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포 - Man 인가
2015년 5월 4일 21시쯤(현지시간).
파리의 오스테를리츠 역(Paris Gare d'Austerlitz).
SNCF(Societe Nationale des Chemins de fer Francais / 프랑스 국영철도)의 이룬(Spain
Irun)행 야간열차 18량 중 12번째 출입문 첫좌석(1번 창가).
명멸하고 교차하는 만감에 잠겨 발차(21시 32분)를 기다리고 있는 한국 늙은이.
아내와 3자녀 아무의 환송도 받지 못했을 뿐 더러 극언까지 남기고 떠나왔으니 그럴 수 밖에.
큰 딸과 사위의 배웅을 받기는 했지만 여느 때와 달리 서먹했고.
홀로서기(獨立)를 완성한 40대의 자식들과 달리 48년을 애오라지 남편만 바라보며 살아 온 '남
-바라기' 아내에게 마저 포-맨(抛-man)이 되었는가.
만류하면 포기하거나 기간을 조정할 영감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포기한 남자?
내 여정 자체를 반대하거나 남편과 아버지에 대한 그들의 가족애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81살 나이에 3개월도 무리가 아닐 수 없거늘 반년이라니 언어도단이며 걱정하는 가족에 대한
배려가 전무한 내 독단을 성토(?)하는 것,이었을 뿐이지만.
까미노에는 도처에 간이 석비 또는 목비가 서있다.
순례 도중에 사망한 사람들의 것인데 모두 한참 나이에 비명횡사의 변을 당했다.
워낙 장거리인데다 오늘날 보다 엄청 형극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고령자가 없는 것은 감히 엄두(순례길에 들어설)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고.
한데도, 불귀객이 될 지도 모를 길을 80 넘은 늙은이가 가려 하는데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방관
하고 있을 가족이 어디에 있겠는가.
역지사지 해보자.
내가 아내 또는 자식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그러나 6개월은 줄일 수 없는 필요 불가결의 기간.
국내의 빈번한 교통사고로 인해 발병한 공차증(恐車症)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 껏 걷기 위해
2011년 4월에 택했던 길이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였지만 2.100km를 걷고
돌아오는 75일간의 여정 중에 2개의 새 목표가 이미 잉태된 상태였던 것.
유산하지 않고 해산하려면 어차피 가야 할 길이며, 불구나 기형이 아닌 옥동자의 출산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최소 기간을 6개월로 잡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 이유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지 않은 것은 식언이 될 수도 있는 지난한 일이며 내
계획의 성취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2번째) 까미노 행(行)을 결심하기는 작년(2014년) 10월 초로 기억된다.
일본의 시코쿠헨로(四國遍路) 1.200km를 걷는 도중이었다.
첫번(2011)인 프랑스 길(Camino Frances)의 한 알베르게(Sahagun) 벽에 붙은 홍보 전단이
시코쿠 헨로에 관심 갖게 했는데 이번에는 시코쿠 헨로가 2번째 까미노 행을 자극한 것.
시코쿠 헨로는 결행하기 까지 3년이나 걸리도록 정서적으로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길이었기에 걷는 도중에도 까미노로 방향을 틀라는 충동 또한 대단했다.
그 충동이 어찌나 거세고 잦았던지 이듬 해의 2번째 까미노 행을 확정하고 2개의 목적을 위해
6개월을 설정함으로서 비로소 1.200km 헨로 걷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2일이 부족한 180일 간의 이 여정은 20여시간 전인 아침 9시30분(한국시간), 대한항공과 공동
운항편(인천 ~ 파리 간) 여객기 에어 프랑스(Air France)에 오름으로서 시작되었다.
나는 터무니 없이 비싼데도 '국적기'라는 이유로 애용할 만큼 맹목적 애국자는 아니다.
다만, 축적된 보너스 마일리지를 사용하기 때문이며 대한항공 보다는 덜 편한 에어 프랑스를
택한 것은 파리 체류시간(목적지 Spain Irun 가는 열차시간 까지의)을 늘리기 위해서 였다.
(오후에 떠나는 대한항공으로도 열차 환승이 가능하지만 빠듯하기 때문에)
전번에도 같은 코스였으나 그 때는 공항~ 오스테를리츠 역 간을 아들이 주선한 승용차를 이용
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파리의 도심을 걸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2000년 이래 15년 만의 이 기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샤를르 드골(Charles De Gaulle) 공항을 나설 때 내리기 시작한 비가 노트르담(Saint Michel
Notre-Dame) 역을 나왔을 때는 거센 빗줄기가 되어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다.
어디로 대피했는지 많이 붐볐을 인파가 사라진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광장을 지나 뒷편
아르슈베셰 다리(Pont de L'Archeveche/대주교의다리), 일명'사랑의자물쇠다리'(?)를 건넜다.
다리 양쪽 난간에 빈 틈 없이 빼곡히, 겹겹으로 매달아 놓은 형형색색의 각종 자물쇠들.
언제 부터 였는지, 어떤 전설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 길 없으나 자물쇠들의 하중 때문에 다리의
붕괴를 염려하게 되었단다.
사랑의 자물쇠가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며 자물쇠 업자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겠다.(판매에 영향을 줄 것이니까)
(모방의 천재국이 된 우리나라가 잠잠할 리 있는가.
