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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 광주
이땅의 민족예술을 다져온 한국의 아테네
송수권 / 시인
광주「남도(南道)」문화예술의 이해를 위하여 - 남도풍(南道風)
흔히 문화 예술이란 인류가 자연을 개척해서 이루어낸 정신활동의 소산이라 말한다. 또한 문화예술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규정짓는 요소로서 향토성(로컬리티)을 들기도 한다. 가장 향토적인 것이 세계적이라 볼 때, 가장 향토적인 남도 문화예술이야말로 민족문학의 핵이 됨음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남도권 문화예술은 유별하다. 예술 중에서도 「남도문학」은 더하지 않을까? 그래서 예로부터 이 고장을「예향」또는「빛고을」이라 일러 왔다. 달리 말하면 남도는 이 땅이 민족예술을 다져온 한국의 아테네요, 피렌체라 할 수 있다.
또한 남도 지방은 유달리 풍류가 성한 곳이다. 산세(山勢)가 쇄려하고 뻐꾸기 한 마리가 울어도 그 숲 속에서 아주 깊이 걸려 절절하게 운다. 성산일대(별뫼)나 옥당골 또는 영랑의 고가(古家)를 돌아나오다 듣게 되는 꾀꼬리 한(恨) 마리의 울음 속에도 우리들의 한이나 흥이 절절이 배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한의 흥이나 느슨한 가락을 남도풍(南道風)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반증으로서는 서울에서 싸락눈이 내리다가도 고속버스로 어두운 국도를 따라오다 보면 어느새 노렁산맥 이남에서는 훈훈하고 탐스러운 목화송이 같은 흰눈으로 바뀌어 있음을 본다.
또한 남도는 풍광이 밝게 빛나고 그 전통정신에 의한 보수정신이 강한 곡창지대다. 평야 지대여서 역사 속의 수난장이기도 했다. 이 말뜻을 바꾼다면 이곳은 곧 문(文)의 아테네요 도(道)의 기맥이 뻗친 선비의 고향이기도 하다.
일찍이 일본의 야만국에 문자를 전수해 준 왕인박사로부터 성리학의 거둥니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등의 기맥을 이어받은 저 구한말의 마지막 선비로 의연했던 매천 황현 선생의 절명시(絶命詩) 4수 중「人間難作識字人」(지식인으로 태어나서 사람노릇하기가 이리도 힘들구나)의한 구절이 보여준 대로 그 시대를 살다간 선비들의 정신이 구절이 보여준 대로 그 시대를 살다간 선비들의 정신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정신과 위업 아래서 특히 우리 남도예술은 그 맑은 가락이나 색채 또는 그 양이나 질에서 남도풍으로 그 명맥을 떨치고 있음을 자랑으로 삼는다. 면앙정 송 순(宋純)을 으뜸으로 송강 정 철(鄭澈)을 위시한 성산가단(星山歌壇)의 형성이나 고산 윤선도(尹善道)를 비롯한 해남가단(海南歌壇)의 형성, 그리고 섬진강의 동과 서로 가름하는 동편제와 서편제의 판소리 가락과 진도권을 중심으로 한 서, 화단의 주종은 예(藝)와 도(道)에 합일하는 예술의 고향임을 실감하게 한다. 위에서 예와 도에 합일한다 함은「예」의 그 풍부한 심미적 인간성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서릿발같은 꿋꿋한 기상으로 맥을 이루는 정신을 말함이다.
이것이 후일 남도인의 기질로 다도(茶道)의 터전을 마련했고 더 멀리는 청자(靑磁)의 고향을 마련했다.
광주권 문화예술의 산실 원효계곡
이와 같은 남도문화권 예술, 그 중에서도 광주의 상징으로 우람하게 버티고 있는 무등산 문화권의 산실을 일러 「원효계곡」이라 말할 수 있겠다.
원효계곡의 문풍(文風)과 의맥(義脈)을 일러 「계산풍류」라고 한다. 이 계산풍류의 특징은 서원(書院)에 있지 않고 누정에 있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남도, 특히 광주권 문화예술은 서원문화보다「누정」문화가 그 특징을 이룬다. 고경명(16C)이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에는 무등산에 사찰 20여 개가 소개되어 있다. 세월은 무상하여 지금은 중심사와 원효사가 있을 뿐이다. 무등산 상봉을 중심으로 큰 계곡은 넷으로 갈라진다. 동남쪽의 영신계곡은 화순군 동북수원지요, 서남쪽의 용추계곡은 광주천의 상류에 합수하여 서북쪽의 중심사 계곡은 수량이 적지만 광주천의 상류, 마지막은 원효사 위쪽에서 발원한 원효계곡으로 이 물은 광주호를 거쳐 창평의 들판으로 든다.
바로, 이 원효계곡에서 일어난 문화를 사림문화(士林文化), 곧 계산풍류(溪山風流)라 일컫는다. 여기엔 많은 청자가 모여 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담양군 남면 지곡리 일대와 광주직할시 충효동 일부 지역이 된다. 사림문화는 당시의 관학에 비해서 향토색을 지니게 되므로 훨씬 활달하고 신선하다. 또한 서원의 학풍이라면 누정은 문풍이다.
16세기 이 계곡에 누정이 집중적으로 창건되었음은 바로 중심사 계곡을 거쳐 중봉을 오르는 무등산 코스로부터 시작하면 이 계산풍류를 만끽할 수 있다. 원효사에서부터 가까운 곳을 살피면 풍암정(김덕령의 아우 김덕보가 지음)으로 시작해서 조선 초기의 전시민(全市民)이 지었다는 독수정(獨守亭), 그 밑에 양산보의 소쇄원과 제월당 그 아래가 유명한 임억령이의 식영정, 그 맞은편은 창계천을 건너 김윤제의 환벽당과 취가정이 있고 광주호를 타고 내리면 정 철의 송강정, 그 맨 끝이 송순의 면앙정인데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이 일대의 산을 별뫼(星山-정철의 성산별곡)라 하고 송순의 면앙정가에서도 무등산의 계산풍류를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식영적 뒤의 서하당도 대단한 곳이었다. 기묘사화 10년 뒤인 1530년 양산보(조광조의 문인)가 세운 소쇄원은 천연적 폭포와 수목과 괴석을 이용한 우리나라 민간정원 양식의 대표적인 본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제월당은 계산풍류를 일으킨 제월봉 아래의 첫 번째 정자다. 「소쇄원사실」에서는 3책의 기록에 그때 모아둔 시와 글을 싣고 있어 당시의 정황을 그대로 살필 수 있다. 또한「소쇄원도」를 판각으로 남기고 있으며 원효계곡의 문풍 시조격인 송순의 면앙정은 1533년에 지어졌고 면앙정집에 그 전모가 나와 있다. 식영정과 서하당은 1560년 김성원이 지었고 식영정은 그의 스승 임석천을 위해 지은 정자다. 석천집에 나와 있다. 송강정은 정철이 대사헌에서 동인들의 탄핵에 밀려난 1585년에 지었고 권력을 잡기까지 4년을 각고했던 곳이며 술로 그의 울분을 끄던 시기라 다소 촉기가 죽어 있다. 이 황의 수제자였던 학봉 김성일이 나주목에 서원을 중창했는데 이를「경헌서원」이라 한다. 이 서원과 원효계곡의 누정은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알려진 기축사옥에서 정면 충돌되어 계산풍류의 오점을 남겼음을 오늘을 사는 광주인들에게는 좋은 교훈이 되고 있다. 남평 출신인 이발(광산)은 동인의 거두요 담양 출신인 정 철은 서인의 거두였다. 고의든 타이든 중앙의 정치 무대에 휘말려 두 인물이 연출한 세력다툼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천여 명의 학자와 문인 정객들이 학살되었거나 사옥을 치른 일이 이 시대의 민중항쟁으로 죽은 광주의 참극을 훨씬 능가한 사건이었다. 중앙 정치무대의 광대놀음으로 이쪽 공간이 쿨쩍거려졌고 전라도의 기질론이 대두하기까지 하는 오명을 찍었다. 중앙의 정치무대가 바뀔 때마다 함평의 대유학자 정개청의 사우가 여섯 차례나 헐리고 다시 세워졌던 그 비극은 이 시대의 정치놀음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현대사에 오면서 광주학생 사건, 5.18항쟁 등은 역사를 전면 재수정하는「5월의 문학」과「예술」정신을 주도해가는 본고장으로 이제 광주는 그 보수전통 정신과 함께 발돋움하고 있다.
