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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답사 둘쨋날로 이번 답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일제시대 무장투쟁의 중심지였던 신흥무관학교 옛터를 방문하는 날이다. 100년전의 옛 현장을 찾아서 일제시대 무장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선열의 애국애족 독립정신을 생각해 보는 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시대 상황에 따라 (1) 추가가(1911년) --> (2) 합니하 (1912년~1920년) --> (3) 고산자 (1919년~1920년) 지역으로 학교가 3번 이전되었다. 1919년 신흥무관학교가 본교를 고산자로 이전할 때, 합니하에 있던 신흥무관학교는 분교로 계속 유지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시도가 일본군과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조선의 뜻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비폭력 평화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압록강 넘어 신흥무관학교를 찾아 왔다고 한다. 님 웨일즈의 'Song of Arirang(아리랑의 노래)'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김산도 이곳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그도 1919년 15살의 어린 나이에 기차로 하얼빈 가는 도중에 난리통에 기차가 더이상 가질 못하자 계획을 바꿔 신흥무관학교가 있는 이곳까지 걸어서 찾아왔다. 나중에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신 지청천 장군과 청산리 전투의 야전 사령관이었던 이범석 장군도 이 곳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다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셨다. 명성을 듣고 찾아 온 수많은 젊은 청년을 수용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는 고산자의 본교와 함께 합니하의 분교를 유지했다고 하니, 이때가 신흥무관학교의 최전성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0 년간에 걸친 독립군 양성교육은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의 승리로 꽃을 활짝 피웠다.
우리 일행은 첫날 도착지인 북쪽(장춘)에서 남쪽방향(집안)으로 내려와야 했기 때문에 답사 동선을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순서대로 하지 못하고 (3) 고산자 --> (1) 추가가 --> (2) 합니하 순으로 역사의 현장을 찾아갔다.
신흥무관학교 답사 지도
전날 묵었던 유하빈관 호텔을 떠나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부근의 하동(河東) 대두자 마을로 출발하였다. 가는 길 내내 옥수수밭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오전 9:00시)
1시간여를 달려도 옥수수밭이다. 동북3성의 논농사는 우리 조선인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지역에서 옥수수대신 논농사를 짓고 오리 대신 닭을 많이 치는 집이 있으면 그 동네에 조선족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고산자의 대두자 마을에 가까와 오기 시작하니 길 한쪽 켠에 종종 논이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사진에서 보이는 길 왼쪽은 전부 논이고 오른쪽은 옥수수밭이었다. (오전 9:37시)
우리 일행은 길 오른쪽 옥수수밭에 난 길을 따라 올라갔다. (오전 9:37시)
잠시 가야할 방향을 잃어 멈춰섰다. 여기 옥수수는 사람 키보다 높아서 방향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옥수수에 가려 앞이 잘 안보인다. (오전 9:45시)
한길을 훌쩍 넘는 옥수수를 헤치고 고랑 사이로 지나갔다. 잠시 잠깐 100년전 독립군이 된 기분이다. ^^
사방이 온통 옥수수밭이다. 옥수수밭 사이로 논이 조금씩 있었다. 왼쪽 숲속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대두자 마을의 신흥무관학교 옛터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자그만 숲속이다). 신흥100주년 준비위원장이신 주동욱 선생님께서 이곳 고산자/대두자의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다.
저 앞 하늘과 옥수수밭의 경계선을 따라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눈길을 옮기면, 나무 숲으로 가려진 위치에 신흥무관학교의 국기 게양대가 있었다고 한다. 옥수수가 베어져 황량한 겨울철이나 이른 봄에 가면 국기 게양대 흔적이었던 돌무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역사 탐방에서 눈에 보이는 흔적을 직접 보고 만져보는 것과 흔적이 없어 다만 자취만을 더듬는 것엔 사람에게 주는 감동에 많은 차이가 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하나같이 지금은 자취만 남아 있는 신흥무관학교 옛터를 바라 보며 많은 아쉬움을 느끼고 안타까움을 얘기하였다.
설명을 들었던 숲속에서 나오는 길에 잠시 단체사진을 촬영하였다.
(Photo by 김해규)
신흥무관학교 옛터를 바라보며 설명을 들었던 자그만 숲속에서 나오고 있는 답사 일행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옛터에서 추가가 신흥무관학교로 떠나기 위해 버스에 탑승하기 직전 기념사진 (오전 10:40시)
(왼쪽부터) 소설가 정혜주 선생님, 홍소연 실장님, 이민우 선생님, 김순흥 교수님, 장병화 답사팀 단장님, 방학진 사무국장님
1시간 반 정도 달려서 유하현 삼원포 시가지를 지나 서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추가가(鄒家街)에 도착하였다. 도로 표지판에 추가(鄒家, 조우지아)라고 씌여 있다. 도로 표지판이 손가락처럼 가리키는 방향이 대고산 아래 신흥강습소(첫 신흥무관학교 터)가 있던 곳이다. (오후 12:13시)
저 앞에 보이는 산이 대고산이다. 대고산을 바라보며 이 시골길을 따라 몇백 m 정도 올라가면 길 왼쪽, 오른쪽 편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신 우당 이회영 형제와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안동의 유림이 사셨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와 추가가 신흥무관학교 옛터가 나온다.
