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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일주 닷새째 충남 보령시 대천해수욕장에서 맞이한 일몰. |
여행기사? 차라리 모험기사에 가깝죠."
강원도 동해안 38선휴게소에서 "지금 여행지 취재 중이냐"고 묻는 어느 자전거 투어족에게 응수한 기자의 답변입니다.
한국인이라면 한번쯤 꿈꿔봤을 전국일주. 국내여행의 완결판이지만 그만큼 쉽지 않고 흔치 않은 도전입니다. 전국일주에 나서려면 챙겨야 할 게 많습니다.
우선 여유로운 일정과 돈키호테 같은 무모함은 필수품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교통수단입니다. 도보나 자전거는 너무 멀고 아득합니다. 자동차는 지독히 밋밋하고…. 해서,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 스쿠터라는 추론에 이르렀습니다. 수소문 끝에 배기량 125cc의 앙증맞은 '애마' 한 녀석을 구했습니다.
전국일주를 통해 얻은 결론은 우리땅을 자그마한 반도국가 쯤으로 만만히 볼 일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부산을 출발, 동해안을 거슬러 국토의 북쪽 한계점인 통일전망대를 찍었습니다. 다시 내륙을 가로질러 수도 서울을, 다시 서해안을 줄곧 내려오면 해남의 땅끝에 닿습니다. 그리고 남도를 관통해 부산으로 귀환하는 8일의 여정 동안 모두 1809㎞를 달렸습니다. 지구 둘레의 20분의 1에 해당하는 장도입니다.
전국일주는 여행의 개념을 넘어,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한 편의 모험영화이자 온 몸으로 쓰는 서사시입니다
사물마저 흐물거리게 만드는 늦여름 땡볕의 도로를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폭우 속을, 때론 칠흑의 밤길을 스쿠터 두 바퀴에 몸을 맡긴 채 우리 땅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1000개가 넘는 마을과 고장을 넘나들며 낯선 풍경, 낯선 사람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상황들과 조우하게 됩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죠.
바람에 실려온 바다내음, 길섶에 핀 이름 모를 들꽃들, 들녘을 뒤덮은 파란 벼밭과 하루를 지우는 장엄한 일몰 앞에 서면 스스로가 위대한 여행자이며 순례자라는 착각에 빠져 듭니다. 바람결에 고개를 흔드는 도로가의 그 흔한 강아지풀에서 조차 굳은 줄 알았던 감성이 녹아나고 있음에 놀라게 됩니다.
짧지 않았던 8일간의 전국일주, 그 드라마 속으로 들어갑니다.
- 전국민의 스타가 되어버린 고독한 여행객
- 역주행하다 부상…만용과 오만의 대가
- 잿빛 도심에서 본 생애 가장 아름다운 노을
- 서울에서의 좌절…여행의 고비를 넘어
태극기 휘날리며(1일째, 부산→경북 울진 270㎞ 주행)
떠난다는 설렘 때문이었을까. 잠을 설쳐 늦잠을 자는 통에 오전 9시가 다 되어 집을 나섰다. 도전은 언제나 설렘과 떨림이 따라붙는 법. 어릴 적 소풍 가던 들뜬 기분과 막연한 두려움이 묘하게 뒤엉켰다.
단출하게 꾸린 짐이 예상보다 많다. 별로 챙긴 것도 없는데. 트렁크 공간이 부족해 스쿠터 앞뒤로 짐을 묶으니 모양새가 어째 나귀 등에 봇짐을 실은 피란민 꼴이다. 여행 도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짐은 적을수록 여행의 성공률이 높아진다. 짐은 말 그대로 짐이 된다. 그래도 내비게이션과 6000원을 주고 산 소형 라디오, 태극기까지 애마에 매다니 제법 여행의 운치가 풍긴다.
