회의 이해 와 관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에 소개되는 것들도 교회에 따라 무리한 것들이 있겠는데, 이것을 소화하지 못하는 교회라고 해서 문화적으로 수준이 낮다는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 현대문화를 수용해야만 더욱 활력 있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생각들은 아직은 혁신적인 분위기를 수용할 수 있는 교회에 한정될 것이며,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는 아직도 현대문화의 수용을 꺼리고 있거나,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여기서는 전통예배에서 현대 문화들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를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1) 예술 문화
음악, 드라마, 미술, 무용 등의 예술적 표현들로 예배의 각 요소들을 새롭게 표현할 수 있다. 음악의 경우에, 최근에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복음송의 주일예배 수용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는 것이 좋겠다. 이미 많은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데, 복음송 중에서 예배송으로 적합하고, 회중에게 잘 알려진 노래를 선곡하여, 먼저는 헌금송이나 성가대 합창 등으로 소개하고, 예배의 찬송으로 도입할 수 있겠다. 중보기도 후와 교우의 교제 시에 사랑과 기쁨과 간구를 주제로 한 복음송을 함께 부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미술적 표현의 경우에,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은 음악보다 관심이 적은데, 그러나 회중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음악 못지않게 크다. 예배실 안에 있는 커튼, 십자가, 제대의 카펫, 예배실 벽면의 플랜카드, 방석등의 색깔을 미적인 조화를 가지도록 연구 검토한다. 부적절하고 자극적인 색깔들은 음악에 있어서 불협화음처럼 거슬리고 예배자의 마음과 정신을 산만하게 한다.
매우 혁신적으로 생각되는 드라마나 무용의 경우, 성경봉독을 입체낭독이나 간단한 드라마형식으로 대신할 수 있고, 설교 전이나 후에 잘 준비된 연극을 행할 수 있겠다. 예배 시 작을 입례행렬로 시작하는 교회에서는 예전 무용단이 그 행렬에 참가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형태의 참여는 예배의 각 요 소의 의미를 강화시켜줄 것이다.
(2) 과학 문화
예배에서 컴퓨터의 사용에 대해서 관심이 커지고 있는데, 이는 영상스크린의 활용과 직접 연결된다. 기존의 환등기 뿐 아니라 최신의 멀티비젼시스템도 결국 영상스크린을 어떻게 사용하는 가로 귀결된다.
1) 예배 전에 예배준비를 위한 공지사항 또는 예배에 대한 사전 지식.
2) 찬송 부를 때 찬송의 가사.
3) 설교 시에 설교의 대지나 성경구절
4) 성찬 없는 주일예배 시에 성찬의 장면들을 제시.
5) 광고나 중보기도 내용소개.
6) 중보기도를 위한 자료(세계교회, 선교지 모습)
(3) 정신문화
주일예배 중에서 청년주일이나 어린이주일, 남선교회(아버지회)주일, 여선교회(어머니회)주일 등을 활용하여 각 세대가 표현하고 싶어 하는 문화를 담은 예배를 기획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린이 주일의 경우 어린이의 문화를 반영한 예배실 분위기, 안내위원들의 복장도 밝은 색상으로 하고, 찬송과 설교 중에 영상을 활용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청년주일의 경우, 청년들로 하여금 안 내를 맡게 하고, 성서봉독을 청년들로 하여금 입체낭독이나 드라마형식으로 낭독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장년들에게는 낯설지만, 청년들에게는 자연스럽고 매우 호소력 있게 들리기 때문이다.
7. 현대적 문화의 적극적 수용과 예배의 본질 유지의 과제를 위한 지침
현대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지만 다음의 요소들이 더욱 강조가 되어야한다. 만일 현대문화를 수용할 때 다음 요소들이 약화된다면, 그 예배는 교회전통의 아름다운 유산을 잃어버리게 된다.
