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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도 아랑곳되지 않는 행복로
초저녁에 몰려왔던 구름이 물러가고 하늘을 수놓은 총총한 별무리에 안도했으나 강을
덮은 새벽 물안개가 오늘의 무더위를 예고하는 아침.
내가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도 농촌의 새벽을 여는 것은 늘 농기계의 굉음이다.
6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길을 나섰다.
자전거길과 평행하는 마을간 차로의 확포장이 진행중이라 밤에는 조심해야 할 길이다.
송금리 배수관문 앞에서 재개되는 자전거전용도로는 마을에서 멀찍한 강변도로다.
그리고, 차량의 통행을 금지하면서도 허용하는 묘한 길이다.
"하천구역(둔치)에는 농작물이나 나무심기 등 어떠한 행위도 금지한다" 는 광양시장의
경고판이 서있으나 바로 그 아래 둔치에서는 각종 농작물이 자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전거전용도로의 일부 구간들은 둔치의 농사에 필요한 차량이 드나들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하고 있다.
금지하고 협조하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까.
그래도, 자전거마저도 어쩌다 만나는 안전하고 마음편한 이 길이 내게는 폭염도 아랑곳
되지 않는 행복로다.
간밤의 여인 말대로 온 들이 하얀 지붕(비닐하우스)이다.
예전에는 고대광실 와가가 많아야 부촌이었으나 지금은 비닐하우스로 판정한다.
10시 방향으로 산허리를 아스라하게 움직이는 물체들이 슬로비디오(slow video) 같다.
태인대교에서 헤어졌던 2번국도를 타고 매치재를 꼬불꾸불 오르내리는 차량들이다.
매치재(炭峙)는 해발431m불암산과 447m국사봉을 가르는 2번국도상의 고개인데 '매치'
(煤峙)에 불필요한 '재'가 붙은 겹말일 것이다.
마치 역전 앞, 처가 집 등 처럼.
섬진강 자전거길을 걸으면서도 매치재에 관심이 가는 까닭은 아마도 호남정맥 종주때
망덕산을 염두에 두고서도 옥룡면 동곡리에서 백운산에 오른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진상면과 하동을 잇는 또 하나의 도로와 다리 공사장 이후 중도마을(月吉里)을 지나고
방금 화물열차가 순천을 향해 섬진강을 건넌 답동(월길리)의 철다리 밑도 지났다.
지근에 새 철교 공사가 진행중이다.
일제가 건설한 철교가 수명이 다 되어 교체해야 한단다.
경상도(경부선 삼랑진역)와 전라도(호남선 송정리역)를 잇는다는 뜻을 담은 경전선(慶
全線)은 1904년 착공이후 우여곡절이 많았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낙후된 철도다.
동일 노선 버스의 배 이상 소요되는 운행시간 때문에 달아난 소비자들을 찾아오기 위해
KTX운행용 복선 전철화 작업이 진행중이란다.
우리나라의 철도는 일제의 작품이다.
그들은 수탈물자를 일본으로 운반하기 위해 철도와 도로, 항만 건설에 전력을 다했다.
그래서 모든 길은 부산으로 집중했으며 차선이 인접 항구였다.
모든 열차번호의 기준이 부산이었던 것은 그들의 수도 동경을 기준했기 때문이다.
(열차번호는 수도를 중심으로 하행선은 홀수, 상행선은 짝수다)
그랬음에도 경전선이 낙후된 것은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비지땀을 흘리며 작업하는 이들과 달리 강심에 본부(채취선)를 둔 재첩사냥꾼들은 얼핏
보아서는 한량놀이 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스노클링(snorkeling)하며 더위를 즐기고 있는 듯이 보이니까.
550리 섬진강 중에서도 특히 하동과 광양이 섬진강재첩의 본산지란다.
민물과 해수가 섞여 염분이 적은 곳이 재첩의 서식지인데 이 일대가 바로 기수역이니까.
섬진강 재첩 잡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구분된단다.
철다리를 기준으로 남쪽에서는 채취선을 띄워놓고 각종 장비를 갖춘 어부들의 규모 큰
채취가 진행되고 북쪽에서는 아낙들이 강바닥을 호미로 긁어 잡아내는 정도로.
까닭은 섬진강의 얕은 수심이 다리를 지나면서 갑자기 깊어지기 때문이란다.
입증하려는 듯 다리 북쪽 원동마을 앞 강가에는 노파들까지 호미를 들고 있다.
진월면을 뒤로 하고 가장 긴 면이라는 다압면(多鴨面)에 들어섰다.
섬진강 따라 20km나 길게 뻗어있는 면이란다.
면계(新院里院洞마을)를 200세 팽나무가 지키고 있다.
