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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묵정밭의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벽암 이상인
단수시조 창작 교실
권갑하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황진이, <청산리 벽계수야>(*고시조는 제목이 없음)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 화담 서경덕, <마음이 어린 후이니>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황진이< 내 언제 무심하여>
조선시대 천재시인 황진이의 시조는 현대시에 전혀 손색이 없는 문학적 예술성을 갖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황진이와 대학자인 화담(花潭) 서경덕(1489~1546)과의 러브스토리도 유명하지만,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한 백호(白湖) 임제(1549~1587)가 평안도사가 되어 송도로 가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을 올리며 지은 아래 애도의 시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명편입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위에 소개한 시를 우리는 흔히 <옛시조>라 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우리말과 우리의 숨결로 천여년 전에 빚어낸 우리의 시형식입니다.
시는 크게 <정형시>와 <자유시>로 나눕니다. <정형시>는 그 나름의 형식을 지닌 시로 중국의 <한시>(오언율시, 칠언절구 등)와 우리나라의 <시조>, 일본의 <하이쿠> 등이 있고 유럽에는 <소네트>가 있습니다. 정형시를 가진 민족은 이처럼 매우 소수입니다. 문화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나라가 아니고는 그 민족의 정형시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 자유시는 유럽에서 시작된 시형식입니다. 우리나라에 자유시가 들어온 것은 불과 100년 전으로, 지난해 현대시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었지요. 그런데 물밀듯 밀려온 서구문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민족의 혼이요, 정신이며, 우리 문화유산의 정수인 우리 민족시 <시조>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서구에서 들어온 자유시를 안방에 들여놓고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민족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세상이 이런 눈물 나는 일이 또 어디 있으며 가슴 아픈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우리의 혼, 우리의 정신을 빼앗겼으니 나라를 빼앗긴 것이나 다를바 없는 현실이죠. 아무리 우리가 부족하고 힘이 없다 해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이렇게 부정하고 우리 것, 우리 문화를 외면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웃나라 일본은 우리 시조와 같은 자신들의 정형시 <하이쿠>를 세계 속의 시로 발돋움시켰고, 중국의 지도자들은 외국 정상들과 만나면 한시 한편을 꼭 읊어주고 있다는데 말입니다.
우리시인 <시조>를 쓸 줄도 모르면서 서구에서 들어온 <자유시>만을 고집하고, 시조를 폄하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집안, 자기 가문의 역사와 문화, 정신은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조상, 남의 가문의 전통문화를 섬기는 것과 다를바가 없는 일이지요. 비유가 조금 거칠지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마치 독립운동하듯 <시조 창작 캠페인>을 범국민 운동으로 펼칩니다.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인 시조를 알고 창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 한국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입니다. 대통령이나 사회 지도자들도 시조 한수쯤은 외울줄 알아야 하고 쓸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분들이 시조가 어려워서 알지 못하고 쓰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민족 정신이 흐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의 혼과 숨결로 빚어낸 <시조>는 창작이 어렵지가 않습니다. 물론 문학적 예술적으로 우수한 작품을 쓰려면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시조 창작은 우리 말, 우리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익혀 시조 한 편을 창작해보면 <아, 시조 속에 우리 민족의 혼과 가락, 숨결과 정신이 배어 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시조>는 원래 한 수 짜리가 원형, 기본형입니다. 한 수짜리 시조를 <단수시조><단시조>라 부릅니다. 초장, 중장, 종장으로 이뤄진 한 작품의 시조를 <시조 한 수(首)>라 하지요. 아래처럼 초장, 중장, 종장으로 이뤄진 시조를 <한 수>라 하며 시조의 원형인 것입니다.
