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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봉 위로 달이 휘영청 떠오르면 쇠(꽹과리) 치는 가락은 더욱 흥겨워지고 날라리 소리도 더욱 간들어지게 넘어 간다.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 빛에 어지럽게 휘돌아가는 상모꼬리는 흡사 정월대보름날 쥐불놀이의 불꽃이 휘돌아가는 듯 눈앞이 어지러웠다. 붉은 치마 노랑저고리의 무동들은 치마를 부풀리며 맵시 있는 손동작으로 춤사위를 맞추며 돌아간다.
흰 점투성이 검붉은 낯짝의 바가지탈을 쓴 영감은 흥에 겨워 장죽을 휘두르며 덩실거리고, 북잽이와 징잽이들도 덩달아 어깨를 우쭐거리며 돌아가면 장구잽이도 날렵한 손동작으로 가락을 휘몰아 간다. 장면마다 쇠가락이 빨라졌다가는 느려지고 다시 빠르게 휘몰아 가는데 거기에 따라 날라리 가락도 변화무쌍하게 바뀌고 어깨춤이 덧들이면 놀이마당은 온통 흥겨움으로 휩싸인다. 마당 구석이나 삽짝 바깥에 웅기중기 모여선 구경꾼들은 간드러지는 가락과 풍물패들의 현란한 몸짓에 손뼉 장단을 맞추며 어깨를 같이 들썩거리게 된다. 어둠 속에 얼굴을 숨긴 숫기 없는 처녀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몸짓 하나하나라도 놓칠세라 뚫어지게 쳐다보며 한숨을 내 쉬기도 하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하다가 행여 다른 사람이 눈치를 채기라도 하면 얼굴을 붉히며 어둠 속으로 꽁무니를 뺀다.
그 중에서도 인기는 단연 상쇠인 만복이 형이 최고였다. 시골 농사꾼답지 않게 흰 얼굴이며 시꺼먼 눈썹에 조각 같은 옆얼굴 모습은 물론이려니와 훤칠한 키와 탄탄한 몸매에 자신에 넘치는 표정으로 전체 풍물단을 이끌어 가는 모습은 정말 대단하였다. 쇠가락이 바뀔 때마다 꽹과리를 높이 쳐들고 고갯짓을 하며 강한 울림으로 가락을 바꾸면 다른 잽이들도 눈길을 맞추며 따라 바꾸곤 하였는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감탄사를 쏟아내곤 하였다.
흥겨운 놀이판이 벌어지면 이웃 마을에서도 구경을 오곤 하는데 특히 고요한 밤에 울리는 징소리는 굉장히 멀리까지 울려나가서 밤이면 10여 리 떨어진 먼 이웃 마을까지 아련히 울려 퍼지는데 그 소리를 들리면 공연히 마음이 들뜨곤 하였다.
집에 붙어 있지도 않고 논밭에서 일도하지 않으며 싸돌아다니기만 하던 만복이의 형인 만수형은 언제부터인가 얼굴에 핏기가 없고 초점이 없는 퀭한 눈으로 힐끔거리며 동네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또 저녁 어스름에 마을에 잠깐 나타났다가는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는 했다.
만복이한테 물어봐도 손사래를 치며 모르쇠요, 그 부모는 더욱이나 입을 다물었는데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퍼진 소문에 의하면 읍내에서 봤는데 뒷골목에서 불량한 젊은 놈들과 어울리더라, 언젠가 장날에 경찰이 좀도둑을 쫓는데 흩어지는 젊은이들 틈에서 만수를 봤다는 둥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마을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폐병(결핵)이 걸렸다더라, 야편쟁이(아편-마약)가 되었다더라. 갈보집에서 나오는 걸 봤다, 도둑질을 일삼는 다더라는 둥 온갖 못된 이야기를 다 붙여서 수군거렸다. 그렇지만 그 부모는 물론 만복이조차도 찾아 나서거나 걱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고 만수 이야기는 입에 담지도 않으려고 했다.
