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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하라! 우리는 모두 필요의 존재다
1. 만물이 커다란 한 세상을 이룬다 -도종환「숲」
2. 인간도 제각각의 몫으로 한 세상을 이룬다 -이응인「돌들은 아름답다」
3. 우리 모두는 필요의 존재 -신경림「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4. 관계에 의해서만 ‘무엇’으로 존재한다 -김진경「뿌리」
5. 먼저 그 존재의 필요를 보려고 해라 -권정생「강아지똥」
*6.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쓰임’의 존재다 -이응인「꼭 고만한 돌멩이들이」
7. 서로의 필요일 때 ‘아름다운 일치’가 된다 -이시영「아름다운 일치」
8.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를 본다면 -양정자「미래의 남편」
9. 큰 틀, 긍정할 수 있는 맥락을 찾아서 보라 -양정자「복상꽃 같은 순이」
10. 보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도종환「배롱나무」
11. 믿자, 다 제몫을 한다 -이정록「씨앗 파는 女子」
12. 간섭을 최대한 줄이자 -인디언 롤링썬더의 말
13. 그에 대한 믿음이 그를 크게 한다 -김해자「기가 맥혀」
14. 당당하면서 조심스러운 손님처럼 -노자「도덕경 제15장」
1. 만물이 커다란 한 세상을 이룬다 -도종환「숲」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는 이 세계는 유기적인 하나입니다. 생성의 그물은 그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만물을 낳았고, 그 모두를 살려 가는 방향으로 자기구속․자기생성․자기영속 합니다. 그렇기에 만물은 필요의 존재입니다. 당장 인간의 눈에는 필요치 않는 것도 더 큰 차원에서는 필요의 존재입니다. 그 유기적 하나 안에 인간도 부분으로 속합니다. 한 식구, 하나의 천지가족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넘어서는 전체, 더 큰 ‘생의 엄연함’입니다. 그래서 그 식구들을 ‘잘났냐, 못나냐’ 식으로 자기 필요에 의해서 가치판단하기 이전에 존재 모두는 생성의 세계가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생겨나게 한 필요의 존재이고, 차이의 존재이고, 선험적으로 연결된 존재라는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음 시를 읽으며 ‘모두가 한 세상’을 이룬다는 이미지를 간직하기 바랍니다.
숲
- 도종환
산 발치에 있는 나무와
산 정상에 있는 나무가 함께 모여 있다
아랫말 젊은이 백발 될 때까지 지켜본
고목이 있고 꽃봉오리 처음 열고
이 나무 저 나무 기웃거리는 진달래가 같이 있다
짐승 발톱에 챌까봐 제 잎으로 가려주고
추위에 얼어죽을까봐 가지 꺾어 덮어주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봄날이 가기 무섭게
그 나무 친친 감아 오르며 까불대는
칡넝쿨 다래넝쿨도 있다
아주 아주 위태롭던 날 어둡고 슬프던 날
벼락을 대신 맞고 죽어간 나무가 있고
그 앞에 어린 순을 내미는 나무가 함께 있다
그 나무들 모여 숲을 이룬다
낙락장송 혼자 이루는 숲은 없다
첫서리 내리면 잎을 버리고 몸 사리는 나무와
한겨울 내내 푸른 빛을 잃지 않는 나무가
함께 모여 숲을 이룬다
작은 산 하나를 만든다
설명하고 말 것도 없이 “아-, 차이들의 숲!”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함께 모여 숲을 이룬다/ 작은 산 하나를 만든다”는 이 이미지를 우주로 확대해 보고, 마을로 축소해 보고, 한 집단으로 축소해 보고, 우리 몸으로 아주 작게 축소해 보십시오. 모든 경우에 우리들은 각자이면서 유기적인 하나를 이룹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더 잘나고 못나고 한 기준이 없습니다. 모두 필요의 차이이고 존재입니다. 그 필요의 차이들이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여’ 하나의 작은 산을 만들고 세계를 만듭니다. “짐승 발톱에 챌까봐 제 잎으로 가려주고/ 추위에 얼어죽을까봐 가지 꺾어 덮어주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봄날이 가기 무섭게/ 그 나무 친친 감아 오르며 까불대는/ 칡넝쿨 다래넝쿨도 있다”. 그리고 그 커다란 하나가 다시 필요의 차이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이게 필요의 차이들이 이룬 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숲에서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을 골라서 가려내시렵니까?
2. 인간도 제각각의 몫으로 한 세상을 이룬다 -이응인「돌들은 아름답다」
인간 세계도 필요의 존재들이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여’ 한 세상을 이룹니다. 물론 특수한 고립계 안에선 잘나고 못난 것이 나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고립계를 벗어나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일 예로 달리기를 하는 그룹에서 달리기를 못하면 그 몫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 고립계를 벗어나면 그는 다른 필요의 존재입니다. 이 사회는 그런 고립계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어느 한 고립계의 가치를 전면화 전체화하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물론 인간계(界)의 가치를 생명의 그물에 전면화시켜도 위험한 일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그물 속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필요에 대한 확신이 우선 필요하고, 그 필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궁극에는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물며 인간들의 관계에서는 그 모두가 제 몫의 필요의 존재임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이 세상에 있다는 ‘있음’이 쓰임과 필요입니다.
다음 시를 읽으며 ‘제 몫의 필요의 존재’들이 이루는 한세상이라는 이미지를 간직하기 바랍니다.
돌들은 아름답다
- 이응인
동해 물고기들 때로 몰려와
부처님 설법 들었다는 만어사(萬魚寺)
물고기들 지금은
돌이 되어 있습니다.