첫째는 과거 교우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교우들은 과거 교우와도 한 몸이 됨을 확인하게 되는 것 은 예배의 현장에서이다. 과거 교우와의 연합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예복과 교회력을 충실히 따르면서, 현대문화를 수용해야 한다. 또한 최근 불리는 복음송의 무분별한 도입 때문에, 과거 교우들로부터 불려 왔던 찬송가를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 과거 교우들의 기도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둘째는 공동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현대문화의 특징 중의 하나가 연령과 이해에 따른 소그룹화현상이다. 자연히 과거의 대가족제도 같은 공동체가 유지되기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더구나 교회의 대형화에 따라서 소그룹화가 교회의 역동성 유지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본질적이고 영속적인 신앙의 가치들은 소그룹화된 공동체 보다는 연령과 이해와 관심을 초월한 더 큰 공동체적 예배에서 확인되고 전달된다.
셋째는 전통적 말씀형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수사학의 변화나 컴퓨터의 발달로 기존의 일방적 말씀의 전달방식과는 다른 전달방식들이 - 예를 들면, 사이버교회의 설교청취- 요청 되고 있지만, 현재의 설교와 성찬을 통한 말씀의 전달이 약화 되거나 변형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시대와 문화가 변화해도 변할 수 없는 예배의 두 축이기 때문이다. 다른 방식이 더욱 효과적일 수는 있으나, 본질적인 것이 변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김세광 교수(서울장신대학교 예배설교학교수)
-끝-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전도 3:1)
그 때를 분별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하지 말아야하는가를 깨닫고 결정하는 것은 예배 인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만약 찬양과 경배의 첫 시간에 회중 가운데 무겁게 짓누르는 영으로서 원수의 공격이 있는데 당신은 곧이곧대로 이미 뽑아놓은 곡 리스트대로 감사의 찬양을 하거나 무조건적인 찬양 곡들을 한다면 아마 그 찬양과 경배 시간은 말할 수 없이 힘겨운 시간이 될 것이다. 이때에는 필요한 선에서의 강력한 선포와 회중적인 기도가 돌파구를 열어줄 수 있다.
또는 회중들 가운데서 깊은 경배의 폭발적인 흐름이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당신은 그것을 조용히 “자제”시키고 예배를 마무리 한다면….
내가 찬양 경배를 인도하기 시작하고 나서 3~4년의 시간이 흐르고 정식적인 훈련의 시기에 들어가고 난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지금 드리고 있는 경배가 얼마나, 어디까지 올라갔는지를 부분적이나마 통찰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올라간다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찬양과 경배의 두 가지 개념에 대해서 알아야한다.
첫째는 우리의 경배 가운데 주님께서 임하시는 것에 대한 시편 22편 3절의 개념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찬양과 경배 가운데 거룩하신 주님께서 임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의 찬양과 경배 혹은 기도가 주님께 향기로운 형태의 제물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찬양과 경배가 주님께 아주 높이 올라가서 셋째 하늘에 보좌에 계신 하늘에 까지 올라가면 이제는 곧 그 보좌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어 좌정하시는 놀라운 일이다.
이 두 가지가 항상 순서적으로 - 우리의 찬양이 올라간 후에 좌정하시는 -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에 이 경배의 개념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 순서를 규정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마치 그 인생이 언제 와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한한 사람의 논리로 만든 신학 속에 광대하신 하느님을 가두려하는 것과도 같다. 어떤 것이든지 논리화, 조직화, 공식화 하려는 것은 유익할 수 도 있겠지만 유익보다는 광범위한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킬 만한 위험 요소가 더 많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우리의 경배가 “얼마나” 혹은 “어디까지 올라갔는지”에 대한 ‘통찰’은 대부분 찬양이나 경배보다도 그 뒤에 따르는 더 깊은 임재 속에서 드려지는 새 노래 때에 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
(New Song - 사람들에 따라 Free Worship, Spontaneous song, Prophetic Song, Song of the Lord 등으로 명명되어지지만 이상의 이름들은 새 노래의 한 성격을 대변해 주는 것일 뿐이며 가장 빈번히 사용된 성경적인 명칭은 구약의 New Song(새 노래)와 신약의 Spiritual Song(신령한 노래)이다. {참고} 1역대 25:1~3, 시편 33:3, 40:3, 96:1, 98:1, 144:9, 149:1 ; 에베 5:19 ; 골로 3:16)
회중들이 온 맘을 다해서 경배하기 시작하면 나는 통찰하기를 “아, 이제 회중들이 온 마음과, 의지와, 힘을 다해서 경배하기 시작하는 구나” 라고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회중들이 육적으로 억지를 부리거나 악을 쓰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경배가 지금 현재 모인 회중 가운데 충만 하다고 느끼게 되면 정확한 시점은 규정지어 말할 수 없지만 곡을 내려두고 우리의 영을 다해 충만한 경배를 하늘에 새 노래로 올리기 시작해야한다고 통찰하게 된다.