돌멩이 투성이인 조그만 밭뙈기를 일구어 푸성귀나 감자 따위를 조금 심고는 주로 동네에서 품을 팔아 생계를 꾸리던 만복이네는 가을걷이가 끝나자 아버지가 대관령 넘어 황병산으로 산판(벌목)에 목도질을 하러갔다. 벌목일은 벌이는 괜찮았지만 무척이나 위험한 일로 특히 목도일은 품삯이 많은 반면 다치는 일도 많았다.
산주와 협의가 되어 산림청에서 벌목 허가를 받은 벌채의 총 책임자인 목상(木商)은 먼저 인부들을 모은다. 인부는 벌채할 나무를 골라 표시를 하는 사람, 자르는 사람, 굴려 내리는 사람, 목도질하는 사람, 껍질을 벗기는 사람(탈피공), 차에 나무를 싣는 사람(상차꾼) 등으로 나누어진다.
산 아래쪽부터 통나무를 굴려 내리는 길을 만들며 올라가는데 경사를 보아가며 자른 나무를 뉘어 홈통처럼 만들며 차츰 위로 올라간다. 꼭대기까지 홈통이 만들어지면 그 언저리의 나무를 잘라 홈통을 통하여 아래로 내려 보내게 되는데 거센 기세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굵은 통나무는 소리도 요란하고 한 길씩 튀어 오르기도 해서 자칫 사람에게 덮치기라도 하면 큰 사고가 난다. 근처의 나무를 다 자르면 차츰 내려오면서 벌목을 하는데 위쪽부터 홈통도 허물어 통나무를 내려 보내며 차츰 내려오게 된다.
굴러 내려진 통나무는 목도꾼이 덤벼들어 넓은 공터로 옮기는데 큰 통나무는 목도꾼 넷이, 좀 작으면 두 명이 붙기도 하고 더 작으면 한사람이 어깨로 메어 나른다.
목도질은 우선 튼튼한 삼끈으로 굵게 꼰 밧줄을 두골 잡이로 하여 통나무 밑으로 넣어 감아 올려서는 끈에 구멍을 만든 다음 매끈하게 깎은 목도(막대)를 구멍에 낀다. 그 다음 양쪽에서 목도꾼이 목 뒤에 목도를 얹고 호흡을 맞추어 일어서서는 ‘에야, 헤야’ 소리를 맞추며 발을 옮기는데 엄청나게 무거운 것도 거뜬히 목도질을 해냈다. 목적지에 다 오면 그 중 제일 연장자가 큰 소리로 ‘놓고~’ 하면 동시에 땅에 내려놓았다. 목도질은 목도꾼의 호흡이 생명으로 둘이 할 때도 그렇지만 앞뒤로 넷이 할 때에는 목도질 소리와 호흡과 보폭이 기가 막히게 맞아 외나무다리도 건너간다고 하였는데 많은 경험이 필요하였다.
만복이 아버님은 소문난 목도꾼으로 목 뒤에는 손바닥 같은 굳은살이 박혔고, 허리도 구부정하였는데 젊어서부터 수도 없이 산판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목도꾼이 옮겨 쌓은 한 옆에서는 탈피작업이 시작되는데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넓적한 낫으로 좍좍 껍질을 벗겨낸다.
탈피작업은 완전히 하얗게 벗기는 것이 아니라 듬성듬성 죽죽 벗겨내었는데 쉬 마르고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껍질을 벗겨낸 통나무는 다시 한 옆에 쌓았다가 실어 낼 트럭이 오면 차 뒤에다 기다란 발받침 두 개를 비스듬히 걸쳐 놓은 다음 목도꾼이 목도질을 하여 차에 실었다. 비스듬히 걸쳐진 발판위로 엄청나게 큰 통나무를 목도질하여 올라가는 것을 보면 아슬아슬하고 신기하였다. 보통 늦은 가을에 시작되는 산판의 벌채일은 눈이 내릴 때까지 계속되곤 했는데 눈이 내려서 미끄러우면 더욱 위험하였다.