수업 끝종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벌렁 드러누운 녀석, 옆에 놈 꼭꼭 찌르며 장난치는 녀석
입 가리고 키득거리는 놈, 침 흘리며 곯아떨어진 놈
통통통 종소리 흉내내는 녀석
중생도 깨달음도 따로 없네요
이런 녀석들도 소풍날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보리밥 한 덩이 감자 몇 알로
자성산을 넘을 것입니다
그 속에 철부지 검정 고무신 나도 끼어.
거대한 축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이렇게 저렇게 생긴 돌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잘생긴 돌도 있고 조각난 돌도 있을 것입니다. 큰돌도 작은 돌도 있을 것입니다. 둥글어서 둥근 쓰임이 된 돌도 있고 모나서 모난 쓰임이 된 돌도 있을 겁니다. 그것들이 다 모여서 하나의 축대를 이룹니다.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한 교실에서 수업 받던, “수업 끝종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벌렁 드러누운 녀석, 옆에 놈 꼭꼭 찌르며 장난치는 녀석/ 입 가리고 키득거리는 놈, 침 흘리며 곯아떨어진 놈/ 통통통 종소리 흉내내는 녀석” 등 제각각의 아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한세상을 이루듯이 말입니다. 혹시 이십 여 년의 시간이 흘러 동창회에 나가보신 분들은 이 사실을 금방 아실 겁니다. 학교라는 고립계에서 보았을 때와는 다른 저마다의 몫을 삽니다.
이렇게 모두가 제 몫의 필요로 하나의 세계를 이룹니다.
그렇기에 인간을 포함하여 이 세상 만물은 필요의 존재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를 이룬다 점에 유의하여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3. 우리 모두는 필요의 존재 -신경림「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우리 모두는 필요의 존재다!’
이것이 생성의 세계 출입문에 적힌 말입니다. 따라서 만물과 인간에 대한 예의는 여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이 지금은 비록 천덕꾸러기처럼 존재하더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해가 못 미치면 괄호로 두어야지, 불필요한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세계에서 혹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하나같이 ‘우리 모두는 필요의 존재다!’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이 말은 다른 모든 생각들의 첫 장입니다.
다음 老詩人의 말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 신경림
자리를 짜보니 알겠더란다
세상에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미끈한 상질 부들로 앞을 대고
좀 처지는 중질로는 뒤를 받친 다음
짧고 못난 놈들로는 속을 넣으면 되더란다
잘나고 미끈한 부들만 가지고는
모양 반듯하고 쓰기 편한 자리가 안 되더란다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서러워진다
세상에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기껏 듣고 나서도 그 이치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내 미련함이 답답해진다
세상에 더 많은 것들을 휴지처럼 구겨서
길바닥에 팽개치고 싶은
내 옹졸함이 미워진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들 차이의 몫으로 쓰입니다. 자리를 짤 때도 상중하의 부들이 어울려야 됩니다. 어울림 속에서 모두의 가치가 생성되는 것이지 가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거기에 어울리지 못한 자투리들은 또 다른 몫으로 쓰일 것입니다. 그래서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버릴 것이 있었다면 생명의 그물은 그것을 애당초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들 역시 필요의 존재로 이 세상에 살려고 온 것입니다. 그 중에서 못난 것도 어떤 필요로 있는 것입니다. 또 그 필요로 하여 ‘못난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내 옹졸함이 하늘을 찌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필요의 존재라는 사실을 “기껏 듣고 나서도 그 이치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내 미련함”이 한세월이었기 때문입니다. 안 그런다고 하면서도 어느새 잘나고 못남을 따져 작은 이해에 집착하던 나의 옹졸함, 이제는 부끄럽다 못해 미워집니다. “잘나고 미끈한 부들만 가지고는/ 모양 반듯하고 쓰기 편한 자리가 안 되더란다”는 말을 알면서도 순간순간 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내 밴댕이 소갈딱지여!
저는 지금이라도 ‘모두는 필요의 존재’라는 말을 되새겨 보려 합니다.
정말이지 이 말이야말로 지상을 살아가는 이의 모든 윤리가 응축된 말입니다.
4. 관계에 의해서만 ‘무엇’으로 존재한다 -김진경「뿌리」
이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은 자기만의 힘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큰 차원에서도 그렇고 아주 작은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라는 존재는 이미 자기 아닌 것에 의하여 자기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기 아닌 것에 의하여 자기라는 순간을 유지하며 생성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존재는 이미 관계에 의하여서만 ‘무엇’으로서의 그 존재입니다. 관계에 의하여서만 무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놈에 관계라는 것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너무 깊은 관계(예를 들어 공기와 나의 관계)는 의식하지 않아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기에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다들 저 잘나서 잘 된 줄 알고 살아갑니다. 관계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하지만 우리는 항상 관계 속의, 관계에 의하여 ‘무엇’일 뿐입니다.
저는 다음 시를 읽으며 ‘자기 중심’에서 ‘관계 중심’으로 이동한 마음을 읽습니다.
뿌리
- 김진경
밭에 거름을 낸다.
그 냄새만 맡으면 참 지독한데
그게 흙의 습기와 바람과 햇볕과 섞이면 왜
나무며 고사리며 칡이며 온갖 것들의 뿌리에서 나는
그 축축하고 좀 맵기도 하고 구수한 냄새로 되는지 모
르겠다.
흙과 거름과 바람과 햇볕 속에는
뿌리보다 먼저 뿌리 같은 게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따뜻하고 부드러워진 흙의 작은 구멍 속에
콩을 떨어뜨리고 잘 덮어준다.
머잖아 콩들도 흰 실뿌리를 뻗으리라.
그 실뿌리들은 꼭 콩에서 오는 것도
그렇다고 저 무뚝뚝한
흙과 거름의 알갱이로부터 오는 것도 아닐 게다.
