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몽준 의원은 1951년 10월 17일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8남 1녀 중 6남으로 태어났다. 정 의원은 별로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워낙 식구가 많은 집안이었기 때문에 단체 생활 같은 분위기였다. 일반 가정에서는 저녁 식사시간이 되면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아이들을 부르곤 하는데, 정 의원의 가정은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어지는 그런 분위기였다. 정 의원의 어머니는 16세에 결혼하여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에 평생 고생만 한 전형적인 한국 여인이다. 정 의원은 “어머님이 서울에 처음 올라와 신월동의 부엌이 따로 없는 방 한칸짜리 집에 살면서 많이 우셨다고 한다”고 이야기한다. |
|
|
|
|
정몽준 의원은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정 의원은 항상 겸손하고 성적도 우수하며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우등생이었다. 그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현대家의 아들인지 모를 정도로 튀지 않는 학생이었다. 공부도 잘했지만 싸움도 잘하는 학생이었다”고 회고한다.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학생’ 정몽준은 스포츠를 할 때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되었다. 친구들은 “넌 스포츠를 할 때는 매서운 호랑이와 같았어”라고 기억한다. 정 의원은 다섯번이나 골절상을 입었다. 축구를 해서 무릎을 다쳤고 스키에서는 어깨, 농구에서는 팔꿈치에 부상을 입었다. 공부는 외국어를 특히 좋아했는데, 독일문화원(Goeth Institute)에서 제2외국어였던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다. |
|
|
|
|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정몽준 의원은 75년 ROTC 소위로 임관(13기), 77년 육군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 |
|
|
|
|
병역을 마친 정몽준 의원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만 계속 일하면 일정한 범위 내의 좁은 세계밖에 모르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거기서 살아 있는 학문을 배우려 한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을 보는 눈을 뜨고 싶었다. 정 의원은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 대학에 들어가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세계의 선진국 미국의 중심인 뉴욕에서의 생활은 흥미가 있었다. 그러다가 1978년에 콜럼비아에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으로 옮겼다. 뉴욕에 살다보니 콜럼비아 대학의 주변 환경은, 특히 야간에는 안전에 신경을 쓰는 것이 필요한 그러한 분위기였다. 조용한 도시의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하고싶다는 것이 전학을 하게 된 이유였다. 정 의원은 MIT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고 1980년에 귀국하여 현대중공업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정 의원은 1985년에 이홍구 전 총리의 추천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
존스홉킨스 대학의 국제관계대학원(SAIS ; The School of Advanced International Studies)에서 정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전공을 경영학에서 정치학으로 바꾼 것은 당시 이홍구 교수와 한승주 교수의 영향이 컸다. 정 의원의 부친은 가문에서 한 사람 정도는 공직(公職)에 봉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 의원의 숙부였던 정신영 당시 동아일보 기자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독일에 유학을 가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거의 마칠 단계에 이르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으로 인해 결국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고 말았다. 만약 숙부가 살아 있었다면 정 의원은 그대로 경영자의 길을 매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 의원은 박사학위논문 자료를 구하기 위해 87년부터 88년까지 일본에서 작은 아파트를 세내어서 1년 반 정도 체재했다. 도쿄대학에서 객원교수라는 신분으로 있으면서 일본의 관계 경제계 인사들을 만나고 자료를 수집했다. 정 의원은 93년 5월 <일본에서의 정부와 기업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현역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정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정 의원은 미국과 일본에서의 유학을 통해 한국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과 함께 세계의 리더인 미국과 일본도 다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 두 가지가 정 의원의 유학생활의 최대의 성과였는지도 모른다. |
|
|
|
|
정몽준 의원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려고 했으나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만류로 출마하지 못했다. 정 의원이 언젠가 전두환 前대통령과 둘만이 있게 되는 기회가 있었다. 全 대통령이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정 의원은 “신문 등 매스컴에서는 대기업을 재벌이라고 부르며 비난을 하고, 비판하고 있다. 나는 이런 비난을 받고 싶지 않다. 그래서 공직에 몸을 담으려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全 대통령은 “그러면 공직이란 무엇인가?”라고 되물었다. 정 의원은 “공직이란 글자 그대로 공적인 서비스(public service)로 여러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의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全 대통령은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하지만 이번 선거(12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은 안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정 의원은 결국 12대 총선에 출마하는 것을 단념하고, 85년에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전두환 前 대통령 덕분에 좋은 학문의 기회가 생긴 셈이라고 하겠다.
|
1987년 동경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정 의원은 이듬해에 실시되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이때에도 전두환 대통령이 다시 불러 “여당의 후보로 입후보해달라”고 했으나, 정 의원은 이를 거절하고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정 의원은 88년 13대때 처음 국회의원이 된 이후 14,15,16,17대 선거에서 내리 당선되어 5선을 기록하고 있다. 정 의원은 국회의원을 시작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공직(public service)을 하는 기분으로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 의원은 국회의원 이외에도 여러가지 책임을 맡고 있는데 어떤 경우든 퍼블릭 서비스의 정신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
|
|
|
|
정몽준 의원은 1993년 1월 12일 대한축구협회 제47대 회장에 취임했다. 정 의원은 축구협회장에 취임하면서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다. "보나마나 안된다", "일본에 승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 의원은 우선 1994년 5월 13일 아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극적으로 당선되었다. 월드컵 개최지는 회장과 각 대륙별 부회장을 포함한 21명의 집행위원이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 의원이 FIFA 부회장이 됨으로써 월드컵 개최지 결정에서 일단 한표를 확보한 셈이 되었다. 정 의원은 이때부터 1년의 1/3 이상을 외국에서 보내면서 월드컵 유치를 위한 강행군을 계속했다. 94년부터 96년 5월 31일 월드컵 개최지 결정때까지 정 의원은 150만km가 넘는 거리를 다녔는데 이는 지구를 15바퀴 도는 거리에 해당한다.
|
1996년 5월 31일 비록 공동개최이기는 하지만 2002년 월드컵 유치라는 목표를 이루어냈다. 일본에 절대 불리할 것이라던 예상을 뒤엎은 정몽준 의원의 외교력과 추진력의 승리였다. |
|
|
|
|
정몽준 의원은 국방위원회, 교육위원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활동해왔다. 상임위원회 활동을 통해 정신대 문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일본의 군사대국화 문제, 한미간 안보협력 문제, 남북간 군축의 필요성 등 한일, 한미, 남북관계를 주로 다루어 왔다. 또한 정 의원은 OECD 가입, 일본의 독도 망언, 한일어업협정 체결, 일본의 10억달러 차관 제공, 동티모르 파병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국가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입장을 개진하였다. |
|
|
|
|
정몽준 의원은 우리나라의 실패한 20년 정치실험을 마감하고, 의회정치의 정상화를 이루겠다며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07년 대선에서 선대위 상임고문을 맡아 TV 연설은 물론 대중유세까지, 이명박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며 전국을 누벼 10년 만의 정권 교체를 이루어 냈다. 또한 만장일치로 한나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어 집권여당의 지도자로서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2008년 2월, 이명박 당선인의 대미특사단장으로 미국을 방문한 정 의원은 조지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을 모두 만나는 한미 외교사에 전례없는 큰 성과를 이루며, 한미동맹강화 및 북핵문제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
첫댓글 의원님의 좋은 자료 감사히 마음속에 세겨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