<초장> 까마귀 / 검다하고 / 백로야 / 웃지마라
<중장> 겉이 / 검은들 / 속조차 / 검을소냐
<종장> 아마도 / 겉 희고 속 검을 손 / 너뿐인가 / 하노라
- 이직(1362∼1431)
단(수)시조의 기본형은 <3장 6구 12음보, 45자 내외>로 일반적으로 설명합니다. 즉 네 개의 소리마디(/로 구분)가 결합하여 <한 장>을 이루고 한 장이 세 번 중첩되어 <한 수>를 이루는 형식 구조입니다. 이를 학교 교과서에는 아래와 같이 <자수율>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장> 3(4) / 4 / 3(4) / 4
<중장> 3(4) / 4 / 3(4) / 4
<종장> 3 / 5(~8) / 4 / 3
그러나 근래에는 <자수율>보다 <음보율> 개념으로 시조를 설명합니다. <자수율>은 엄격한 자수를 바탕으로 하는 중국의 <한시>나 일본의 <하이쿠>를 의식해 시조를 자수로 해석하려 했던 일제시대의 유산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경직된 사고를 갖지 않았고 무엇보다 우리말은 뜻글자가 아니기에 자수율로 시조를 해석하는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음보율>에서 음보는 음절이 4자인 것을 <평음보>, 3자 이하로 작은 것을 <소음보>, 5자 이상(~8자이내)으로 큰 것을 <과음보>라 합니다. 이를 한 수의 시조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초장> 소(평) / 평 / 소(평) / 평
<중장> 소(평) / 평 / 소(평) / 평
<종장> 소 / 과 / 평 / 소
<초장>과 <중장>에서 비교적 규칙적인 흐름을 유지해 <율격적인 개방성>과 <시상의 연속성>을 부여한 뒤, <종장>에 와서는 이 연속성을 차단하여 호흡을 비대칭적으로 긴장시켰다가 풀어주는 형태로 한 수가 전체적으로 완결성을 취하는 형식으로 구조화 되어 있습니다. 종장 전반부의 <소음보-과음보>의 불균형 구조는 여기에 <시적 긴장>이 모이도록 하는 <시조만이 갖는 특유의 시적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초장과 중장의 평이한 걸음걸이가 계속 이어진다면 너무 지루하고 답답하겠지요. 여기에 탄력을 주는 시적 장치가 요구되는 것인데, <종장>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장치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시형식에 이러한 수준 높은 시적 장치를 가미해 시의 격을 한층 높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시조의 형식적 유산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시를 쓴 것이 바로 <현대시조>입니다. 시조라는 옷을 입은 <현대시>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현대인이지만 옷을 전통 복장을 입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고시조>는 문학적인 <시>와 음악적인 <창>이 한 몸이었지만, 19~20세기 인쇄술로 발달로 <현대시조>에 와서는 음악적 요소인 <창>과 분리된 것입니다. 이제 문학에서 <시조>는 자유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현대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 <현대시>라고 하면 <자유시>와 <시조>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시는 서구에서 들어온 <자유형식>으로 현대시를 쓰는 것이고, 시조는 <우리 민족이 만들어낸 시형식>으로 현대시를 창작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현대시조>는 현대시로서 시조 원형을 바탕으로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현대 자유시>와 구분이 쉽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를 구축하는 율격 구조는 시조의 원형에 두고 있기에 시조인 것입니다.
옛시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시조의 형식을 현대적으로 정리해보면,
① 시조는 <초장><중장><종장>의 3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② 각 장은 걸리는 시간이 같은 걸음걸이(음보) <넷> 이상이 모여 이루어지며,
③<종장>의 첫 음보는 긴장과 조임의 소음보(3음절), 둘째 걸음은 이완과 풀림의 과음보(5~8음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조 한 수의 의미구조는 통상 <4단 구조설>과 <3단 구조설>로 나뉩니다. <4단 구조>설은 시조 3장의 형식이 기승전결(起承轉結) 구조라는 관점으로 초장은 起句, 중장은 承句가 되며, 종장이 轉과 結에 해당합니다.
반면 <3단 구조>설은 초-중장의 두 전제에 대한 결론이 종장에 해당한다는 관점입니다. 시정신이 지향한 바가 대상(사물)과의 합일화이든 관념적 객관화를 통한 세계화이든 간에 종장에 이르러서는 동화나 조화로써 결구되고, 의미나 이미저리의 내적 형성력에 의해 통합되고 있다는 주장이지요.
이러한 형식과 의미구조의 바탕 위에서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 사상이나 내용 따위를 어떻게 건축할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시조 창작의 기본 과제라 하겠습니다.