그해 초겨울, 기어이 만복이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고야 말았다. 목도질을 하다가 산위에서 굴러져 내려온 통나무에 깔렸는데 허리를 심하게 다쳐 업혀서 집으로 돌아왔다. 원체 사람이 양순하여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쥐꼬리만한 위로금을 받고는 흐지부지 말았는데 그 후로는 영영 목도 일을 못하는, 동네 어른들의 말을 빌리면 폐인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 봄이 되었는데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만복이 아버지는 돌투성이 밭가에 쪼그리고 앉아 벙어리 마누라가 씨앗을 넣는 모양을 보고는 못마땅하여 손사래를 치며 혀를 차고는 했다.
그해 가을, 가을걷이가 끝나고 감나무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 빨갛게 익어갈 무렵 만복이형이 집을 나갔다. 정초 걸립 때 이웃마을까지 쫓아다니며 드러내놓고 꼬리를 치던 납돌집 큰 딸 연순이와 함께 옷가지만 싸들고 밤중에 마을에서 사라진 것이다. 달밤에 연당집 연못가에서 둘이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둥 찰방집 대나무 밭에서 둘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둥 쉬쉬하며 떠돌던 소문들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조금 철딱서니가 없다고는 했지만 연순이는 얼굴도 토실토실하고 가슴도 제법 봉긋하여 사람들이 복스럽게 생겼다고들 하였었다. 그러잖아 두 집에서 혼사 말까지 나왔었지만 납돌댁이 펄쩍뛰며 반대를 하였는데 연순이 머리채를 끌고 매질을 하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납돌집은 논밭뙈기도 몇 마지기 있고 살림이 탄탄한 편이었지만 만복이네는 영세에서 이사 온 외지인에다 찢어지게 가난할뿐더러 특히 아버지가 좀 모자란다고 알려진 터였다. 거기에 어머니가 벙어리인 것이 결정적 요인으로 동네사람들도 신랑감은 아깝지만 두 집안이 좀 기운다고 이야기들을 했었다.
납돌댁은 딸을 찾는다고 사람들을 풀어 읍내를 뒤지기도 하고 수소문도 했지만 도무지 종문소식이었다. 어느 날 만복이 집에 찾아가 모두 만복이놈 때문이라고 행악질을 퍼붓고는 했다지만 동네 사람들은 이미 깨진 쪽박인데 찾기는 뭘 찾느냐, 둘을 위하여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들 하였다. 또 만복이가 원체 똑똑하니 어디 가서든지 잘 살꺼라고들 하였다.
그리하여 만복이네는 그 잘생긴 아들 둘을 졸지에 잃어버리고 바싹 쪼그라든 노부부만 남게 되었다. 만복이 아버님은 그러잖아 굽은 허리인데다 더욱 구부리고 땅바닥만 드려다 보며 무언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고 다녔고, 벙어리인 그 부인도 동네사람들과는 눈도 맞추지 않고 사람이 얼씬거리기라도 하면 부리나케 자리를 피하곤 하였다.
그 일로 한동안 동네가 술렁거렸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마을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는데 청년들은 정작 농악대 꾸려갈 일이 걱정꺼리로 떠올랐다.
그해 가을 농악대의 상쇠를 솔골집 둘째인 억만이형이 맡았는데 혼자서는 꽹과리도 잘치고 멋들어지게 춤도 잘 추었지만 농악대를 이끌어가는 요령이 부족했던지 예전만큼 단합도 잘 되지 않았고 사소한 말다툼도 잦았다. 특히 청산유수로 읊어나가던 만복이형의 비손이 실력을 따라갈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모두들 제일 아쉬워하였다.
