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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이앙가는 농기계의 굉음
최전방인데도 낚시터(울안니 낚시터/조강저수지)를 개설하고 운영하며 마을의 애로를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조강마을.
그래서 그들은 민통선지구라고 겁 주고 군림하려 할 뿐 뒷짐지고 있는 중앙정부도 지방
정부도 의지할 생각하지 않는다.
요순시절의 격양가(擊壤歌: "해 뜨면 일하고(日出而作) / 해지면 쉬고(日入而息) / 밭 갈
아 밥 먹고(耕田而食) / 우물 파 물 마시니(鑿井而飮) / 임금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인가
(帝力于我何有哉)”) 마을을 연상케 하는 조강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하늘
교(天助自助者敎?)의 신도들이다.
누가 조강포 마을을 흔적도 없이 쓸어버리고 그 위에 철책을 세웠는지 잘 알고 있지만
원망하지 않고 살기 더 좋은 마을로 가꾸려고 합심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정략적 슬로건이 아닌,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체득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까.
공동체 의식이 강하면서도 경로(敬老)에는 이해관계를 초월한다.
내게 정자의 이용절차만 알려주면 1만원의 수익을 올리게 되는데도 난방이 잘 되어있는
관리인 사무실을 선뜻 내준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정자를 무료로 사용하게 하면 특혜시비가 따를 수 있으나 사무실은 그럴 소지가 없으며
더우기 늙은 나그네를 공대하는 것이니까.
찜질에 다름 아닌 전기온돌이 원행 첫날은 으레 그러한 경색된 몸 마디마디를 풀어주는
듯 했으나 수시로 스위치를 껐다.
전력 소모라도 줄이는 것이 마을의 호의에 대한 도리라는 생각에.
전혀 상상해 보지 못한 행운을 잡은 첫날 밤.
평생 처음 낚시터의 밤 분위기를 접해보기도 했다.
아직 한기를 많이 느끼게 하는 깊은 밤.
곳곳에서 찌만 반딧불처럼 명멸하고 있는 칠흑의 저수지.
저 찌 앞마다 저것만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정좌하고 있을 터.
내 책방 벽에 걸려있는 동양화의 글귀 "萬事無心 一釣竿 三公不換 此江山"(만사무심 일
조간 삼공불환 차강산)이 떠올랐다.
허달재(許達哉) 화백(南宗畵의 대가 許百鍊의 손자)이 그려준 그림인데 평생 낚싯대를
잡아본 적 없는 내가 삼정승도 부럽지 않다는 조사들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안개 자욱한 새벽에 보는, 밤내 요지부동했을 물가의 그들은 정진일로의 수도승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먼동이 막 튼 이른 아침인데도 지나가는 트랙터와 경운기 소리가 요란했으며 내가 길에
나섰을 때는 조강마을 온 들의 하루가 농기계의 굉음으로 시작하는 듯 했다.
예전의 지금쯤(계절)은 소를 몰아 써레질하면 뒤따라 모내기하는 농군들로 북적거리는
것이 농촌 들판의 풍경이었다.
당연히 '모내기 소리'(移秧歌)가 온들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농촌에서 일꾼들이 사라진지 오래다.
일꾼이 사라질 때 이앙가도 함께 사라졌고 일꾼들을 대신해 등장한 농기계들의 굉음이
현대판 이앙가라 할까.
영농의 기계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산업사회로의 전이과정에서 우리 농촌은 폐업하고
말았을 것이며 최전방 민통지구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요란한 기계소리가 싫지 않은 이양가처럼 들리는 것일까.
왜 애기봉인가
간밤에 잘 대접했는데도 우측 다리가 또다시 사보타주(sabotage)라도 하려는 것인가.
조강저수지에서 넓은 포장농로를 따라서 조강2리로 가는 동안 주저앉기를 거듭했으며
이러기를 몇차례 더한 후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앞으로 이 짓을 반복해야 할 것 같다.
천형(天刑)에 다름 아니며 익히 아는 병이라 대처하는 방법을 숙지하고 있으므로 크게
당황하지는 않지만.