콩 속에는 콩 속에 갇히는 것을 싫어하는
흙과 거름 속에는 흙과 거름 속에 갇히는 것을 싫어
하는
작은 무언가가 살고 있어
이 작은 것들이 콩과 흙의 경계를 가까스로 뚫고 나와
조금씩 조금씩 흰 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리라.
그래서 삽질을 하다 콩의 뿌리를 다치기라도 하면
콩보다 훨씬 중요한 무언가를 다치게 한 것처럼 가슴
이 뛰는 게 아닐까?
그때 우리는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다치게 한 그 작은 영혼들을 보고 있음
에 틀림없다.
똥은 똥일 뿐인데, 그래서 “그 냄새만 맡으면 참 지독한데/ 그게 흙의 습기와 바람과 햇볕과 섞이면” 거름이 됩니다. 관계가 바뀌면 똥은 똥이 아니라 식물들을 살리는 신(神)이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변하여 “나무며 고사리며 칡이며 온갖 것들의 뿌리에서 나는/ 그 축축하고 좀 맵기도 하고 구수한 냄새로” 됩니다. 관계로 하여 존재가 변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씨앗에 뿌리를 틔웁니다. 이것을 씨앗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저런 조건에서는 뿌리를 틔운다가 되겠지만, ‘흙과 거름과 바람과 햇볕’의 입장에서 보면 뿌리가 나올 수 있게 자기를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 속에 “뿌리보다 먼저 뿌리 같은 게 살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똥으로만 있으면 결코 뿌리를 불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실뿌리들은 꼭 콩에서 오는 것도/ 그렇다고 저 무뚝뚝한/ 흙과 거름의 알갱이로부터 오는 것도” 아님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각각에서 서로를 부르고 있으니 그 각각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시인은 “콩 속에는 콩 속에 갇히는 것을 싫어하는/ 흙과 거름 속에는 흙과 거름 속에 갇히는 것을 싫어하는/ 작은 무언가가 살고 있어/ 이 작은 것들이 콩과 흙의 경계를 가까스로 뚫고 나와/ 조금씩 조금씩 흰 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갇히는 것을 싫어하는” 무엇이 관계를 이루고, 그 관계가 만드는 창발성(創發性)이 ‘실뿌리’라는 새로움을 낳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에서 아주 중요한 진술은 “작은 영혼”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전까지의 영혼이라는 말이 그 존재에 국한되어 존재의 기저(基底)를 이루는 것이라면, 여기에서의 그 ‘작은 영혼’은 관계의 것으로 관계로부터 나누어 가진 ‘작은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관계가 없으면 영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낳는 체험을 시인은 “그래서 삽질을 하다 콩의 뿌리를 다치기라도 하면/ 콩보다 훨씬 중요한 무언가를 다치게 한 것처럼 가슴이 뛰는 게 아닐까?/ 그때 우리는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다치게 한 그 작은 영혼들을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진술합니다. 이런 체험이 깊어질 때 진정 ‘자기 중심’에서 ‘관계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관계가 존재를 규정합니다. 존재는 항상 “갇히는 것을 싫어하는” 무엇으로 서로를 불러 관계를 만들고 관계 속의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관계가 변하면 존재도 변하고, 존재가 변하면 관계도 변합니다.
5. 먼저 그 존재의 필요를 보려고 해라 -권정생「강아지똥」
지상의 모든 문제는 ‘그는 필요의 존재다’를 보지 못한, 그러니까 기본 예의를 지키지 못한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그는 필요의 존재다’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그의 필요부터 읽고 느끼려고 해야 합니다. 혹여 내가 어떤 차이에 대해 용납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일단 이 시작의 자리로 돌아와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오늘 생각합니다. “아이구, 이 밴댕이 소갈딱지야. 너 역시 그 나이 되도록 변변한 구석 없이 멀쩡히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분명 네 몸 속 어딘가에도 큰 세상을 이루어 가는 차이의 몫과 어떤 지혜의 손길이 있을 것이야. 너 스스로도 그것을 보도록 노력하고, 그 몫의 일을 해야해. 그것이 너 스스로에 대한 예의이고 그로 하여 타자에게 갖출 예의가 생기는 것이야”라고.
여기가 출발점입니다.
여러분들도 <강아지똥>이라는 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었을 것입니다. 저도 제 딸이 유치원생일 때 그림책을 읽어주며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다음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강아지똥에게 어느 봄날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존재의 필요를 찾아 읽고 느낄 때, 무엇이 달라질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강아지똥
- 권정생
보슬보슬 봄비가 내렸어요.
강아지똥 앞에 파란 민들레 싹이 돋아났어요.
“너는 뭐니?”
강아지똥이 물었어요.
“난 예쁜 꽃을 피우는 민들레야.”
“얼마만큼 예쁘니? 하늘의 별만큼 고우니?”
“그래, 방실방실 빛나.”
“어떻게 그렇게 예쁜 꽃을 피우니?”
“그건 하느님이 비를 내려 주시고, 따뜻한 햇볕을 쬐어 주시기 때문이야.”
“그래애…. 그렇구나….”
강아지똥은 민들레가 부러워 한숨이 나왔어요.
“그런데 한 가지 꼭 필요한 게 있어.”
민들레가 말하면서 강아지똥을 봤어요.
“….”
“네가 거름이 돼 줘야 한단다.”
“네가 거름이 되다니?”
“네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 속으로 들어와야 해. 그래야만 별처럼 고운 꽃을 핀단다.”
“어머나! 그러니? 정말 그러니?”
강아지똥은 얼마나 기뻤던지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아 버렸어요.
비는 사흘 동안 내렸어요.
강아지똥은 온 몸이 비에 맞아 자디잘게 부서졌어요….
부서진 채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 민들레 뿌리로 모여들었어요. 줄기를 타고 올라가 꽃봉오리를 맺었어요.
