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6월이 다가 오면 6.25 전쟁을 생각 하게 된다. 동서 냉전의 충돌은 엉뚱하게도 우리의 국토 한반도에서 터졌다. 동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우리의 강토를 초토화 시키고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이념의 노예가 된 대가는 혹독하였다. 수백만의 인명 손실과 함께 고아와 미망인, 그리고 이산가족을 만들어 내었다. 그 아픔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우리 주위에 살아 있지 않은가.
전쟁의 목적인 통일은 이루어 지지 않은 채 국토의 양분 현상은 그대로 지속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쟁 당사국이 그어 놓은 38선이 형태만 조금 바뀌어 졌을 뿐 국토의 양분 현상은 비장지대(DMZ) 라는 군사 완충지대로 부활 하게 되었다. 전쟁이 터진지 1년여 만에 남과 북을 대표하는 세력들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휴전 협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회담은 지루 하게도 2년을 넘게 질질 끌어 1953년 7월에 들어서야 협정의 조인을 마치게 되었다. 협정기간 2년여의 기간은 전쟁의 교착 상태가 현 휴전선에서 고지 점령의 전투를 가열 시켰다. 하루는 아군이 점령하면 또 다른 하루는 북한군이 반격하는, 뺏고 빼앗기는 고지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닌 2년여 동안 비무장 지대에서 있었던 전투는 그야말로 소모전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우리의 젊은이들은 포탄과 폭탄, 그리고 총검에 수없이 스러져 갔다. 우리의 뇌리에 아직도 아 있는 철의 삼각지의 전투는 유명하다. 철원과 금화, 북쪽의 평강을 잇는 삼각의 고지 전투는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현장이 바로 오늘의 비무장 지대가 아니고 무엇인가. 비무장 지대는 지난 50년 가까이 남북의 군사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지켜져 왔다. 사실 비무장 지대는 말뜻과는 정반대로 지구상에서 유일 하게 남아 있는 중무장 지대로 바뀐 지 오래다. 그래서 비무장 지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착잡하기이를 데 없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처참한 결과를 안겨준 6.25 전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국제 정치면에서는 동서 냉전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자연과 생태면 에서 바라보면 의외의 창조물이 탄생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지역에는 인적이 끊긴 특유의 생태계가 형성 되어 왔다. 자연의 복원력은 가히 신의 조화가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신통력의 발휘가 아닌가 한다. 한반도에서 멸종의 위기에 있던 동 식물이 자라고 있음이 학자들에 의해서 보고 되고 있다. 희귀종들이 집단 서식 되고 있는 곳도 있다. 특이한 생태계의 현상은 변종을 탄생 시켰다는 보고도 소홀히 넘겨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새로운 세기에는 생물학과 환경 분야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선진 제국들의 선례를 차치하고서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천혜의 생물학적 보고인 비무장지대를 귀중히 여기고 보존 해야 할 所以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세계는 바야흐로 종자 전쟁이라 불릴 만큼 이 분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국토의 한가운데를 동서로 가로지른 비무장 지대는 길이가 248km, 폭이 남북 각각 합쳐 4km이지만 지역에 따라 넓게는 13~14km, 짧게는 서로의 관측소 간의 거리가 1.2km밖에 안 되는 곳도 있다. 전쟁으로 인하여 생긴 곳이지만 여기는 젊은이들의 주검이 뭍힌 古魂이 숨쉬는 그들의 무덤장이며, 특이한 우리의 문화유산이 자리하는 자연 학습장 이다. 희귀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그들의 생활 터전이기도 하며 생태관광을 계획 할수 있는 관광 자원으로써의 가치도 엄청나다. 더욱이 이 지역의 탄생에 대한 역사적 안목의 접근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매우 색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지역을 훼손 하지 않고 자연 상태를 잘 보존함으로써 가치를 더욱 높여야만 한다. 이 지역에서 생태계의 의미를 빼고 나면 아무런 값어치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이 지역의 보존과 활용에 대해서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하며 나아가 비무장 지대의 반쪽을 책임지고 있는 북한 당국과도 협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이 바로 전쟁의 비극을 승화하는 진정한 轉禍爲福을 의미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非武裝 地帶(DMZ)를 照望한다.(2)
비무장 지대는 우리의 상징이다. 역사상 한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 해보지 않은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우리는 단 한번도 우리 자의로 남을 침략 하는 대열에 참여 해 본적이 없다. 우리가 먼저 남의 나라에 전쟁을 걸어 본적도 없다. 이런 착한 민족이 비무장 지대라는 잔혹한 동족상잔의 징표를 걸머지게 된 것은 그 원인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야 만이 우리는 착한 만큼 강하기도 한 민족 이라는 것을 증명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남의 탓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냉엄한 역사는 약자의 강변 아라고만 해석 할 뿐이다. 원인 제공을 우리 자신이 한 것이 아닐까 하는 뜻에서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 국경 아닌 국경, 비무장 지대가 그것을 웅변으로 증명 해주고 있다. 반백년 동안 우리를 갈라놓은 비무장 지대, 그것은 통일이 되면 없어 져야 한다. 그 지역에 설치되어 있는 철조망과 지뢰, 군대와 무기, 증오와 분열이 없어 져야 한다. 그러나 비무장 지대가 갖고 있는 최고의 가치인 생태와 녹색, 자연과 환경, 철학과 역사는 소멸 되지 않도록 소중하게 가꾸고 영원히 보존해야 할 것이다. 우가 얼마나 많은 희생과 위험, 수모와 인내로써 만들어 낸 곳인가. 남과 북이 지난 50년 넘게 서로 반목과 증오를 하면서 긍정적으로 이룩해 놓은 것이 이 비무장 지대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지난 1953년 7월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 협정(통상 "휴전 협정"으로 불림.) 제2조 13항에서 <비무장 지대 안에 있는 모든 폭발물, 지뢰원 철조망 등의 위험물을 정전 협정의 발효 후 45일 이내에 모두 철거 하기로 적대 쌍방 사령관들은 합의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정전 협정 대로라면 비무장 지대에는 지뢰와 같은 위험물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 국제 대인 지뢰 금지 운동 본부(ICBL)에 의하면 비무장 지대에는 현재 수백만개의 대인 지뢰가 묻혀 있다고 한다. 6.25 전쟁이 아직도 살아 있는 전쟁이라고 하지만 대인 지뢰가 전쟁을 억제 하는 무기라고 보지 않는다. 가장 비 인도적인 무기인 대인 지뢰에 대해서 생산과 수출을 금지 하는 세계적 공감대가 이루어 졌다고 한다. 1998년 말 현재 127개국이 대인 지뢰 금지 협약에 서명을 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 해주고 있다. 우리가 아직도 이 협약에 서명을 거부 하고 있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야만적이고 비겁한 무기로 낙인찍힌 대인 지뢰가 아직도 우리의 신성한 국토의 한가운데를 띠를 만들어 수백만개나 존재 하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부가 최근에 발표한 제4차 국토 종합 계획에 의하면 민통선 이북지역의 개발을 포함 하고 있다. 비무장 지대 인근 까지를 포함 하는 광대한 지역을 보전 지역과 준 보전 지역 그리고 정비 지역 등 3개 지역으로 나누어 준 보전 지역과 정비 지역에는 기반 시설 설치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권역별로 남북간에 특화 사업을 할 수 있는 지구를 지정 한다고 한다. 언뜻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과거 우리가 해온 개발 사업이 환경과 친화된 적이 없는 난개발 일색이었다는 점을 상기 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최근 말썽이 되고 있는 팔당 상수도 지역의 초고층 아파트 건립 허가건 만해도 우리 공직자의 환경과 개발에 관한 수준을 엿 볼 수 있다. 자연과 생태계는 산과 계곡, 강과 하천, 숲과 늪지가 모두 연결 되면서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살아 움직이고 있다. 민통선 이북 깊숙이까지 개발 한다는 것은 바로 비무장 지대의 생태까지 파괴할 우려가 매우 높다. 설악산과 금강산을 연계하여 남북 공동의 관광 특구로 개발 한다는 것도 너무 성급한 면이 없지 않다. 어느 특정한 재벌 그룹이 이를 추진 한다는 것이 이치에 합당 한 것 인지는 둘째 치고 라도 이 지역의 관광 자원화는 통일후 비무장 지대 전체를 생태와 문화, 역사가 어우러지는 종합 평화 관광자원의 큰 틀 안에서 추진해야 할 줄로 안다. 그것도 세계적으로 공인된 환경 학자, 생물학자, 관광 설계 전문가의 조언으로 지속 가능한 개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이 지역의 생태계 조사를 위해 북한의 동참을 이끌어 내야하며, 앞에서 지적한 지뢰의 제거를 위한 정책적인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 순서에 맞는 정도가 아닌가 한다.유엔 기구에서도 비무장 지대의 생태계적 가치를 인정 하고 세계적 관심을 끌고 있는 이 지역의 개발이 정치 논리로 성급 하게 재단되어서는 안 된다. 전 국민의 관심이 요구 되는 때이다.