간밤에도 지역민들은 농로포장의 불가피성을 역설했으나 나는 여전히 이베리아반도의
비포장 농로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근시적 편의성만 쫓는다면 포장이 당연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신중해야 하니까.
조강1리에서 애기봉 전망대 입구까지는 김포 평화누리 둘째길을 따르면 되는데 아직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 애기봉 줄기의 산 능선을 힘겹게 넘었다.
애기봉전망대로 가기 위해서는 셋째길로 이어지는 지점(가좌동)에서 갈라서야 한다.
김포시는 "DMZ 트레킹 평화누리길" 3개 코스를 요란하게 홍보하고 있는데 제대로 맛도
보이지 못하고 마는 꼴이다.
1코스는 DMZ과 거리가 멀고 2,3코스는 DMZ에 접근도 해보지 못한다.
내가 걸은 김포지역의 긴 철책선 길에서 김포 평화누리길을 보지 못했으니까.
애기봉 전망대도 올라가지 못하는 코스를 무슨 DMZ코스라 하겠는가?
부지런을 떤 보람도 없이 '애기봉전망대 출입신고소'에서 제동이 걸렸다.
당장은 아직 이른 시간이 이유지만 9시가 되면 차량이 없기 때문으로 이유가 바뀐단다.
고성 통일전망대처럼 승차 입장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또 다른 차존인비가 있으며 남북 분단은 보행자의 설음까지 가져왔는가.
포기하고 돌아갈까 망설이는 동안에 여직원의 출근으로 신고소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작년의 서남동 길 때 어느 승용차의 호의로 입장이 무난했던 통일전망대의 행운이 이곳
애기봉에서도 재연되도록 여직원이 도와줄 것 같은 느낌에 9시 되기를 기다렸다.
기대대로 여직원은 최초의 관광버스에 편승하도록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나의 의도를 안
그녀는 고맙게도 애기봉에서 민통선 쪽으로 가는 지름길까지 가르쳐주었다.
견학후 버스를 버리고 걸어내려오다가 도중에 차로를 벗어나 직행하는 길을.
애기봉 전망대는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와 월곶면 조강리 사이의 산 애기봉에 서있다.
1954년부터 성탄일(예수와 석가)이면 소나무 트리에 점등해오다가 1971년에 철탑으로
대체된 트리에 불을 켜면 개성에서도 보이는 위치란다.
남과 북 사이가 5리도 채되지 않는 가장 짧은 지점이라지만 유감스럽게도 시야가 거의
없는 날씨가 연 이틀 계속되었다.
애기봉 아래 조강의 한가운데로는 실물 없는 휴전선이 지나가고 있으나 분단 이전에는
이 지역의 남과 북은 하나의 조강마을이었단다.
이북에도 북조강 남조강 마을이 여전히 있으며 분단이 없었다면 이곳에도 진즉 다리가
놓이지 않았을까.
6.25민족동란의 엉거주춤한 미봉(휴전)이 천추의 한이 된 지역이 바로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북녘땅이다.
서화동복(西禍東福)이라 할까.
분단이 북위38도선에서 휴전선으로 고착됨으로서 남한의 서쪽 일부지역은 통한의 북한
땅이 되고 동쪽의 상당한 지역이 남한으로 편입되었으니까.
연미정에서 우측에 보였으며 문수산 정상에서(한남정맥종주때) 코앞에 있던 섬, 떠내려
가다가 머물렀다 해서 머무루섬이라고도 부른다는 유도가 바로 왼쪽에 떠있다.
한강의 법적 종착점이며 남북한 중립지역이 됨으로서 싸늘한 무인도가 되었단다.
저 섬에 다시 체온이 살아날 날은 언제쯤일까.
애기봉은 해발 155m 무명봉에 군사구테타로 권좌에 오른 대통령이 붙여준 이름이란다.
병자호란(인조14년/1636년) 때 일이라 했다.
애기(愛妓)를 데리고 한양 피난길에 오른 평양감사가 강 저편인 개풍군에서 추격군(敵)
에게 납치되고 홀로 강을 건넌 애기는 이곳 조강리에 머물게 되었다.