<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 <한 허리를/ 버혀내여>///
<春風/ 니물아래> //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날 밤이여든> // <구뷔구뷔/ 펴리라>///
- 황진이
황진이 시조의 첫째 구인 <동짓달 + 기나긴 밤을>를 보면 두개 낱말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의미가 창출됩니다. 하나의 구가 형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낱말의 만남이 새로우면 새로울수록 <훌륭한 표현>이 창출되는 것입니다. 시조 한 수는 의미 창출 단위인 구(句)가 6개 이므로 이 6개의 구가 어떻게 만나 구성되느냐에 작품의 성패가 달려있다 할 것입니다. 실제 작품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종달새와 할미꽃/ 정완영
어제 밤 실실 단비
산과 들을 다 적수고
새 아침 하늘 문 열고
종달새 비비비 욺은
저 언덕 할미꽃 하나
고개 들라 함이다.
이 작품은 매우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조의 ABC라고 할 수 있는 기본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서벌 시인의 해설을 빌리면 이 시는 초-중-종장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의미구조와 리듬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하겠습니다. 초장은 과거, 중장은 현재, 종장은 미래에 해당하는 데, 초장은 이미 드러나 있는 세계, 중장은 지금 한창 드러내 보여주는 세계, 종장은 안으로 감추어져서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초장에서 감미로운 <단비>가 <실실> 내려 산과 들을 다 적셔 놓았습니다. <어젯밤>의 일이지요. 나타난 말들은 이러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한 뜻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일구어 놓았다는 얘기입니다. 중장의 <현재>의 의미 진행은 더욱 생생한 리듬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비비비>는 단순한 종달새의 울음이 아니라 <새 아침 하늘 문>을 열어젖힌 것과 같은 의미의 울음입니다.
그러면서 초장의 <어제 밤 실실 단비>의 모습까지 연상토록 하는 울음입니다. 종달새 울음소리 <비비비>는 종장의 <저 언덕>으로 가는 <비비비>이며, 저 언덕으로 가서 <할미꽃>이 고개 들기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종장에 등장하는 <저 언덕>은 <미래>를 상징하는 하나의 세계입니다. 빤하게 보여 지면서 드러나기는 하지만, 알 수 없이 멀리 있는 세계입니다.
때문에 <할미꽃>은 아직 다 보여 지지 않은 세계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하나의 대상입니다. 고개만 들어 올리면 <할미꽃> 꽃망울은 열릴 것이고, 그 꽃망울만 환하게 열려진다면 그 속에 들어 있는<미래> 세상의 의미는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미꽃은 그냥 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래를 열고자 하는 우리들의 희망을 아무도 모르게 만들고 있는 그런 존재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직지사 범종소리 / 정완영
이 돌은 내 고향 직지사
저문 산의 타종 소리
연잎 같은 푸른 바람에
너울너울 실려와서
천리 밖
만려(萬慮)의 창 아래
뚝 떨어진 쇠북소리.
초장의 은유법과 중장의 직유법이 눈에 띄는군요. <연잎같은 푸른 바람>을 볼수 있는 눈이 남다릅니다. <만려의 창>은 여러가지의 생각으로 근심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김대행 교수의 해설을 들어볼까요.
<종소리가 연잎에 내려앉는 것이 이 시인의 눈에만 보이는 것임은 앞에서 이미 알았지만 그것이 다시 바람에 실려 와 이 천리의 밖 근심 많은 삶 속에 한 덩이의 돌로 내려앉을 수 있는 것 - 아니다, 한 개의 무심한 돌덩이에서 고향 하늘에 남아 있을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남다른 귀와 남다른 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답이 아닐는지 모른다. 남다른 눈을 가진 사람이 있을 범하고, 남다른 귀도 뛰어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야 날렵하고 재기 발랄하게 이 세상을 헤엄쳐 다니지 않겠는가? 그들이 증권시장의 동태와 기미를 알아차리고, 권력이 흘러가는 곳을 재빨리 간파하는 데야 남다를 것이다. 그러나 한 덩이 돌멩이에 고향이 들어앉아 있고 종소리가 깃들여 있음을, 그래서 거기에 따뜻한 인정의 온기가 숨 쉬고 있음을 어찌 듣고 볼 수 있으랴.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의 세상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있어서임을 앞에서 보았다. 발밑의 벌레 한 마리가 무심 한 것이 아니고 발끝의 돌부리 하나가 그저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내 삶의 일부로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래야 눈으로 소리를 보고 귀로 모습을 듣는 힘을 비로소 가질 것이다.>
한란(寒蘭) / 김상옥
날 세워
창살을 베는
서슬 푸른 넋이 있다
한목숨
지켜낼 일이
갈수록 막막하건만
향만은
맡길 데 없어
이 삼동을 떨고 있다.