특히 원효계곡에서 일어난 문풍을 뿌리로 쾌적한 휴식공간 하나 없는 숨가쁜 광주는 새로이 문기(文氣)가 충전하여 그 여건 조성에 시민의식이 성숙할 대로 성숙해 있음을 본다.
쾌적한 주거환경에 대한 열말이라든지 예술대학 건립의 추진, 문예회관 건립에 대한 열악한 행정적 뒷받침 또는 원효봉 밑이 무등산 온천 관광단지 조성, 「예술의 거리」정비와 확충 여론 등이 활발하게 개진되고 있음을 본다.
지역문제의 재인식을 위하여
지역문제, 즉 지역주의의 대두는 시민사회의 성숙에서만 가능하다는 이론에서 오늘날, 아무도 그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리라 본다. 이것의 관건이 되는 것이 지방분권주의 또는 지방자치제다.
일찍이 허쉬안 Hirschuan이 지적했듯이 중앙집권적 정치는 모든 문제가「소용돌이의 핵」속으로 빨려드는「소용돌이의 정치」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국토개발계획은 불균형 성장전략에 입각한 것이다. 정부에 의한 개발산업의 선정,, 투자재원의 배분, 그리고 선별적 재정지원과 특정기업 보호 육성은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촉구했던 것이다. 그 결과 지역간의 격차 또는 산업간 계층간의 도농간의 불평등 현상이 위화감으로 조성되어「난국수습」이라는 첨병적 정치기술의 고도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수도권에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집중은 서울과 지방간의 불균형을 야기시켰고 차별적 지역개발 정책은 도(道)간의 불균형으로까지 확산되었으며「행정개혁위원회」의 향기롭지 못한 발설까지를 고려해 본다면 이제 지역문제는 절정에 이르러 있음을 실감한다. 이 위기는 바로 중앙 집권형 사회의 한계를 드러냈으며 이에 대한 치유책은 「새로운 지방시대의 열림」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는 과제다. 이는 한 개인적인 삶의 질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울문화로 대표될 수 있는 오늘의 문화가 물신사상으로 획일화되어 가고 문화의 주체인 인간의 삶을 훼손시켜 의식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오늘의 서울 문화는 산업사회의 부정적인 문화양상을 더욱 퇴폐적인 방향으로 심화시키고 있을뿐 아니라 거대한 조직을 통해 경직되고 있으며 출세주의, 상업주의에 깊이 침윤되고 있다.(정희섭)
중앙과 개체적인 삶
-중앙의식과 지방의식
그는 「중앙」과 가까운 사람
항상 그는
그것을「중앙」에 보고하겠소
그것을「중앙」이 주시하고 있소
그것을「중앙」이 금지했고
그것은「중앙」이 좋아하지 않소
그것은「중앙」과 노선이 다르오라고 말한다.
「중앙」이 어딘가?
「중앙」이 무엇인고 누구인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중앙」으로부터 임명을 받았다는
이 자의 정체는 또 무엇인가?
「중앙」을 들먹이는 그 때문에
자꾸「중앙」이 두려워진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아주 먼 곳에
「중앙」은 있다고
명령은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온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번 근무가 잘 끝나면
나도「중앙」으로 간다고
그는 꿈꾼다.
그러나 십년 세월이 가도
「중앙」은 그를 부르지 않는다
「중앙」은 왜 그를 부르지 않는가?
「중앙」은 왜 그를 기억하지 않는가?
위의 시는 80년대적 모순의 상황을 바로 인식하고 있는 젊은 세대의 작품이다. 「중앙」은 누구며 도대체 그 정체는 무엇인가? 중앙을 짝사랑하고 중앙이 그를 불러주기를 바라는 그 또한 누구인가? 이 시는 바로 중앙집권 권력에 찌들어진 개체적인 삶의 치부를 그림으로 해서 통치 시대를 구가하고 민족성향까지를 변질시켜 가는 통치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일제치하에서는 통감부, 총독부가 바로 이 중앙의 집권감시체제로 이 땅의 민족성향을 말살했고 철저하게 중앙집권으로 예속 통치시대를 구가하며 민족론을 말살시켰다. 광복 후는 자유당정권, 유신정권이 대물림으로 또는 5공이 대물림으로 철저하게 그 통치폭력 시대를 연출했으며 이 적잖은 기간 동안 국민 대다수는 이 통치수단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단합이 와해되었고 민주주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4.19세대도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어 이 땅은「군정종식」이라는 미명 아래 6공이 출발된 것이다.
신세대와 구세대간의 갈등, 첨예하게 대립되는 진보와 보수세력, 이젠 진력이 난 좌우익의 개념이 갈등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동안 이땅에서「중앙집권」이란 권력을 깔고 저질렀던 만행은 지금도 좀처럼 뿌리뽑힐 것 같지 않다.
문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영역은 물론, 특히 문화점유, 문화독재, 문화중앙집권주의 의식마저 철저하게 길들여져 그 감각마저 마비되어 있는 상태다. 「나는 이래봐도 중앙에 있다」는 그 오만불손한 우월감이 때로는 폭력적으로 연출된다. 앞서 한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어느 오만불손한 모장관의 발언인즉 「싹쓰리」「타작」이라는 말의 파문 때문에 그 자리에서 떨려 났던「장관파동」은 한 지역민의 감정을 울분으로 치솟게 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철저한 의식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져 중앙의 의자만 깔면 「낙점」도 하고「심사위원」도 하고「그건 중앙이 원치 않소」「그건 중앙과 노선이 다르오」「싹쓰리하고 타작하오」그렇구나, 오늘의 중앙이여.
그리하여 또 한 시인은 외친다.
개 잡는 법이
사람에게 쓰여졌다.
암장의 밤이
시작도 끝도 없이 시작되었다.
이웃들은 사람의 마을이라
아무도 알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 또 한 시인은 이땅에 저질러진 죄악을 이렇게 외친다.
-합법에는 인간을 당할 악마가 없다고,
을숙도로 날아가는 철새들도 이 땅 위에서는
깃털 하나라도 떨꿀까봐
목을 움추리는 곳에
공인된 간판 하나가
아직도 버젓이 얼굴을 들고 있다.
합법에는 인간을 당할 악마가 없다.
위의 시는 중앙의 비호 아래 저질러졌던 형제원의 복지사건을 풍자한 강우식 시인의 시다.