그리고는 영을 따라 새 노래를 올리기 시작한다.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나는 회중 가운에 온 맘과 의지와 힘을 다한 경배가 충만히 되지 아니한 상태에서 드려지는 새 노래는 육적, 혼적, 영적으로 매우 고단하고 힘이 드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형태적으로는 새 노래를 드릴지는 모르지만 “심히 영적으로 메마른 어떤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 하자면 새 노래 자체가 경배 모임이 드려지는 건물 자체도 넘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예배실의 천장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중들의 하느님에 대한 갈급함 속에서, 그분의 거룩과 임재의 불 앞에서 압도되어 온 마음과 의지와 힘을 다해 올리는 경배후의 마치 폭발 하는 듯이 터져 나오는 새 노래는 어떤 때는 1층천의 악한 영들이 우글거리는 육적인 대기권과 2층천의 정사와 권세의 구역을 뚫고(Breakthrough) 주님의 보좌가 있는 3층천, -사도 바우로가 얘기하던- 셋째 하늘 까지 올라가서 천사들도 같이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때가 종종 있다.
거의 이런 통찰이 올 경우에는 새 노래 후에 강한 성령의 역사로 인한 거룩한 웃음이라든가, 신유, 축사, 성령으로 넘어짐 등의 기름 부음 등이 인위적인 노력이나 자극이 없이 나타나며 직능 적으로 씨어(Seer)들에게는 동시 다발적으로 상당히 구체적이며 비슷한 내용의 환상들이 보고되어진다.
나 같은 경우의 예배인도자들에게는 구체적인 내용의 “예언(적) 새 노래(Prophetic Song)”나 구체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평범한 어조의 단어들이라도 새 노래들이 나올 때 회중 가운데 마치 “바람(Wind)이나 불(Fire)로 휩쓰는 듯한” 영뿐만이 아닌 육적인 지각과 감각으로도 느낄 수 있는 공기 중의 변화로서의 장소적인 영적 변화가 오게 된다. 특히 바람이나 불로 그 장소를 휩쓰는 듯 한 역사는 시편 104편 4절과도 무관 하지 않다.
『바람을 시켜 명령을 전하시고 번갯불에게 심부름을 시키시며』
[시편 104:4]
예언적인 예배 인도자라고 한다면 이러한 시점들과 통찰들을 잘 분별할 수 있도록 인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회중으로서도 많은 경배에 대한 참여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분명히 이러한 시점에 대한 통찰들은 단지 경험들로서만 얻기에는 그 깊이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으며 여기에는 천부적으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예배 인도자를 하도록 부르신 주님의 소명과 사명에 바탕을 둔 태생적인 예언적 기름부음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이 예언적 기름부음이란 것은 단지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능하게 풀어놓는 것만을 예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뿐만이 아닌 주님의 민감한 시점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예언적인 통찰력 -그저 그 시점을 잘 알고 그 시점에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아는- 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배의 시점에 대한 예언적 통찰은 다른 모든 영적인 사역과 마찬가지로 경배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그 경배의 각 시점을 놓치면, 다시는 그 시점을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예언적 예배 인도자로서의 소명과 사명이 있다면 태생적인 예언적 기름 부음으로 예배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지 못하여서 태생적인 예언적 기름부음이 없다면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첫째는 당신의 일을 그 예언적인 기름부음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에게 위임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강등” 되거나 “쫓겨나는 것”이 아닌 영적인 분별로 이루어진 겸손한 선택이며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지름길이다. 자신이 하느님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올바로 깨닫고 그 일에 헌신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며 하느님은 이런 겸손한 자를 축복하신다.
