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팔공총림 동화사 108순례 안내
○ 출발 일시 및 장소 : 2013. 8. 11(일) 07:00 반월당 보현신협앞
○ 순례지 : 모악산 금산사 / 완주 송광사 / 위봉사
○ 동참금 : 3만원
○ 신청방법 : 카페 동문. 재학생 공지방 한줄 댓글 및 사무국 전화 신청
□ 모악산 금산사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수 있게 한다.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 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 완주 송광사
송광사는 도의선사가 절터를 찾다가 영천수를 발견하고 터를 잡았는데 그때가 신라 진평왕 5년(583)이었다. 그후 경문왕 7년(867)에 구산선문 중 도의국사의 가지산파 제3조인 보조국사 체징(804~880)에 의해서 중창되었다.
그 후 폐사가 되어 주춧돌만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던 것을 고려 보조국사가 이곳을 지나다 大성지임을 아시고 표시를 해두었고, 순천 송광사를 개창한 후 제자들에게 본사를 복원·중창할 것을 부탁한지 수백 년이 지난 조선 광해군 15년(1622:임술)에 웅호, 숭명, 운정, 득신, 홍신 등 보조국사 제자들이 덕림스님을 중창주로 모시고 복원·중창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올 것을 기원하고 국난으로 돌아가신 일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했던 곳이기도 하며 병자호란 때에 전주사고(왕조실록)를 지키기 위하여 승군 700명이 머무르는 등 민족의 역사적 영욕을 함께했던 호국도량이다.
또한 석가의 화현이라고 하신 진묵스님께서 1623년(계해년) 대웅전 삼존불 조성시 증명법사로 초청되었으나 부여무량사에서도 동시 초청된 관계로 송광사에는 주장자를, 무량사에는 단주를 보내 법력을 나투었는데 주장자가 밤낮으로 꼿꼿이 서서 법상을 물리는 신의함을 나투신 곳이기도 하다.
일주문은 현재의 위치로부터 3km 남쪽 밖인 나드리(무주, 진안방면 도로 입구)라는 곳에 서있던 것을 1814년(순조14년) 조계교가 있던 곳에 옮겼다가 1944년 해방되기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 절은 본래 白蓮寺(백련사)라 불렸으며 800동의 당우와 600승려들이 살아 16방사가 즐비하여 16방주(주지)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했었다.
□ 완주 위봉사
위봉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먼저 1799년 전국의 사찰에 대해 기록한 『범우고(梵宇攷)』에는 고려 초에 최용갑(崔龍甲)이라는 인물이 처음 암자를 세운 뒤 나옹스님이 중창한 것이라 하였다. 수록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봉사는'圍鳳寺'라고도 한다. 속전에 의하면 산의 형세가 사방이 둘러싸여 있고, 처음 창건할 때 마침 봉황새의 이적(異蹟)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고려 초 전주의 최용갑(崔龍甲)이 명산을 유람하다가 이 터를 얻고 처음 암자를 건립하였다. 이후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이곳을 지나다가 지형의 아름다움에 탄복하였으며, 석잠(釋岑) 스님이 구조를 고쳤다가 승숭(僧崇) 스님이 큰 사찰로 만들었다. 산내에는 북암(北唵)ㆍ달마암(撻摩唵)ㆍ승가암(僧伽唵)ㆍ익수암(益水唵)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정년간(至正年間, 1341∼1367)에 창건된 것들이다.그러나 현재 사찰 내에 남아 있는 「극락전중건기(極樂殿重建記)」에 의하면, 신라 말에 최용각(崔龍角)이라는 사람이 산천을 섭렵하다가 3마리의 봉황이 날아든 흔적을 발견하고 이곳에 절을 지어 위봉사라 칭했다고 한다. 창건에 관한 또 한 가지 설은 신라시대인 604년(진평왕 26) 서암(瑞巖) 스님에 의해세워졌다는 기록이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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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야 여불 김재득, 도심화 이순주 신청합니다
57야 표순옥,법우님 신청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