非武裝 地帶(DMZ)를 照望한다.(3)
비무장 지대(DMZ)는 우리 민족의 분단을 상징 하고 있다. 비무장 지대는 동족끼리의 반목과 대결을 50년 이상 지속 해온 바로 그 현장이다. DMZ를 보고 있노라면 남북한이 서로 이질적인 이념과 체제를 고수 하면서 또는 이것을 지킨다는 구실로 서로가 미워하고 증오 하면서 총칼로 살인까지 서슴치 않았던 수치스런 과거를 영상처럼 되새김질 한다. 우리의 오랜 역사 속에는 공산이니 민주니 하는 사상의 편 가르기를 찾아 볼 수가 없다. 부모에게 효도 하고 나라에 충성 하며, 義를 숭상 하고 情을 중하게 여기는, 좁은 땅이지만 아름다운 강토를 가꾸며, 지키며 소박 하게 살아 온 것이 우리였다. 언제부터 인가 외세가 한반도를 기웃거리기 시작 할 때부터 위기를 기회로 승화 시키지 못하고 분열과 자멸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 했다. 외세의 희번덕거리던 눈초리는 우리의 생존 터인 반도의 분할을 흥정 꺼리로 삼기 시작 하였다. 우리가 전연 눈치도 채지 못한 사이에 우리의 땅 덩어리는 두 조각이 나 있었다.
100여년 전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대에 국가 리더 그룹의 부정과 부패에 일반 백성들은 그들의 통치로부터 유리 되어 냉소를 보내며 그들과 동참하기를 거부 하였다. 권력이 썩고 관료 조직이 부패 한데다 외교와 군사가 무능하니 그 사회는 이미 끝장 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궤변이 정론을 누르고 불의가 의를 호도 한다면, 뇌물이 관직을 사고 공직이 치부의 수단이 된다면, 정치가 정실에 좌우 되고 국민이 유리 된다면 그 국가는 망했거나 망해가고 있는 중이 틀림없다.
필자는 현재의 우리 상황과 과거를 연계 하여 생각 하고 싶지는 않다.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자 타칭 정치 9단의 정치 지도자를 몇분 모시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현재가 윤택 해 지거나 행복한 상태가 아니다. 오로지 권력 추구만이 絶對善인 "천민 정치"는 이제 타파 되어야 한다. 國利民福만이 목적이 될 수 있는 "봉사 정치"를 우리는 갈망 하고 있다. 요즘 지상에 회자 되고 있는 고속철과 무기 도입 등 일련의 국책 사업의 로비 사건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슬프게 하고 있다. 수십조 원의 공적 자금이 어떻게 조성 되고 어떠한 과정으로 승인 되었으며 왜 그곳에 사용 되어야 하는지 설득력이 약하다 용서 받지 못할 병역 비리 사건 수사는 이미 용두사미가 됐다는 여론이 높다. 1948년 제헌 국회 선거 이후 금년 16대 총선까지 늘 붙어 다니는 단어가 있다. 관권과 금권 선거이다. 50년이 지났건만 정치 발전의 증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눈가림 경제 개혁으로 문제의 본질을 가려서는 안 된다. 다수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 슬픔이 분노와 증오로 변하지 않도록 단호한 후속 조치들이 신속하게 취해져야 할 것이다. 공직의 부패상을 척결 하지 못하고 사회전반에 걸친 도덕적 해이가 국가의 기강을 허물 때 외세의 탐욕스러운 눈초리는 또다시 희번덕거릴 것이다. 우리에겐 우물거릴 시간이 없다.
휴전 협정 제1조1항은 비무장 지대가 설치 되게 된 설정법적 근거와 목적을 보여 주고 있다. 즉 "한 개의 군사 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2km씩 후퇴함으로써 적대 군대간에 한 개의 비무장 지대를 설정 한다. 한 개의 비무장 지대를 설정 하여 이를 완충지대로 함으로써 적대 행위의 재발을 초래 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 한다."라고 기술 하고 있다. 여기서 쌍방이라 함은 조선 인민군 사령관 및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관이 일방이 되며, 또 다른 일방은 국제 연합군 총 사령관이다. 대한민국을 지칭 하는 어떤 단어도 찾아 볼 수 없다. 본란에서는 왜 그랬는지를 추적 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 당시에는 우리에게 전쟁 수행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유추 해볼 뿐이다. 따라서 비무장 지대는 남북한의 어느 국내법이 아닌 정전 협정 이라는 국제 법에 의해 설치되었고 지배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칼 하게도 비무장 지대의 자연성을 그대로 보존 하는 데는 긍정적으로 평가 되고 있을지는 몰라도 어딘지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 지역의 경제적 가치를 높이는 발전적 유지를 위해서는 남북한의 협력이 최상의 방도가 아닌가 한다.
요즈음 KBS에서 방영 되고 있는 사극 "태조 왕건"에서 궁예의 활약상이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듯 하다. 신라의 버려진 왕자 궁예는 부패하고 무능한 신라를 무너뜨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한다는 대의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킨다. 영월의 세달 사를 떠난 지 5년만인 896년,지금의 철원 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국이라 하며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태봉국의 도성이 현재 비무장 지대 안에 위치하고 있는 으로 조사 되고 있다. 도성의 크기가 가로 3km, 세로가 4.3km 정도의 장방형인데 공교롭게도 현재의 남북 방 한계선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군사 분계선을 중심으로 도성의 반은 북쪽의 북방 한계선까지, 나머지 반은 남쪽의 남방 한계선 안에 정확 하게 위치하고 있다. 조사에 의하면 이 도성은 화강암으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흙으로 축성된 것인데 그 흔적이 뚜렷하다고 한다.