올라가는 길 왼편의 이곳이 우당 이회영 형제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에서 길 오른편의 이 장소가 석주 이상룡 등 안동지역 유림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20여 미터 올라가면 시야가 탁 틔이면서 대고산이 정면에 바라다 보인다.
1911년 서간도에 이주한 이회영, 이상룡 일가를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이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경학사의 조직과 신흥강습소의 설립이었다. 이들은 1911년 5월(음력 4월) 삼원포 대고산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결사(結社)조직이었다. 한편 경학사는 이주민들을 위하여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벼농사를 보급하기도했다. -출처: 신흥무관학교 답사안내서
대고산을 바라 보면서 다시 십여 m를 올라가면 길 왼쪽에 신흥강습소 옛터가 나온다.
신흥강습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터. 지금은 기와공장으로 사용되는지 깨진 기와가 운동장 한켠에 쌓여 있었다.
신흥강습소 옛터 (7월20일(수) 오후 12:19시)
이 건물은 훨씬 나중에 생긴 중학교 건물이라는데 오래 전에 폐교가 되어 창문은 다 부서졌고, 어느 중국인 한 가족이 창문에 비닐을 쳐서 비를 가리고 살고 있었다.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감격적인 신흥강습소의 개교식이 있었다. 토착민들과 일제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비록 평범한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신흥강습소는 신민회의 조직적 결의와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정체였다. 망명지사들이 서간도에 온 목적은 항일독립운동과 그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고, 그것과 직결되는 사업이 바로 무관학교 설립이었다. 따라서 신흥강습소는 중등과정의 교육뿐만 아니라 군사과를 두어 처음부터 독립운동 전사들을 길러내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출발했다.
- 출처: 신흥무관학교 답사 안내서
신흥강습소 옛터에서 답사 일행
(Photo by 김해규)
추가가의 신흥강습소 답사를 마치고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옛터를 향해 달렸다. (오후 2:23시)
합니하에 도착하였다. 왼편에 넓은 시내(합니하)를 끼고 신흥무관학교 옛터로 향했다. (오후 4:16시)
*** 1912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
1912년 봄부터 망명지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하현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1912년 7월 20일(음력 6월 7일), 100여 명이 모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신흥무관학교 위치는 바로 합니하가 학교 주위를 거의 360도 휘돌아 흘러 마치 해자(垓字)처럼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비로소 서간도 합니하에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출처: 신흥무관학교 답사 안내서 -
옛터 입구에서 하차하여 저 앞 쪽에 산이 바라다 보이는 곳으로 걸어 올라갔다. 이 곳의 지형은 마치 안동의 하회마을처럼 'U'자형으로 강물이 휘감고 지나가는 곳에 형성된 높은 언덕 지대이다. 지금 우리는 전망이 좋은 높은 언덕 지대에 올라와 있다.
오른편에 허름한 중국 농가가 몇채 있었는데 인기척이 나자 집 지키는 작은 개랑 거위 몇마리가 요란하게 짖어댔다. 개짖는 소리랑 거위 우는 소리에 농가의 중국인 몇명이 무슨 일인가 싶어 대문가로 나오더니 우리 일행의 행동을 지켜 보았다. 몇년 전에 어느 답사팀이 이곳에다 '신흥무관학교 옛터' 기념비를 세웠는데 나중에 중국 당국에서 알고 기념비를 깨뜨리고 치웠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이 지역에 답사팀이 들어 오려면 중국 당국에 신고를 하고 들어와야 한다고 한다. 우리 답사팀도 사전에 신고를 하고 들어 왔지만, 신흥무관학교 답사 플래카드는 꺼내지 않고 단체 사진도 재빨리 찍는 등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
아래 사진의 길 오른쪽에 있는 산등성이를 따라서 신흥무관학교 건물이 들어섰다고 한다.
저 앞의 산 중턱을 따라서 오른쪽 방향으로 신흥무관학교 건물이 쭉 배치되었다고 한다.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의 흔적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전혀 남아 있질 않아서 현재의 추정 위치도 확실치는 않다고 한다. 다만 옛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어느 독립군이 쓴 일기에 합니하 신흥무관학교와 주변 지형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현재 이 곳 지형과 비슷한 점이 많아 이곳을 옛터로 추정할 뿐이라고 한다. 해방 후 50년 이상, 중국과 국교를 맺기 전까지는 이곳에 한국인이 올 수 없었기에, 그리고 과거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신흥무관학교와 설립자가 차지하는 비중과 관심의 정도가 지금처럼 높지 않았기에 오랜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언덕아래 개울 건너 맞은 편 풍경이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은 개울가에 높게 솟은 일종의 고원(언덕) 지대인데, 언덕 아래엔 언덕을 감싸고 'U'자형으로 흐르는 폭이 넓은 개울이 있고 개울 옆에는 차도가 있다고 한다. 차도가 있는 곳은 평지인데 주변에 포도밭이 있다. 평지 는 다시 나즈막한 산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위 사진에서 보이는 산지 쪽이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옛터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우리 답사 일행은 다시 관광버스를 돌려 이 고원지대 아래 개울건너 반대편 차도쪽으로 가서 우리가 서 있던 이 언덕 지형을 살펴 보기로 하였다.