오사배수펌프장 앞에서 헤어졌던 861번지방도로와 재회한다.
도로로 뻗어나오는 넝쿨들과 잡초의 정리작업중인 한 여인에게 넌지시 물었다.
광양과 하동 중에 살기 좋은 곳이 어느 쪽이냐고.
"있는 사람은 다 좋고 없는 사람은 다 나쁘지요"
자기 일급이 얼만지도 모른다는 모자란 듯한 여인에게서 천하의 선답(禪答)이 나오다니
도처에 스승이로고.
공무여행자의 숙식소인 섬진원(蟾津院)이 있었다 하여 원동이라는 마을,
2번국도가 건너가는 섬진교,
섬진나루터와 이웃 원동에 비해 새로 터를 잡아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기(新基) 등을
지난 자전거전용도로는 섬진교 앞에서 헤어졌던 861번지방도로와 또 만난다.
갓길을 이용해 외압(外鴨)마을을 지난 자전거길은 강가 매실농원길로 내려선다.
백두대간 종주때 물 부족으로 119구조대의 도움을 받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 있긴 해도
좀처럼 물 걱정하지 않는 늙은이가 목이 타오는 것을 걱정할 만큼 더위는 심했다.
그러나 행복농원은 이름처럼 행복을 주지 못했다.
개에게 맡기고 모두 집을 비웠기 때문이다.
섬진강과 매실촌
곧 섬진강 유래비와 수월정이 있으며 매화로 이름난 섬진마을 동구다.
섬진강은 본래 모래내, 다사강(多沙), 두치강(豆置) 등으로 불리던 강이다.
고려 우왕(禑王/32대) 11년(1385), 왜구가 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섬거(蟾居/진상면)에
살던 두꺼비 수십만마리가 이곳으로 몰려와 울부짖음으로서 놀란 왜구가 달아났다.
이 때 이후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蟾津江)으로 부르게 되었다.
유래비(由來碑)가 전하는 전설이다.
섬진나루는 병사 수백명과 병선 수척을 보유한 수군진(1705~1895)을 설치했을 정도로
주요 통로였으며 여기 잔존한 돌두꺼비 4기는 수군별장들의 공적비 좌대였을 것이란다.
광양출신으로 나주목사를 지낸(이조선조때) 정설(鄭渫)이 만년을 소일하려고 세웠다는
수월정(水月亭)보다 250세된 느티나무(보호수)가 그늘을 만드는 평상의 인기가 높다.
-달빛이 비추니 금빛이 출렁이며 그림자는 잠겨서 둥근 옥과 같으니 물은 달을 얻어
더욱 맑고 달은 물을 얻어 더욱 희니 곧 후(侯=정설)의 가슴이 맑고 투명한 것과 같다-
송강 정철의 수월정기(水月亭記)의 일부라 하나 그에게 절경 아닌 곳이 있던가.
그가 예찬한 관동팔경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옛 시인묵객들은 워낙 과장이 많아서.
광양도 교통사고 으뜸지역인가.
이 마을에도 제2, 제3의 박주윤(어제 만난)이 있다.
아직 창창한 나이에 전동스쿠터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그들이 안쓰럽다.
그나마도 수년에 걸친 사투 끝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증언은 이미 점화된 내 공차증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연간(2010년) 교통사고 발생 22만 6천여건에 5.500여명이 사망하고 35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끔찍하게도 우리는 누구나 일생(평균 80세/남77.3세 여84세)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다칠 확률이 58%가 넘는데 다반사 처럼 교통사고를 당한 내가 공차증에 시달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평상 옆에 있는 무인인증센터 덕에 자전거 주자 몇을 만났다.
워낙 빨리 달리기 때문에 마주 대할 기회가 없는데.
하나같이 눈만 내놓고 온몸을 감싸는 그들, 그들은 왜 햇볕을 두려워(기피)할까.
카미노(이베리아반도)의 자전거주자들이 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머리,양팔굼치,
양무릎 보호 외에는 무관심한 세계의 다양한 자전거 마니아들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기(氣) 죽어 산에도 못가겠다던 이의 말은 열등의식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산에는 에베레스트등정에 손색없는 장비를 갖춘 등산객이 주류를 이룬다는
어느 기자의 논평처럼 여간한 강심장 아니면 주눅들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자전거의 생활화를 외치지만 이 역시 등산과 다를 것 없이 고급화,사치화 되지 않았나.
오직 헬멧 하나 쓰고 보통자전거로 전국을 누비던 1990년대는 참으로 옛날 일이다.
고백하건대, 자전거주자와 등산인, 보행인 불문하고 얼굴을 감싼 괴상한 마스크를 대할
때마다 옛날에 문둥병 환자를 만났을 때처럼 소름이 끼친다.