필자는 서슴없이「중앙의 비호」라는 말을 썼지만「내 아는 친구는......」이 말의 오만불손한 지역 친구들의 말투는 바로 이<비호>를 의미한다. 「내 아는 친구가 신문사에 있는데 또는 잡지사에 있는데.....」쯤만 되어도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지역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기가 죽는다.「임명장을 받고 내려온XX.......」「낙하산 인사.......」「출장나온.........」이런 용어들이 지역을 겁주고 아부하게 하는 잔재적 용어임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개인의 힘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를 국가에 미루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비대해지고 있는 국가의 통치범위를 극대화시켜 개인이 해야할 몫을 스스로 박탈하고 개인을 사회의 거대한 메카니즘 속의 한 나사로 위축시키는 행위라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물론 제도적 측면에서 나라에 요구할 사람이 많이 있지만 겉으로는「문학의 민주화」를 표방하면서 문학을 통치조직을 상징적 수단으로 제도화한 경우가 비일비재함을 상기할 때, 그러한 요구에 앞서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자문해야 한다......우리가 문학의 민주화를 거론하는 까닭은 문학을 특정한 제도로 묶자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특정 제도 속에 묶여 있는 문학을 해방시켜 문학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민주화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예민한 반응을 보여야 할 문학인으로서 문학의 민주화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자신의 직접적 능력을 초월하는 정치나 사회의 민주화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문학의 민주화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어떤 부분의 민주화에 대해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문학의 민주화는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현안이며 되풀이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와 같은 논평은 지역문화인에게는 참으로 고무적이며 각성을 촉구하는 글이 될 것이다. 여기서「각성」이라 함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걸핏하면 무슨 심사, 무슨 강연회, 무슨 공연, 서울 인사만을 기둥서방처럼 불러내리는 그「짝사랑 의식」이 지방민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주의와 신인간 선언- 새로운 삶의 시작
중앙의 중앙화에 기여하는 삶은 이제 낡은 삶이다.
중앙의 대표적 얼굴로 떠오르는「서울」이 중앙이 아니라 중앙의 중앙화에 기여하고 있는 서울적 삶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선 서울도 하나의 지역이다.
서울과 지역을 하나의 수령관계로 잇는 의식구조가 선행될 때만이 오랜 세월동안 누적된 수직구조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민주주의란 바로 수평구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민주주의란 바로 수평구조를 의미한다. 필자는 문학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수평문학(水平文學)이라고 부른다. 전호에서 부산문화 현황을 언급하면서 이윤택 시인이 언급한 사실대로 지역주의 이론을 실천하기 위하여「부산-광주」젊은 시인들이 모여 이루어낸「무크지」가 바로「민족과 지역」의 창간호였다.
86년 겨울방학중, 이윤택 시인이 광주「금호문학」지상좌담회에 왔었고, 그때 필자는 금호문화재단 후원으로 「토요시 낭송회」를 이끌고 있었던 때라 자연 의기화합하여 몇 차례 전화와 서신이 오고가면서 이 작업은 무르익었다. 87년에 기획회의가 광주의 규장각 출판사 주선으로 이루어져 창간호를 광주에서 내기로 합의하였다. 비록 광주-부산뿐만 아니라 대구, 대전, 공주, 강릉, 속초, 제주를 연결하여 기획회의가 시작되었고 1988넌 겨울에 창간호가 나왔다. 그것이 「민족, 지역, 통일, 문학, 삶」이라는 수평문학 운동이 이념을 기반으로 제호는「민족과 지역」이었다. 그때 선언문이 몇 차례 수정 보완되고 마크와 표지가 도안되었는데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지역문화운동과 신인간시대 선언
90년대를 지향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들의 문학, 문화, 사회의 비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의 가장 기초적이고 본질적인 답변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다양성과 자유의 개념일 것입니다. 이 다양성과 자유라는 개념 속에는 어느 한쪽의 문화가 그 사회전반을 주도하는 중앙집권적 문화의 거부를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 삶의 개체적 의지, 문화기류 형성의 개체적 의지로서 어떠한 틀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말합니다. 즉 삶의 정신을 전제된 집단논의의 틀 속에 한정시켜 해석하는 운동성을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지방시대의 개막과 함께 이런 맥락에서 서울도 하나의 지역으로 수평문학의 운동선상으로 파악되는 현상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 위에서 우리는「지역문화운동의 수평적 평준화 운동」을 주도해 나갈 것이며 자율적 문화공간 위에서 개성과 개성 곧 너와 나, 이웃과 이웃, 지역과 지역의 만남이 되고자 하며 여기에 따뜻한 인간, 신뢰와 믿음을 회복하는 공동체적 삶의 목소리만 요란한 지난 세대의 전체주의 문학운동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고 궤를 달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문학 쪽에서부터 각 지역간의 문화라인을 형성하고 공통분모를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 지역간의 특수한 삶의 양식을 문학으로 형성화하고 지역적 차원의 심정적 만남을 통하여 건강한 인간성을 회복하며 각 지역마다의 개성과 주체성을 존중함으로써 문화적 봉건성이나 종속성을 탈피하여 민주성을 회복하여 지역적 연대감을 큰 고리로 형성, 민족공동체(즉 통일에 이르는) 방법을 탐색해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해 나가기 위하여 가장 기초적인 커뮤니티의 소박한 원리 위에 서고자 하며 새로운 삶의 대화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또한, 각 지역과 지역간의 문화적 열등감과 격차를 줄이고 양보다는 질적 문화의 우수성과 특수성을 추스리며 한 지역 또는 그 지역 안의 삶을 누려 받는 개인이나 단체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통하여 문화(문학)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통합, 90년대에는 이 땅에 문화민주주의가 꽃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화민주주의운동을「수평문화운동」이라고 규정하며 우선 한 도시와 도시가 만나는 작업부터 추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기존의 문화단체나 영역에 대한 무조건적 부정 내지는 반동적으로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는 파생적 성격이 아니라. 순수한 문화적 개별성 위에 존재하는 유대적 관계의 채널로 존재하는 수평적 자리이며 심정적 만남의 자리입니다. 즉 개인과 개인, 이웃과 이웃의 만남의 자리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문화인들의 많은 성원 있기를 당부 드립니다.
또 속표지에 실린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본 무크지「민족과 지역」의 태동은 광주-부산-대구-대전-강릉(속초)-제주 등의 전국 지역을 잇는 「環村」으로서의 길트기 작업이며 문화전반의 새로운 이론에서 결집된 모임이다.
광주에서 「토요시」주최 쌍계사 자연시인학교(87. 8. 3∼5)에서 70년대 젊은 지역 시인들이 참가하여 여기에 합의했음을 밝혀둔다.
또한 이 무크지는 어느 도시에 본부를 두지 않고 윤번제로 도시를 순회하며 2집, 3집이 나올 예정이다. 이 까닭은 탈종속, 탈중앙의 논리이면서 과거의 집권적 착종이나 기존단체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한 수평문학 이론에서 나온 것임을 밝혀둔다.
90년대 민족, 문화, 사회, 정치, 경제전반의 문화이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본 「민족과 지역」무크지「신인간시대 선언」에 잘 나타난 바와 같다. 전체획일주의로 개선의 논리를 말살하려는 과거의 흑백논리 통합시대를 주도해가기 위하여 새로운 지역문화논리가 대두된 소이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 논리에 살고자 하며 이 논리의 시대를 「신인간 시대」또는 오염되지 않은「신인간」으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중심부/주변부, 중앙/지방, 계층/계층, 지식인/노동자, 중앙집권/지역, 지역/지역의 갈등의 모순을 해결해가는 전략적 미사일로 이 책은 지역문화운동 논리에 의해, 뜻있는 젊은 세대에 의해 주도해 갈 것으로 경향각지의 호응을 얻을 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작업은 88년 겨울 창간호를 기념하는 「광주지역 보고대회」를 끝냈으며 제2집은 부산책임 편집의 숙제로 남아 있는 셈이지만 어쨌든 86년 5공체제 하에서 질식할 것 같은 삶의 갱생을 위하여 시작한 작업이었다. 결국 필자로서 할 말은「죽은 물고기는 떠내려가고 산물고기는 신선한 물을 찾아 거슬러 올라간다」는 한 지역인으로서의 삶을 말하고 싶은 심정뿐이다.
