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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로미치 지근에 있는 카가와토요히코 기념관과 도이스관
헨로미치의 첫 밤에 내린 비가 계속되고 있는 첫 아침(9월 3일).
잠에서 깨어났으니 잔비는 아니고 머물러 있을 수 없으므로 이슬비도 아니겠다.
길 떠나가라고 가랑비?
어제 어두워서 보지 못한 사찰 경내를 둘러보았다.
코보대사가 42세 때인 815년(弘仁6), 이곳에서 37일간 '아미타경(阿彌陀經)' 독송을
했는데 결원(結願)의 날에 아미타여래가 현현(顯現)했단다.
그 모습을 조조(彫造)해 본존(本尊)으로 삼았는데 여래상이 발하는 빛이 먼 나루토의
드넓은 바다까지 비추어 어업에 지장을 받고 있는 어민들의 요청으로 본당 앞에 작은
산을 쌓고 일조산(日照山)이라 했다나.
이 아미타여래상이 국가 중요문화재란다.
대사가 심었다는 수령1.200년 '장명삼(長命杉)'은 높이 31m, 둘레 6m 영목(靈木)이며
석가가 돌 위에 서서 설법을 했는데 석가의 족적이 선명하다는 돌도 있다.
대사당의 코보대사상를 여기에서는 '안산(安産)대사'라 부르는데 대사의 기도로 유산
위기의 여인이 옥동자를 순산했다 해서라고.
고쿠라쿠지를 나와 카가와의 기념관을 향했다.
어제 왔던 길을 잠시 역으로 걷다가 개천(板東谷川) 둑길을 걸어야 하는데 주저앉을
곳도 없는 비내리는 이른 아침에 다리의 통증이 시작되었다.
앉지 못하고 선채로 달래고, 걸으며 진정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아침.
"토쿠시마현이 낳은 세계의 위인(A Great Man of Tokushima in the World)" 만나러
가기가 이렇게도 어려울 줄이야.
궁하면 통하는가(no way out, some way out))
타카마쓰(高松)고속도로 밑 통로에서 비를 피하며 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20대 초반의 청년은 모두가 포기한 지극히 짧은 생명임을 알고 더욱 열심히 살았다.
3년의 시한생명이 반 백년 이상 더 살며(72세) 아무도 못할 일들을 해냈다.
코보대사가 헨로(88영장)의 개창자라면 카가와 목사는 JA共濟, JA全農 등 JA(Japan
Agricultural Cooperatives)의 창시자다.
이같은 두 종교의 거목이 시코쿠시마에서 태어났다.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다의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기독교 성서(미가 5:1, 마태 5:6)의 기록처럼 일본 본토의 4섬중에서 가장 작지만 결코
작은 땅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나 나는 이 아침에 적지 않은 안타까움을 달래야 했다.
9시30분에 개관하기 때문에 아쉽게도 돌아서야 했지만 비를 피하고 아픈 다리를 달래
느라 현관 앞 바닥에 앉아서.
일본 불교와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살기 위해서는 일본의 토착신앙인 신토(神道/神社)
와의 타협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 국가의 안위를 우선하는 것을 이해하나 지나치면 범세계적 종교는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코보대사의 시기는 8, 9c로 우리나라의 통일신라 때라 현실과 무관하지만 카가와는
20c, 우리 시대의 인물이다.
기독교사회주의자, 열정적 복음주의자 답게 자국민을 위해서는 온 몸을 내던졌지만
자국의 제국주의 야욕으로 인한 피해민족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방관적이었다.
카가와 보다 1세대쯤 선배인 우치무라간조(内村鑑三/1861-1930) 역시 유감스럽게도
일본 안의 기독교사상가, 복음주의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신앙전집(25권)을 다 뒤져도 그는 일본적인 기독교, 일본인에 필요한 하느님을
찾는데 급급했다.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신앙의 근거는 오직 성서뿐
이라며 가시적인 교회를 거부한, 그의 소위 무교회주의도 마찬가지다.
골방에 홀로 앉아 성서만 붙들고 있으면 복음이 땅 끝까지 절로 퍼지는가.
기성교회를 거부하고 따로 모이면 그것은 다른 형식의 교회 아닌가.
그들이 일본 기독교의 거목이지만 거대한 하느님 나라를 일본이라는 작은 섬에 압축
하려 했다 할까.