김상옥 시인은 시조의 정수를 단수에 두고 꾸준한 개작을 해오신 분입니다. 그만큼 시인의 정신은 푸르고 고고하며 향기를 발합니다. 위 작품은 초정 선생님이 말년에 지향하던 정신의 경지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이숭원 교수의 해설을 보겠습니다.
<가늘게 치솟은 한란의 잎을 '날 세워 /창살을 베는 /서슬 푸른 넋'으로 본 것은 김상옥만의 독특한 감각의 발견이다. 날이 추워져야 잎을 피우는 한란은 그처럼 매섭고 심독한 일면을 내장하고 있다. 그렇게 첨예한 잎으로 냉혹한 계절의 추위에 맞서 목숨을 지켜낸다는 것은 얼마나 막막한 일인가.
그러나 한란은 목숨보다도 자신의 향을 지키는 일에 더 비중을 둔다. 한란 말고 이 향을 감당할 자가 누가 있는가. 이 향만은 아무한테도 맡길 수 없으니 한란은 몸을 떨며 삼동을 버텨가고 있는 것이다. 목숨보다 서슬 푸른 넋을 지키고 그것에 더하여 은은한 향을 지키는 것. 이것이 초정 김상옥 시인이 지향하던 정신의 경지였다.>
무꽃 / 조운
무꽃에 번득이는
흰나비 한 자웅이
쫓거니 쫓기거니 한없이
올라간다
바래다
바래다 놓쳐
도로 꽃을 보누나.
무꽃과 흰나비가 어우르는 정경을 빼어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밀한 관찰 없이는 이를 수 경지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조운 시인은 순간적인 상황포착이 남달리 뛰어난 시인이었습니다.
상치쌈 / 조운
쥘상치 두손 받쳐
한입에 우겨 넣다
희뜩
눈이 팔려 우긴 채 내다보니
흩는 꽃 쫓이던 나비
울 너머로 가더라.
한 순간의 풍경이 아름다은 영상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두 손 받쳐>와 <한 입><우겨 넣다><희득> 등의 적확한 어휘가 돋보이며, 꽃잎 분분이 지는 봄날, 나비는 바람에 날리는 꽃잎 따라 울을 넘어 가고 있는 정경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곰 / 이호우
눈 감으면 선해오는
지워도 가시잖는
호광대 꽹과리에
어설피 재주턴 그 곰
조국은 달무리처럼
희끄므레 더 있고.
단층에서 / 이호우
옥문이 여닫기듯
또 하루가 새고 저물고
너와 나 사대하여
갈라 선 단층에서
한 탯줄 진하던 피는
물로 엷어 가는가.
이호우 시인의 현실 비판은 예리합니다. <단층에서>는 남과 북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으며, <곰>에서는 국제사회에서 제 몫을 찾지 못하고 강국의 장단에 놀아나는 조국의 모습을 어릴 적 보았던 호광대 놀이에 놀아나는 곰 재주 장면에과 오버랩 시킴으로써 비판을 간접화하고 있습니다.
오(午) / 이호우
쩌응 터질 듯 팽창한
대낮 고비의 정적
읽던 책을 덮고
무거운 눈을 드니
석류꽃 뚝 떨어지며
어디선가 낮 닭소리.
이호우 선생의 작품 <오(午)>도 빼놓을 수 없는 현대시조의 대표작입니다. 정완영 선생의 해설을 들어보겟습니다. <'석류꽃 뚝 떨어지며 어데선가 낮닭소리', 이 종장이야말로 일발필중으로 적중한 종장이다. 이 시에는 이 종장말고는 다시 다른 말이 있을 수가 없다. 종장뿐 아니라 시제 자체도 <오(午)>라는 단자를 놓아 이미 적중하고 있다. 단발로 큰 짐승(詩材)을 쓰러뜨린 통렬감이 뒤따르는 작품이다.