광주문화예술의 현실과 전망
오늘날 조금이라도 의식있는 지역예술인이라면 그동안 지역 예술인은 무엇을 했던가? 소영웅주의에 들떠, 아니 투신할 수밖에 없는 사회환경의 여건 속에서 자폐증 환자는 되지 않았던가? 「시민의식」이라는 비호 아래 허위의식으로 날조된 예술인은 없었던가? 흑백논리의 강압에 문을 닫고 들어앉은 버러지 같은 예술인은 없었던가? 아마 80년대는 「광주」가 그것을 잘 증명해줄 것이다. 대체로 이 시기는 어느 한 세력권 또는 어느 한 고리 안에 연결 지워져 전체적이고 획일적인 문화운동주의로 전락되었고 개별성, 특수성 다시 말해서 예술, 더 첨예하게 말해서 시가 갖는 충분한 자월성은 획득하지 못한 시대였다. 파당적으로 상황에 짓눌려서 몇 사람이 과대평가 되거나 아예 평가받지 못한 시인이 많았다. 여기에는 5.18이라는 역사적 정당성의 귀결 앞에 「비예술적인 삶」 그 자체가 운동의 논리로 수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술(詩)은 폭력적 언어로 전락되었고 오히려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운동시들마저 도매금으로 상처를 입은 시대였다. 실천이론에 맞추어 조작된 언어는 질적인 저하를 초래했다.
이분법적 대량 갈등의 악순환에 하나의 길트기 작업으로서의 다양성과 변증법적인 통합원리로서 지역주의 문화운동만큼 시급한 과제도 없다. 광주의 상황만 보더라도 첫째 중앙의 중앙화 논리에 붙지 못한 젊은 예술인들, 둘째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는 문화 소유의 집체현상, 셋째 한 지역 안에서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는 첫째와 둘째의 집체 현상인데 이 경우는 중앙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방에서도 젊은 예술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어떤 대응책이나 응전력을 그들은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럼으로 해서 세대 단절이 노출되었고 기득권의 문화활동은 오히려 낡은 것으로 되어 버렸다. 대개 문학의 경우 최장수 전통을 자랑하는 동인지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도 이 유형에 속한다. 문화활동의 핵을 쥐고 있는 이 세력들은 대개 이 그룹들인데 보수체제 유지 때문에 쉽게 투자하지도 않거니와 세대의 단절을 개방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지역문화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첫째 기득권을 보수세력이 스스로 파기하거나 민감하게 세대 교체에 솔선하며, 둘째 신진문화 주도 세력은 소집단 운동을 통하여 지역 상권을 지고 있는 계층에 대한 이해 상관으로서의 응전이 그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소집단 운동을 하는 그룹들과 백화점의 충돌이 빈번하게 되었고 백화점 불매운동 전단을 살포하거나 하는 사례는 시민의식의 성숙이라고 보아진다. 그러므로 중심가에 백화점을 짓더라도 소극장 소강당 또는 많은 문화공간을 열어 놓는다. 광주의 현실과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미술관만 보더라도 화니미술관, 가든미술관이 백화점에 딸려 있고 법인체로서는 금호문화재단 미술전시실, 현산문화재단의 현산미술관, 인재미술관, 광주일보의 남봉미술관 그리고 남도예술회관 전시실, 무등방갤러리 등이 그 축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단만도 금호문화재단, 현산문화재단, 금향문화재단이 있는 형편이지만 실제로 활발히 가동되고 있는 재단이 금호문화재단뿐이고 현산문화재단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아직은 활성화되지 않고 금향은 「금향 1호」를 창간한 적도 있지만 그 후 이렇다할 변모는 없는 것 같다. 금호학예술상, 현산문화상이 매년 주어지고 그 중 금호는 50호(89. 7월호)가 나왔다. (월간지) 특히 금호문화는 광주일보사에서 발행되고 있는 「예향」과 함께 이 지방문화예술을 정리해 가는 양대 잡지로 꼽힌다. 「예향」은 시민들의 보편적 「교양」에, 「금호」는 지식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지역적 특성을 지니면서 뿌리를 박았다. 광주일보의 무등문화상, 그리고 관에서 주도하는 전남도 문화상과 광주직할시 문화대상은 작년부터 분리되어 시상되었다.
각종 문화행사는 개인과 단체활동으로 나눌 수 있으며 양대 백화점이 주도하는 마케팅회사, 그리고 KBS와 MBC, 그 중에서도 MBC의 시민을 위한 교양강좌는 39회에 이르고 있다.
무엇보다도 산업정보화 시대에 있어서 시민문화를 주도해 가는 것은 마케팅문화라고 할 수 있겠는데 양대 백화점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은 고작 「미술전시회」가 한 개씩뿐인 실정이다. 대구의 동앙쇼핑이 대여섯의 소극장과 강당을 가지고 있는데 반하여 광주가 얼마나 영세한 도시인가를 짐작케 한다. 이 도시는 기질만 살아 있고 자생적 능력을 잃은 지 오래다. 「화니」와 「가든」이 각기 사보를 월간으로 발행하고 있으나 대구의 「대백」(大百)에 비교한다면 「대백」발송비인 우표값 2백만원 (30만부 추정) 정도를 이곳에선 제작비로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급한 청소년 문화예술 공간의 창출
이와 함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청소년 전용시설이 없다는 점이다. 89. 7. 2일 현재 광주. 전남지역의 청소년 전용시설이 타 시도에 비해 크게 부족한 것으로 나타나 청소년비행증가의 한 요인으로 분석되었다. 광주시와 전남도에 따르면 광주 3개, 전남 8개 등 모두 11개소이며 전국 1백92개의 시설 중 겨우 5.7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이같은 현황은 경기 30, 충북 26, 충남19, 부산. 경남 22, 대구. 경북 17개 등에 비해 훨씬 부족한 실정으로 제주도와 함께 전국 최하위에 머물러 있다. 그나마 8개의 전용시설이 지난 86년 광주. 전남 분리 이전의 시설물들을 광주시의 경우 학생, 근로회관, 학생과학관이 1개씩 있을 뿐 청소년들이 위락시설로 이용할 수 있는 야영장이나 자연학습원, 수련장 등은 전무한 실정이다. 특히 청소년이 숙박시설로 활용하는 유스호텔은 타 시도에 1~2개씩 설치되었으나 이 지역에는 단 한 군데도 없다. 이 밖에도 타 도시의 경우 학교와 사회단체가 협조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해 청소년 문화를 스스로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가 하면 디스코텍을 설치해 양성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광주. 전남에는 88년 모두 6천4백71건의 청소년 범죄가 발행 87년에 대비 5.2퍼센트가 증가했고 전국 평균1.5퍼센트보다 3배 이상 급증했다. 