그래서 별처럼 많은 일본 밖의 하느님의 백성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호국 불교처럼
호국 기독교를 추구했다면 그들에게 무례를 범하는 표현일까.
이 점에서는 우리나라도 다를 것 없다.
서산대사를 비롯해 호국 승군(僧軍)의 활략이 지대했으며 기독교 역시 이데올로기의
틀을 깨지 못하고 있으니까.
더욱 묘한 감정을 갖게 한 것은 바로 이웃하고 있는 도이쓰(독일)관이다.
1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연합국측이 되어 태평양의 독일령에서 싸웠다.
독일과의 직접 전투에는 소극적이었으며 피해는 경미하면서도 이득은 충분히 챙겼다.
이 때 산둥반도(중국)의 칭다오(靑島/독일租借地)에 주둔한 독일군 5천여명이 포로가
되어 일본의 여러 수용소에 분산 수용되었는데 이 지역에도 1천여명이 수용되었단다.
나루토의 반도후리(板東俘虜)수용소다.
2차세계대전에서는 독일, 이탈리아와 추축국(樞軸國)이 되어 연합국과 싸워 패했으나
수용소 지역에 독일관을 건립하고 우호관계를 과시하고 있다.
2차대전 종전 후 독일은 힘있는 마르크를 바쳐 크리스찬 아카데미운동을 전개했다.
전쟁의 원인을 대화(對話)의 부족 때문으로 보고 대화 운동을 전개한 것이며 이것이
대전의 전범자족(族)으로서의 그들의 참회, 사죄 방식이었다.
추축국이며 전범자의 한축인 일본은 어떠하며 일본기독교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국가에 씁쓸한 아침이었다.
헨로미치에는 사람이 없는데 납경소는 왜 바쁜가
다리가 웬만큼 진정되었다.
12번국도로 리턴, 2번후다쇼 앞을 지나면 얼마 가지 않아 나루토와 이타노군(板野郡)
시군계(市郡界)다.
혼슈(本州)와 시코쿠, 큐슈(九州) 3개섬 사이의 좁은 바다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해협을 나루토해협이라 하는데.'나루토' 라는 이름은 간조와 만조
(干潮滿潮) 때 소용돌이치는 격한 조류의 굉음에서 비롯되었단다.
(순례를 마치고 나루토해협을 걷다가 알게 되었으며 후에 다시 언급하겠다)
2번에서 3번 콘센지(金泉寺/板野郡板野町)로 갔다.
쇼무천황(聖武天皇/재위724~49)의 칙원(勅願)으로 교키(行基)보살이 건립하고 콩코
묘지(金光明寺)라 했다는 사찰이다.
시코쿠를 순교(巡敎)하던 코보대사가 마을 사람들이 가뭄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이
곳에 우물을 파게 했는데 영수(靈水)가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장수하게 하는 황금우물이라 해서 콘센지로 개명하고 시코쿠 제3번 영장으로
정했단다.
2번 ~ 3번 사이 2.7km 헨로미치는 곧 차로(국도)와 보행자로로 나뉘는데 보행자로는
숲이 무성하고 산록에는 낙엽이 길을 덮어버린 상태다.
걷는(歩き) 헨로상이 거의 없음을 의미한다.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는데 3번 영장의 납경소는 헨로상들로 바쁜 듯 했다.
헨로상 복장을 한 거의가 대소 차량을 이용하고 있는 단체 또는 개인들이기 때문이다.
자전거 개인 또는 팀도 더러 있고.
오전 10시쯤, 콘센지를 떠날 때 비는 완전히 그쳤다.
낯 설던 지도가 눈에 잘 보여지고 붉은 화살표를 비롯해 헨로미치 안내표지들을 확인
하는 눈도 각각으로 편해 갔다.
나홀로 길도 오랜 세월 워낙 익숙해져서 인지 먼 타지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4번 다이니치지(大日寺) 헨로미치(농로) 변에 토쿠시마현지정 천연기념물인 '오까노
미야 녹나무(岡宮 樟木)가 있다.
나이 700여살에 키가 약 35m되며 가지가 동서27m, 남북37m쯤 된다는 거목이다.
우리나라의 고려 후기쯤에 태어난 나무로 간주된다.
배를 만들기 위하여 베어질 운명에 처했으나'御神鏡木'(신령으로 모시는 거울을 걸어
두는 나무?)이라 해서 살아남았다나.