또 만복이형이 없어져서 그런지 농악대 자체의 인기도 시들해져서 아무리 화톳불을 돋우고 신나게 쇠를 쳐대도 처녀들이나 젊은 아낙들은 시큰둥해 하였고 신나서 쫓아다니는 것은 우리 조무래기들이나 노인들뿐이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이던 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읍엣집 큰 아들이 집으로 내려왔는데 서울에서는 큰 난리가 났다고 하였다. 종로에서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는데 경찰이 총을 쏴서 옆에 있던 친구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골목길로 도망쳐서 그길로 하숙집에 들러 옷가지만 몇 가지 싸들고는 마장동에 와서 새벽 첫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하였다. 데모를 하던 대학생들과 시민들 중에 틀림없이 수십 명은 죽었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우리 집 사랑방에 모인 동네 청년들과 어른들은 자유당이니, 부정선거니 하는 이야기를 처음 듣고는 모두 어리둥절해 하였으며, 경찰들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마구 쏘아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사변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므로 틀림없이 그 밑에 있는 나쁜 놈들이 권력을 잡기위해 그런 짓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둥, 공부하기 싫으니 데모나 하는 철부지 대학생들이 문제라는 둥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 이듬해 다시 무슨 혁명으로 대통령이 물러나고 군인정치가 들어섰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민심은 흉흉했지만 우리 마을은 외부의 변화와는 전연 상관이 없다는 듯이 평온하고 여전히 가난하였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던 해 벙어리네 첫째인 만수형의 소식이 들렸다.
집으로 만수형의 군 입대 영장이 나왔었는데 입대를 하지 않자 조사도 나오고 했었다. 결국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었는데 어떤 이들은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을 읍내에서 보았다는 둥, 서울로 가서 크게 성공했다더라는 둥 가지가지 풍문이 떠돌았다.
그 해 가을 을씨년스러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면파출소의 순경이 찾아와서 만복이 아버님과 무슨 말을 한참 수군거리더니 만복이 아버님이 지게를 지고 따라 나섰다. 저녁 어스름 녘이 되어서야 아버님은 거적에 둘둘 만 만수의 시체를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허위허위 팔을 내 저으며 쫓아 나온 만복이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부, 아부’ 신음소리와 함께 애끓는 슬픔을 토해내다가 마당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마당가에 아들의 시체를 내려놓은 아버지는 쪼그리고 돌아앉아 먼 산만 건너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네 장정들이 모여 어둠 속에서 수군거리더니 곡괭이와 삽 등속을 챙겨서는 시체를 다시 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는데 설맹골 뒷산에다 평토장을 했다고 한다.
그 후 들리는 소문으로는 만수가 삼척에서 깡패노릇을 했는데 바닷가에서 뱃놈들과 싸움이 벌어져 배 갈쿠리로 머리를 맞아 골수가 쏟아져 나왔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아편에 절어 시궁창에 박혀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더라고도 하였는데 어떤 말이 사실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이듬해는 몹시도 가뭄이 심하였다. 초여름이 될 때까지 아침나절 희뿌연 안개가 끼었다가는 붉은 해가 떠오르는 날이 계속되어 비 한줄기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바람이 쉴 사이 없이 불어댔고 밭의 곡식도 모두 빨갛게 타죽었다. 논에 댈 물이 없어 모를 내지 못하는 집이 대부분이었는데 어찌어찌하여 산골짜기 밑의 논은 모를 냈지만 말라붙어 졸졸거리는 골짜기의 물줄기를 서로 자기 논에 대려고하여 다툼이 그치지 않았다.
어느 마을에서는 자기 논 물꼬에 서로 먼저 물을 대겠다고 싸움이 벌어져 살인이 났다는 둥, 저녁에 논에 댄 물이 내려오지 않아 올라가 봤더니 건넛마을 젊은 아낙이 물꼬에 철퍼덕 앉아 자기네 논으로 물을 대고 있어 일어나라고 호통을 쳤더니 어떤 놈이냐고 으름장을 놓으며 아래 속곳을 모두 벗고 앉았으니 어데 와서 손을 대기만 해 봐라...는 둥 벼라 별 이야기가 다 들렸다. 자기 논에 물을 먼저 대려고 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아는 사람이거나 모르는 사람이거나 죽기 살기로 서로 욕을 퍼붓기도 하고 멱살잡이도 예사로 하였다. 그런데 어른들은 논에 물을 대다가 일어난 싸움은 큰 허물이 아니라고 하였다.