광주시가 밝힌 바를 보면 매월 마지막 토요일 「놀이마당」을 활성화하고 내년도 30억의 국고 보조를 요청, 청소년「종합예술회관」을 설립한다고 한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청소년 문화공간은 의식있는 젊은 연극인들에 의하여 「학교연극 경연대회」가 제법 활기를 띄었고 문학서클 등도 숨쉴 공간이 있었으나 80년대에 오면서 불모지가 돼버린 것이다. 이는 각 대학 서클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이 원인은 첫째 광주적인 성향, 둘째 제도적인 감시체제, 셋째 학교교육의 비정상화로 분석된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관주도인 청소년백일장, 시민백일장 그리고 상업성과 결탁된 「무용학원」의 소속팀이 참가하는 무용공연 등이며 이는 각교 여학교에 무용교사가 배치되어 있어 지원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주관행사는 CBS가 연 1회 주관하며, 광주일보가 호남예술제(문예, 미술, 음악, 무용)를 수용하고 있으나 연극 경연이 없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개 청소년이 모이는 곳은 만화가게, 비디오, 로울러스케이트장, 소극장 등이고 학교 생활에 흥미가 없거나 불량서클 등인데 이들의 의식성향은 예술감각이 아니라 범죄감각으로 직결되기 마련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여중하교의 경우 「연극을 보았다」는 학생이 한 학급당 3~4명(대학연극제 초청) 연주회 2~3명, 미술전람회(백화점화랑- 화니, 가든)40~50명, 무용발표회 30~40명 순위로 되어 있어 사회교육환경이 얼마나 열악한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설사, 청소년 문화공간이 창출된다 하더라도 학교교육 제도가 입시위주 교육으로 치닫고 있어 참여할 기회가 별무하다. 여름방학에도 1, 2학년이 보충수업에 동원되고 있어 학부모의 의식수준도 제로지대에 머물러 있다. 이런 취약한 환경의 기반 속에서 그동안(80년대 이후) 문학의 경우「신춘문예」 당선 통계를 놓고 보더라도 대구, 전북(원광대), 부산 등지에 비해 아주 취약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필자는 금호문화재단 후원 아래 「토요 시낭송회」를 월 1회, 약 2년간 이끌어 오면서 여름방학 기간 중은 「해변시인학교」 겨울방학은 「겨울산사학교」 등 그리고 청소년문학상 제도까지도 운영해 왔지만 청소년들이 도대체 토요일인데도 학교에 매달려 빠져 나올 기회가 없더라는 것을 통감했고, 또한 정경유착이라는 5공 체제의 인식 때문에 운동권 대학생 그것도 타 도시의 대학생까지 부추겨 몇 차례 수난을 당하고는 아예 작파했다. 그 덕분으로 순수문학에 대한 대학생 그룹이 결국은 운동권으로 편입되고 고등학생 그룹 또한 운동권 성향의 투쟁의식 문학으로 넘어가고 「진짜 시인이 될 사람은 책을 싸들고 절로 들어가라. 그래야 진짜 시인이 되고 문학사에 살아 남는다」는 평소의 나의 의도를 왜곡하여 「이 시대에 문학은 왜 필요합니까?」라는 공박만 잔뜩 받는 게 싫어서 걷어 치웠지만, 6.29선언 덕분에 지금은 완화되어 어느 정도 필자의 말이 그렇게 틀렸던 것은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민주화체제 없이 문학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또한 기정 사실이다. 그때 주부크럽(여교사주축)은 「시우」(詩友)라는 동인으로 결속되어 지금도 꾸준히 순수열정의 문학은 펴고 있다. 적어도 1930년대, 남도에서는 박용철, 김영랑이 순수 예술의 열정을 가지고 당시 사회분위기를 지휘했던 계급주의 문학에 쐐기를 박았다. 영랑은 강진, 용철은 송정리, 서로 이웃하여 시골 토박이들이 중앙문단을 향하여 대포를 펑펑 쏘았던 셈이다.
나두야 가다
나의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도야 가련다............
서정시인 용아 박용철 시비 제막이 저지난해 11월 15일 향리인 광산구 송정리공원에서 있었다. 높이 2.6미터 둘레 2.3미터 화강암 통돌로 배모양의 형상을 띠고 있는 시비의 앞면에는 나라 잃은 젊은이들의 번민과 방황을 읊은 「떠나가는 배」 전문과 그의 초상을 새겼다. 1904년 광산군 송정리 소촌리(素村里)에서 태어난 용아는 서울 배재고보와 일본 청산학원, 동경 외국어학교 독문과, 연희전문학교를 수학한 뒤 1938년 34세로 요절하기까지 순수문학 발전을 위해 「시문학」「문예월간」「문학지」등을 창간하고 영랑 김윤식과 더불어 순수서정시 운동을 벌였다. 이날 제막식에는 용아의 부인 임정희 여사와 세 아들 종달, 종일, 종률 씨가 참석 의의를 더욱 깊게 하였다. 참으로 그가 간 지 47년만의 일이다.
광복이 되고 50년대에는 박봉우 시인의 「휴전선」을 출발 기점으로 영도동인의 활성화는 가히 문학의 본고장 같은 분위기를 조성, 그후 줄기찬 문맥을 이어왔다. 60년대 4.19세대의 중견층 또한 팽배하였으며 80년대 5.18광주항쟁은 이 땅을 5월문화와 예술의 본산지로 진폭 시켰다. 역사의 당위성 앞에 예술이 서야함은 또한 당연하지만 그로 이한 폭력적 언어로 떨어진 작품의 질에서는 아직 평가가 이른 것이다. 또한 최장수 동인으로 지칭되는 「원탁」(27집)이 있지만 대부분 기성 원로층이어서 「세대단절」이라는 개운찮은 뒷맛을 남길 우려가 깊다. 이의 범주로는 「광주직할시 문협」 또한 마찬가지다. 필자를 포함해서 대개 이 층을 이루고 있는 세대는 보수체제의 세대로서 신분상의 제약도 뒤따르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이 시대에서 활성화될 뚜렷한 명분도 없어 보인다. 또한 여류시인 모임인 「시누대」가 2년 전에 출범했고 70년대 시인 주축이었던 「목요시」도 가동이 안 된 채 머물러 있으며 「5월시」동인은 엄격히 말해서 광주에서 태동은 하였지만 조직성원은 그렇지 않다. 그동안 가히 공과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5월시」가 해체되고 지금 광주문단은 적막한 느낌이다. 기대를 건다면 필자가 관계했던 「토요시낭송회」의 기획위원들로 주축을 이룬 「5세대 동인」정도라 할 것이다. 금년 5월에 제2집이 나왔으며 참가 동인은 최승권(중앙일보 신춘 시), 이재창(중앙일보 신춘 시조, 심상 시), 정양주(무등일보 시, 민족과 지역), 이용범(소설문학 시), 이상인(한국문학 시, 교원예술대상), 유강희(서울신문 신춘 시) 등에 그 기대를 걸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최승권은 작품활동이 활발하며 곧 첫시집을 상재할 예정으로 있다.
최근에는 소설문학동인지(이명환, 문순태, 주동후, 이삼교, 김신운, 이지흔 등)가 나올 예정이며 몇 년 전 타계한 정청일의 창작집「13번 정류장」을 「예원」에서 오재동시인이 「운암리 시편」을 세종출판사에서 내놓아 반응이 좋다.
또한 출판을 서둘고 있는 책들은 「남풍」이 기획하고 있는 「조운시선집」, 신석정, 박봉우 시전집 등에 기대가 크며 필자의 산문집(문학사상사)을 비롯한 수필집들이 나올 예정으로 있다.