우리나라의 정2품송, 정3품은행나무 처럼?
불탄 국보1호(崇禮門)를 복원한다고 온산을 뒤져 금강송을 잘라온 사람들, 그 나무를
빼돌린 최고의 장인, 그들도 보고 듣고 배우고 깨달으면 달라질까?
3번~4번 구간 5km 역시 농로가 아닌 숲길, 산길은 사람의 발길이 뜸함이 역력하다.
만나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까미노의 마드리드 루트를 연상하게 하는 길이다.
호젓해서 훼방받지 않고 오히려 좋다는 뜻이다.
까미노의 '아니모(animo/힘내세요)' 처럼 '오겡끼(お元氣)' 격려판도 있다.
한데, 5번 지조지(地藏寺)를 지근에 두고 먼 4번에 갔다 되돌아오는 황당한 코스다.
4번에서 6번으로 직행할 길이 없기 때문에 순서를 바꿀 수도 없다.
다이니치지는 앞의 세 사찰과 달리 약간 고지대(해발 75m)인 유현한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42세 코보대사가 이곳에 오래 머물며 수행했단다.
이 때 다이니치여래(大日如來)를 감득하고 여래상을 새겨(彫造) 본존으로 해서 절을
창건한 후 다이니치지라 명명했다는 사찰.
본당과 대사당을 잇는 회랑에는 에도(江戶)시대(1603 ~ 1867)에 시주되었다는 목조
관음상들이 안치되어 있는데 33체나 된단다.
왜 33인가?
88이 인간의 모든 번뇌를 뜻함은 이미 알았고 33은?
일본인이 33을 선호하는가?
그렇다면 3. 1독립선언서의 33인에 일본 압제자들이 더욱 발끈했겠다.
그러나, 불교의 33관세음상은 다른 뜻이 있단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또는 음성에 따라 성관음도 되고 천수관음도 되는
등 삼계육도(三界六道)에 고루 화현하는데 응화신(應化身)의 수가 33이나 된다니.
임진왜란 때 죽은 일본병사의 무덤에 발끈한 한국 영감
다이니치지를 나와 5번 사찰로 가는 2km 길에서 잠시 알바를 했다.
고가자동차도(고속도로) 밑 잘 닦여있는 농로를 무심코 따랐기 때문이다.
방심하지 말라는 첫 경고장?
'헨로미치를 지키는 모임'의 주의 푯말이 있는데도 보지 못한 벌인가.
"이 길은 헨로미치가 아닙니다. 5번후다쇼로 가는 분은 뒷편 고속도로고가교 앞에서
우측으로 돌아 가십시오"
5번사찰은 보행자와 차량 모두에게 헷갈리게 한다.
오백나한(五百羅漢)을 5번 사찰로 착각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석가여래가 입적한 후 그의 가르침을 결집(結集)하기 위해 모인 오백 명의 아라한(阿
羅漢)을 말하는데 나도 그랬거니와 승용차로 올라와 주차했던 헨로상들이 되돌아가는
것을 잠시동안에 거듭 목격했으니까.
보행자들은 오백나한에서 내려가는 샛길이 있어서 무방하지만 차량은 차로를 따라야
하므로 번거로움이 있다.
지조지는 사가천황(嵯峨/재위809~23)의 칙원에 따라서 코보대사가 개창했으며 닌묘
천왕(仁明/833~50)때까지 3대에 걸친 천황가(家)가 귀의한 사찰이란다.
대사가 조각한 본존의 승군지장보살(勝軍地藏菩薩)은 오른손에 석장(錫杖), 왼손에는
여의보주를 쥐고 있으며 갑주를 입고 군마에 올라탄 용맹한 모습이다.
악인을 물리치고 재해를 벌한다는 지장상.
대사당 앞 800살 은행나무가 원기 왕성하며 본당 앞의 수금굴(水琴窟)이 명물이란다.
일본 정원 기법의 하나로 떨어지는 물방을을 이용해 거문고 소리를 연출한다고.
현대의 음악분수는 이 수금굴이 발전하고 대규모화 된 것?
까미노를 걸을 때 잘 가꿔진 공동묘지가 있는 마을이 살기 좋은 마을임을 확인했다.
마을의 교회는 하나같이 공동묘지를 겸하고 있다.