전국 관광지 곳곳에 '사랑의 자물쇠'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황토빛으로 변한 센 강(la Seine)을 건너 2km쯤 된다는 오스테를리츠역 까지의 빗길을 걸었기
때문에 샌들을 신은 하반신이 후줄근히 젖어 더욱 심란해진(gloomy) 늙은이.
파리 시내를 걸으며 기분을 전환한 후 노르떼 길(Camino del Norte)에 들어서려는 바람마저
앗겨버렸으며 감기를 수반한 비였는가 감기 증세까지 나타났으니 설상가상의 형국이었다.
큰 말 나가면 작은 말이 크 말 노릇한다 ?
4년 더하기 1개월여 만에 다시 찾은 오스테를리츠 역은 구면이라 설지는 않았으나 너무 일찍
도착하였기 때문에 하릴없이 시간보내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게다가, 국내 약국에서 조제해 온 감기약을 먹었기 때문인가.
나는 비몽사몽 상태였다.
시발역이라 일찍 대놓은 열차 안에서 발차시간을 고대하게 된 것이 그래도 다행이긴 했지만.
열차가 역을 막 떠났을 때 저 앞 출입문쪽에서 걸어오는 한 청년이 아른거렸는데 내게 다가온
그는 잘 포장된 한 물건을 건네주고 돌아갔다.
"플랫폼(platform)에서 부인들이 좌석 주인에게 전해주기를 부탁했다"는 말을 남기고.
엉겁결에 받아놓기는 했으나 전달 착오일 것이라 생각되어 곧 그 젊은이를 찾으러 나섰다.
우리 말을 한 것으로 보아 그는 한국인 청년이 분명한데도 워낙 혼미해진 상태였기 때문인지
찾는데 실패했다.
정신을 차리고 물건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각종 영양 간식을 비롯해 알카셀처(Alka-Saltzer) 까지 정성이 담긴 종합세트.
첨부된 열차 티켓 사본이 내 티켓과 일치한데다 청년은 내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소한 파리 하늘 아래에 내게 지극 정성일 여인(국적 불문)이 있는가.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많은 시간이나 고심을 요구하지 않았다.
파리 땅뿐 아니라 국내외를 통틀어 내 티켓 사본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뿐이라는 점이
바로 해결의 키(key)가 되었으니까.
내 2번째 까미노 여정도 첫번 처럼 스페인으로 직항하지 않고 파리 경유다.
노르떼(북쪽) 길의 출발지 이룬(Irun)이 프랑스 길(Camino Frances / St. Jean Fied-de Port)
처럼 프랑스와 국경지역이라 파리에서 야간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고 유리하니까.
열차 티켓은 모두 국내에서 예매했다.
이 일(예매)을 자임한 이는 K은행을 정년 퇴직한 L.
그 은행의 파리 지점장으로 있을 때 유럽 여행 중 그 곳에 들른 우리 부부를 위하여 금쪽 같은
시간을 할애했었는데 나를 위해 매번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는 그다.
유일한 친구 S가 유명을 달리 한(1997년) 이래 교분 연륜은 길지 않으며 십수년의 연령 차가
있음에도 언행범절이 인격적 신뢰와 경의를 갖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사람이다.
L 에게는 결례될 수도 있겠으나 S의 빈 자리를 메꿔주는 그가 내게는 "큰 말 나가면 작은 말이
큰 말 노릇한다" 는 속담이 알맞는 표현일 듯 싶다.
이번에도 지난번 처럼 그가 인터넷으로 SNCF 티켓을 구입하고 파리의 지인을 동원해 이 일을
꾸몄을 것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5개월 후 귀국하여 L과 소주잔을 나누며 거듭 감사드리는 주석.
그 때 일을 회상하며 정담을 나누고 있을 때 L에게 전화가 왔다.
통화 도중에 L은 내게 전화기를 건네 주었는데 이럴 수가!
우천인데도 그 꾸러미를 준비해 오스테를리츠 역 플렛폼 까지 나왔던 여인이라니.
그녀는 L이 지점장이었던 K은행 파리지점에 근무하는 파리 거주 한국여인.
L의 부탁으로 정성껏 준비했으며 나를 기어코 만나보고 싶었다니 L의 소개가 과장되었던가.
열차 안으로 오르려 하다가 입장을 저지당해서 한국 청년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단다.
얼마나 과도하게 소개했기에 아직도 미련(?)을 가지고 있는가.
립 서비스(lip service)인가.
(11월에 잠시 귀국한다는 그녀를 꼭 만나고 싶었는데 동감이라던 그녀와의 만남은 불발.
내 나름의 사례를 하고 싶었으나 우선 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렸나) <계 속>
드골 공항의 백팩/ 2015년의 까미노 5개월을 포함해 7년 동안 20.000여km를 함께 걸어온 배낭!
2015년 9월 23일 알메리아(Almeria/스페인 남부 Andalucia 지방)에서 도둑맞았다.
배낭 안에는 사진 3.954컷이 담긴 메모리칩도 들어 있었기 때문에 스마트폰에 담은 소수의 사진 외에는
올릴 사진이 없다.
드골 공항~ 노트르 담 역의 전철(위) 티켓(10유로 라면 너무 비싸지 않은가)(아래)
노트르 담 대성당(위/아래)
황토빛 센 강(위)과 난간의 자물쇠들 때문에 붕괴의 위험이 있다는 아르슈베셰 다리(아래)
첫댓글 반갑게 글로서 인사드립니다, 건강하시온지요?
이역만리에서 꼭꼭 챙겨주시니 건강할 수 밖에요. 거듭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