지금은 비무장 지대 안에 위치하고 있어 복원이나 발굴 혹은 더 이상의 가꾸는 작업은 불가능 하지만 비무장 지대를 관광 자원화 한다는 남북의 협력이 성사 될 경우 "궁예 도성"은 훌륭한 역사 유산, 문화 유산으로 자리 매김 될 것이다. 이 지역의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한 온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非武裝 地帶(DMZ)를 照望한다.(4)
비무장 지대(DMZ)는 우리 민족의 분단을 상징 하고 있다. 비무장 지대는 동족끼리의 반목과 대결을 50년 이상 지속 해온 바로 그 현장이다. DMZ를 보고 있노라면 남북한이 서로 이질적인 이념과 체제를 고수 하면서 또는 이것을 지킨다는 구실로 서로가 미워하고 증오 하면서 총칼로 살인까지 서슴치 않았던 수치스런 과거를 영상처럼 되새김질 한다. 우리의 오랜 역사 속에는 공산이니 민주니 하는 사상의 편 가르기를 찾아 볼 수가 없다. 부모에게 효도 하고 나라에 충성 하며, 義를 숭상 하고 情을 중하게 여기는, 좁은 땅이지만 아름다운 강토를 가꾸며, 지키며 소박 하게 살아 온 것이 우리였다. 언제부터 인가 외세가 한반도를 기웃거리기 시작 할 때부터 위기를 기회로 승화 시키지 못하고 분열과 자멸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 했다. 외세의 희번덕거리던 눈초리는 우리의 생존 터인 반도의 분할을 흥정 꺼리로 삼기 시작 하였다. 우리가 전연 눈치도 채지 못한 사이에 우리의 땅 덩어리는 두 조각이 나 있었다.
100여년 전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대에 국가 리더 그룹의 부정과 부패에 일반 백성들은 그들의 통치로부터 유리 되어 냉소를 보내며 그들과 동참하기를 거부 하였다. 권력이 썩고 관료 조직이 부패 한데다 외교와 군사가 무능하니 그 사회는 이미 끝장 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궤변이 정론을 누르고 불의가 의를 호도 한다면, 뇌물이 관직을 사고 공직이 치부의 수단이 된다면, 정치가 정실에 좌우 되고 국민이 유리 된다면 그 국가는 망했거나 망해가고 있는 중이 틀림없다.
필자는 현재의 우리 상황과 과거를 연계 하여 생각 하고 싶지는 않다.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자 타칭 정치 9단의 정치 지도자를 몇분 모시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현재가 윤택 해 지거나 행복한 상태가 아니다. 오로지 권력 추구만이 絶對善인 "천민 정치"는 이제 타파 되어야 한다. 國利民福만이 목적이 될 수 있는 "봉사 정치"를 우리는 갈망 하고 있다. 요즘 지상에 회자 되고 있는 고속철과 무기 도입 등 일련의 국책 사업의 로비 사건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슬프게 하고 있다. 수십조 원의 공적 자금이 어떻게 조성 되고 어떠한 과정으로 승인 되었으며 왜 그곳에 사용 되어야 하는지 설득력이 약하다 용서 받지 못할 병역 비리 사건 수사는 이미 용두사미가 됐다는 여론이 높다. 1948년 제헌 국회 선거 이후 금년 16대 총선까지 늘 붙어 다니는 단어가 있다. 관권과 금권 선거이다. 50년이 지났건만 정치 발전의 증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눈가림 경제 개혁으로 문제의 본질을 가려서는 안 된다. 다수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 슬픔이 분노와 증오로 변하지 않도록 단호한 후속 조치들이 신속하게 취해져야 할 것이다. 공직의 부패상을 척결 하지 못하고 사회전반에 걸친 도덕적 해이가 국가의 기강을 허물 때 외세의 탐욕스러운 눈초리는 또다시 희번덕거릴 것이다. 우리에겐 우물거릴 시간이 없다.
휴전 협정 제1조1항은 비무장 지대가 설치 되게 된 설정법적 근거와 목적을 보여 주고 있다. 즉 "한 개의 군사 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2km씩 후퇴함으로써 적대 군대간에 한 개의 비무장 지대를 설정 한다. 한 개의 비무장 지대를 설정 하여 이를 완충지대로 함으로써 적대 행위의 재발을 초래 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 한다."라고 기술 하고 있다. 여기서 쌍방이라 함은 조선 인민군 사령관 및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관이 일방이 되며, 또 다른 일방은 국제 연합군 총 사령관이다. 대한민국을 지칭 하는 어떤 단어도 찾아 볼 수 없다. 본란에서는 왜 그랬는지를 추적 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 당시에는 우리에게 전쟁 수행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유추 해볼 뿐이다. 따라서 비무장 지대는 남북한의 어느 국내법이 아닌 정전 협정 이라는 국제 법에 의해 설치되었고 지배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칼 하게도 비무장 지대의 자연성을 그대로 보존 하는 데는 긍정적으로 평가 되고 있을지는 몰라도 어딘지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 지역의 경제적 가치를 높이는 발전적 유지를 위해서는 남북한의 협력이 최상의 방도가 아닌가 한다.
요즈음 KBS에서 방영 되고 있는 사극 "태조 왕건"에서 궁예의 활약상이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듯 하다. 신라의 버려진 왕자 궁예는 부패하고 무능한 신라를 무너뜨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한다는 대의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킨다. 영월의 세달 사를 떠난 지 5년만인 896년,지금의 철원 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국이라 하며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태봉국의 도성이 현재 비무장 지대 안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 되고 있다. 도성의 크기가 가로 3km, 세로가 4.3km 정도의 장방형데 공교롭게도 현재의 남북 방 한계선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군사 분계선을 중심으로 도성의 반은 북쪽의 북방 한계선까지, 나머지 반은 남쪽의 남방 한계선 안에 정확 하게 위치하고 있다. 조사에 의하면 이 도성은 화강암으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흙으로 축성된 것인데 그 흔적이 뚜렷하다고 한다.
지금은 비무장 지대 안에 위치하고 있어 복원이나 발굴 혹은 더 이상의 가꾸는 작업은 불가능 하지만 비무장 지대를 관광 자원화 한다는 남북의 협력이 성사 될 경우 "궁예 도성"은 훌륭한 역사 유산, 문화 유산으로 자리 매김 될 것이다. 이 지역의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한 온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非武裝 地帶(DMZ) 조망한다.(5)
비무장 지대는 우리의 정치적 분열과 혼란 상태로 인해 비롯되었다. 그 틈에 세계전략을 논의 하던 강대국들이 자기네 마음대로 우리 국토를 38선으로 양분 하였다. 우리는 그네들에게 아무런 잘못을 저지른 것이 없는데도 그들은 우리 국토를 잘라 놓았다. 우리 몸 속 깊숙이 흐르고 있는 맹목적인 "권력 추구 성"이 이에 편승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필연 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남의 나라를 침략 할 만큼 강성한 국력을 키운 적이 별로 없다. 옛날 고구려의 그것이 강대 하여 중국으로부터 猜忌와 견제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의 국가 형성기에는 이웃 부족 국가를 점령하여 복속시킴으로써 영토를 늘려 가는 과정 이었다.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시절에 고구려의 국력은 현재 만주 지역인 중국의 동북3省인 요령, 길림, 흑룡강성의 거의 전 지역을 차지하였다. 원래 고구려의 출신지가 그곳 이었던 점도 있지만 중국 대륙은 5胡 16국의 전란기를 맞았던 것도 작용 했으리라 본다. 분열과 통일을 번갈아 하는 중국 대륙의 역사성은 그때도 그랬다.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국가를 세운 隋나라의 양제와 唐나라의 태종은 동쪽의 강대한 고구려를 그냥 묵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단결했던 때는 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을지문덕의 탁월한 전술에 참패하고 달아난 수나라는 결국 나라까지 멸망 하는 수모까지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건, 두 아들간의 권력 암투를 배경으로 한 唐과의 전쟁은 지난번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로 인한 내부 분열만 없었더라면 고구려의 역사는 다시 써 져야 했을 것이다.