헨로미치도 까미노와 대동소이다.
우리나라와는 문화적 차이(差異)라기 보다는 상이점(相異點)일 것이다.
일본의 소규모 가족묘역은 도처에 산재해 있으며 대단위 공원묘역에도 무수하다.
지조지와 오백나한 간에도 대규모 종합 묘역이 있는데 내 눈을 사로잡은 묘가 있다.
'모리진타유게보쇼(森甚太夫家墓所)'
오래된(500년쯤?) 비문이라 읽을 수는 없으나 2009년 이타노타운 교육위원회가 세운
안내판에 따르면 풍신수길의 조선출병때 군선(軍船) 제작에 종사한 모리우지무라(森
氏村)가 문록5년(文祿/1596) 7월 부산에서 전병사(戰病死)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이 맞다면 그들이 정유재란(1597년)을 일으키기 전해다.
그러니까 임진년에 출병해 철수하지 않고 부산에 잔류해 있다가 병사한 것?
일본은 임진왜란을 분로쿠노 에키(文祿의役)라 하며 일본이 일으킨 것이 아니고 풍신
수길의 전쟁으로 축소하려 하는데 이 기록에서도 엿보인다.
하긴, 36년 식민통치와 압제까지도 반성과 사죄는 커녕 조선민이 원했기 때문이라고
황당한 억지를 펴는 자들이니까.
속내가 어떠하던, 하필 극심한 피해를 입은 민족의 후손이며 끝내는 온몸으로 압제를
겪은 영감의 눈에 띄어 기분을 망쳐놓을까.
5c도 더 오래 전의 묘 하나에도 이렇듯 심기가 산란해진다면 시작에 불과한 1.200km
헨로미치를 어떻게 헤쳐갈지 막막한 느낌도 들었다.
아무튼,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서 아와구니(현 토쿠시마현) 해상교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모리진타유 가(家)가 이 고을에서는 명문가에 속하는가.
88영장의 하나가 떠받들고 있으니.
관광객이 헨로상이라면 나는 누구인가
일그러진 기분으로 지조지를 나왔기 때문일까.
다리가 팍팍하고 배낭이 무겁게 느껴지는 참인데 내 기분을 알기라도 하는 듯 차도와
만나는 지점에 서있는 반가운 안내판.
피곤한 헨로상들 쉬었다 가란다.
영업용 카페(Brisa)지만 밖에는 쉬면서 차 끓여 마실 수 있게 시설되어 있고 안에서는
얼음냉수를 제공하는 고마운 집이다.
스페인어로(포르투갈어도) brisa는 미풍(breeze)을 말하는데 미풍 같은 집?
기분이 전환될 때까지 잠시 쉰 후 5..3km 안라꾸지(安樂寺) 길 걷기를 재개했다.
그러나 얼마 후 바뀐 마을 가미이타초(上板町)의 헨로상 휴게소인 코야(小屋/神宅)의
다다미(畳) 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무거워진 몸이 좀처럼 풀리지 않기 때문인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에 적게는 1시간, 심할 때는 3시간 까지도 고통과의 전쟁이 정례화 되어 있지만
오후에 전혀 다른 유형의 아픔에 시달리기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목표(安樂寺)가 2.3km쯤 남은 지점의 또 하나의 휴게소(小枾)에 다시 들렀다.
고통스러운데다 오후 4시 이전이니까 여유롭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잡힐듯 하면서도
숨어버리는 해답 찾느라 골몰해서 걸음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막연한 채 다시 걷는데 다행히도 지도가 필요치 않을 만큼 엣 헨로미치 등 길
안내를 잘 하고 있다.
안라꾸지도 코보대사가 개창한 사찰이란다.
북서 2km쯤 산에서 만병에 특효가 있는 더운 물이 솟아나 온천산이라 하고 약사여래
상을 조각, 당우(堂宇)를 건립해 모시고 '안라꾸지'라 명명했다는 영장.
잉어가 살고있는 일본식회유정원(回遊庭園)의 중앙에 대사가 심었다는 액막이(厄除)
소나무(さか松)가 있다.
대사가 맞을뻔한 사냥꾼이 쏜 화살을 막아주었다는 나무다.
뒤로는 정토(淨土)를 뜻하는 현란한 불화와 조각으로 내부를 단장한 다보탑이 있고.