이렇게 모두는 필요의 존재이고 필요로 엮여진 차이의 존재이고, 그렇게 유기적인 한 세상을 이룹니다. 그러니 우선 그의 필요를 보고 느끼려고 해야 합니다. 물론 스스로도 자신의 필요를 느끼고 알려고 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존재하는 모두가 서로를 부르는 관계에 놓일 수 있습니다. 생명의 그물 안에서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이 가치론적으로 실체화되어 나뉠 수 없습니다. 서로에게 필요로 얽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그가 어떤 필요의 사람인지 보려고 하십시오.
선과 不善을 나누고 단가적 선택을 하는 지혜는 재앙을 부르는 지혜일 뿐입니다.
6.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쓰임’의 존재다 -이응인「꼭 고만한 돌멩이들이」
생성의 세계에서 버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자는 불룩불룩 숨쉬는 생성의 세계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개똥이 우리에겐 전혀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똥이 없으면 개가 없어질 것이며 그와 연결된 모든 관계도 사라져야 합니다. 또 개똥 곁에 뿌리박고 있는 풀도 사라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개똥을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쓰일 곳에 있다면 그것은 필요입니다. 그것이 쓰일 곳이 아닌 곳에 있다면 그로 하여 다른 관계를 생각해봐야 하는 필요를 낳는 것입니다. 따라서 쓰일 곳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닙니다. 또 나의 필요를 기준으로 하여 너무 쉽게 ‘필요 없는 존재’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다른 쓰임의 존재일 뿐입니다.
다음 시를 읽겠습니다.
꼭 고만한 돌멩이들이
- 이응인
텃밭에서 돌멩이를 한 트럭은 주워냈을 거야.
푸석푸석한 흙덩이 속에서
호박덩이만한 돌부터 주먹만한 놈에다 잔돌까지
끝없이 주워냈어.
이것들이 밭을 다 망쳐놨어.
밭둑이고 마당 구석에 잔뜩 모아 두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돌탑 쌓아 보라 하더라고.
대문 자리에 땅을 파고
나무 기둥 세울 때 보니까
당장 호박돌 몇 덩이하고 잔돌을 넣어야
기둥이 바로 서더라고.
마당 끝에 축대를 쌓은 뒤에도
빈 자리마다
꼭 고만한 돌멩이들이 필요하더라고.
백작약도 보고 봉숭아 채송화도 피우려고
마당가에 화단을 만드는 날
주먹돌 빙 둘러놓으니
그제야 제법 티가 나더라고.
오늘은 꺾꽂이해 두었던 개나리를
울타리 밑에 옮겨 심었어.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잔돌을 박아주려니
꼭 고만한 돌들이 안 보이더라고.
온 식구들이 달려들어 주워낼 때는
참 징그럽더니
그 쌔고 쌨던 돌들이
텃밭을 텃밭으로 만들고
마당을 널찍이 펼쳐 주고
꽃밭을 꽃밭같이 밝혀 주더라고.
텃밭을 만들며 거짓말 보태 트럭 한 대 분의 돌을 주워냅니다. 그쯤 되면 돌만 봐도 징그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채소를 심어야 하는 곳에 돌이 필요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고 필요만 벗어나면 그 돌이 기둥을 세울 때나 밭둑을 만들 때는 또다른 필요가 됩니다. 어떤 것에서는 필요 없는 것이 어떤 것에서는 필요가 됩니다. 밭에는 필요 없는 돌이 밭둑을 만드는 데는 꼭 필요합니다. 꽃밭에는 필요 없는 돌이 그 테두리를 만드는데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것이 한곳에 섞여 있다가 어떤 질서를 잡아가는 과정에 다 필요한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질서를 잡아간다는 것은 솎아서 내다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미지보다는 배치를 달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호박돌은 호박돌대로, 주먹만한 돌은 주먹만한 돌대로, 잔돌은 잔돌대로 그 쓰임을 찾아 배치를 다르게 함으로써 필요의 존재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섣불리 ‘필요 없는 존재’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아직 그 쓰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필요 없는 존재’는 아닙니다. 인간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쓰임의 최선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내다버리는 것이 급한 게 아닙니다. 그러다가는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잔돌을 박아주려니/ 꼭 고만한 돌들이 안 보이더라”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7. 서로의 필요일 때 ‘아름다운 일치’가 된다 -이시영「아름다운 일치」
민들레와 강아지똥의 관계, 그게 아름다운 일치입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 그게 아름다운 일치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우리 마음에 근심이 사라지고 따뜻한 감정이 흐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가 되게 하고 더 큰 풍요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몫이 서로에게 필요가 되어 ‘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를 읽으며, 아름다운 일치가 이 세상에서 정말 우리들이 꿈꾸어도 될 가치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일치
- 이시영
나는 용산성당 그 푸르른 나무둥치숲이 좋다
한 그루는 찬미 예수를 구경하기 위해
창문 쪽으로 파르라한 머리를 잔뜩 숙이고 있고
한 그루는 비탈에 서서 꼿꼿이
하늘을 향해 찌를 듯이 서 있고
한 그루는 인간을 향해 납짝 엎드려 온몸으로 환히 웃고 있는,
나는 용산성당 그 푸르른 나무숲이 좋다
아름다운 일치입니다.