그 뒤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 왕조 그리고 현재까지 우리 역사는 외향적 이라기보다는 내부 지향의 소극적인 정치 문화를 갖게 된 것으로 풀이 된다. 우리 자의로 단 한번도 남의 나라를 침범 해 본적이 없이 오히려 당하기만 한 것이다. 당해도 다시 반격 하여 그들을 응징 해본적도 없다. 스스로 운명을 극복 하지 못하고 권력 다툼의 내부 정쟁만 일삼다가 결국 남의 손에 의해 좌우지 됐던 것이 우리의 근 현대사다. 비무장지대도 그러한 정치 문화의 역사적 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이 타당 하다고 본다. 그것이 비무장 지대를 만들게 한 기본 원인이다. 통합 점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소모적 논쟁과 불의와 부도덕한 국가 경영은 언제나 우리의 삶터를 위기로 몰아 갈수 있다는 점을 교훈으로 얻는 그 자체 만으로라도 이 지역의 역사성은 높이 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발전적 보존은 비무장 지대의 생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주변 국가들에게도 우리의 색다른 의미를 전달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진정코 우리의 강한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된다고 믿는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과 함께 비무장 지대는 탄생 되었지만 군사 시설의 보호와 안보의 목적으로 생긴 것이 민통선이다. 1954년 유엔군 사령관의 직권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지역으로 귀농선(歸農線)의 설치가 발표 되었다. 이것이 1958년 민간 통제선(Civil control Line)으로 개명되고, 줄여서 민통선(民統線)이 된 것이다. 지금은 많이 완화된 느낌이 있지만 당초에는 남방 한계선으로부터 지역에 따라 최소 5km에서 많게는 20km까지 민통선 이북 지역(통상 "민북 지역"으로 불림)에 포함 되었다. 동부의 산악 지역이 민북 지역에 많이 포함 되었다. 군사 목적으로 설치 된 이상 자연히 사유 재산권이 제한되고 민간인의 출입이 극히 한정적으로 이루어 고 있는 지역이다. 이러한 통제가 오랜 기간 계속 됨에 따라 개발과 보존, 두 가지의 개념에서 보더라도 민북 지역까지 포함하여 광의의 비무장 지대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한다.
"비무장 지대에 원시림은 없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우리나라 국토의 특징은 동산서야(東山 西野)의 형태이다. 동부는 백두 대간을 중심으로 하여 양쪽으로 정간과 정맥이 뻗어 있고 서쪽으로 갈수록 완만한 평야 지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비무장 지대 전부가 브라질의 아마존 밀림처럼 열대의 원시림을 상상 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비무장 지대는 온대지방의 중간 경계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50년 가까이 인간이 드나 들 수 없었던 지역 인만큼 자연의 생태계가 잘 보존 되어 있으리라는 개연성은 충분히 인정 할 수가 있다. 군부대가 주둔 하고 있으며 민간인의 출입이 다소 인정 되는 민통선 이북의 자연이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동부 산악의 민북 지역은 이미 "생물 종 다양성"(生物 種 多樣性)지역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의 관계 기관뿐만 아니라 유엔의 국제기구와 국내외의 학자들 모두가 지대한 관심을 갖는 생태계의 보고로써 알려져 있는 것이다. 철원의 중부 지역은 희귀종과 멸종 위기의 철새 도래지로써 그 성가가 널리 알려져 겨울철에는 저명한 외국의 철새 연구가들이 모여 들기도 하는 지역이다. 서부의 파주 강화의 임진강 하류 지역은 하천과 저수지, 습지가 만든 수생 생태계로써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비무장 지대 전 지역이 밀림이 아니라고 해서 이 지역의 생태적 가치를 폄하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만들어진 생태적 자산을 가꾸고 보존해야 할 방도를 강구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가 아닌가 한다. 민통선 지역의 자연 보존이 비무장 지대의 그것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 과거 분단의 반 백년 동안 남북이단 한번도 비무장 지대내의 생태 조사 활동을 하지 않았던 점에 주목 해야 한다. 아마도 민북 지역 보다는 더욱 밀도 있는 생태계가 존재 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무장 지대에 대한 외국의 시선은 오직 자연 생태계에만 모아지고 있는 듯하지만 우리의 시각은 그것만이 아니다. 정치적 사건이고 군사적 현장이며 문화, 역사적 유물의 개념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환경과 생태. 이것은 정치 문제가 아니다. 남북이 부담 없이 홀가분하게 논의 할 수 있는 테마가 아닐까. 비무장 지대의 생태 연구 활동을 남북이 함께 벌린다면 이 지역의 생태적 자산 가치를 좀더 확실히 평가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남북이 함께 비무장 지대의 학술 조사를 한다면 그 자체 하나 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남북의 평화와 화해를 이미 달성 한 것이나 다름 없는 효과를 볼 것이다. 무책임한 정치와 행정의 결과로 마구잡이 개발이 온 국토를 황폐화 하고 있는 요즈음, 한반도 자연 보존의 장래에 한줄기 희망의 빛이 비무장 지대에서 출발 할 수 있다고 확신 하는 것도, 열흘 여 앞으로 다가온 남북 정상 회담에서 이 문제가 의제로 채택 될 수 있다는 바람 때문이다.
非武裝 地帶(DMZ)를 照望한다.(6)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 되던 해인 1945년 12월15일, 소련의 수도 모스코바 에서는 2차대전의 戰勝國인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의 外相들이 모였다. 일컬어 "모스코바 3상 회의"라고 불리는 여기서 한국의 독립에 관한 구체적 행동 절차를 결정 하였다. 즉 한국에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과 중국 등 4개국이 향후 5년간 "信託統治"를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이의 실천을 위하여 미국과 소련 두 나라의 한국 주둔군 사령관이 "미소 공동 위원회"를 2주안에 개최하기로 한다는 내용 이었다. 남북의 구별 없이 한반도 전체의 신탁 통치를 의미 하였다. 그러나 이미 4개월 전에 남북 분단이 시작된 상태에서 그것이 가능 할까. 일본이 항복 하던 8월 15일, 바로 그 일주일 전에 약삭빠르게도 對日 선전포고를 한 소련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한 작전을 각본대로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소련은 이미 38선 이북 지역을 선점 하였고 한달이나 늦은 9월9일에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시작한 것은 한반도의 분할이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북한 단일 민주 정부를 수립 한다는 "모스코바 3상 회의"합의 사항은 허울 좋은 겉 치례 외교 행사였고 실질적으로는 남북한 분단하여 신탁 통치 한다는 뜻이나 마찬 가지였다. 말하자면 소련의 의도를 인정 해주는 국제적 행사였다. 신속 하고도 용의주도한 한반도 점령 작전이 그를 말해 주고 신탁 통치를 했다면 그 햇수가 끝나게 되는 5년차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 되는 점 역시 예사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미국은 온 나라가 승전의 기쁨에 흥분된 분위기였다. 이 상태에서 패전 일본의 처리가 가장 중요한 사안 이었지 한국 문제는 次順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소련은 미국의 이러한 상황을 꿰뚫고 한반도의 운명을 자기 페이스대로 이끌어간 흔적이 역력하다. "모스코바 3상회의"의 결정 사항인 "미소 공동 위원회"가 2년 동안 몇 차례 열렸지만 두 번의 무기 휴회 등 표류 하다가 결국 흐지부지 된 것이다. "기름과 물"의 비유는 이를 두고 한말인 것처럼 아무 합의 없이 표류 되었다.