포수로 친다면 과연 명포수의 솜씨이다. 바늘못 하나로 나비나 잠자리의 등을 찔러 꼼짝없이 표본실의 함 속에 꽂아 놓듯이, 시인에겐 은바늘(的中語) 한 개만 가지고도 숨통을 찔러 지구의 자전까지를 멎게 하는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종장에는 주마축지(走馬蹴地), 달리는 말이 뒷굽으로 땅을 차듯 하는 경개(景槪)도 있는 것이다.>
보리고개 / 이영도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 쓸었나
보리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 보네.
이호우의 오누이인 이영도 선생의 <보리고개> 도 단수시조의 정수를 보는 듯 합니다. 문무학 시인의 해설을 들어보겟습니다.
<시조의 기본형에 시대의 아픔을 녹인 작품이다. 시조가 시대를 외면하고 있다는 인식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작품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다. 50~60년대 혹은 그 이전의 배고픈 세월이다. 이 세상에 참 설운 일도 많지만 그 어느 것이 배고픔만 하랴. 감꽃을 주워 먹던 아이가 행여 먹을 것이 있을까 솥뚜껑을 열어보지만 그곳엔 허기만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눈물이니 설움 같은 것을 저만치 밀어두고 있다. 가슴을 치든지 눈물을 흘리든지 그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감꽃만 줍던 아이가 솥뚜껑을 열어 볼 때의 안타까움은 독자들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이 작품엔 북두칠성의 옥형의 이름을 붙인다.>
무심 / 박재삼
가다간 파초잎에
바람이 불어오고
덩달아 물방울이
찬란하게 튕기고
무심한 이 한 때 위에
없는 듯한 세상을
위 작품은 <무심>이라는 관념적인 주제를 구체적인 언어로 실감나게 빚어낸 수작입니다. <무위자연>의 삶, 즉 인위적인 문화를 거부하고 자연 그대로 순진무구한 모습과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삶의 사상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깊은 사상을 관념적으로 말하지 않고 감각적 상황 포착과 묘사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원촌리 눈 / 송선영
예전에, 에전에, 뇌며
꿈꾸는 보리밭에
세상에, 세상에, 뇌며
열 오른 툇마루 앞에
넉넉히
함박눈 오시에,
붉은 빛 벙근 하얀 아침.
송선영 선생의 <원촌리 눈> 작품은 매우 특이합니다. 이지엽 시인의 해설입니다.
<걷어낼 것 다 걷어내 버리고 사유의 가장 예리한 부분만을 담아내는 절제의 미학이 숨겨져 있다. 초장에 '예전에, / 예전에'에 함축된 의미는 과거 지향적 꿈이다. 보리밭처럼 밟아도 희망이 싱그러움이다. 그러나 중장의 '세상에, / 세상에'에 내포된 의미는 가치가 전도되고 질서가 무너진 현실적 공간의 안타까움이다.
이 이상과 현실의 상반된 공간 위를 함박눈이 다 덮어 버린다. 눈은 그래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시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넉넉하게 나누어주는 포근함으로 따뜻하다. 붉은 빛이 벙그는 둥글고 둥근 아침, 시인은 그곳을 원촌리, 시인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칠십년 동안을 지내왔던 이제는 집터마저 사라진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사라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살아있는 시인의 정처(定處)인 셈이다.>
까치집 / 이근배
시인 박용래 눈이 젖어 바라보던
그 삭정이 둥지 삭정이진 슬픔
한 줄 시 고독을 품던 새는 지금은 날아가고 없다.
빈 까치집을 바라보면서 눈물의 시인 박용래를 추억합니다. 둥지를 비우고 어디론지 날아가 버린 새의 이미지에 박용래 시인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지요. 박용래에 대한 그리움, 안타까움, 서러움의 정서가 직접적으로 표출되지 않고 비유적 언어를 취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도창 / 이상범
소리를 짊어지고
누가 영을 넘는가
이쯤해 혼을 축일
주막집도 있을 법 한데
목이 쉰
눈보라 소리가
산 같은 한을 옮긴다.
소릿 광대의 한 많은 인생이 <목이 쉰 / 눈보라 소리>에 담겨 있습니다. 그 산처럼 쌓인 한을 옮겨가면서 살아가는 광대의 인생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작품입니다.