다 다르면서도 기대어 아름다운 일치(一致)입니다. 찬미 예수에 관심이 있는 나무도, 천명(天命)의 하늘을 사모하는 나무도, 그저 사람이 그리워 “인간을 향해 납짝 엎드려 온몸으로 환히 웃고 있는” 나무도 각자이면서 함께 일치의 하나를 이룹니다. 차이이면서 아름다운 일치를 이룹니다. 그래서 가슴속에 명료한 사회적 상상력이 만들어집니다. 어떤 외곬, 한 방향, 하나의 가치와는 아무런 연도 없는 숲이라는 세상과 그 지혜! 한 방향을 향하고 있지 않다고 그 누구도 비난하거나 강제하지 않는, 어울려 하나인 세상! 인간 세상이라면 그리도 쉽게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곤 할 텐데, 아랑곳 않고 각자의 모습으로 서서 각자의 삶을 살며 한 세상을 이룬 그 숲의 풍경!
그렇습니다. 제 몫의 필요를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법은 아름다운 일치입니다.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도 실은 나와는 아주 다른 존재입니다. 섭섭하게도 같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조상과 부모, 성별, 산 곳,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방식, 생각하는 것, 하다 못해 손톱 모양 하나조차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같이 삽니다. 그렇게 같이 살 수 있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에게 되어주는 ‘아름다운 일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몫의 필요는 당신과 곁하여 아름다운 일치입니다.
서로는 서로에게 곁하여 아름다운 일치입니다.
8.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를 본다면 -양정자「미래의 남편」
내가 누구에겐가 존중받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존중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것 생각하지 않고 그냥 ‘존중한다’는 마음만 가지고 살아도 한때 어떤 정치가가 꽁알거리던 것보다 더 큰 ‘대도무문’(大道無門)이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여행길이라면, 여행자처럼 존중하는 마음으로 보고 길을 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떻게 감히 여행자가 그곳 사람에게 잘잘못을 말하겠습니까? 이것처럼 황당한 일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사정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는 놈이 자기 기준으로 나에 대해 ‘쓸데없는 놈’이라고 말한다고 말입니다. 열 받는 일이지요.
그래서 더욱 ‘존중하는 마음’으로 보고 듣고 부득이하게 말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일 때 비로소 차이가 차이다워지고 관계의 맥락이 보이는 것입니다.
차이의 존중 없는 소통은 애초부터 폭력입니다.
차이의 필요를 보지 못하는 만남은 애초부터 싸우려는 만남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 그 자체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계 모두는 생명의 그물이 스스로 지어낸 지혜의 조각들입니다. 비록 먼지처럼 작기는 하지만 그 하나 하나가 큰 생명의 지혜를 자기 모습으로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라는 차이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모든 차이를 긍정하는 쪽으로 퍼져가야 합니다.
존중하는 마음일 때 그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미래의 남편
- 양정자
지금 저렇게 누런 코 줄줄 흘리고
손톱 때 새까맣고
숙제도 준비물도 제대로 한번 챙겨본 적 없는
우리 반 칠칠이 준호
지금 어디선가 코 줄줄 흘리고
손톱 때 새까만 채 떠들썩 자라나고 있을
한 칠칠이 여학생 만나
그래도 사내꼭지라고
제 여자 쥐잡듯 잡도리하며 사랑도 해주면서
남편 구실 당당히 해나가겠지
예전의 저와 꼭 닮은 놈을 보는 듯 합니다. 물론 그때 나의 선생은 양정자 선생님 같은 인품이 못되어 매맞고 똥간 청소한 추억뿐이지만, ‘존중’이라는 것이 이렇게 빛나는 생의 여지를 만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생의 여지가 거짓인가요? 아닙니다. 저도 애아범이 되었고 아들 딸 다 낳아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찔찔이가 이런 글도 씁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절 이런 여지를 두지 못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다른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일단 존중하는 마음으로 살아봅시다.
9. 큰 틀, 긍정할 수 있는 맥락을 찾아서 보라 - 양정자「복상꽃 같은 순이」
사진 찍는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전에 공원 같은 곳에 가면 ‘찍사’라고 부르던 사진사들이 있었지요. 그 분들은 사진관 사진사와 달리 자신들이 직접 몸을 움직여 가장 좋은 위치를 골라 사진을 찍습니다. 가장 잘 나오게 하려면 별 수 없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곳에 고정되어 손가락으로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해서는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차이의 대상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이해관계에 따라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필요가 잘 안 보이면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을 해서 보아야 합니다. 큰 틀에서, 긍정할 수 있는 필요의 맥락을 찾아서 보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차이의 그물은 수없이 많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차이는 수없이 많은 차이의 그물이 낸 연기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어떤 한 국면에서 ‘쓸데없는 놈’도 다른 맥락에서 보면 분명 다른 가치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존재라도 한 맥락에서 보면 분명 그 맥락에서의 옮고 그름, 좋고 나쁨이 있지만 이 세상 어느 것도 그 한 맥락으로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맥락, 수도 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로 존재합니다. 스스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이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맥락으로 한 존재는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한 맥락으로만 보려하고, 고집하면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평가하려 합니까?
긍정할 수 있는 맥락을 찾아서 일단 그의 필요를 보십시오.
하나의 시각에서 그 의미가 박탈된 것은 다른 시각에서는 발견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긍정할 수 있는 맥락을 찾아서 보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더 큰 생명의 그물이라는 틀로 옮아가게 하는 일입니다. 어른답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큰 틀에서 볼 때만이 사태의 참된 면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분에서의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은 큰 틀에서는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를 보면 ‘긍정할 수 있는 맥락을 찾아서 보라!’는 말이 단박에 이해될 것입니다.
복상꽃 같은 순이
- 양정자
사내애처럼 장난 심하고
한 번 웃으면 자지러지게 웃어대고
성적도 별로 좋지 않은 얼굴 검은 복순이의 별명을
우리 반 친구들은
무우장아찌라고 불렀다
공납금 미납으로 불려오신
신길동 시장 바닥에서 떡장사 하신다는
그 애 홀어머니한테서는
몇 년 절은 참기름 냄새가 심했다
"갸가 날 도우래 장거리에 나타나면
시장 골목이 그들막하니
복상꽃이 환히 피는 것 같아라우."