그 사이 소련은 38이북의 북한 지역을 조직화, 무장 화 하여 한반도 전체를 차지 할려는 준비를 착착 진행 시켜 나갔던 것이다.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워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확실히 청산 하고 토지를 인민에게 돌려 주는 등 민심과 사회적 기강을 잡아 나가며 전 지역의 공산화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해방 직후 남한 사회는 민중의 환호와 무질서가 너무 오래 계속 되었다. 무슨 단체, 무슨 정당 하여 수 없는 정치단체가 제목소리를 내는 그야말로 백가쟁명의 혼란 상태였다. 도토리 키 재는 식이었고나 할까. 구심점 없는 사회 상황에 좌우익의 대립은 격화 되고 좌우익의 뜻도 제대로 모르는 대부분의 국민은 어리둥절 할뿐이었다. 일제에 대해서는 좌우익이 함께 되어 투쟁 하였지만 일제가 없어진 이제 내분이 시작 된 것이다. 국리민복의 정치이상도, 어떤 비젼도 없이 오로지 권력을 향해 질주하는 우리네 정치 행태가 여지없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회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 권력이라는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비 떼들처럼 줄서는 일이 바로 정치였다. 자기 몸을 태우는 진정한 리더십의 불꽃이 아쉬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듯 하다.
또한 신탁통치의 발표가 있자 국내의 모든 정치 세력 즉 좌우익 할 것 없이 모두가 입을 모은 듯이를 결사반대 하였다. 그러나 15일이 지난 12월30일부터 좌익 세력은 갑자기 태도를 돌변, 신탁통치를 찬성 하게 된다. 모스코바의 지령이 있었던 것이다. 종주국 소련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던 도토리들의 급선회였다. 이것이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각각 진주한 미국과 소련의 모습 이었다고 할까. 노예 상태에 있는 조선을 유념하여 기필코 독립시키겠다던 국제회의가 네 차례 있었다. 2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굳혀져 가던 1943년 11월의 '카이로 선언",1945년의 "얄타 회담", "포쓰담 선언", 그리고 대전후 "모스코바 3상회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독립은 기형적으로 변형된 반신불수의 모습 이었다. 그 모습이 반세기가 지난 아직도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의지대로, 우리 힘대로 이룩된 독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은 왜 그토록 한반도에 집착 하는 것일까. 그것은 세계 해양을 지배하는 영국을 자극하고 영국은 세계 정치의 요리사답게 대가를 치루어 서라도 일본을 대리인으로 내세운다. 우리는 지난 100여년전, 바로 조선이 그 대가 속에 포함된 상황을 역사에서 목격 하였다. 몇 나라를 대입 해보면 오늘을 연상하게 됨은 비단 필자만의 느낌일까.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노력하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일게다.
비무장 지대는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지역이라고 확신 한다. 우리의 비극적이고도 굴절된 역사를 웅변으로 얘기 하고 허리에 동여맨 철조망 대문에 고통을 호소하며 곳곳에 매설된 지뢰가 터진다면 이제는 완전히 허리가 끊어져 죽을 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현장인 것이다. 철조망이 겉이고 지뢰가 뽑혀 나가는 날, 녹색 벨트는 더욱 빛을 발하여 매력적인 허리의 곡선미를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이다. 그때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녹색 허리띠에 관심을 가지고 구경하러 오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말썽의 소지가 될수 있는 토지분쟁에 대해서도 만반의 대비책이 세워 져야 할뿐 아니라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만들기 위한 국제적 감각의 수준 높은 제반 준비들을 생각 할 때라고 믿는다. 녹색 띠의 매력은 무엇일까. 자연과 환경 그리고 희귀 동식물의 생태이다. 지금부터라도 이 녹색 벨트가 상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충일을 맞아 이곳에 ane혀 있는 수많은 젊은 영령들의 명복을 빌면서...
非武裝 地帶(DMZ)를 照望한다.(7)/땅굴(上)
땅굴! 그것은 우리 민족 전체를 멸망시킬 악마가 될 것인가. 아니면 민족의 사랑을 독차지 할 귀염둥이가 될 것인가. 이는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렸다. 현재도 진행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 되는 북한의 장거리 땅굴이 완성 되어 수만 명의 특수 경보 병 부대가 남한의 후방 깊숙히 침투 한다면 속전속결로 남한 전체를 장악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북한의 의도대로 통일이 이루어 질것인가. 이러한 시나리오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 하다고 본다. 현대 무기가 이를 용납치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동족상쟁의 전쟁의 시발을 알리는 弔鍾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한반도는 또 다시 전쟁터가 되고 남북 가릴 것 없이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의 비극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평화적으로 이용 한다면, 이러한 대원칙 아래 가꾸고 활용 성 있게 개조 한다면 땅굴은 비무장 지대의 최고 명물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훌륭한 관광 자원임은 물론이고 비무장 지대의 생태계를 건드리지 않고 이 지역을 지하로 왕복 할 수 있는 멋진 교통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만들어 가기에 따라 21세기에 걸 맞는 거대한 지하 생활 도시나 문화 공간을 생각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로는 허구의 상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불가는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 한 것이 현재 미 발견된 건설 중의 땅굴 전부가 확인 되어야 할 것이다. 단 한개 라도 숨겨서는 안 된다. 그것이 평화적으로 이용 하겠다는 징표가 되기 때문이다.
비무장 지대의 군사 분계선을 넘어 남방 한계선을 지나 남쪽으로 향한 땅굴이 모두 26개 정도인 것으로 당국은 파악 하고 있다. 이것은 땅굴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국방 당국도 확증은 없지만 부인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비무장 지대 북방 한계선 이북 지역에서 파 내려온 땅굴은 분명 북한이 만든 것이다. 현재 군 당국에 의해서 발견된 땅굴이 4개이다 경기도 고랑포 동북방 8km 지점의 제1땅굴, 철원 북방13km지점의 제2땅굴, 판문점 남방 4km지점의 제3땅굴, 그리고 강원도 양구 동북방26km지점의 제4땅굴이 그들이다. 제1땅굴이 발견된 시기는 1974년 11월15일, 그 후 1년과4년의 간격을 두고 제2,제3땅굴이 발견 되었고 제4땅굴은 그 후 10년도 훨씬 지난 1990년 3월에 최종 발견 된 것으로 확인 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발견 되지 않고 있는 땅굴이 22개나 남아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더욱 괴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땅굴 전문가들은 당국의 시추 탐사 기술의 미숙을 지적 하고 있으며 당국은 확증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보 문제의 특성상 증거가 없다고 해서 안심할 일이 아니다.
땅굴에 관한 한 私財를 털어 가면서까지 땅굴 탐사와 증거 확인을 위해 노력한 몇몇의 전문가들은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에 격려는 커녕 오히려 확증도 없이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 일부 관계 기관으로부터 핀잔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이다. 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연구 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책임 회피성 언행은 삼가야 할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나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술이 모자란다면 외국의 우수 기술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사명감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 땅굴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북한과의 협상도 가능 할 것이다. 만약 한 개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을 군사적으로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북한이 떨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국방부의 땅굴 탐사에 참여하여 제2, 제3 땅굴 발견에 기여 해온 이종창 신부는 서울 근교까지 적어도 3개의 장거리 땅굴이 있으며 출구는 수천개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 하고 있다. 김포군 월곶면 석정리, 의정부시 가능 3동 그리고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 등이 그곳 이다 북한의 땅굴 굴착과 발견 시 노출 지역을 메우는 기술이 매우 뛰어 난데 비해 우리의 탐사 수준은 기대 이하라고 걱정 하고 있다. 또한 몇 차례 보도에 의하면 오랫동안 땅굴 탐사를 위해 헌신 해온 정지용씨는 국방부의 시추 방식으로는 땅굴발견이 어렵다고 한다. 땅밑에서 얼마든지 눈가림을 할 수 있기 때문 이라고 한다. 과연 그 말이 사실 이라면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땅굴 문제를 해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왔다고 단언 할 수 있다.