그다지 손에 익지 않은 스쿠터 운전. 시내를 벗어나는 게 녹록잖다. 일요일인데 도로에 무슨 차들이 이렇게나 많은지. 자동차를 몰 때는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앞지르는 스쿠터들 때문에 짜증이 났는데, 입장이 바뀌니 차량들의 행태가 영 마뜩찮다. '아니, 무슨 운전을 저 따위로…'.
시내를 힘겹게 벗어나 본격적으로 외곽 국도에 올랐다.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스쿠터. 뒤에 매단 태극기의 퍼덕이는 소리가 더없이 경쾌하다. 한 편의 로드무비 속 주인공이 된 기분.
스쿠터를 멈춰 세웠는데도 그간 엔진의 떨림으로 손끝이 얼얼하다. 아차, 오토바이 글러브를 빼먹었다. 궁여지책으로 공사판 면장갑 하나를 샀다. 방금 전까지의 낭만 가득한 라이더는 간데 없고 엉성한 택배기사가 거리를 달리고 있다.
울산 시내를 거쳐 경주에 닿아 늦은 아침을 뜰 때쯤 식당 TV에서 박태환의 금메달 소식을 한참만에 전해들었다. 장도에 오른 라이더에겐 세상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선덕여왕릉 유적지 한 곳을 둘러보고 포항을 거쳐 영덕으로 빠졌다. 가는 길에 되도록이면 유명 관광지와 해변은 꼭 둘러보려 했는데 시간이 빠듯하다. 자동차와 달리 스쿠터는 충분한 스피드를 내지 못할 뿐더러 냉각 방식이 공랭식이어서 장시간 운전도 금물이다. 따라서 50분 주행 후 10분 이상의 정차는 필수. 굳이 이런 기계적 이유 외에도 좁다란 안장에 앉아 온 몸으로 바람을 맞다보면 피로가 차량 운전에 비해 클 수 밖에 없다. 더위도 복병이다. 꽉 낀 헬멧 안은 땀으로 젖은 지 오래. 몸을 식히려 휴식 시간엔 생수병을 통째로 머리에 들이부었다. 그래도 막힘 없는 시야는 스쿠터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이자 위안이다.
경북 울진에 닿기 전 좁고 가파른 고갯길을 만났다. 그런데 차량들은 스피드를 늦출 기미를 보이질 않는다. 따로 비껴날 갓길이 없어, 결국 망양해수욕장까지 10분 이상의 위험한 곡예운전에 동참해야 했다. 8일의 여정 가운데 가장 위협적이고 아찔한 구간이다. 7번 국도는 이런 구절양장의 가파른 고개가 두 번 정도 더 있다.
해가 기울어서야 울진 시내로 들어섰다. 오늘 하루만 270㎞를 달렸다. 첫날 치고는 양호하다. 대신 기름값이….
밤길 거슬러 최북단으로(2일째, 울진→고성 230km 주행)
이래저래 머뭇거리다 정오가 넘어 숙소를 나왔다. 갈 길이 구만리인데. 배터리가 간당간당하던 휴대전화는 이참에 전원을 내려버렸다. 운전 중에 울리는 벨소리가 극도로 신경 쓰일 뿐더러 잠시 세상과 선을 끊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다. 단절은 또다른 해방감을 주기 마련이다.
전날과 달리 시원스레 펼쳐진 왕복 4차선 국도. 앞뒤로 빠르게 내달리는 차량들의 흐름을 탈 목적도 있지만 뻥 뚫린 길은 묘한 질주 본능을 부추긴다. 운전에 자신감이 붙은 데다 길도 순탄해 가속 레버를 끝까지 당겨 시속 90㎞로 질주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길은 자동차전용도로였다. 이륜차는 근처 지방도로로 우회했어야 했다.