학교에서도 관정(灌井)을 판답시고 수시로 학생들을 동원하였다. 우리 학교에서는 경포 쪽으로 여러 번 나갔는데, 호미나 괭이를 들고 선생님의 인솔아래 터덜터덜 흙먼지 일어나는 이면(임영)고개를 두어 시간이나 걸어 경포호수 위쪽의 개천바닥까지 갔었다. 개천바닥은 물론이려니와 인근의 논들도 모두 거북 등딱지 마냥 쩍쩍 갈라져 괭이로 파거나 호미로 긁으면 뿌연 흙먼지만 날릴 뿐 축축한 땅도 만나기 힘들었는데 왜 이런 짓을 하느냐는 눈으로 선생님을 쳐다보면 선생님도 눈을 끔적이며 그냥 파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하셨다.
그 해의 가뭄은 강릉지방 뿐만이 아닌 전국적인 것으로 특히 호남지방이 심해 그 넓은 평야에 벼 한 포기 못 심었다고 하였다. 연이은 가뭄으로 소작농들은 먹을 것이 없어 전국으로 떠돌게 된 사람이 많았다. 얼마나 굶주렸던지 처녀들은 밥만 먹여주면 째보(언청이)든 소경이든 심지어 늙은 홀아비한테도 시집을 가겠다고 하였다.
우리 마을도 식량이 떨어져 고생이 심했는데 봄에 감자가 나기까지가 힘들었다. 양식이 떨어지면 미처 감자가 여물기도 전에 감자포기 옆을 헤집고 콩알같이 맺힌 감자를 뜯어내어 물에 씻어서는 껍질째 삶아먹기도 하였다. 어머니께서는 그래도 지금이 나은 편이라고 하셨다. 어머니 젊은 시절에는 미처 밀보리가 익기를 기다릴 수가 없어서 밭에 들어가 이제 파랗게 올라오는 보리나 밀 이삭을 똑똑 잘라다가 가마솥에 넣고 볶아서 맷돌에 갈아 그 가루에 나물을 많이 넣고 죽을 쑤어 연명을 하기도 하셨단다.
흉년이 거듭되다 보니 가을에 미리 구람(도토리)을 주워다 보릿고개에 대비하였다. 가을 걷이가 끝나면 마을 아낙들은 자루를 하나씩 가지고 큰골이나 절골로 도토리를 주우러 다녔다. 그러다 저녁때면 자루가득 구람을 주워 왔고, 어떤 집은 한 가마니가 넘게 모으기도 했다.
주워온 도토리는 먼저 껍질을 벗긴 다음 개울가에 큰 자배기를 가져다 놓고 물에 담가 도토리의 쓰고 떫은맛을 우려내었다. 아무리 우려내어도 쓰고 떫은맛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그 우려낸 도토리를 삶아서 밥처럼 먹었다. 도토리는 아무리 푹 삶아도 여전히 딱딱했고, 입에 넣고 씹으면 가루처럼 바스러지며 목이 멜 뿐더러 너무 써서 정말 먹기가 힘들었다.
특히 아이들은 먹기 싫어 울고는 했는데 간혹 강낭콩을 넣고 삶아 방망이로 도토리를 으깨어서 섞어 먹기도 하였고 사카린을 물에 타서 끼얹어 먹으면 조금 나았다.
제대로 먹지 못하다 보니 부황(浮黃)이 걸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여섯 살짜리들은 배는 불뚝 나오고 얼굴이 부석부석한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도 여나무 살 먹은 우리또래들은 찔레 순을 따 먹기도 하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송기(松肌)를 먹기도 해서 조금 나았다.