그러나 대체로 광주는 이 시대의 첨예한 도시로 문학적 분위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강상태며 얼마 전 「원탁 27집 자축」모임에서 故이수복 시인의 시비건립 발제를 하였으나 「문협」이 명분상 이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 개진만 있었지만 실제 문협광주 지부 그럴 만한 자생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필자의 발제마저 공수표로 부도가 났다. 다만 문단의 활성화에 기대를 건다면 무등일보, 전남일보가 새로 생겼고 이런 지방 언론사들이 앞장서주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대일 뿐이다.
남도화(南道畵)가 가는 길
남도화(南道畵)의 발생지는 진도(珍島)의 운림산방(雲林山房)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허소치(許小痴)이래 그의 아들 미산이 여기서 나왔고 의재 허백련이 그의 직계는 아니지만 11세때 미산으로부터 모란 치는 법을 익혔다. 또한 미산의 넷째 아들인 남농 허건은 운림산방을 떠나 목포로 와서 그림을 시작했다. 의재는 정만조가 진도로 유배되어 온 것을 기화로 그림을 시작했다. 일곱 살 때였다. 무정 정만조의 권유로 상경하여 기호학교에 다니다가 도일하여 신문배달 등 고초 끝에 다시 귀국하였다. 이 때는 부친의 위독 때문이었고 귀국해서 1922년 선전(鮮展) 1회 출품에서 2등상을 받으면서 김성수의 권유로 중앙화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로부터 소치 이후의 맥각은 뚜렷하게 이어졌고 결국 남도화는 이 지역에 깊이 뿌리박고 넓은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그 특징은 전통적인 고법을 버리지 않고 전수시키며 이를 현대화의 흐름 속에 일치시키려는 노력에 있을 것이다.
이 점은 남도화의 성격을 규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남도화의 기맥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양팽손(梁彭孫. 학포1450~1545), 윤두서(尹斗書. 공재), 윤덕희(尹德熙, 蓮翁), 윤용(尹熔, 靑皇), 허련(許蓮, 小痴1809~1892), 허형(許瀅. 未山), 허백련의 맥으로 이이질 것이다.
1983년 광주에서 첫모임을 가진 의재의 「연진회」는 광주 화단에 매우 뜻깊은 사건이 되었다. 남화의 전승과 맥을 잇는 연진회의 활동을 중앙화단 진출까지 화려하게 수놓고 있음을 본다. 의재의 수제자로 꼽히는 구철우(具哲佑)화백은 바로 엊그제(6월) 타계해서 광주화단의 별 하나가 떨어진 셈이다. 남화의 맥을 잇는 그의 제자들로는 정규원, 허정두, 정상호, 오우선, 문장호, 박행보, 허의득, 허대득, 이상재 같은 화백이 있고 규슈로는 허남전, 김승희, 김화래, 김춘, 장은정, 허산옥 등이 있다. 서예로는 송곡 안규동이 작년에 타계했고 그의 수제자 학정 이돈흥이 학정서예원을 열어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다. 광주는 명실공히 서화의 고장임을 이들이 증명한 셈이며 얼마 전에 구철우 화백이 운명할 때 수많은 제자들이 「비문을 누구에게 쓰게 할까요?」 했으나 그는 끝내 입을 다물고 법통을 한정하지 않았다는 일화는 지금 널리 펴져 있다. 전명옥 같은 화백은 그의 뛰어난 수제자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년 전에 타계한 양화의 시조격인 오지호 화백을 주축으로 한 화단의 구축이야말로 위의 남화와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다. 그의 아들 오승윤 화백과 오승우 화백 그리고 젊은 세대를 이끌고 있는 강연균, 황영성, 양인옥, 김흥남 화백 등은 그 의욕들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다.
또한 미술인의 가장 큰 행사로서는 과거의 국전을 능가 하겠다는 의욕으로 출발한 「제 1회 전국무등미술대전」을 들 수 있겠다. 명실상부한 이 민전은 그 특징을 아카데미즘에 국한 시키지 않고 민감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다는 데 참뜻이 있었다. 우선 무등대전은 도전(道展)과 관전적(官展的) 인 때를 벗는 의미에서 거액의 상금(3백만원과 해외여행)을 내걸고 실시되었다. 그리고 심사위원 위촉에 있어서도 전원 외지인사들을 초빙하였으나 기대 이상의 성과는 올리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어째든 70년대에 들어 각 일간신문사를 주축으로 대규모 전람회가 기획되어 바야흐로「민전 시대」의 막을 열고 그것이 진보라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 민전시대의 열림과 동시에 「민중예술」의 줄기찬 노력도 포기할 수 없는 곳 또한 광주적 상황이다. 그러나 80년대 미술이 새롭게 야기된다고 해서 「5월 문화」의 카테고리 속에 가두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리라 믿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상성을 통한 자유로운 언어의 확대」 다시 말하면 70년대의 모노크롬. 컨샙츄얼 쪽으로 기울었던 반작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더욱 타당하리라 본다(장석원). 이전 맥락에서 이해할 때 6월 9일~ 15일까지 인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송필용 작품전은 충분히 새롭다. 「땅의 역사」라는 테마로 그 메시지를 전달시킨 점이 그렇다. 고전적 언어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화수, 달, 서낭당, 당산나무, 젯상 등의 향토적인 감각을 17미터 정도의 대형화폭에 동학혁명에서 5.18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의식을 천착하고 있다. 피카소의 기념비적인 「게르니카」를 생각나게 하지만 그 조형기법이나 색체의 조화 등에서는 아직 유보상태로서 그 평가를 기다려야 될 줄 믿는다.
아무래도 금년 들어 가장 괄목할만한 전시는 금호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장석원씨가 책임 조직을 했던 「감성(感性)의 전개」가 아닐까 싶다. 한국화, 도예, 서양화, 조각, 서예 및 문인화 등 분야별로 신춘시리즈 기획물이었다. (4. 10일~ 5. 10일) 서양화에 5명(김산하, 김익모, 박노련, 박철우, 이경희), 조각에 5명(김성식, 김지연, 김형준, 김흥곤, 윤성규) 서예 및 문인화에 5명(구지회, 김명옥, 박태후, 손호근, 이상태) 등 15명의 정선된 작가는 30대 이하의 연령 분포를 보였다. 또한 광주일보 창사기념(37주년)으로 열린 「國推會 초대전」이 4. 20일~ 30일 남봉미술관에서 열렸다. 전자는 30년대의 신선한 「감성」을 후자는 국전 현대작가라는 「원숙한 경지」에서 충분히 새로웠다.
음악분야에서는 획기적인 향토성을 발휘할 만한 행사가 없었던 것 같고 다만 광주 KBS가 지방 문화예술중흥책의 일환으로 마련한 「신인음악회」가 5월 7일 남도예술회관에서 있었다. 이 음악회는 광주, 전남지역 4개 대학의 음악과 졸업생 중 5명씩 출연하여 음악인으로서의 첫출발을 부추기는 행사였다. 그리고 금호문화재단에서 이 지방의 유수한 연주가를 초청 「실내악의 밤」을 6.19일 시민회관에서 가졌다. 초청된 연주가들은 한니헨닝, 이형석, 박인수, 이희덕, 김성희, 최은재, 이현정 씨 등, 그리고 본재단 주최로 강성애, 신애정, 이경희, 이병란, 이봉기, 장미애 씨 등이 연주하는 「피아노 페스티발」이 6월 27일 남도 예술회관에서 열렸다.