(오후 5:02시)
차를 돌려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옛터가 있는 고원지대(언덕)이 잘 보이는 맞은편 지역으로 갔다. 아래 사진의 빨간 지붕의 집은 중국에서도 유명한 이곳 포도원 건물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포도원 건물앞 너른 주차장에서 다시 차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면서 개울 건너 맞은편에 높이 솟은 언덕 지형을 살펴 보고, 과연 이 지형이 일본군의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서 독립군 전사를 키워낼만한 천혜의 요새인지 살펴보았다.
합니하 신흥무관학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맞은편 언덕지형이다. 언덕 위는 평평한 분지인데 이 곳 개울옆 차도에선 분지가 보이지 않는다. 중국 경찰인 공안이 따라온다고 하여 관광버스에서 내리진 못하고 차를 타고 가면서 차장 밖으로 살펴 보았다.
아래 사진의 왼편의 언덕지대에 집 몇채가 보인다. 이 집이 조금 전에 우리가 답사할 때 개가 짖던 농가 주택이다. 이런 지형 지물로 봤을 때 저 언덕 위에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연병장이 있었음직하다고 생각되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맞은 편 언덕지대를 살펴보고 나갈 즈음 중국 공안이 탄 경찰차가 우리를 가로 막았다. 우리는 사전에 방문 신고를 했기에 염려할 것은 없었지만, 관광버스를 공안이 가로 막는 것을 보고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독립운동의 현장 답사도 자유롭지가 못한 것에 잠시 씁슬한 기분이 들었다. 공안은 차에 탑승하여 탑승 인원을 세고 나서는 바로 차를 돌려 떠났다.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답사를 끝으로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 옛터 답사는 마감되었다. 내일(목)은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의 국내성과 옛 무덤을 답사할 예정이다. 차는 집안을 향해 힘차게 달렸다. (오후 5:57시)
밤 9시가 다 되어 집안에 도착하였다. 배가 출출하였다. 우리는 서둘러 버스에서 내려 조선족 불고기집으로 향하여 삼삼오오 둘러앉아 숯불구이 불고기를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밤 9:16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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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졸음이 쏟아져서 합니하, 추가가 신흥무관학교 답사 이야기는 다음 회로 미루겠습니다. --;;
---> 잠을 푹 잤더니 개운하네요. 오늘 나머지 답사기를 써서 완성했네요.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그림과 함께 덪붙인 답사이야기 기억을 돌리는 치매약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소진
ㅎㅎㅎ. 글쓰는 재주가 없다 보니.. 저렇게 사진위에 간단한 설명을 붙혀 그냥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치매 예방ㅎㅎㅎㅎ 사진과 함께 하는 답사기.. 선생님 덕분에 둘째날의 여정이 그대로 눈에 보여지는 것 같습니다. 왼쪽에 계신 분은 소설가 정혜주 선생님 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본문에 존함을 넣었습니다.
정 선생님 안뇽. 잘 지내시죠?
보여지는 것 --> 보이는 것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잘못(틀리게) 쓰고 있는 우리말입니다.
'보다'는 내가 주체가 되어 다른 대상을 보는 것이고,
'보이다'는 다른 객체가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미 '이'라는 피동보조어간이 들어있습니다.
'보여지다'는 틀린 말로, 영어식 수동태가 우리 말에 무분별하게 들어와서 우리말을 오염시키고 있는 대표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제강점기 오염되었던 우리말도 독립시키고,
잘못된 영어식 표현으로부터 우리말을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그분들의 자리에서 하실 일을 하셨듯이
그분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얻은 우리의 '독립'을 지켜나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봅니다
놀부님의 말씀. "그 분들이 그 자리에서 하실 일을 하셨듯이, 그분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얻은 우리의 '독립'을 지켜나가는 것은 우리의 몫" 이라 하신 말씀이 가슴 속에 깊이 와닿습니다. ^^
역시 놀부님.... ㅎㅎㅎㅎㅎ 이런 착한 놀부만 있으면 세상 살맛 날 것 같습니다. 물동이 인* 거기 만지는 그런 놀부가 아닌.....ㅎㅎㅎㅎㅎㅎㅎㅎ 정소진
저도 우리말 쓰는게 참 어렵습니다. 감사합니다.
홍선생님 잘 보고 있습니다. 다시금 기억이 새록새록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선생님과 여행을 함께 하여 더욱 즐거웠습니다.^^
홍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늦게서야 선생님의 사진이 있어서 메일로 보냈습니다.....
예, 보내주신 사진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겨울에 갔는데 여름은 이렇게 더 좋군요. 잘 다녀오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