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국이 열연하게 된다는 "바람의 나라" 그 실제 주인공은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의 이야기다.
대무신왕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 (출처 네이버)
대무신왕(大武神王, 4년~44년)은 고구려의 제3대 왕(재위 : 18년~44년)이다.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무휼(無恤)이고,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22년에 동부여를 공격하였고, 26년에 개마국을 공격하여 영토확장을 꾀하였다. 37년에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때 그의 아들인 호동왕자와 낙랑국의 공주인 낙랑공주와의 사랑 얘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로 다물후 [송양]의 딸 송씨 소생이다. 유리명왕은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첫째 도절(都切)은 요절하였고, 둘째 해명(解明)은 [황룡국](黃龍國)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일로 자살하였다. 이런 이유로 셋째인 무휼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장성하면서 영특하여 큰 지략이 있었다고 한다. 서기 [9년]에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하자, 왕자였던 무휼은 부여의 사신에게 부여의 내부 사정부터 잘 다스리라 충고하였다. 또한 [13년] 11월에 부여가 침공하자 무휼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매복 작전을 펼쳐 부여군을 크게 격파하였다.[14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국정을 맡아 보았으며 [18년] 10월에 유리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서기 20년 10월, 부여의 [대소왕]은 대무신왕에게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사신을 통해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전하며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으로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도다.”라며 까마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대소왕]에게 전했다.
대소왕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21년] 12월 대무신왕은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22년] 2월 고구려의 장수인 괴유(怪由)가 [대소왕]을 죽이기는 하였으나, 부여군에게 포위당한 끝에 후퇴하였다. [대소왕]을 잃은 부여는 분열되어 대소의 동생이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웠으며 7월에는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부여 백성 1만 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다.
- 한나라와의 전쟁
[26년] 10월 [개마국]을 공격하여 복속시켰고, 12월에는 구다국이 항복하였다. 또한 [을두지](乙豆智), [송옥구](松屋句) 등을 등용하여 내치를 다졌다.
[28년] 7월에 [한](漢)나라의 요동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에 고구려군은 을두지의 진언을 따라 [위나암성]에서 수십 일 동안 농성하였다. 한(漢)군이 포위를 풀지 않자 을두지가 계책을 내기를 위나암성이 암석의 땅으로 물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니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에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퇴각하였다.
- 낭랑국 정벌
32년에 낙랑국을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낙랑국 정벌에 앞서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왕 최리(崔理)와 만나 그의 사위가 되기를 약조하였다. 호동은 귀국한 후 최리의 딸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고, 이후 낙랑국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기 위해 호동을 최리의 딸과 정략 혼인시키고,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이 낙랑 정벌 기록은 현재까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낙랑을 한군현(漢郡縣)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한 기록이 없으며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찾을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한편 낙랑국과 낙랑군이 병존하였던 정치체로서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國邑)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호동이 옥저로 사냥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도 있다. 37년에도 낙랑을 정벌하여 병합한 기사가 있는데, 이를 32년 낙랑 정벌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며, 독립적인 기록으로 판단하여 고구려가 한군현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을 정벌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44년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다시 낙랑을 정복하여 살수(薩水) 이남을 한나라 영토로 하였다 한다.
그러나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광무제가 낙랑을 회복하였던 것은 30년의 일로, 이 시기에는 군사 활동이 없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이 오기(誤記)이며 살수가 실질적인 경계선으로 확정되었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 가족관계
* 왕비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록 없으며 아들 해우가 있는데 호동이 32년에 죽을 때, 해우는 태어난 상태였다. 대무신왕의 다음왕인 민중왕이 등극한 44년, 해우는 아직 어려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참고
◦ 백제
온조왕 (기원전 18년~서기 29년)
다루왕 (29년~77년)
◦ 신라
남해 차차웅 (4년~24년)
유리 이사금 (24년~5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