민중예술로서의 판소리
방자 : 도련님, 그 먼 책이요?
도령 : 이것이 주역이다.
방자 : 그 어디 주역이오? 코책이제, 도련님, 그 흔한 코밑에 소인몸의 코도 하나 넣어 주시오.
도령 : 에라, 에라, 네 코는 상놈의 코다. 이 코에 범치 못한다.
이런 대화에서 전통사회의 상전과 노복의 대화는 가히 풍자와 해학이 일품이다. 이러한 사설을 광대들은 궁전이건 감영이건 양반의 사저이건 가릴 데 없이 서슴치 않고 쏟아 놓았다. 지배계급층은 이미 이런 사설을 허용하고 용납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서민의식의 성장을 인정했다. 그것은 곧 서민정신의 승리를 뜻한다. 광대들은 음악가인 동시에 문호의 재질을 타고난 재인 이었다. 5명창 중의 한 사람인 정정렬의 더늠으로 「五里亭 이별가」가 있다. 잦은모리 장단으로
「저 방자 미워라고 이랴 툭, 저 나귀몰아 달랑달랑달랑 훠얼훠얼 달아나니 말탄 사람은 仙童이요 가는 말은 비룡이라 그때에 춘향이는 따라갈 수도 없고..... 도련님 가시는 데만 우두꺼니 바라볼제 가는대로 적게 뵌다. 달만큼 보이다가 별만큼 보이다가 나비만큼 불티만큼 막중고개 넘어가니 아주 깜박 그림자도 못 보겠구나--」
섬진강을 가로질러 동편제와 서편제 가락이 굽이쳐 흐르는 땅이 남도다. 동편제의 송만갑(구례) 임방울(송정리) 서편제의 박유전(보성) 그리고 육률의 악보를 현대화한 김연수(고흥) 등은 한 시대를 누비고 간 인물들이다. 그 후예들로 조상현, 신영희, 공옥진 등의 소리와 춤사위에 이어 대학가에서 붐을 일으켰던 「80년대 민중예술의 놀이마당」은 시민의식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아진다. 문학 쪽에선 김지하의 고발정신에 의한 많은 사설조가 있지만 문학성은 결여된 듯한 느낌이며 미술에도 많은 작가들이 이를 시도했지만 별다른 공적은 없는 듯하다. 송필용의 개인전은 이의 유형으로 시도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송필용의 개인전은 이의 유형으로 시도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의 특기할 만한 업적으로는 금호문화재단이 후원하고 있는 「광주민학회(民學會)」의 사물놀이패가 그동안의 역사 유적지의 탐방에서 한 걸음 발전하여 미국 교포사회를 겨냥한 순회공연을 하고 온 점이다. 이로써 「광주민학회」는 튼튼한 뿌리를 이 지방에 내렸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언급한 정정렬의 더늠이 훌륭한 문학성으로 정착되어 서민의식의 승리를 확인시켰듯이 광주(남도)가 안고 있는 예술의 승리는 판소리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이를 수용하는 문학, 미술, 국악, 오페라는 이제 겨우 시작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이 분야의 「실험무대」를 주도해볼 필요가 있는데 2년전에 조선대의 김경양 교수와 필자가 손을 잡고 필자의 서사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판소리로, 판소리를 다시 오페라로 연결짓는 작업을 시도한 일이 있으나 제도적인 모순점, 예술적 감각이 결핍 때문에 도중 작파한 일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광주의 예술의 그 특성을 지니면서 현대의 예술로 그 정신을 발휘하기 위해 이 분야가 반듯이「실험무대」로 제시되어 「길트기 작업」을 이루어내야 함은 시급한 과제라 할 것이다.
전망과 대책
경제적으로 낙후된 도시, 광주예술의 사회적 여건과 기반을 마련하는 일은 첫째 과제가 된다.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청소년 문화공간 하나가 없는 광주다. 사회복지관 하나가 없는 광주다. 그런 대로 광주직할시가 그 영세함에도 불구하고 「예향건설」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조례」를 제정하였음은 이 지방 예술인들에게는 큰 힘이 아닐 수 없다.
① 예술의 거리 조성
우선 그 조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양배 사장시절에 제정됨)
광주직할시 조례 제1643호 「예술의 거리 조성 조례」 1987년 7월 8일
제1조(목적) : 이 조례는 문화와 예술의 고장 광주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서화와 도자기 등 예향예술의 상징적 작품을 집산 판매하는 「예술의 거리」를 조성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로 되어 있다. 또 6조를 보면 「육성위원회」를 두고 7조를 보면 1) 예술의 거리 입주 신청의 심의 결정. 2) 업주업체에 대한 「예술의 거리 입주 인정서」 발급. 3) 기금운영 등을 규정하고 4조를 보면 「지원책」이 나와 있는데, 1) 금융기관과 육성기금 융자 알선. 2) 임대업주자에 대한 융자금 대출이나 보전(3%이내)으로 되어 있다. 추진현황을 보면 1) 구간 : 광주경찰서(동부) - 중앙로 2) 유치업종 : 화실 및 서도원, 화랑 및 필방, 도자기전시 및 판매, 토산품 및 민속가구, 서점(예술 및 고서점) 등등이고 융자기관은 광주은행, 확보자금은 5억원, 대출금리는 연 12.5% 중 피융자부담이 9.5% 당시(市)부담이 (이자보전)이 3%로 되어 있다. 필자가 실제로 이 거리에 나가 조사한 바로는 해방후 ①온고당 ②삼보당 ③고호당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거리고 표구회회장으로 있는 박당화랑이 40년이 되었다. 박당화랑 주인에 따르면 융자금을 받았다는 분이 꼭 한분있는 것 같더라는 소문을 들었을 뿐 유명무실이고 업주는 재산세 감면 혜택을 받는 정도란다. 가게세는 평당 2백만원 정도란다. 대개 오고간 얘기는 이렇다. 1) 예술의 거리보다는 오히려 광산동 거리가 활기를 띄고 있고 구세보다 신진층이 집결해 있으며 2) 신안동 골동품상 거리가 있어 예술의 거리는 사실 유명무실하다는 얘기였다. 2동 광주직할시가 추진한 작업은 1) 일방통행규정 2) 가로등 1천2백만원 시설 정도며 전신주를 지하도로, 묻어야 하는데 거리가 좁아서 불가능하고 양쪽 입구의 아치를 세운다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이 거리는 재고되거나 신앙동, 광산동 거리를 통합하거나 독자성을 인정하여 특혜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업소유치(대상:94, 유치:36)-배치도:생략
계 | 화랑 | 화방 | 필방 | 학 원 | 수석 전시장 | 골동품 | 공예 | 찻집 | 예술 고서점 | 민속 가구 | ||
미술 | 국악 | 음악 | ||||||||||
36 | 17 | 2 | 1 | 4 | 1 | 1 | 1 | 2 | 2 | 3 | 1 | 1 |
② 문예회관 건립
문화예술의 활성화는 「공연장」이 첫째 여건인데 광주의 경우 고작해야 「남도예술회관」「시민회관」 그리고 낡아빠진 「학생회관」정도다. 국제적 공연장은 하나도 없는 실정, 그것도 관주도적인 행사에 알맞는 공간이다.