이 봉우리에 올라 오매불망 평양감사를 기다리다가 병사한 그녀를 마을인들이 여기에
묻었는데 애기의 사연을 들은 대통령이 애기봉이라 명명했다는 것.
병자호란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라는 우리 역사상 최악의 굴욕적 패배로 끝났다.
이 때, 평양감사가 죽기를 결(決)하고 싸우기는 커녕 기생을 대동하고 도망치다니?
죽어 마땅한 대역죄인이며 그를 추종한 기생 또한 참작의 여지가 없는 천기에 불과하다.
국란의 위기에는 논개와 같은 의기(義妓)들이 탄생하며 행주산성 전투처럼 아녀자들의
공도 지대하건만.
한데도 훗날의 대통령은 그런 기생을 가상히 여겨 무명봉에 그녀의 이름을 붙여주다니?
내로라 하는 시인은 여기에 주저리주저리 헌시하다니?
주적이라고 매도하는, 일촉즉발의 이북땅을 1.8km 앞 둔 곳에서 감상적 감정놀이 하고
있는 것인가.
('애기' 는 기생의 이름이 아니고 '사랑하는 기생'이라는 보통명사가 구전과정에서 고유
명사로 둔갑했을 것이다)
늙은 나그네의 느낌은 고소 불금(苦笑不禁)의 나라가 아니라면 코미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는 것.
포항과 더불어 강화 김포지역은 해병대의 최전방이란다.
따라서 해병대사령관의 입김이 가장 센 곳이라 할 수 있다.
여기 애기봉이 제적봉이 될 뻔 한 사실이 강화도 평화전망대 뜰에 적혀있다.
공정식 6대 해병대사령관이 이곳 애기봉을 제적봉이라 명명하려 하다가 대통령의 힘에
밀려 강화도 평화전망대가 제적봉이 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민족의 자유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공산 침략자들을 무찔러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려던 봉우리가 센티멘털 봉으로 둔갑된 것이다.
전망대 입구에 걸린 "해병대의 심장이 멈추지 않는한 대한민국은 안전하다"는 해병대의
결의와도 거리가 먼 이름이다.
이같은 결의에 찬 해병도 애오라지 평화통일을 열망하고 있다.
여기에도 강화도 평화전망대의 '피한'과 대동(大同)한 "엣 소대장의 소망"이 있다.
적(敵)은 이념(ideology)일 뿐이며 이념이 민족을 얼마동안은 갈라놓고 적대적 관계를
만들고 있으나 통일의 열망을 영원히 잠재울 수는 없음을 재확인해 주고 있다.
라면 끓일 물을 군 부대에서 구해야 하는 민통선
전망대 출입신고소에서 최초로 대면한 중년남을 애기봉에서 다시 만났다.
냉랭하기가 얼음장 같아 아무 도움도 기대할 수 없겠다고 생각되었던 사람이다.
출입신고소의 책임자려니 짐작했는데 애기봉 청소요원?
상전보다 노복이 더 설치는 격이었던가.
신고소에서는 "입장할 때 탔던 차편으로 나와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던 그가 신고소
여직원이 가르쳐준 샛길을 물을 때는 전혀 딴 사람이 되다니.
걸어서 내려가는 길을 소상히 가르쳐줌은 물론 군초소의 저지가 있으면 관리사무소의
허락받고 가는 길이라고 응수하라는 대책까지 알려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민간인 출입 금지 차단기가 치워진 널따란 샛길에서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허리춤에 단
노파가 산나물을 뜯고 있다면 주간에는 민간인이 자유로이 출입해도 되는 길 아닌가.
그런데도 정문에서는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는 애기봉 전망대 출입.
도저히 이해되지 않으며 미리 알았다면 신고소에서 지루하게 기다리지 않고 평화누리
셋째길을 따라서 가다가 우회하여 올라갔을 것인데.
내가 무료했던가 어버이날에도 산채를 뜯어야 하는 노파에 대한 연민이었는가.
지뢰지대가 아니므로 안심이 되고 접근금지구역으로 알려져 있는데다 민가가 없으므로
산나물이 많은 산임을 알고 있는 단골 노파에게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꼴이 되었다.