남북 정상 회담을 며칠 앞두고 남북의 해빙무드가 고조 되고 있는 요즘, 국내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시선이 한반도에 모아 지고 있다. 분단 55년 만에 처음 있는 만남이기에 그 의미는 가히 역사적 이라고 불릴 만하다. 그래서 그런지 국내에서는 과장해서 표현 하면 축제와 같은 분위기를 느낀다. 평화와 .통일이 거의 손에 잡힐 듯한 착각을 갖도록 국민을 오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선결 조건이 명확하게 해결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꼭 풀어야 할, 꼭 짚고 넘어 가야 할 땅굴의 존재와 건설 현황, 그리고 활용 방안이다. 이 문제를 거론 하지 않거나 덮어둔 채 남북의 평화와 화해를 추구 하는 것은 모두 허구에 불과 할뿐이다. 남북의 문제는 감성 보다는 이성으로, 열정 보다는 냉정으로, 한꺼번 보다는 한걸음 한걸음으로 풀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非武裝 地帶(DMZ)를 照望한다.(8)/땅굴(中)
1972년 7월4일. 온 겨레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 "7.4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 되었다. 전문 7개항으로 구성된 이 성명에는 불신과 증오로 점철 되어온 남북간에 무력사용을 배제 하고 자주적이고도 평화적인 조국 통일 원칙을 밝혔다. 남한의 이후락 당시 정보 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당시 부수상이 서울과 평양을 교차 방문 하면서 최고 통치자였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회담한 결과이기에, 남북간의 긴장 상태를 완화 하고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남북의 온 국민이 환영 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남한의 국민들은 그때 당장 통일이 다가 오는 듯 열기가 달아올랐던 기억이 새롭다. 마지막 조항인 제7항을 개 하면 "쌍방은 이상의 합의 사항이 조국통일을 일일 천추로 갈망 하는 온 겨레의 한결 같은 염원에 부합 된다고 확신 하면서 이 합의 사항을 성실히 이행 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엄숙히 약속 한다."라고명기 하고 있다. 바로 그 성명이 발표 되던 순간에도 비무장 지대를 관통 하여 남쪽으로 향하는 지하 땅굴의 굴착기는 힘차게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 되었다. 이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1992년 2월19일 발효된 "남북 기본 합의서"는 남북의 화해와 불가침, 교류와 협력에 관한 합의를 그 기본으로 하고 있다. 전문 4장 25조로 구성된 본 합의서는 당시 정원식 국무총리와 북한의 정무원 총리 이던 연형묵이 서명 하고 발효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 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대남 무력 공작은 이러한 합의서와는 무관 한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3번째 조항인 "교류와 협력"에 관련해서는 부분적이나마 그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다. 그래도 이러한 방향으로 인내 하면서 가야 할 필요성을 시사 해 주는 대목이다. 이번에 남북의 정상이 만나 당장 이렇다 할 합의가 없다 하더라도 김대중 대통령의 언급대로 서로 무엇을 생각 하고 있는지 아는 것만 해도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정상들의 몇 차례 교차 방문이 있은 후 제1장과 2장에 명기된 화해와 불가침 조항도 실현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해 본다. 그렇지만 비무장 지대를 관통하여 수도권 인근까지 남하한 것으로 추정 되는 장거리 땅굴의 완전한 해명이 그 선결 조건이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 하지 않을 수 없다.
막대한 노력과 시간, 예산을 수반해야 하는 땅굴 굴착 사업은 이러한 극도의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 어려운 사업 이지만 군사 전략상의 가치로 따진다면 어느 예비역 장군이 말 했듯이 이는 분명히 "상대방 심장을 향해꽂히는 匕首"와도 같이 결정적 승패를 가름 할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땅굴이 김포, 양주, 파주, 연천, 동두천, 화천 등 비무장 지대 후방 곳곳에 골고루 분포 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당국의 판단 근거는 항공사진과 귀순자들의 증언, 그리고 그간 전방 관측소에서 해온 청음 관측 활동을 종합 분석한 결과 이다. 비무장 지대를 따라 배치된 북한의 전방 부대인 13개 군단으로 하여금 1개 군단에 1개 내지는 2개씩의 땅굴을 파내려 가도록 명령 한 것이 아닌가. 분석 되고 있는 것이다. 비무장 지대 248km의 지역에 남북으로 관통 하는 땅굴이 26개가 존재 하고 있다는 전문기관의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 대목이다.
1971년 9월 25일, 김일성은 중앙당 1호 청사에서 이른바 바"9.25교시"를 내렸는데, 당시 땅굴 시공 기술자로 직접 참가 한바 있는 귀순용사 김부성씨가 쓴 "내가 판 땅굴"에 기록 되어 있는 김일성의 육성을 그대로 옮겨 본다. [적 후방에 준비된 경보 병 부대 3개만 침투 시켜도 원자탄 10개를 떨군 것보다 더 큰 위력과 효과를 거둘 수 있소. 이건 내가 지난 69년 1월 인민군 당 4기4차 확대 전원 회의에서도 강조한 말이오. 전쟁 발발과 함께 요새진지로 강화된 군사 분계선을 통과해서 적 후방을 강습, 교란 하는 것은 전쟁에서 기선을 제압 할 수 있는 주요 원인들 가운데 하나요.......(중략)... 유형은 3가지로 하는게 좋겠소. 첫째 경보 병 부대를 대거 침투 시킬 수 있는 형태, 둘째 대남 공작원을 침투 시키기 위한 형태, 셋째 이 두 가지 기능을 모두 수행 할 수 있는 절충 형태가 괜찮을 것이오. 늦어도 우리 당 창건30주년(1975년 10월10일) 안으로 다 완공 해야겠소. 이건 내 바램이고 동시에 동무들한테 주는 전투 명령이오.] 이렇게 해서 땅굴은 파내려 가기 시작 한 것이다. 이 얼마나 당당 하고 자신 만만한 명령 인가. 일제의 암울 했던 시절에 나름대로 항일 무장 투쟁을 했던 그의 전력답게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써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권력만을 추구하는 야심가로써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쟁취 했으며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인 동족상쟁의 6.25전쟁을 주도 하고 민족 전체에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엄청난 비극을 안겨 준 자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시작된 국제 냉전의 한축인 소련에 이용된 면이 없진 않지만 그의 젊음과 권력욕망은 소련의 한반도 점령 야욕과 한데 잘 어우러져 결국은 불가피 하지도 않는 전쟁 드라마를 연출 하고야 만 것이다. 패전 일본의 간계와 공산 제국 소련의 야욕이 만들어 낸 국토 분단을 민족 분단으로 까지 이끈 그 책임을 역사는 엄중하게 평가 할 것이다. 그 전쟁은 정의를 간판으로 내 걸었으나 반인륜적 불의의 전쟁 이었으며, 민족 해방을 기치로 내세웠으나 외세 의존과 이념 노예의 전쟁 이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권력만을 잡기 위해 외세와 전쟁의 수단까지 동원한 권력광은 마침내 사후의 권력까지 염두에 두고 왕조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아들 세습까지 감행 하였던 것을 온 세계가 알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북한의 김정일 국방 위원장은 어쩌면 그의 아버지의 권력욕에 이용된 희생양 인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를 사랑 하는 김정일 총비서는 인간성을 존중 하고 서민 생활을 알며 진정으로 민족의 장래와 역사를 염려 하는, 냉철한 두뇌와 함께 따뜻한 가슴을 가진 큰 지도자이기를 기대 해 본다.
