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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식 장군 사적비명(事蹟碑銘) 및 서문(序文) (3) | |
세상에 역사란 오래 지나면 희미해지기도 쉽고 잃어 버리기도 쉬운 것이다. 장군으로써 강씨 시조를 삼아 왔으면서도 자세한 사적(史蹟)을 전하지 못하고 뒷날 신라말엽에 태중대부 내의령(太中大夫 內議令)을 지낸 휘 진(諱 縉)은 시호(諡號)가 정순공(正順公)이요 진양후(晋陽侯)로 봉해진 어른이다.
※ 이은상(1903 ~1983) : 시조작가, 수필가, 사학자, 명예문학박사. 호(號)는 노산(鷺山) 경남 마산 출생으로 연희 전문학교 문과 졸업후 일본 유학, 이화여전 교수 조선일보 편집고문을 지냈으며 호남신문사 사장,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선문단지 초기부터 꾸준히 작품활동을 계속했으며 그의 시조는 조국과 국토 산하에 대한 예찬, 전통적 동양정서, 불교적 무상관에 얽혀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은 거의 신앙적 열상(熱想)으로 나타난다. 령이한 언어가 자연 유출하는 즉흥성은 넓은 독자층을 이루어 시조부흥을 이룩한 원조의 한사람이 되었다. |
처음 ◀ ▶ 시조님 사적탐구 : 강이식장군 사적비명/서문-역사문헌 고증-보사기록 고증-수전사 기록 고증
역사(歷史) 기록상의 고증 |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고대의 기본 사료(史料)임은 누구나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수전쟁편(高隋戰爭編)에 姜以式 장군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金富軾)선생은 유학을 숭상하는 유도통치의 성경(聖經) 구실을 하는 수사(隋史)의 문헌을 토대로 한 까닭이다. 그러나 수사(隋史)의 내용과는 달리 대동운해(大東韻解), 서곽잡록(西郭雜錄)등의 문헌에는 당시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강이식 장군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
보사(譜史) 기록상의 고증 |
우리의 시조 강이식 장군은 서기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에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고구려를 침입할 야욕으로 사신(使臣)과 국서(國書)를 보내왔는데 국서 내용이 지극히 모욕적이고 위협과 야유로 써 있었다. |
수전사(隋戰史) 기록상의 고증 |
수(隋)나라 전사(戰史)기록에 의하면 임유관은 수나라 한왕 양양(漢王楊諒) 원수의 아성(牙城)의 본거지로 되어있다. 남쪽은 벽해(壁海 : 황해)요 고구려의 영토가 있는 동쪽에는 요하(遼河)의 어구(於口)요 동북쪽에는 수나라의 대군이 집결 공격하여 오는 곳이다. 더욱이 청주에서 원병하여 오는 수나라 수군장(水軍將) 주라후(周羅喉)가 이끄는 대군 선단(船團)이 임유관으로 향하여 동진(東進)하고 있었다. 따라서 임유관은 수나라 대군이 집결하는 철통 같은 진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나라의 요새지(要塞地)에 사랑하는 병사를 남게 하고 또 사지(死地)인 함지(陷地)에 있으면서 죽지않고 살게하는 전술을 능히 선용하였다. 실로 전무후무한 교능성사(巧能成事)의 전술이라 하겠다. 이러한 작전을 계획하여 그 계략을 실천에 옮기기에는 실로 엄청난 모험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조(始祖)이신 강이식 장군은 수군(水軍)의 계략이 추호도 오산(誤算)함이 없이 능숙히 감행하지 않고 수군이 의심없이 임유관으로 집결할 수 있도록 그대로 놔둘리 만무했다. 따라서 수군의 형세가 이루어진 것은 우연한 사실이 아니라 반드시 고구려의 병권(兵權)을 장악한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강이식 장군의 작전계략(計略)이 주효(奏效)한 것이다. 원래 전쟁은 항상 상대방의 형세에 따라서 변동하는 즉 적동사지(敵動司之)라고 한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강이식 원수(元帥)는 이미 수나라가 요서와 유주 일대를 노림을 알고 이에 대한 방어작전을 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주력을 요하의 하구(河口)로 정하여 놓고 연합군을 통하여 수군이 요서로 향하는 것을 저지하는 한편 거짓 패배를 꾸며서 영주총관(營州摠管 : 사령관)을 유인하여 임유관으로 집결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실정에서 강이식 원수가 이끄는 육군과 수군은 이 무렵 요하어구(遼河於口) 동편에서 형세에 맞추어 임유관 연해에 있는 수군을 급습하여 해군기지를 점령하고 임유관 해안에서 배수진을 쳤던 것이다. |