안라꾸지는 보행 헨로 야숙 리스트에 츠야도(通夜堂)가 있는 사찰이다.
어둠이 나래를 펴기 시작하는데 소등하는 납경소와 달리 불을 밝히는 큰 집.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늙은이가 이 집(宿坊)을 츠야도 려니. .하고 찾아갔으니
이런 넌센스가.
천연온천이 있으며 400년 역사를 가졌다는 고가(7.300엔)의 슈쿠보를 무료숙소라고?
오헨로상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니 그 헨로상들은 어떤 사람일까.
숙식, 복장, 장비와 순례용품비 등 순례에 필요한 직접비용으로(교통비제외) 최저 40
만엔을 잡는다면 사치스런 관광객에 다름 아니다.
이들이 헨로상이라면 나는 누구인가?
청천벽력같은 수치감, 자괴감을 어떻게 다스린다?
내 몰골이 초라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염되고 천박한 사이비 순례길을 걷기 위해서 그
많은 고심을 했으며 스스로 만난을 무릅쓰려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안내받은 츠야도는 산문(山門) 2층 종루.
3명의 잠자리가 가능하겠는데 이미 일본청년 2명이 자리를 폈다.
더 젊은 하나는 오후에 휴게소에서 마주치며 먼저 떠난 청년인 듯 한데 두 젊은이가
내 수치감을 조금은 희석시키는가.
얼마 후에 온 한 이탈리아청년과 나이 많은 일본청년이 의기가 투합되는지 짐을 싸서
함께 나감으로서 다시 둘이 되었다.
어제 인천공항에서 사온 빵으로 하루를 보낸 내게는 저녁식사가 필요한데 내게 있는
것은 섬진강 보행때 만덕선원 원장(법장)이 준 국군 야전비빔밥 뿐.
온수가 필요함을 알고 나간 일본청년의 협조로 처음 먹는 야전식이지만 식사도 했다.
남은 일본청년과는 내일 함께 걷기로 했다.
아이치겐(愛知縣)에서 온 34세 젊은이 니시오(西尾保紀)는 인터넷(스마트폰)에서 내
까미노 기록을 보고 경이롭다며 함께 걷는 것을 기껍게 동의했다.
내 까미노 크레덴시알(순례자여권)의 현란한 스탬프들을 자기 스마트폰에 담고.
일본청년과의 동행 계획은 헨로미치의 슬로건 중 하나가 '동행이인(同行二人)' 이기
때문이 아니다.
내 순례방식과는 상반되지만 일본에 생소한 내가 적응하려면 당분간 일본인과 동행
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말수가 적은 그가 적임자라 판단되어서다.
그러나, 이 동행 계획은 아침에 무산될 수도 있다.
시코쿠 도착 이틀째지만 본격적 걷기는 첫날인 오늘, 나는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크나큰 충격을 받아 모두 패닉(panic)상태가 되어버렸다.
이 밤에 추스르고 확실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면, 그래서 순례의 의미가 선명하게 되
살아나지 못하면 나는 미련없이 귀국하고 말 것이다.
향락의 거리에 다름 아닌 길은 순례자에게는 영혼 없는 육의 길에 다름 아니며 순례의
의미를 상실한 길을 왜 걸어야 하는가. <계 속>
極樂寺 副住職 安藝實英/젊어보이는데 부주직(부주지)이란다.(위)
매점 책임자(?)/자동차 숙소를 안내하고 오니기리를 만들어 준 여인(위)
極樂寺(위 사진들)
賀川豊彦기념관(위)과 독일관(아래)
金泉寺(三番靈場) 가는 길(위)과 金泉寺(아래)
헨로道에는 사람이 없는데 헨로靈場에는 사람이 많다(위)
도쿠시마현지정 천연기념물인 '오까노미야 녹나무(岡宮 樟木)(위)
첫번째 大日寺 가는 길(위)과 大日寺(四番靈場)(아래)
위 主意(안내)판을 놓치면 알바를 하게 된다.
地藏寺 가는 길(위)과 地藏寺(五番靈場)(아래)
늙은 한국영감을 착잡하게 한 임진왜란 참전 병사의 묘(위)
安樂寺 가는 길(위)과 安樂寺(六番靈場)(아래)
안라꾸지 츠야도 벽에 붙어있는 '헨로' 삼행시(아래)
번역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