"오늘 하루쯤은 편히 쉬시지 일을 나오셨습니까"에
"할아버지는 왜 오늘 이 고생이십니까"
노파의 눈에는 나 또한 산약재와 산채 캐는 가련한 영감으로 보였던 듯.
내리막에 군부대 막사가 가로막고 있어 조마조마했으나 인적이 끊긴 텅 빈 막사에 지레
겁먹었고 DMZ 긴 철책 아래로 난, 시멘트로 포장된 너른 농로 따라 동북진했다.
철책에 밀착하여 걷기 때문에 이정표가 전무하여 어데쯤 가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고
군부대를 거명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위치를 말하기가 애매하다.
아무튼 간밤에도 막걸리만 마신데다 아직껏 먹은 것이 없는데 어찌 시장하지 않겠는가.
비상식량인 건빵으로 달래느라 물도 바닥났지만 구할 길이 없는 최전방 민통구역이다.
하삼도에서 도성(한양)으로 가다가 머무는 세곡선과 화물선,어선들로 성황을 이뤘다는
마근포도 옛 영화는 커녕 흔적도 없고 철책 사이로 북녘땅이 다가올 뿐이다.
정오쯤에는 길을 막아버린 군부대의 정문에 달린 인터폰을 눌렀다.
식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기갈이 심해오는데 배낭에 있는 라면을 끓이려 해도 물 구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1.5리터 페트병을 들고 나온 군인은 멀찌기 우회해서 가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농로를 따라 그늘 있는 숲을 찾아갔다.
파주의 오두산 전망대가 가까이 마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 김포시의 북동쪽 돌출부인
하성면 시암리 연화산 자락 어디쯤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아무도 없는 채소밭 작업장(?)에서 라면으로 공복을 달랜 후 다시 민통선 농로로 갔다.
빈 초소 옆 고지대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합치는 두물머리임을 확인했다.
할아버지 강(祖江)이 서해길을 시작하는 위치다.
김포평야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려는 지점에서 만난 트랙터의 중년남이 말을 걸어왔다.
"영농인들만 다닐 수 있는 곳에 민간인이 왜 들어왔느냐"며 시비조인(?) 이 사람.
민통선 영농인이 특수신분일 수 밖에 없음은 이해하나 특권층인 듯이 행세하고 싶은가.
아직 이틀째에 불과하기 때문에 처음 보는 특이한 사람이지만 기나긴 민통선에서 더러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떨떠름해지려 했다.
자연과 첨단이 어우러지는 새 도시?
곧 한강 둑에 올라섬으로서 조바심에서 해방되었다.
강 저편이 깊은 잠을 자고 있는 듯 침묵하는 땅 대신 달리는 대소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자유로렸다.
고속도로와 차량 전용도로가 아닌데도 걷는 것이 원천 봉쇄된 희한한 길을 이틀간 걸어
왔기 때문인지 사방이 확 트인 높다란 한강둑길에서야 말로 자유를 만끽하며 걸었다.
비록 여전한 철책 따라 걷는 길이지만.
늙은이 유세를 부린 것은 아니라 해도 실은 늙은니니까 그나마 가능했을 것이다.
아무 지도에도 없고(군사지도에는 있겠지만) 이정표는 물론 어떠한 길 안내표지도 없기
때문에 정확한 거리를 알 수 없다.
다만 시속3km쯤으로 계산해 어림하는데 후평리 철새도래지와 석탄리 펌프장을 지나서
전유리 포구까지 우측에 김포평야를 끼고 가는 한강둑이 10여km는 됨직한 길이다.
군인과 대면하게 될까봐 조마조마했던 이제까지와 달리 전주에서 공사중인 통신병과도
이야기하고 싶도록 다른 길이.
긴 김포평야가 끝나는 지점의 전유리 포구는 한강 내수면 어업의 최전방 포구란다.
마근포, 조강포, 강녕포 등 김포반도의 최전방 포구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륙에서는 전방 산간의 독립가옥들은 물론 일체의 화전민 마을까지 해체되었다.
명분은 치안의 한계에 따른 주민의 안전이었지만 간첩들에게 악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강제를 쓴 것이다.