이런 무모함으로 결국 그날 늦은 오후께 일이 터지고 말았다. 길을 잘못들어 역주행을 시도하다 도로에서 자빠지고 만 것. 넘어지는 순간 손으로 땅을 짚으면서 손목이 접질렸다. 오가던 차량이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다. 다친 곳은 없지만 일주일 내내 오른쪽 손목이 욱신거렸다. 만용의 대가치고 하늘이 보살폈다.
강릉 경포대와 속초 일대를 제외하곤 동해안은 이미 끝물 피서 분위기가 역력했다. 작은 해수욕장을 낀 마을은 가끔 순회하는 경관 외에는 주민도 관광객도 눈에 띄질 않았다. 흡사 유령마을을 연상케 할 만큼 황량하고 스산하다.
해수욕장과 멀찍이 떨어진 속초 시내에서 밤을 묵으려 했는데 방값으로 4만 원을 요구한다. 전날은 3만 원에 잤는데. 바가지란 느낌에 다시 스쿠터를 몰고 이웃 고성군으로 향했다. 그 사이 날은 저물어 주위가 어둑해졌다. 집을 나설 때 '밤길 운전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1만 원에 목숨을 건 게 후회스럽다. 너무 멀리 와 돌이키기도 어렵다.
한 시간 넘게 칠흑의 밤길을 달려 '군장병 우대'란 현수막을 내 건 고성의 어느 허름한 모텔에 닿았다. 그런데 여기도 방값이 4만 원이다. 좀 깎아달라는 요구에 주인이 무표정하게 하는 말. "아무리 그래도 시즌인데…." "푸하하하" 어이가 없어 소리내 웃자 모텔 주인이 어리둥절해 한다.
경이로운 서울의 노을(3일째, 통일전망대→서울 277㎞ 주행)
새벽 안개를 가르고 마침내 우리땅의 북쪽 한계점인 통일전망대 초소 입구에 섰다. 위쪽으로 민통선이다. 사전 허가 없이는 차량 이외 출입이 불허된다. 결국 스쿠터를 세워 놓고 김해에서 올라 온 중년 부부의 승용차를 얻어 탔다. 날씨가 흐려 망원경으로도 북녘의 모습은 눈에 담지 못했지만 손때 타지 않은 낯선 민통선 풍경이 묘한 긴장감으로 다가온다.
통일전망대 초소를 빠져 나와 왼쪽 길로 명파해수욕장이 있다. 북한과 불과 10여 ㎞ 떨어진 우리국토 최북단의 아담한 해변이다. 7번 국도를 따라 그동안 수십 개의 해수욕장을 거쳐 왔지만 일정에 쫓겨 바다에 발 한번 담가보질 못했다. 여기서 한을 풀어야겠다.
이제부터 내륙을 가로질러 서울로 가는 길. 가파른 진부령 고개를 넘자 가느다란 빗줄기가 폭우로 둔갑했다. 장대비를 피해 식당으로 들어서니 주인이고 손님이고 할 것 없이 기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신기해한다. 솔직히 전국투어 내내 기자는 사람들의 호기심에 시달려야 했다. 구멍가게 주인부터 시골 암자의 스님, 심지어 엔진오일을 갈러 찾아간 오토바이 정비소의 사장님까지 "스쿠터로 부산에서 온 게 맞느냐"란 질문을 쏟아냈고 이에 100번은 넘게 답해야 했다. 특이한 사람을 주시하고 질문하는 게 기자란 직업이다. 주객이 한참 바뀌었다. 아예 글로 써 붙이고 다닐까.
폭우를 피해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경기도 양평을 지날 때쯤 하늘이 거짓말처럼 갰다. 수도권 식수원인 팔당호의 풍광이 가히 압권이다. 작은 산봉우리가 인공으로 채워진 호수에 잠겨 마치 섬처럼 떠 있다. 연이은 4개의 팔당터널을 통과하자 지평선 아래로 붉은 노을이 깔렸다. 서울로 다가갈수록 노을의 색감은 천지를 태울만큼 넓고 짙어졌다. 솔직히 서해의 일몰보다 장엄하다. 생애 가장 스펙터클한 해넘이를 서울에서 보게 될 줄이야.