엉컹퀴 / 고정국
쉽사리 야생의 꽃은
무릎 꿇지 않는다
빗물만 마시며 키운
그대 깡마른 반골의 뼈
식민지 풀죽은 토양에
혼자 죽창을 깎고 있다.
뻣뻣하고 강마른 엉겅퀴의 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식민지의 메마른 땅에서 죽창을 깎는 반골의 사나이를 떠올립니다. '야생' '빗물만 마시며 키운' 등이 식민지 땅의 초라하고 삭막한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팽이 / 이우걸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3-4의 보법이 아닌 2-5의 보법이 우선 눈에 띄는군요. 이러한 2-5의 보법은 5의 걸음걸이를 빠르게 만들어 시를 더욱 역동적으로 끌고 갑니다. 탁월한 언어 조율 능력은 다양한 언어의 결합과 비틈 속에사 자연스럽게 곷을 피울 것입니다. '팽이'가 시인 자신이라면 '매'는 자아가 될 것입니다. 자아의 채찍을 온몸으로 받아 꼿꼿이 몸을 세워 돌 때 비로소 팽이는 고통스러운 자각 속에서 무지개를 피워 올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지개는 자기 구원의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심부름 / 서우승
미래사 가는 길에 내생(來生)만한 꽃을 만나
스치는 눈인사에 절이 한 채 생겨나서
심부름
까마득 잊고
소풍 속에
노닌다.
고도의 상징과 은유적 표현으로 다양한 해석을 열어놓고 있는 작품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무언가를 위해 잠시 이 세상에 심부름 온 것으로 생각해본다면 조금은 이해가 될 듯도 하다. 그 심부름 도중 어떤 인연으로 절 한채를 만나게 되고, 그 황홀경에 빠져 이 세상에 심부름 온 목적을 까마득 잊고 마냥 노닐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바라보니 / 조오현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기는 벌레 한 마리가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 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위 작품은 삶 가운데 어쩌지 못하는 육신의 고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나>를 <벌레 한 마리>로 인식하는 시인의 시선은 정직합니다. 가식의 옷을 벗고 <온갖 것을 다 갉아먹는><배설하고 알을> 스는 욕육의 존재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곰감의 폭이 확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현대시조의 형태는 다양하게 창작되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에워쌓으니 / 이정환
에워쌌으니 아아 그대 나를 에워쌌으니 향기로워라 온 세상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온 누리 향기로워라 나 그대 에워쌌으니.
어머니의 말 4 / 이한성
애비야,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말썽 피운 아이들을 가지치듯 자르지 마라
봉분 옆 산죽(山竹) 하나가 말귀를 트고 있다.
박제 / 권갑하
등 구부리고 얼굴은 책상에 박은 채
너는 살아 있었구나, 텅 빈 영혼을 안고
묵묵히
어둠의 시대에도
너는 살아 남았구나.
목련 필 때 / 박영식
가뭇해진 성감대를
살살 좀 그래그래 바람아
아아아아… 눈감기는 칠흑 땅 속
환각으로 몰려오는 빛 빛 빛
발 저린
하얀 순결을, 지 지금
터 터뜨리고 싶어.
여인숙 / 김윤철
버둥대며 강 건너던선잠 여울목
꽃다지 가시내의거침 숨도 뚝, 그치고
누우런
닥종이 위에
눈곱낀 햇살 빼꼼.
초생달 / 김강호
그리움 문턱쯤에
고개를 내밀고서
뒤척이는 나를 보자
흠칫 놀라 돌아서네
눈물을
다 쏟아 내고
눈썹만 남은
내 사랑
※ 시조의 분류
<형식적 분류>
○ 단(單)시조
- 단(短)시조(평시조)
* 단(短)시조 → 단장시조, 양장시조
- 중시조(엇시조)
- 장(長)시조(사설시조)
○ 연(連)시조 :
- 단순 연시조
- 혼합 연시조(옴니버스시조)
<내용적 분류>
- 서정시조
- 서사시조
- 동시조
출처 : 시로 여는 e좋은세상 ♬ 작성자 : 권갑하 작성일 : 2009.06.29 공개설정 : 전체공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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