두 번째는 당신에게 없거나 혹은 미약한 그 예언적 기름부음을 이미 그 일에 숙련된 사역자들을 통하여 훈련 받음으로서 얻을 수도 있다. 구약의 사울왕도 선지자의 무리들과 함께 사역을 하거나 배운 것도 아닌 그저 동행을 하였을 뿐인데도 예언을 물 흐르듯이 할 수 있는 예언적 감각이 생겨났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영접한 자들로서 예수의 증거인 대언(예언)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심으로 말미암아 구약 시대 때의 전통 있는 베델의 선지자 수련생과 여리고의 선지자 수련생(2열왕 2:3,5)들처럼 현대의 성령 사역 학교 들을 통하여 사역자들의 균형 있는 멘토와 영적인 훈련들로 얼마든지 예언적인 것을 개발하고 하느님과 교우들을 섬기기 위해 모든 사역뿐만 아니라 경배 때에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거창한 사역학교 뿐만이 아니라 당신 주위에 있을지도 모르는 예언적인 예배 인도자들과의 교제만으로도 그것은 당신에게 상당히 나누어지게(Impartation)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깊고 가장 정확한 예언적인 기름 부음은 예수의 증거이신 대언(예언)의 영(묵시 19:10),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로서 강화되며 촉진되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예배 인도자라면 그 행해야할 때와 행해야하는 일을 아는 이싸갈 자손들의 기름부음이 당신에게 임하여서 예언적인 예배 인도자로서 경배를 드리는 지금 이순간이 어떤 시점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 “밝히” 알 수 있기를 기도한다.
『므나쎄 반쪽 지파에서 만 팔천 명. 그들은 모두 지명을 받아 다윗을 왕으로 떠받들러 온 사람들이었다.』(1역대 12:32)
-끝-
샬롬, 주님의 새 부흥 운동들의 한성진 전도사(개신교)입니다!
먼저 예언적 연주에 대해 논하기 전에 "즉흥적 연주"에 대하여 선행적으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즉흥적 연주란 찬양과 경배 중에 정해진 곡의 전체나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멜로디, 새로운 화성으로 연주하는 것을 뜻합니다.
음악적으론 이것을 “Improvistion” 이라고 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아무리 즉흥적이라고 해도 화성악적으로 규정되어진 진행 스타일을 갖지만 그 형태상 "즉흥 연주"라고 합니다. 이 즉흥 연주 중에 우리는 새 노래를 드리기도 하고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깊은 묵상에 들어가기고 하며 하느님의 은혜의 단비에 젖기도 합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자면 경배를 드리다 회중이 전체적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피아노 연주자는 악보가 없는 상태에서 어떠한 화성악적 코드 진행으로 계속적인 연주를 합니다. 그리곤 반주가 계속되는 가운데 목사님께서 나오셔서 회중 가운데 기도를 인도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때를 우리는 보편적인 관점에서의 즉흥 연주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제는 예언적 연주에 대하여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외형상으론 즉흥연주와 예언적 연주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음악적으로 똑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즉흥 연주와 예언적 연주를 구분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언적" 이라는 단어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찬양과 경배 가운데 예언적이라는 단어를 쓸 때, 이것은 하느님의 보좌로부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시는 "계시"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언적 이라는 단어 자체를 어떤 문장으로 정의 내린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언적이라는 단어가 가진 속성들에 대해 이해할 때 예언적 연주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1. 즉흥적인 속성을 내포한다.