민통선 해안의 성시를 이루던 포구들 역시 같은 이유로 사라졌을 것이다.
전유리 포구에는 '한강 자율어업 공동체'가 개설한 황복, 참게, 민물장어, 숭어, 새우 등
자연산 수산물 직판장이 있다.
특히 참게는 수라상에 올랐을 만큼 유명하단다.
전유리 포구 이후 김포2동까지의 강변은 피하고 싶으나 피할 길이 없는 길이다.
월곶과 하성 양면에서 전유리 포구와 봉성배수펌프장, 누산배수장을 거쳐 김포2동으로
가는 차량들이 위험하게 북적대지만 인도는 부분적으로 조성되어 있을 뿐이다.
게다가 공사로 인한 불편을 줄이려는 배려는 커녕 보행자는 아예 안중에 없는 도로공사,
시설공사에 기가 찰 뿐이었다.
내가 지금껏 걸어온 길중에 최악의 구간이다.
김포의 심벌마크 베스트 김포(Best Gimpo)와 전혀 상반되는 워스트 김포(worst)다.
불확실한 내일의 행복을 제시하며 오늘 불행하라는 것과 뭐가 다른가.
김포한강신도시 지역에 들어섬으로서 비로소 안도하게 되었다.
베스트 김포의 핵이 될"자연과 첨단이 어우러지는 새 도시"건설의 야심찬 사업지역이다.
면적 3.282.500여평에 55.700여세대, 153.000여명을 수용하는 대단위 도시 건설이다.
현재 인구30만명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김포시가 이곳에 총인구의 반 이상이 되는
주민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일산대교를 건너 오두산(파주) 지역까지 가려던 당초 일정의 수정이 불가피했다.
석탄제3펌프장에 도달할 무렵에 벼란간 오른쪽 발에 허전한 느낌이 들어왔는데 신발의
옆구리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낡은 등산화지만 휴전선 길 완주쯤은 책임져줄 것으로 믿었는데 수중전을 자주 치룬 후
관리에 소홀했기 때문일까.
겉보기는 말짱하나 가죽과 고무가 기능을 상실해 수선도 불가한 상태라 바꿔 신기 위해
귀가길에 오른 것.
귀가가 지난한 북동부(강원도)의 어느 지점이라면 구입하는 방법을 택했겠지만 서울의
대중교통망지역인 것이 다행이었다. <계 속>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는 조강저수지의 정자들.
마을의 정자와 달리 사용료 1만원을 지불해야 한다.(위)
조강1리에서 조강저수지와 조강들, 조강2리를 지나고 산고개를 넘어 애기봉 입구까지는 김포평화누리 둘째길인데
인화물들(낙엽)이 쌓여 있는 산길에 지천인 담배꽁초는 누가 버렸을까.
백두대간에 쌓여있는 쓰레기들은 대간종주자들이 버렸고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오물들은 순례자들의 것임이 틀림
없는데 여기에 버려진 꽁초들은 누가 버린 것일까.
애기봉 입구는 둘째길의 종점이며 셋째길이 시작되는 지점(아래)
경남76바1507 블루투어 관광버스(위)가 나를 2013년 5월 8일의 애기봉 전망대 입장 1호로 만들어 주었다.
주차장에서 애기봉 전망대 오르는 길(아래)
애기봉과 애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해병대 김포지구 전적비(위)
애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땅과 유도(아래)
애기봉에서 민통 철책선으로 내려가는 지름길(위)과 빈 막사(아래)
김포의 민통선(위)과 북녘땅(아래)
내가 고집한 민통선은 군부대(위)에서 식수를 구해 어느 빈 작업장(아래)에서 라면을 끓일 만큼 민가도 표지판도 없는 길이다.
한강둑에 올라섬으로서 긴장의 민통선에서 해방되고 지근으로 다가오는 오두산 전망대(위)
전봇대에서 작업중인 통신병이 반갑도록 지루한 홀로의 한강둑길이 전유리 포구까지 이어진다(아래)
베스트(best ) 김포 아닌 워스트(worst) 김포의 현장 전유리 포구~김포2동 길(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