非武裝 地帶(DMZ)를 照望한다.(9)/땅굴(下)
휴전 협정 제2조 15항과 16항에는 비무장 지대의 해상과 상공에 관한 규정이 있다. 그러나 지하에 관한 단어는 협정 어느 조항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지하 공간에 대한 명시가 없다고 해서 지하 땅굴이 본 협정의 위반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상과 해면의 권리는 그 상공과 지하에까지 연장 되는 것이 통상의 관례다. 지하 광업권, 해구 개발권은 그 지상과 바다를 관할하는 자가 권리를 행사 하게 된다. 따라서 군사 분계선을 넘어 땅굴을 판다는 것은 분명, 정전 협정 위반 사항이다. 제 356차 정전위에서 땅굴에 관한 공동 조사를 요구 했으나 북한 측은 "남한에서 굴착 한 것"이라고 강변 하면서 이를 전면 거부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발견된 제1땅굴은 경기도 고랑포 동북방 8km에 위치한 군사 분계선(휴전선) 남방 1,200m지점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비무장 지대 안에 위치하고 있다. 총길이가 3,500m로써 군사 분계선 북쪽 2,300m ,북방 한계선에서는 불과 300m 떨어진 곳에서 터널은 시작 되는 것으로 보인다. 1974년 11월15일 유엔군 측 수색대가 순찰 중,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이상히 여기고 이를 굴토함으로써 발견된 것이다. 이어 1975년과 1978년 그리고 1990년에 연이어 발견된 제2, 제3, 제4땅굴도 지하로부터의 폭음이나 모터 소리 등이 빌미가 되어 세상에 드러났지만 1시간에 3만 명 이상 중무장 병력이 이동 할 수 있으며 야포와 중화기, 소형 차량까지 지나 갈수 있는 규모라고 당국은 파악 하고 있다. 지하 암반을 뚫은 지하 터널은 지하수가 고이는 것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5도 각도로 낮게 경사가 되어 있어 이것이 북한에서 굴착 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 셈이다. 만약 경사가 남쪽으로 날 경우 물이 고여 더 이상 작업을 진전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제1땅굴만 천정과 벽이 인공 콘크리트로 되어 있고 나머지 3개의 땅굴은 모두 암반을 뚫어 만든 것으로써 땅속 깊이는 50내지 150m 인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북한이 자랑 하는 특수 부대 10만 명 가운데 약 8만 명이 輕步兵인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 경보 병은 우리나라의 특수 지형인 산악전과 후방 교란전, 유격전등의 비정규전을 염두에 둔 김일성 특유의전술과 전투를 감안한 특수 부대이다. 이 부대원들을 공수 한다면 수백 대의 비행기가 하늘에 떠야 하지만 항공기는 격추될 것이며 낙하한 병력도 분산 되고 공격을 받음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성공 시키기란 어려울 것이다. 또한 공격이 노출 되어 반격을 불러 오지만 땅굴을 통해서 남한 지역의 지상으로 나온다면, 그것도 국군 복장으로 변장 하여 실전 훈련 중이라고 가장 한다면 혹은 쿠테타 군처럼 행동 한다면, 그 이후 벌어질 혼란 상황은 엄청난 살육전으로 전개 될 것이란 상상 하기 어렵지 않다. 군사 전문가들은 현재의 군사 상황으로 볼 때 最大의 安全, 最多의 병력 이동, 適의 攻擊路 선택은 바로 땅굴이라고 말할 정도다. 북한이 땅굴을 보는 군사 전략적 가치가 어느 정도 인가를 가늠 하는 평가라 아니 할 수 없다.
북한이 대남 전략에서 가장 큰 부담으로 여기는 것이 주한 미군의 존재 인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 미군이 개입 할 여지를 주지 않고 서울과 수도권을 점령한 후, 미국과 정치 협상을 벌리는 소위 "政-戰 配合 戰略"에 땅굴의 이용 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없는 것으로 북한 당국은 생각 하는 것 같다. 북한의 특수 부대가 땅굴을 통해 수도권에 잠입, 서울로 들어 와 주요 기관과 요인들의 신병을 그들 뜻대로 좌우 하는 사태가 온다면, 속전속결로 남한을 무력화 시키고 미국과의 협상도 그들 뜻대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에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견해가 많다. 오히려 남북간의 전면전이 일어날 것이며 북한의 전략인 내전화가 이루어지더라도 남북 공멸의 사태가 벌어진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70년대, 80년대라면 몰라도 세기가 바뀌고 있는 현대는 남북 지도자와 지도층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바깥을 보고 안을 어떻게 해야 겠다는 방안을 숙의해야 할 때다.
미군 당국은 지금까지 발견된 4개의 땅굴이 지하 100m에서 150m의 심도를 갖고 있지만 지하400m까지 깊게 급경사로 뚫었다가 완만하게 상승 각도를 유지 하면서 남한 지역을 파고들면 후방 깊숙이 침투 할 수 있는,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는" 장거리 땅굴의 가능성을 우려 했다고 한다. 90년대 초반에 언론을 통해 심각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김포의 후평리, 연천의 구미리와 두일리, 파주의 덕천리, 양주군 남면 한산리등의 지역에서 굴착기 소음과 진동 소리, 궤도차가 레일을 지나면서 규칙적으로 "덜거덕, 덜거덕" 하는 소리는 심상치 않는 예감을 불러 오지만 확증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금년 3월에도 연천 지역의 땅굴을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군 당국은 "땅굴을 발견 하지 못했다."고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 되었다. 땅굴 문제는 확증이 없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다. 의혹을 풀지 않으면 안 되는 당면 과제가 아닐까. 북한이 땅굴의 군사적 이용은 성공 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도록 만드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비무장 지대를 관통 하고 있는 수많은 땅굴의 평화적 활용 방안을 논의 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 한다. 숨겨둔 땅굴이 한개 라도 남아 있는 한 남과 북이 어떻게 화해와 평화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부터라도 민, 군, 관의 전문가와 과학자 그리고 전문 기업으로 구성되는 "땅굴 조사반"의 설립을 정부 주도 하에 추진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북한과도 꾸준한 설득과 접촉을 통해 땅굴에 관한 모든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유도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땅 위에서는 서로가 웃고 악수 하는 반면 땅 밑에서는 상대방의 가슴에 꽂을 비수를 갈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 희극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의 비무장 지대가 지하에서까지 생기지 않도록 온 국민의 용기와 지혜가 요청 되는 때이다.