이른 봄,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작은 소나무의 연한 가지 아래쪽 껍질을 벗긴 다음 손으로 앙감쥐고 쭉 훑으면 하얀 목질부분만 남고 두어 뼘 가량의 껍질이 벗겨진다. 이것을 거꾸로 들고 솔잎을 살살 잡아당기면 거친 껍질은 벗겨지고 하얗고 부드러운 속껍질이 남는데 이것을 입에 넣고 씹으면 진한 소나무 향기와 아울러 달짝지근한 맛이 났다. 좀 더 나은 것은 제법 굵은 소나무를 정하여 빨갛고 매끈한 부분을 골라 우선 거친 겉껍질을 대충 긁어낸다. 그 다음 낫으로 아래 위쪽 껍질을 자르고 살살 껍질을 들춰내면 하얀 나무 살이 드러나는데 이 부분을 낫으로 살짝 긁어내면 제법 두툼한 송기가 나온다. 이것은 훨씬 물기가 많을 뿐더러 달짝지근하고 부드러워서 먹기가 좋았다.
그해 봄 연순이가 젖먹이를 안고 마을에 나타났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초라한 옷차림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그 발그스름하고 탐스럽던 볼은 핏기가 없어졌고 항상 헤설픈 웃음을 흘리던 입도 시무룩하니 다물었으며, 눈가에도 그늘이 져서 표정이 없는 얼굴로 바뀌었다. 뒤에 들리는 이야기로 만복이형과 마을을 떠난 후 둘이 무진 고생을 겪은 모양이라고 했다. 먼저 삼척으로 내려가 부두에서 하역작업 일을 했는데 그나마 한 달도 못 채우고 먼저 일하던 토박이들의 텃세에 못 이겨 밀려났다고 했다. 흉년이라 농촌 사람들도 모두들 품팔이로 나서서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고 품삯도 형편없던 시절이다. 그 이후로 주문진 어시장에서 고기 나르는 일, 속초에 가서는 명란공장에서 명란 담는 통을 짜는 일, 덕장에서 오징어 거는 일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둘이 같이 나서서 돈벌이를 하여 그럭저럭 지냈지만 아이가 생긴 후 혼자 벌이로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저히 세 식구가 먹고 살수가 없었고 끼니도 거르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종내는 속초에서 넝마 줍는 일을 하겠다고 쓰레기더미 뒤편의 움막에 들어가고 나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눈총을 무릅쓰고 젖먹이를 안고 연순이 혼자 고향마을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밥술깨나 먹는다하여 좀 뒤실락거린다고 손가락질을 받던 납돌댁도 연순이가 돌아온 뒤로는 말수도 적어졌고 기가 한풀 꺾였다고들 하였다. 동네 호기심이 많은 아낙들은 연순이 얼굴과 만복이 아들을 좀 볼 요량으로 쓸데없는 구실을 만들어 납돌집에 들락거리고는 했지만 연순이는 아이를 끼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낯짝도 보이지 않더라고들 하였다.
경우로 따지자면 연순이가 벙어리네 시댁에 가 있는 것이 옳겠지만 만복이 부모고, 납돌집이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는 양 태연하였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경우가 아니라고 수군거리기는 했지만 누구하나 선뜻 나서서 경우를 따져 그리하라 이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보다도 마을 사람들은 괘씸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사위이고 손자까지 있는데 객지에서 넝마주이를 시켜서야 되겠냐며 연순이 아버지에게 만복이를 찾아서 데려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야반도주했던 앙금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연순이 아버지는 ‘흥, 제깟 놈 고생을 더 해 봐야지..’ 하며 콧방귀를 뀌곤 했다.
연이은 흉년으로 살기도 어려웠고 세상인심도 흉흉해졌지만 이듬해 봄에는 비가 맞춤하게 내려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씨앗을 넣을 수 있었다. 곡우(穀雨) 즈음, 진달래가 피어 앞뒤 동산이 울긋불긋해지자 마을의 연중행사처럼 이어져 오던 곡우날 화전(花煎)놀이를 가기로 의논이 되었다.