문둥이골짜기에서 얼굴을 감싼 어머니와 누이를 만난 벤허의 참담한 모습이 떠오르고.
시원한 평상의 자력(磁力)이 강했으나 멀찍이 보이는 식당의 인력이 더 강했다.
어제 점심 이후 공복상태니까 당연한 일.
도중에 '협성농산' 특산품 판매점에 들렀다.
매실촌 답게 매실진액(津液/엑기스)을 타서 마실 수 있는 음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갈증을 푼 대가로 주인여에게 팁(tip) 하나를 주었는데 반영할까.
"나그네여, 걸음을 멈추고 들어와서 포도주 한잔 마시고 힘내세요"
캄포나라야(카미노 프랑스길) 와인 협동조합의 입간판을 소개했는데.
"피곤한 나그네는 들어와서 시원한 매실수 한잔 마시고 힘내십시오"
안내판 하나 세워놓으면 어떨까.
제철이 아니며 이른 점심때라 그런가 높은 곳에 자리한'해돋이식당'이 마을인들의 극구
추천과 달리 한산했다.
그러나 주인여 이순분은 인상대로 후덕한 여인임이 틀림 없다.
강원도 원주 태생이 전라도 광양땅에 정착하기 까지는 곡절이 많았겠지만 몸이 여의치
않아 손님 맞을 준비가 늦어졌다면서도 성의를 보였다.
재첩국밥을 팔면서도 제맛 날 때가 아니란다.
매실 막걸리 한병을 마시게 하면서도 회사가 시음용으로 준 것이란다.
아무리 눈치 없는 늙은이기로 부담 갖지 말고 마시라는 뜻임을 어찌 모르랴.
광양땅에서 보는 하동포구80리길이 멋진 길인 것은 틀림 없다.
그러나 자연은 공평하다.
광양에는 실리를 주고 있다.
아침햇살을 받고 자라는 광양땅의 소출들이 석양볕을 받는 하동의 것들에 비해 월등한
인기를 누린다니까.
그래서, 광양의 매실축제에 하동땅이 몸살을 앓는단다.
이곳 매실마을 축제때 하동땅 섬진강대로(19번국도)와 부교를 가설해 몰려드는 인파를
정리한다니까.
왜 사기를 쳤을까
아무리 극성을 부리는 무더위도 차 없는 길을 걷는 나를 어찌할 수는 없다.
선비가 많이 날 것(多士)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지만 모래와 내(川)가 많다해서
다사천(多沙川)이었다는 마을을 지났다.
마을 앞에 학이 많이 앉는다 해서 소학정(巢鶴亭)이라는 마을도 지나서 관동(官洞)마을
송정공원 쉼터까지 거침 없이 갔다.
쉼터에서 홀로 휴식중인 믿음직한 젊은이도 만났다.
30만원짜리 자전거로 1천만원, 2천만원을 자랑하는 자전거들과 당당히 겨룬다는 그의
호기가 고맙고 나를 반하게 했다.
이런 젊은이가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희망적이니까.
송정공원에 서있는 백운산 등산 안내판이 또 걸음을 붙들었다.
어쩔 수 없는 산(山)늙은이임을 어찌 부정하겠는가.
평생의 산행을 통틀어 유일하게 나를 감동먹인 '119 안전지팡이'를 만난 산인데 하던 일
일체를 중지하고 산으로 오르고 싶은 충동이 일지 않겠는가.
나는 2번이나 119구조대의 도움을 받았지만 광양소방서의 작품'119안전지팡이' 이상의
감동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관동 이후 불길한 예감을 주기 시작한 자전거전용도로는 고사마을을 지나면서
종잡을 수 없게 하더니 다압면소재지를 우회한 후에는 절망적이다.
일부 개선과 보완만 이루어지면 썩 잘 조성되었다고 생각되는 자전거길에 대해 부정적
이고 비판을 쏟아낸 해돋이식당 여주인을 드디어 이해하게 되었다.
마지막 연결만 하면 되는데도 방치되어 있는 과수원길, 뽑혀서 흉물처럼 나뒹굴고 있는
자전거길 안내표지판과 이정표, 공사를 중단해 만신창이가 된채인 소위 자전거길.
강따라 신설되는 길이 아니라 861번 지방도로의 한쪽을 자전거길로 확장하는 작업인데
토지의 보상문제,자전거길 성토로 인한 농기계 출입과 영농의 애로 등이 원만하게 해결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강행하다가 제동이 걸렸다는 것.
한 과수원 주인과 고사리 신토불이농장주, 주민 몇분의 증언이다.
올해 안에 해결될지 의문이며 왜 서두르는지 이해할 수 없단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왜 사기를 쳤을까.