여행의 위기를 맞다(4일째, 서울 시내 83km 주행)
부산 번호판을 달고 서울 시내 곳곳을 누볐다. 한강시민공원, 63빌딩, 청와대 앞길, 대한민국 최고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평창동의 빌라촌 등. 가장 여유로웠던 하루가 악몽으로 바뀐 건 늦은 오후께였다. 서울을 빠져나오기 전에 잠시 들른 대형마트에서 내비게이션을 분실했다. 우여곡절 끝에 분실물 센터에서 내비게이션을 되찾았지만 이번엔 메모리 카드가 없다. 일이 갈수록 꼬여만 간다.
서해 쪽 도로망은 실타래처럼 복잡해 내비게이션 없이는 일정 내에 일주를 소화하기란 극히 어렵다. 더욱이 고향 부산에서도 길을 헤매는 길치다.
부주의하고 미숙한 실수에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았다. 땀 범벅으로 동분서주 다닌 끝에 내비게이션을 이전 상태로 돌려놓고 나니 시계추는 이미 자정을 가르키고 있다. 전날은 서울 친구 집에서 묵었지만 이날은 갈 곳도 없다. 영락없이 서울 한복판에서 발목이 잡혔다. 전국일주 자체에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싫다, 이 잿빛 도시가….
# 지칠대로 지친 심신 아찔한 졸음운전도
- 일상에서 찾은 평온함 여행의 눈을 뜨다
- 어느덧 일상이 되고 순례길로 변한 일주
- 가슴 설레는 '나를 만나러 가는 먼 여정'
길가에서 만난 감성(5일째, 서울~충남 보령 202㎞ 주행)
찜질방에서 선잠을 깨고 미명이 보이자 시동을 걸었다. 한시라도 빨리 서울을 벗어나고 싶다. 전날의 후유증 때문인지 며칠간 쌓인 피로가 한 순간에 몰려왔다. 서해로 내려가는 너른 국도에서 옆으로 휙 지나가는 덤프트럭에 놀라 휘청하며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서야 졸음운전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 끝이 쭈뼜서고 등골이 서늘하다. 아무 아파트 공원의 벤치에 길게 누워 긴 잠을 청하고서야 심신이 가벼워졌다.
서해 앞바다에 닿기 전에 찾아갔던 수원의 화성행궁과 아산의 공세리성당 그리고 예산의 수덕사는 나름대로 큰 수확이었다. 특히 국내 행궁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화성행궁은 거대한 스케일 못지않게 도심 한복판에서 시민들의 삶과 융화되어 있음에 조금 놀랐다.
서해 대천해수욕장에서 부산 번호판이 붙은 스쿠터를 보자 몇몇 피서객들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미쳤나봐? 스쿠터 몰고 여기까지 왔어." '그 스쿠터를 몰고 1000㎞를 돌아돌아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800㎞를 더 가야한다'고 알려주면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인해 달라고 떼쓸지 모른다.
"그냥 자수 해 버리쇼"(6일째, 보령→목포 278㎞ 주행)
갈 길이 왔던 길보다 짧다. 일정이 중반을 넘자 여정은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다. 고독·외로움이란 단어를 초월해 알 수 없는 의무감 같은 순례길로 변했다. 사회교과서나 간혹 신문에서나 봄직한 낯선 지명들이 수없이 스쳐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할 마을과 사람들이다. 만나고 느끼지 못한다면 존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대하소설 아리랑에서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룬다'고 설명한 김제평야를 거쳐 부안, 고창, 영광 등 전라남북의 서쪽을 가로질렀다. 영광과 함평을 잇는 23번 국도는 축구를 할만큼 도로가 넓은데 지나가는 차량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한산하다. 이러다 보니 7번 국도 못지않게 자전거 여행가들을 많이 만난다. 약속이나 한 듯 그들이 내지르는 일성. "스쿠터, 너무 부러워요."