문예회관 건립은 당초 전남도가 문예진흥시책이라는 큰 포부 아래 지난 85년 발주, 추진 중이던 것을 87년 3월 광주시가 인수하여 88년 올림픽 문화행사 즉 소련 등 참가국 예술공연을 이곳에서 치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같은 계획은 그동안 골조공사에 머무르고 있어 시민들의 기대감을 허물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50%의 공정에 미루어 볼 때, 그나마 대강당 3천 1백 98평, 관리동 5백 46평만이 내년 11월에 준공할 계획일 뿐 소강당, 미술관, 국악당, 조각공원 등은 90년 이후에야 완공할 계획으로 있어 까마득한 형편이다. 당초 2백74억원에서 3백80억원으로 공사비가 늘어나고 있고 정부지원의 눈치만 살피고 있어 자생적 능력이 없는 형편이다. 이는 당초 이진희 장관이 내려와서 「국악협회」의 건의로 「국악당 건립」에서 「종합문예회관」으로 2만평 규모로 된 것인데 광주시의 배정액 신청(금년) 65억 가운데 10억 정도가 배정될 예정이라고 예총사무국장 박형모 씨는 말하고 있다. 「예향의 자존심을 살려 달라」 문화예술 예산 0.1% 수준이 문화부(청) 신설로 1퍼센트 상향은 시급한 과제라고 그는 덧붙인다.
③ 문예회관 건립
이 고장 최고의 문화산실이 될 금호도서. 미술관이 광주직할시 동구 산수동 산 4-1번지에서 지난 6. 16일 오후 2시에 기공식을 했다. 총 2천8백40평의 부지에 들어서게 된 금호도서관. 미술관은 지하 2층 지상 2층의 규모로 2천8백80평의 부대시설이 마련된다. 외형적으로는 왼편에 미술관, 오른편에 도서관으로 독립되어 보이지만 지하 1층에 자리한 대강당 홀의 무대 상부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색다른 한옥이다. 자유열람실 5개와 향토자료실을 갖춘 도서관은 1천5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전시실 3개 대강당과 소강당 및 휴게실과 주차장 등이 갖춰진다.
1백억원 사업비로 1990년 11월에 준공될 예정이며 50여개 단체 후원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금호」는 명실공히 청소년문화로부터 기성노인층의 문화까지를 총망라할 예정이다. 한 지역에서 한 기업이 커가는 기쁨은 곧 지역인의 기쁨이며 긍지를 자아내게 한다. 다만 프로그램의 다양성과 전문적 인력을 수용하지 못할 때는 비판의 소리도 상대적으로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전문인력이 수용이야말로 시급한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술, 또는 시민문화는 돈과 직결된다. 어디 문화예술뿐이겠는가? 피렌체는 피렌체적 도시분위기에서 「문예부흥」이 싹텄다는 얘기처럼 무릇 광주는 광주다운 도시적 분위기로 조성되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④ 도시조경
또한 마지막으로 이런 점에서 거론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도시조경, 즉 예술적 사회환경이 구축되어야 함이 광주가 안고 있는 1차적인 문제다. 이는 시민의식의 성숙과 그에 따른 재정적 여건 마련이 시급한 과제다. 위에서 예술이 거리를 운운했지만 그보다는 도시 전체적인 조경이 문제다. 예를 든다면 충장로와 금남로의 중심가는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도 모르고 지금 세대들은 자라고 있다. 충장공 김덕령, 금남공 정충신에서 빌어온 이름이라면 적어도 그 중심부를 이루는 도청앞 광장은 그들의 동상이 서고 도청청사가 이전한 그 자리에는 하나의 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유럽형 조경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 「역사와 전통과 삶」이 한 「놀이마당」에서 벌어지고 현재가 전통속에 전통이 현재속에 어우러질 것이다. 거리의 시화전이 그 광장에서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서화, 연희, 판소리, 심지어 판토마임, 시민백일장 등이 그 광장에서 활기를 띨 것이다. 도청자리에 차라리 문예회관을..... 이러한 성숙된 시민의 여론도 많을 줄 안다. 무등산까지 산책로가 뚫리고 그 거리가 차라리 예술의 거리로.... 하기야 도청 앞에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도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 중앙교회가 들어섰다는 데야 할 말이 없다. 그래야 예술에 투자가도 생기고 의욕적인 예술인도 나올 것이다. 「기성세대는 예술에 투자하지 않는다」 이것이 신세대들의 시각임은 그래서 「단절론」이 대두되고 있다. 상무대의 노른자위가 신시가지 조경 설계로 파다하게 풍문처럼 나돌고 있지만 글세, 그쪽 공간은 또 어떻게 더럽혀질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덜어버릴 수가 없다. 돈이 없는 도시, 영세한 광주(어쩌면 자생력이 없는 광주라고 표현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혼마저 얼어붙은 부동항의 광주가 되어서는 아니 될 터인데.... 어딘가에 숨어서 예술가들을 키우고 있는 참다운 귀족이 있을 법한데..... 생각하며 자료를 모으기 위해 생면부지의 「갤러리 무등방」을 찾았다. 주인은 38세의 고복순 여사. 「전시실을 운영하며 장삿속으로 놀겠지」하고 갔더니 의외였다. 의외라기보다는 입이 벌어질 만큼 놀랐다. 한마디로 너무나도 호사판으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이것은 「작가와 현장」이라는 시리즈로 펴내는 무등방총서 2권 개인화집인데(1천5백부) 강종열(여수) 화가편이고 이것은 무등방총서 1권인 장원석 평론가의 평론집이고(2천부)..... 이건 갤러리 무등방 기획 10회「'89 판화축제」 팜플렛이고 이건 「'89 신예표현전」(아름다운 광주만들기라는 선전 타이틀이 붙어 있음)이고 이건 개관1주년 기념 특별기획Ⅱ- ① 오늘의 광주 전남 작가70인 초대전 (①6. 6~ 6. 15 : 서양화 구상부문 ② 6. 17~ 6. 26 : 한국화부문 ③ 6. 28~ 7. 7 : 조각공예전) 팜플렛이고 그러고도 「갤러리 무등방」이라는 「격월간지」책자를 시중의 어느 잡지보다 단아하게 발간하고 있었다. 금호그룹의 「금호문화」 광주일보의 「예향」은 알고 있었지만 개인이 전문적으로 내고 있는 미술잡지가 광주에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본지가 첫 호를 썼던 「Art 2000」이라는 제호를 바꿔 「갤러리 무등방」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발행한다. 점차로 내용을 채워가고 읽기 쉽고 그림감상도 무리가 없으며 확대하기 쉬운 포맷으로 겉모양도 잡혀가는 것 같아서 기쁘다.
본지는 갤러리 무등방의 단순한 홍보물 성격을 지향하고, 광주권 미술 문화의 실태와 미래를 담은 미술전문 저널로서, 이 지방의 작가와 미술애호가의 만남의 장이고자 한다.
매달 내겠다고 했지만 재정적 여건이 충분치 못함은 나의 꿈을 지나친 욕심으로 남겨두고 말았다. 그나마 합본을 낼 수 있음은 관심을 갖고 읽어주시는 많은 분들의 격려 덕택이다.
........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민예품 가게 하나 있는 것을 처분해서 시작했는데, 벌써 2년째고 빚이 2억정도..... 이 사람이 미쳤나.... 그렇다, 25평의 전시실을 운영하면서 이렇게 미친 사람이 있어서 광주의 예술은 꽃이 될지도 모른다.
끝으로 89년도 광주무대에서 떠올랐던 각 전시관 및 공연장의 실황중계를 별표로 작성하면서 이 글을 끝맺는다, 끝맺기 전에 이 말만은 되풀이 해두자. 「죽은 고기는 떠내려가도 산 고기는 참신한 물을 찾아 거슬러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