자기 딸을 끝없이 믿는 그 어머니의 눈에
복상꽃 같은 행복한 미소가 한없이 번지고 있었다
그 후 내게도 복순이 얼굴이 전보다 더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다
장난 심하고 공부는 못 하지만
착한 그 마음씨만은 늘 복상꽃처럼 피어나는
우리 반 귀염둥이 복순이
'그들막한' 후광(後光)을 가진 믿음! 내 마음이 다 환해지는 풍경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선생님이 늘 고정된 시각에서만 보았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잘 볼 수 있는 곳, 그를 필요의 존재로 긍정할 수 있는 맥락을 찾아 긍정하는 것의 힘이 바로 이것입니다. 한 학생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바로 그런 ‘보기에서’ 생겨납니다.
큰 틀에서, 긍정할 수 있는 맥락에서 보십시오.
10. 보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도종환「배롱나무」
그가 어떤 필요의 존재인지를 보려고 노력할 때 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모든 일에서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소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은 그 관심으로 하여 점점 아름다운 소리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알아보게 되는 것이지요. 또 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젠 역으로 그것으로부터 배우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그물에 함께 하는 모든 존재는 다 필요의 존재이고, 그 필요에 묻혀 있습니다. 그래서 잘 안 보이기 쉽니다. 거기다가 사회적으로 어떤 하나의 필요만 부각시킨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필요를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관심이 더욱 그것을 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보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것으로부터 배우게도 됩니다.
다음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배롱나무
- 도종환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루하고 먼길을 갈 때면 으레 거기 서 있었고
지치도록 걸어오고도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할 때
고갯마루에 꽃그늘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접어들면
건너편에서 말없이 진분홍 꽃숭어리를 떨구며
서 있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만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어
혼자 외딴섬을 찾아가던 날은
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듯
늘 다니던 길에 오래 전부터 피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
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그를 보려고 할 때 점점 그가 눈에 들어옵니다. 관심이 나와 그를 열어 가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 속에서 비로소 차이의 존재로, 필요의 존재로 그가 보입니다. 또 그가 필요의 존재로 보이는 순간, 나는 그것으로부터 배웁니다. “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듯” 그렇게 배롱나무가 이젠 나에게 깨우침이 됩니다. 그리고 더 크게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는 생의 지혜로 존재합니다.
보려고 할 때 보입니다!
11. 믿자, 다 제몫을 한다 -이정록「씨앗 파는 女子」
만물은 스스로 그러하게 움직이는 관계의 그물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생성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만물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은 제 몫의 삶을 받아 이 세상에 살려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 만물의 본성은 살려는 것이고, 그 지성은 더 잘 살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물은 ‘살려고’ 하며, ‘더 잘 살려는 지혜’로 똘똘 뭉쳐 있는 생명체입니다. 요즘은 돌과 같은 무생물도 먼지를 끌어 모아 몸을 불리는 삶의 작용으로서의 자기조직을 한다고 말합니다. 엘리뇨 현상이니 하는 요즘 들어 많이 나타나는 이상한 기상현상도 못되먹은 인간들의 파괴로부터 지구가 살려고 몸부림치는 행위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물은 관계의 그물이 낸 자기 몫의 삶을 자기의 본성으로 하여 살아갑니다.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내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쉽게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다 제몫은 한다는 생각을 화끈하게 믿고 기다려봐야 합니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씨앗 파는 女子
- 이정록
두어 평 남짓한 아리랑종묘사
푸짐한 그가 맞춤으로 앉아 있다
(쭉정이는 한 톨도 읎어유)
몸집으로 가을을 보여준다
신문지 조각에 씨앗을 접는,
저 두꺼비 손을 거쳐 열무가 되고
육쪽 마늘이 터지며 김치가 버무려진다
(속 안 썩이는 자식이 있나유
그래두 그놈들 죄다 새끼 낳구
낭중엔 눈물이 뭔지도 알더래니께유)
그의 품을 지나
들판이 열리고 겨울이 풀림을
근방 비둘기며 꿩이 다 안다
(가찹게 가만 들여다보면
때깔이며 모냥이 같은 게 읎지유
그러구 흠 읎는 씨앗 읎구유
그런디 이놈들, 씨앗 틔우고
한 가지 맴으로 골똘해지면
원하는 색깔루다 기차게 남실거리지유
말 더 안 혀두, 알지유)
씨앗에 대해 통달한 지식이 삶의 지혜로 옮겨와, 마치 경(經)을 읊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속도 썩이지만, 어느 때가 되면 “씨앗 틔우고/ 한 가지 맴으로 골똘”해져서 주변 환경을 자기화하며 저대로의 삶을 이룹니다. 생성의 그물이 낸, “그놈들 죄다 새끼 낳구/ 낭중엔 눈물이 뭔지도 알더래니께유”의 제 몫의 삶을 삽니다. 그러니 섣불리 간섭하려고 하지말고 기다려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가 제 몫의 삶을 골똘하게 생각할 때까지.