팔도 경계를 넘나들다 보면 꽤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투리다. 줄곧 운전을 하다 차를 멈춰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 어느새 말투가 달라져 있다. 시·도의 경계지점에서는 마치 폭탄주처럼 사투리가 뒤섞여 있다.
목포를 목전에 둔 1번 국도를 달리다 길을 잘못 들어 신안군의 압해도로 빠져 버렸다. 두달 전 연륙교가 놓여 뭍에서 바로 섬으로 연결되지만 이륜차가 다니지 못하는 자동차전용도로라는 게 문제다. 영문도 모르고 섬으로 들어왔지만 다시 연륙교를 건너 빠져 나갈 일이 막막하다. 검문소애 경찰들이 지키고 있던데…. 딱한 사정을 들은 어느 압해도 주민의 조언. "아따 그냥 자수해 버리쇼, 모르고 그랐는디 경찰이 어쩌것소."
다시 집으로…머나먼 여로(7일째, 목포→광양 273㎞ 주행)
한반도의 실질적인 최남단인 해남의 땅끝마을 지나 본격적인 귀향길로 접어 들었다. 땅끝마을은 국토순례의 시발점이자 고성의 통일전망대와 함께 전국일주 코스에서 꼭 찍어야 하는 상징적인 장소다. 반도의 끄트머리에 들어서면 같은 육지면서도 사뭇 달라진 정취에 시선을 떼지 못한다. 서쪽은 제주도의 내륙지방에 온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두륜산의 연봉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맞은편은 중국의 여느 비경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장관이다.
집까지의 거리는 310㎞. 종일 쾌청하던 하늘에 슬그머니 먹구름이 드리웠다. 어떻게 항상 더위 아니면 폭우일까. 전남 순천에 다다를 쯤 시커먼 하늘에서 폭우를 토해냈다. 또 다시 순천 바로 옆 광양시에서 발목이 잡혔다. 원래 일정보다 하루가 늘었다. 그래도 별 탈 없으면 내일이면 집에 도착한다.
달랑 520원 들고 걸어서 - 20일 일정으로 전국 무전여행을 다니는 윤지환 임승준 박상준 씨(왼쪽부터). | |
'또 하루가 멀어져 가고 조금씩 잊혀져 간다'며 나이 서른을 고뇌하며 읊조리는 노랫말이 있다. 그럼 마흔 즈음엔 어떨까. 불혹(不惑) 이라고도 한다. 흔들리지 않고 유혹당하지 않아 불혹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일'의 경계가 금을 긋듯 확연해지는 연령대가 마흔이다. 꿈을 망각하며 자신을 버려야 하는 서글픈 나이일지 모른다. 필부에게 나이는 결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왜 그 나이에 전국일주를 떠나느냐'고 주위에서 의아해 했다. 거창한 깨달음을 얻고자 나선 길이 아니다. 그저 단 한번이라도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동일선상에 놓고 싶었을 뿐이다. 어릴 적 동경만 하다 내려 놓아야 했던 그 무모한 꿈, 관광도 여행도 아닌 바로 모험을 하고 싶었다.
집까지 남은 길은 외줄기 남도 오백리. 줄곧 너른 2번 국도만 타면 된다. 새벽 공기가 맑다. 늦더위가 한풀 꺾였는지 바람도 선선하다. 그래도 하동군 북천면의 장대한 코스모스, 메밀밭은 꽃잎을 전혀 피우질 못하고 있다.
진주 마산 창원. 낯익은 지명이 하나둘 보인다. 진해시 용원면 도로의 표지판 하나만 넘으면 이제 부산이다. 아직 집까지는 31㎞나 남았지만.
어차피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게 여행이다. 긴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대면해야 하는, 바로 나 자신을 만나러 간다. 마음이 설레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나저나 가족에겐 뭐라 설명해야 하나? 말도 안하고 나왔는데.