왜 마무리되었음을 알리는 준공식을 갖는 등 요란법석을 떨었을까.
권력의 핵심장관은 취임 반년도 되지 않아 실각의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가.
그래서 재임중 한건 했다는 치적의 유혹을 받았는가.
그깟 자전거길 지연되면 어떠하고 해를 넘기면 어떠하며 장관이 누군들 무슨 대수라고.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기자라는 자들은 무슨 극약에 마취되었기에 그들의 사기행각을
홍보하는데 열 올려 나같은 늙은이를 골탕먹이고 있을까.
까마득히 몰랐으며 속았다고 변명할텐가.
발로 뛰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전화 1통화면 금방 들어날 거짓이기 때문에 나는 저들을 쓰레기만도 못하다는 것이다.
섬진강길, 번복을 거듭하다
나는 허탈에 빠지고 말았다.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해도 생래적으로 도덕적인 적이 전무한 이 권력집단으로부터는
더는 실망할 것도 없다.
일명 제4부라는 언론마저 이미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버린 현실에서 뭘 기대하겠는가.
그럼에도 내가 아직 버리지 않고 있는 희망은 칼보다 강하다는 펜이 살아서 호흡조절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믿음마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맥이 빠지고 공차증이 수직으로 오르고 걸어갈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신토불이매실농장주 안호찬은 새로 보충한 물병에 매실액을 타주며 나를 격려했다.
잠시 쉬고 있는 사이에 강 건너 하동포구80리중에서도 각광받는 지역임을 입증하는 듯
대소 차량들로 붐비고 있는 악양 평사리공원 일대가 지근으로 다가왔다.
최참판댁(박경리의 토지)도 어림해 볼 수 있는 위치인 신토불이농장 앞은 861번 지방도
변인데도 널따란 무료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다압면의 매실은 80여년(1931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단다.
일본에서 광부생활로 번 돈으로 밤나무와 매실나무 묘목을 구입해 귀국한 율산 김오천
(栗山金午千/1902~1988)이 퍼뜨렸다니까.
다압면 전체가 매화마을이며 최근에는 농촌 자연관광지로 각광받아 몰려드는 차량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의 주차장이란다.
주목되는 점은 옛부터 영호남의 관문으로 양지역 화합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다압면은 광양땅이면서도 생활권이 하동이기 때문인지 하동말씨다.
의기소침해진 나는 죽천(竹川)마을을 지난 후 섬진강길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철수할 버스편을 만날 때까지만 걷기로 하고 걸은 것이 금천교를 막 지났다.
구례 간전면과 하동 화개장터를 잇는 남도대교가 4km쯤 남았을 지점에서 지나쳤던 한
소형승합차(봉고?)가 스스로 멈춰서서 나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염주가 걸려있는 이 차는 남도대교를 건너 화개장터 입구에 나를 내려놓았다.
버스편으로 섬진강에서 멀어졌어야 할 나를 이 불자가 다시 섬진강에 붙들어 놓은 것.
애초의 계획은 아니지만 화개장터에서 일박하는 것이 희망사항이었다.
화개장은 섬진강의 가항종점(可航終點/돛을 단 行商船이 들어올 수 있는 최 상류지점)
에서 열렸다.
물물교환시대에 섬진강 물길을 주교통수단으로 하는 전라도와 경상도민들이 내륙에서
생산된 임산물, 농산물과 남해에서 생산된 해산물들을 서로 교환하는 장이었으니까.
지리산 남쪽자락, 섬진강에 합류하기 직전의 화개천변, 전라도(구례)와 경상도(하동)의
경계에서 양도민들이 오순도순 장을 여는 것만으로도 이름대로 꽃이 활짝 핀 듯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근 300년의 긴 역사속에서 갖은 애환으로 점철된 5일장은 오래 전에 폐장되었고 하동땅
화개면 탑리에 재현한 화개장은 상설시장이다.
현대화 되어 정감은 떨어지나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 자극적인 간판들이 시선을 끈다.
이 복잡한 장마당 안에서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못 궁금하나 애닲도다 새벽같이
떠나야 하는 나그네여.
화개장터 안에 자리한 2층 정자 화개루(花開樓)에 여장을 풀었다.
가다오다 들렸을 뿐인 화개장터 한복판에서 밤을 보내게 되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사다.
섬진강에서 멀어졌다면 다시 가까이 가는 일이 없을 것인데 결국 이 불자가 내 결심을
되돌려 놓았다.
번복된 만큼 차 없는 길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각오가 비장하지 않으면 도저히 걸을 수
없는 길이겠기에 몹시 무겁게 느껴지는 밤이 깊어갔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