12. 간섭을 최대한 줄이자 -인디언 롤링썬더의 말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는 이 세계는 스스로 그러함의 질서로 움직입니다. 스스로 그러하게 모두의 생을 살려 가는 방향으로 자기구속․자기생성․자기영속 합니다. 그렇게 큰 한 세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위적인 개입은 오히려 꼬이게 할 수 있습니다. 한 때 하천 정리작업이 유행했던 적이 있지요? 제가 살고 있는 동네의 하천도 그 대상이었는데, 하천 바닥을 긁어내고 콘크리트로 아주 깨끗하게 발라 놨었요. 겉보기에는 정리정돈이 잘 된 것처럼 보였죠. 그런데 웬걸요, 그 해부터 물은 더 썩고 악취는 더 심해졌어요. 그런 상태로 몇 해 방치되다가 하천변에 말뚝을 박고 수초를 심고 하는 사업을 벌렸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연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려고 한 것이지요. 지금은 비가 오거나 하면 물고기들이 올라온다는 소식도 있고, 겨울이면 겨울철새들도 볼 수 있게 되었지요. 하천을 하천으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 그것이 그 천성의 길대로 살 수 있게 그처럼 놔두는 것, 자연함의 질서를 따르는 지혜가 새삼스러워지는 경험입니다(이런 예는 갯벌 문제, 댐 건설 문제, 도로 건설 문제, 도시 건설 문제 등에서도 수없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은 ‘스스로 그러함’(자연함)의 질서에 대하여 인위(人爲)를 대립시켜 이해한 왕필의 글입니다.
天地任自然, 無爲無造,(천지임자연, 무위무조)
천지는 스스로 그러함에 맡기니 인위나 조작이 없으며,
萬物自相治理, 故不仁也.(만물자상치리, 고불인야)
만물이 스스로 서로 다스리므로 천지는 어질지 않다.
仁者必造立施化,(인자필조립시화)
어질다는 것은 반드시 만들어 세우고 베풀어 교화하는 것이므로
有恩有爲(유은유위).
은혜와 작위가 있게 마련이다.
造立施化, 則物失其眞.(조립시화, 즉물실기진)
만들고 세우고 베풀고 교화하므로
사물이 그 참된 본래의 모습을 잃는다.
- 왕필
1) 스스로 그러함에 맡긴다.
2) 만물은 관계적이어서 스스로 서로 다스린다.
3) 작위는 항상 공을 의식하여 남긴다.
4) 작위는 그 대상의 참된 본래 모습(眞)을 잃게 한다.
그렇기에 스스로 그러하게 놔두어야 합니다. 자연함의 질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길을 가며 커다란 한 세상을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섣불리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그물이 낸 자기만의 몫이라는 그 참된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간은 그 짧은 시선을 거두어야 합니다. 어쩌면 생명의 그물이라는 큰 차원에서 그것이 그것의 길을 가도록 놔두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일지도 모릅니다.
다음 인디언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자연을 길들이려는 어떤 장치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자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마다 느끼고 생각하는 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연의 의식체계를 통제하려 든다면 그것은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람의 본성과 존재 목적에 반해서 어떤 한 개인의 길을 결정짓거나 통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가능할 것처럼 보이나 결과는 비극적이다. 결국 모두가 두려워하고 위험스럽게 생각하는 길로 향해 갈 뿐이다…
자연은 고귀한 것이며, 인간 내면의 자연 역시 고귀하다.
자연은 언제나 존중되어야 한다.
모든 생명, 세상의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존중되어야 한다. 이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 체로키族 인디언 구르는 천둥(롤링 썬더)
13. 그에 대한 믿음이 그를 크게 한다 -김해자「기가 맥혀」
만물은 스스로 그러하게 움직이는 관계의 그물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생성한 존재입니다. 만물은 제 몫의 삶을 받아 이 세상에 살려고 왔습니다. 그러니 그를 볼 때 천지의 마음과 함께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단순한 방법이, 그를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인간이고, 거기다가 최고의 효율성 경쟁 속을 산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무얼 기다린다는 것이 어렵기만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간섭은 왕필의 말처럼 “사물이 그 참된 본래의 모습을 잃게 합니다”(物失其眞). 그래서 섣불리 개입하기보다 기다려야 합니다.
다음 시를 읽으며, 한 생명의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기가 맥혀
- 김해자
여자1 : 엄니 글씨 고것이 몰래몰래 술을 마신당께요. 아
고것이 아니라 지 방 책상 밑에다 소주 병 숨겨놓고 밤에
홀짝홀짝 마신단 말이요. 애즈녁에 버릇을 잡아야제 엄니가
따끔하게 혼 한번 내랑께요.
여자2 : 생각 안 나냐. 중핵교 다닐 때 하도 니가 붕어빵
노래를 불러싸서 외상 달고 묵어라 항께 느그 동무들과 하
도 처먹어서 내가 가슬에 나락 반 가마니 갖다 안 줬냐. 나
원 참 기가 딱 막혀서. 그래갖고 한번 배터지게 묵어보라고
붕어빵틀 안 사부렀냐. 만두는 또 어찌고. 물리게 묵어버려
야 다시는 생각 안날텡께 쬐금 기다려보그라.
여자1 : 거시기 고것이 담배도 솔솔 피는 갑습디다. 아따
시방 내가 한 두 대 갖고 그러것소. 오밤중에 대문 밖에
쪼글씨고 앉아 연기 피우는 걸 내가 몇 번이나 봤당께요.
여자2 : 아따 시끄럽다. 요새 젊은것들이 핀당께 지도 폼
으로 좀 해 봤것지. 허허어… 주둥이로 불피운께 퍽이나 재
미졌는갑다.
여자1 : 아이고 엄니 시방 농담할 때가 아니란께 그라요.
저번참엔 지 형부가 벽돌 한나 세워놓고 작심하고 기다렸다
요. 지 방에 숨겨둔 쏘주병이랑 재떨이랑 다 내놓고. 금세 고
것이 오밤중에 인사불성이 되갖고 들어와서 발에 뭐시 걸린
께 혼자 중얼거렸답디다. 이상하다 이것이 왜 여기 있으까?
고개를 갸웃거림서. 지 형부가 하도 기가 맥혀 싸울 맘이 다
떨어져 부렀다는디. 시방 포도시 스무 살 넘은 가스나가 나
참 기가 맥혀서…
여자2 : 아따 자꼬들 그랑께 숨어서 하제. 그냥 백주대낮에
병나발 붐서 걸어댕김시롱 펴부라고 해라.