◆ 아름다운 고생길
- 길에서 만난 괴짜 전국일주族
3년째 헝그리투어 자전거로 - 진주서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국도 7번 도로를 따라 가는 자전거 여행객. | |
식사와 잠자리는 시골의 마을회관이나 교회에 들어가 청소나 잡일을 거든 뒤 '정당하게' 해결한다고. 필요하면 노숙도 불사한다. 이동 수법은 도보와 히치하이킹. 지나가는 자동차를 세워 머리를 긁적이며 '좀 태워주세요'하는 식이다. 요즘 세태에 이게 가능할까 싶은데 의외로 효과 만점이란다. "여태 티코부터 체어맨, 트럭, 23t트레일러까지 안 타 본 자동차가 없어요." 돈 없고 배 고프니 뻔뻔해지고 용감해지더라는 게 이들이 밝히는 무전여행의 비법. 여행 도중에 넉살과 담력이 평상시 보다 100배는 증폭된 것 같다고. "그동안 100명 정도에게서 도움을 받았어요. 이렇게 잘 도와주실지 전혀 예상못했어요. 아직 한국은 살만한 곳임에 분명합니다."
전 국민의 '온정'으로 비상금 520원이 갈수록 불어난다며 천진하게 웃는 괴짜들에게 기자가 가방에서 먹다 남은 황태채를 꺼내 줬다. 이구동성으로 돌아오는 인사말. "감사합니다. 형님은 부산에 사는 천사입니다."
"오픈카는 전혀 안 부러운데, 스쿠터는 왜 그렇게 부럽던지…."
숨을 헐떡이며 7번 국도의 고갯길을 넘어 온 자전거 여행가 2인은 자칭 '헝그리 투어족'이다. 올해 서른 한살인 두 사람은 3년째 여름휴가를 페달을 밟으며 보내고 있다. 제주도, 울릉도·독도 여행을 끝내고 올해는 7번 국도 완주를 택했다. 경남 진주를 출발, 동해안을 따라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까지 3박4일의 일정으로 길을 나섰다. 총 예상 경비는 20만 원. 각 지역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경비를 최대한 아낄 생각이다. '짠돌이 여행'으로 추억까지 쌓고 싶다는 게 이들의 포부. 진주의 한국국제대학교 교직원인 이들은 '독도는 우리 땅'라는 피켓까지 달아 자전거 투어에 무게감을 실었다.
최남단 마라도까지 스쿠터로 - 스쿠터로 마라도까지 돌겠다는 전국일주족. | |
김대환(25) 부윤철(25)씨는 전국일주로는 성에 안 차 최남단 마라도까지 스쿠터로 돌아볼 작정이었다. 두 사람은 군 전역후 복학을 준비하는 휴학생. 여행 일정은 15일. 대책없이 길을 나섰다고는 해도 코스와 일정을 섬세하게 꾸렸다. 책자로 된 도로지도에는 형광펜으로 갈 곳을 표시하고 복잡한 도로에는 주석도 붙여놓았다. 야심찬 투어임에도 정작 고성의 통일전망대는 빼 놓았다.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했다는 그들. "아시잖아요, 그쪽으론 소변도 보기 싫은거."
# 스쿠터 전국일주 이것이 궁금하다
★여행경비·일정=취재기자의 경우 8일간 약 60만 원(내비게이션 분실에 따른 메모리카드 8만4000원 포함)을 썼다. 기름값으로 12만 원 소요(125cc의 연비는 ℓ당 30㎞). 스쿠터는 하루 300㎞ 이상의 주행은 곤란하다. 냉각 방식이 바람에 의한 공랭식이 대부분이어서 40~50분 주행후 10분 이상 시동을 꺼줘야 한다. 관광지를 둘러보는 등 여유롭게 다니려면 10~15일 정도가 무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