상당히 많은 경우 "예언적인"이라는 단어는 내가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결과들을 가져 옵니다.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갑자기 솟아올라오는 것이지요. 이 즉흥석에 기초하여 예언적 연주를 이해할 때 예언적 연주란 "미리 계획되어지지 않은" 이라는 상태적인 이해를 줍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즉흥성이 다 예언적이지는 않습니다.
2. 악기로 예언한다.
찬양과 경배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한번쯤 들어보셨지요? 도대체 하느님의 음성을 어떻게 악기로 표현한다는 것입니까? 바로 악기로 예언한다는 것은 기름 부은 악기연주자가 자기 심취가 아닌 하느님의 어떠한 감동에 대해 민감한 예언적 감각으로 그것을 인지하여 자신의 악기적 특성을 통해 "하느님의 감동을 연주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로 빈야드 “Winds of Worship 1집”에 수록된 “SONG FOR THE BRIDE”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들어보면 예배인도자 브라이언 덕슨의 잔잔한 기타반주와 신디의 스트링에 일렉 기타의 예언적 연주가 나옵니다. 이 일렉 기타의 연주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매우 강력한 하느님의 임재와 기름부음을 풀어 놓아줍니다. 실제, 녹음된 이 부분에서 어떤 여성분에게 하느님이 매우 강력하게 임하시자 브라이언 덕슨이 주변에 있는 분들에게 기도로 그 여성분들을 도와달라고 권면하기도 합니다.
저는 직접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이 일렉 연주자가 예언적인 연주, 일렉 기타로 예언하였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이 연주자를 통해 일렉기타로 풀려져 나갔을때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역사가 성경과 같이 나타나고 입증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예언적 연주의 속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3. 연주자의 이해가 반드시 필요 된다.
연주자가 하느님의 예언적인 속성에 대한 이해와 예언적인 것을 인식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다면 그가 아무리 화려한 실력을 가진 연주자라도 그는 예언적인 연주를 하기에 어렵습니다. 물론,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강권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매우 드물겠지요.
4. 반드시 개인적이든 회중 적이든 열매가 나타난다.
위에 예처럼 기름 부은 연주자가 하느님의 감동에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하여 예언적 연주가 이루어질 때 이는 곧 악기로 하느님의 음성을 대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강력한 하느님의 나타나심이 있게 됩니다. 그것이 기름부음이든, 어느 한 개인에게 평안과 위로와 마음의 상처의 치유이든, 육신적인 신유이든 나타날 수 있는 모든 하느님의 역사하심 중에 하나로서 그 결과가 있게 됩니다.
+ 예언적인 연주를 하려면
1. 무엇보다 하느님의 감동하심에 매우 민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기본적인 영역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필요하다면 상응하는 훈련과정을 밟아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으며 그것이 어렵다면 개인적으로 정기적이고 깊이 있는 말씀 연구와 묵상, 그리고 주님과의 친밀한 기도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2. 예언적인 연주와 관련되어진 음반들을 통하여 간접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습니다. 사도적인 목사 로버트 게이, Prophet 킴 클레멘트, 캔트 헨리-특히 호산나 레이블이 아닌 캔트 헨리의 개인 미니스트리에서 나온 20여종의 라이브 워쉽 음반 등이 있습니다.
3. 예언적인 연주가 허용되어질 수 있는 무리들안에 소속되어지는 것은 매우 필수적이겠지요?
예언사역자는 자신의 말로 예언함으로 하느님의 감동을 전달합니다. 예언적인 연주자는 자신의 악기를 연주함으로 하느님의 감동을 전달합니다. 능숙한 실력을 가진 연주자라면 예언적인 연주를 할 수 있는 연주자가 되도록 기도하시기를 도전합니다. 능숙한 예배 인도자시라면 예언적인 예배 인도자가 되시기를 도전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리고 제가, 능숙한 하느님의 감동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할렐루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