마을의 화전놀이는 매년 곡우에 칠성암(현 法王寺) 아래쪽 큰골입구인 보아구(堡口) 계곡으로 가곤 했다. 아침이 되면 이른 조반을 마친 남자어른들이 솥단지 등 무게가 나가는 도구들을 지게에 지고 먼저 출발하였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자잘구레 화전놀이에 필요한 도구들을 챙겨서는 이고 들고 나중에 출발하였다. 남녀노소, 심지어 강아지까지 따라 나서는 화전놀이 날은 마을이 온통 텅텅 비었다. 마을사람 모두 모처럼 웃고 떠들며 나들이를 나서면 울긋불긋 차려입은 사람들로 꽃길을 이루었는데 산에 핀 진달래와 어울려 장관을 이루곤 했다.
남자들은 도착하자마자 우선 솥을 걸고는 곡우물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 골짜기 응달진 곳을 찾아 수액(樹液)을 받을 나무를 정하고는 나무 밑 부분을 괭이로 판다. 뿌리가 나오면 곁뿌리 하나를 자르고 뿌리의 흙을 씻어낸 다음 똑똑 떨어지는 수액을 받기위해 병이나 주전자를 받쳐 놓았다. 수액은 고로쇠나무나 다래덩굴이 많이 나온다고 했는데 이따금 자작나무나 느릅나무를 골라 수액을 받기도 하였다. 한 시간 남짓 있다가 가보면 맑은 수액이 그득히 고이고는 했는데 나무에 따라 엷은 분홍색을 띄는 것도 있고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것도 있었다. 느릅나무 수액은 간에 좋다고 하고, 고로쇠나무 수액은 위에 좋다고 하였는데 어른들께 먼저 맛보신 다음 우리차례가 되면 달짝지근하고 시원한 맛에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다투곤 했다.
여자들은 한편으로는 쌀을 씻어 밥을 짓고, 한편에서는 알불(숯불)을 내어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화전을 지질 준비를 하면 우리들은 참(진달래)꽃을 따 날랐다. 솥뚜껑이 달아오르면 기름을 두르고는 미리 준비한 찹쌀가루나 녹두가루 반죽한 것을 떼어 올려놓아 누른 다음 그 위에다 꽃잎을 얹어 지져 내었다. 또 녹두전을 지지다가 속에 팥고물을 넣어 부꾸미를 지져 내놓기도 하고, 녹두가루에 참꽃 잎을 넣어 반죽하였다가 썰어서 녹두참꽃국수를 하기도 하였는데 어른들만 드리고 우리는 맛보기가 어려웠다.
찹쌀가루 위에 참꽃 잎을 얹어 지져낸 화전(花煎)은 약간 새콤한 맛이 나면서 고소한 것이 기가 막히게 향기로웠다. 또 어른들은 바짓가랑이를 걷고 개울에 들어가 돌맹이를 들추며 가재를 잡기도 하였고, 맞춤한 다래덩굴을 골라 송아지 코뚜레를 장만하기도 하였다. 우리 꼬맹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달음박질도 하고 진달래꽃을 한 아름씩이나 꺾어 자랑을 하거나 꽃잎을 따서 그냥 먹기도 하였다. 또 길바닥에 앉아 꼰지니(고누)를 놀기도 하였다.
농악대의 꽃을 일구던 권씨는 사진기도 가지고 있어 무척 신기하였는데 사진기를 가슴팍에다 대고 네모난 구멍으로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나중 명함보다 작은 흑백사진을 집에서 직접 만들어 내 놓았는데 사진 밑에다 글씨까지 넣어 한 장에 2원씩 동네사람들에게 팔았다. 젊은 아낙네들이나 처녀들은 앞 다투어 사진을 찍고는 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권씨의 여러 가지 재주에 놀라움을 나타내곤 하였다.
마을의 화전놀이(1962년/ 권씨가 찍은 사진)
골짜기와 산등성이는 진달래꽃으로 온통 붉게 물들었고, 먼데 가까운데서 들리는 뻐꾸기 울음소리와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에 넋을 놓다보면 하루가 아쉽게도 금방 지나가 버렸다. 어스름 산 그림자가 드리워질 즈음 은은한 칠성암(七星庵) 범종소리를 들으며 마을로 돌아오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