非武裝 地帶(DMZ)를 照望한다.(10)
1998년 10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자 회담 3차 본 회의 개막 연설에서 스위스의 외무 차관인 "야콥 켈렌 베르그"씨는남북 방 한계선을 따라 "인도 주의적 회랑"(Humanitarian Corridor)을 개설 할 것을 희망 하였다. 남북한과 미국 및 중국 대표가 참석한 국제회의에서 개최 국가의 고위 외교관이 제의한 내용이어서 더욱 이채롭고 돋보이는 제안 이지만 그 후 남북한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고 어떻게 다루어 가고 있는지, 아니면 이미 死藏 되어 잊혀진 사안이 되어 버렸는지 아직 후속 얘기를 들어 본적이 없는 상태이다. 남북한의 긴장을 완화 하고 평화를 추구 할뿐 아니라 비무장 지대의 자연을 보존 하고 그 가치를 국제적 잇슈화 할 수 있는 함축성을 고려한다면 이 제안이 매우 훌륭한 가치를 가진 아이디어라고 생각 한다. 그의 말대로 "인도주의적 통로"가 설치될 경우 북한에 대한 인도 물품을 직접 공급 하고 판문점을 통한 구호 물품 전달 등 물자 수송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비무장 지대의 생태 경계선을 의미하며 보존 구역을 명확히 하는 부수적 효과도 얻을 것이다. 물론 248km 거리의 회랑이 비무장 지대 남과 북 양쪽에 건설 된다면 그것은 자연 생태계를 파괴 하지 않는 지속 가능한 개발 범위내의 사항이 되어야 함은 새삼 말할 필요가없는 사항이다.
최근 남북 정상 회담 이후 합의 사항의 실천을 위한 접촉이 여러 채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이다. 우선은 전쟁 방지나 이산가족의 재회 같은 문제가 핵심적 논제가 되어야 함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 이지만 주요 협의 사항 중에 환경에 관한 내용이 없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방북단 가운데 환경을 책임진 당국자가 한 분도 없었다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오히려 북측의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환경에 관한 언급을 했기에 다행으로 생각 하고 그의 발언이 의외의 신선함을 주었기에 높이 평가 하는데 주저 하고 싶지 않는 것이다. 즉 "금강산에 케이블카를 설치 하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환경 문제를 고려해 내 자신이 이를 반대 했다."는 대목이다. 환경과 자연을 주제로 남북한이 "소프트 터치" 할 수 있는 가능성과 환경에 관한 그의 생각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주위의 핏발선 눈초리를 유도하는 정치 문제 보다는 우리끼리 얼굴을 맞대고 우리 삶터의 환경과 자연 그리고 개발을 논의 한다면 결국은하나가 되는 종착점에 조용히 도착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비정치적 정치! 독일이 우리에게 충고 하는 것이 이러한 조용한 방법 아닌가. 여하튼 수만, 수 억년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해온 금강산이 무지막지한 개발 론에 의해 한 순간에 케이블카로 망쳐졌을 지도 모를 것을 생각 하니 아찔할 뿐이다. 인간이 개발한 아름다움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결코 능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10년 전 소련의 붕괴 이후 국제 정치의 지각 변동은 동서 냉전을 종식 시키고 화해와 협력의 급류 속에 새로운 국제 질서를 재편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한의 선택은 향후 남북 전체의 진운과도 관계가 깊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개혁과 개방이 북한 사회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 되지만 북한 당국은 꼭 그렇게 만은 생각지 않는 것 같다. 자유 경제 사회로 향한 급속한 노출은 체제의 붕괴까지 가능한 위험한 방법으로 간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무장 지대의 평화적 이용은 남북이 서로를 이해하고 한걸음씩 가까워지는 아주 적당한 점진적 방책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환경과 관광, 이 두 가지의 테마는 북한과 남한 어느쪽도 정치적인 해석이 필요 없는 부분이라고 본다. 서로에게 경제적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통일 기반을 조성 하는 자연스런 점진적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아직도 비무장 지대의 관할권은 남북한과 유엔군 사령부, 중국 등이 관계 당사국으로 인정 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의 평화적 활용 방안은 이들 4자가 합의에 도달 하여야 하는 절차상의 문제가 있지만 남북한의 합의에 우선 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물론 이러한 상황을 가상 한다는 것은 현 휴전 협정을 평화 협정이라 던가 화해 협약 같은 것으로 바꾸는 것이 순리 이고 이것 역시 남북한의 합의가 우선 이라고 본다. 남북한이 새로운 평화 협정에 의하여 비무장 지대에 대치하고 있는 쌍방의 군사력을 감축 혹은 해제 하고 후방으로 물러나게 하는 등 가시적 조치를 취한다면 휴전 협정의 관계 당사국이 이 협정의 대체를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며칠 전 보도에 의하면 현대 그룹의 경영자들이 방북 후 돌아와 서해안 공단 지역으로 해주와 신의주 외에 남포와 개성을 포함 시키는데 합의 했다고 한다. 그들의 대표성이 정당한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지금까지 주장 해온 것으로 알려진 비무장 지대 안에 공단을 건설 하자는 반 환경적 "회색 개발론"이 받아 들여 지지 않은 것이 다행으로 생각 한다. 그러나 개성 지역의 수계가 어떠한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아 무어라 단정 할 수는 없지만 만약 개성의 水係가 임진강 하류와 연결 된다면 개성 공단 건설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남쪽의 오염된 한탄강 수계와 연결된 임진강의 남쪽 하류는 이미 위험한 수준의 오염도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동두천시를 관통하는 신천과 한탄강으로 합류 되는 하천은 이미 거대한 하수구와 같은 실정이다. 이 물이 청정 지역인 비무장 지대를 지나 경기도 연천, 포천, 양주군을 거쳐 임진강에 합류 하는 수계를 이루고 있다. 이 지역에는 염색,피혁등 악성 폐수 배출 업소가 200개를 넘는다고 한다. 이들이 매일 쏟아 내는 오 폐수는 한탄강과 임진강 하류를 더럽히는 주범인 것이다. 당초에 이곳에 공단 허가를 내어준 당국에게 물으면 그들은 합법적이라고 말 할 것이다. 결과 까지는 책임 질 수 없다는 얘기다. 계속 되는 단속과 처벌은 연례행사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정말 끊을 수 없단 말인가.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 하기전인 1997년 大選 시절에 "그린벨트 대폭 해제"를 포함한 "접경 지역 개발 특별법 제정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공약 하였다. 그리고 2년 후 인1999년 말에 기어코 "접경 지역 개발 지원법안"이 국회에서 통과 되었다. 민통선 북부 지역의 마구잡이 개발이 또 하나의 국토의 "난개발"을 몰고 오는 것이 아닌지 심히 염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필연코 한반도 유일의 녹색 생태 지역인 비무장 지대의 환경과 자연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국토의 마구잡이 개발과 상수원 오염 실태 그리고 수도권 지역이 시멘트 범벅의 회색 개발이 된다고 전국의 성토 대상이 된 적이 있다. 또한 동물 전염병인 구제역이 전국을 휩쓸고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홍역, 이질 등의 역병이 발생 하여 전국을 놀라게 한 것이 난개발이 몰아온 비위생적 환경과 시기상 우연한 일치 일뿐 서로 함수 관계가 있다고는 보고 싶지 않다. 선진국에 가보면 구릉지나 산속에 주택이 지어져 있는 것을 자주 접하게 된다. 분명히 차도가 있을 텐데 길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처럼산을 절개한 붉은 황토 흙을 볼 수가 없다. 이런 것부터 해결해야 선진국에 진입 할 수 있다고 감히 주장 하고자 한다. 사이비 환경 평가 연구 기관, "환경"이란 단어만 갖다 붙인 어용 단체, 그리고 이들의 궤변을 이용하는 함량 미달의 공직자를 경계하고자 한다. 자연 파괴로 인한 피해는 금전으로 환산 할 수 없으며 생존과 직결된 문제 이므로 자연을 파괴 하고 보호 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삶의 터전을 포기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