여자1 : (기가 맥혀 찍소리 못 허고…)
마치 ‘부처와 제자’나 ‘예수와 제자’의 관계구도를 연상케 합니다. 실제로도 여자2(어머니)가 보여주는 품은 쉽게 볼 수 없는 교육자의 그것입니다. 자식을 끊임없는 믿고 스스로 그러하게 자기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방패막이를 해주며 여유를 주는 마음씀은 쉽게 볼 수 없는 큰마음입니다. 우리 같으면 왜 그렇게 술 먹고 담배 피는 것인지도 모른 채 그저 ‘나쁘다’는 이유로 금하기에 골몰하여 문제만 더 쌓았을 텐데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자기 몫의 삶에 골똘해져 길을 잡아갈 때까지는 우선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천지는 “너는 이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14. 당당하면서 조심스러운 손님처럼 -노자「도덕경 제15장」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몫으로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 초대된 사람, 손님입니다. 그가 누구이던 자기만의 몫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주체이지만, 전체를 염려하며 행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손님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축하연에 초대된 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A는 직장 몫, B는 가족 몫, C는 고등학교 동창 몫… 등으로 많은 분들이 초대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체의 목적에 합당하게 초대된 자기의 몫으로 놀다가 갈 뿐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그물에 초대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손님으로서의 주체’입니다.
여기로부터 관계의 세상을 살아가는 손님의 태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1. 나는 손님이다.
2. 나는 나만의 몫을 가진 초대된 손님이다.
3. 내 몫을 전체와 소통시킨다.
4. 여러 사람들과 아름다운 일치인 조화를 이룬다.
5. 생기로운 하루로 향하게 한다.
이런 특징적인 모습이 잘 연상되지 않는 분은 한 번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임은 금방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1. 내가 주인이어야 한다
2. 내 몫이 절대적이니 나는 절대적이다
3. 내 몫을 극대화한다
4. 튀어야 한다. 나는 아름답기 때문에
5. 난장판!
그래서 관계의 세상을 살아가는 분들은 늘 ‘손님으로서의 주체’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항상 조심스럽게 살라는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우리가 손님이면서 주체인 까닭은 ‘어떤 몫’으로 이 세상에 초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초대받음 그 자체가 ‘당당함’을 구성하고, 초대한 이의 집에 있다는 생각이 ‘조심스러움’을 구성합니다. 따라서 가장 훌륭한 손님의 태도는 ‘당당하면서 조심스러운’ 자세입니다. 당당함으로 어울리고 조심스러움으로 일치를 구하는 것 -이것이 손님의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제 몫의 초대장을 지닌 당당한 손님이면서 조화를 이루어 전체 뜻을 이루는 주체입니다.
이런 지혜로운 손님이 행하는 모습을 노자(老子)는 다음과 같이 형용합니다(『도덕경』, 제 15장 중에서 인용 목적에 맞게 문장 단위로 읽어보겠습니다).
豫焉, 若冬涉川(예언, 약동섭천);
차이의 몫을 가지고 초대된 그는 코끼리처럼 당당하면서도, 전체 생명의 그물을 호흡하고 있으니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머뭇거리네, 겨울에 살얼음 진 냇가를 건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당당한 모습은 안하무인(眼下無人)하고 다릅니다. 그냥 큰 걸음으로 첨벙첨벙 걸어가면 될 곳도 머뭇거려 한 번 더 살펴보고 생각하고 갑니다.
猶兮, 若畏四鄰(유혜, 약외사린).
그것은 겁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의심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어떻게 사려 깊음이 겁과 의심이 되겠습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살핀다는 것은 관계의 그물을 더 깊게 이해하려는 행위입니다. 작은 이해와 시비에 자기를 묶어두지 않고 더 큰 틀에서 생각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원숭이처럼 쭈물거리네, 사방의 주위를 두려워 살피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 쭈물거림에 바로 생명의 그물을 위하는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때와 장소를 가려 행동할 줄 아는 현명함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모습은 작은 이해에 집착하여 눈을 반짝거리는 것이나 우유부단한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儼兮, 其若客(엄혜, 기약객);
그렇습니다. 생명의 그물을 호흡하는 그는 제 몫을 분명히 아는 사람입니다. 나설 때와 들을 때, 자기가 해야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정확히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근엄하도다, 그것이 손님의 모습과 같고”라 말합니다.
渙兮, 若氷之將釋(환혜, 약빙지장석).
이런 모습은 사의(私意)로 독단하는 것이나 제 잘났다고 방방 뜨는 것과는 백팔십도 다릅니다. 고집하는 것 같으면서도 때가 되면 그 고집을 모든 것에 스며들게 하는, ‘얼음과 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흩어지도다, 녹으려하는 얼음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기로 유지하면서 늘 남에게 곁을 내어주고 있는 모습!
敦兮, 其若樸(돈혜, 기약박).
그래서 모든 것은 나무 그릇을 함장하고 있는 통나무와 같습니다. 수없이 많은 쓰임을 지니고 있는 넉넉함 그 자체의 모습 말입니다. 이미 하나로(예를 들어 ‘다기’ 식으로) 고정되지 않고 더 큰 쓰임의 맥락들로 존재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래서 “도탑도다, 그것이 질박한 통나무와 같고”라 말하는 것입니다.
曠兮, 其若谷(광혜, 기약곡).
모든 것을 생하게 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형체를 갖지 않는 골처럼!
모든 쓰임(用)을 있게 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비어 있는 無처럼!
삼라만상을 있게 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관계의 그물처럼!
그래서 지혜로운 손님의 그 지혜의 행동을 “텅 비었도다, 그것이 빈 계곡과 같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