고구려 임유관 전투
고·수(高·隋) 전쟁의 원인(1) |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서로 충돌되는 것은 공리(公理)요 정리(定理)다. 고대 동아세아에 있어서 비록 많은 종족이 대립(對立)하였으나, 다 무무미개(貿無未開)한 유목(遊牧)의 만족(蠻族)들이라, 혹 일시(一時) 정치상의 세력을 가진다 할지라도 문화가 없으므로,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그 붕괴(崩壞)하는 날에는 다시 계속(繼續)할 터 까지 없어질 뿐이거니와, 토착(土着)의 민족으로 장원(長遠)한 역사와 상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진 자는 지나(支那)와 조선이니, 지나와 조선은 고대 동아세아의 양대 세력으로 만나면 서로 충돌이 많았다.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도, 반드시 피차(彼此) 내부의 분열과 불안이 있어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시기였다. |
고·수(高·隋) 전쟁의 원인(2) |
만일 이때 지나대륙이 통일되었다면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빈번하였겠지만, 지나도 남북으로 분립(分立)하여 산해관이동(山海關以東)을 엿볼 사이가 없었으므로, 위초발(魏招跋)씨의 백제 침입과 주자문(周字文)씨의 고구려 침입과 같은 일시적 침입은 있었으나, 피차 흥망(興亡)을 다투는 계속적인 혈전(血戰)은 없었다. |
수나라 문제의 모욕적 외교문서와 강이식의 북벌(北伐) 논의(1) |
기원 597년은 곧 고구려 영양왕(陽王) 8年이요, 수문제가 진(陳)나라를 병합(倂合)하여 지나를 통일한지 17년이니, 수나라가 이즈음에 해마다 풍년이 들어 갑병(甲兵)이 매우 충족하여, 고구려와 힘을 겨루고자하여, 무망(誣罔)과 오만(傲慢)을 극(極)한 모욕적 서신(書信)를 보내왔다. |
수나라 문제의 모욕적 외교문서와 강이식의 북벌(北伐) 논의(2) |
<삼국사기>에는 이 글을 평원왕(平原王) 32년 수 문제가 평원왕에게 보낸 것으로 기재하였으나.<수서(隋書)>에는 수문제 개황(開皇) 17년에 평원왕에게 보낸 것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평원왕 32년은 수문제 개황 17년이 아니니,<삼국사기>에는 년조(年條)를 잘못 표기하였으며, 개황 17년은 평원왕이 붕서(崩逝)한지 7년 뒤니, 수서(隋書)에는 그 왕대를 잘못 기록하였다. 인국(隣國) 제왕의 붕서를 매양 그 보상(報喪)의 년(年)으로 기(記)하고, 따라서 그 서실(書實) 발생의 년조(年條)를 이개(移改)함은, 지나(春秋)이래의 습관인 고로,<隋書>에 이같은 잘못 기록되어 있음이거늘,<삼국사기>는 평원·영양 양본기(兩本記)의 년조(年條)는 고기(古記)를 좇고, 피아(彼我) 관계된 사실은 오로지<수서>를 베껴 기록한 한겄이므로, <수서>에 이글이 평원왕에게 보낸 글이라 한 고로, 삼국사기에 드디어 이 글을 평원왕 32년에 이재(移載)하여 년조(年條)를 잘못 표시한 동시에, 사실의 관계인물까지 잘못 기록한 것이다. |
고구려 임유관 전투
임유관(臨關)의 전역(戰役) |
?년(翌年)에 고구려의 요서(遼西)에 침입(侵入)하여, 수나라의 요서총관(遼西摠管) 위충(偉沖)과 접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관에 나오니, 수나라 임금, 문제가 30만 대병(大兵)을 동원,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을 삼아, 임유관으로 나오고, 주라후(周羅喉)를 수군총관(水軍總管)을 삼아 바다로 맡게하니, 주라후가 비록 평양으로 향한다고 말은 하였으나, 사실은 군량미를 실은 배를 이끌고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양의 대병(大兵)에게 군량(軍糧)을 전해 주려 하였으나 강이식장군이 수군에게 바다에서 격퇴할 것을 명령하여 군량미를 실은 배를 격퇴하고, 군중(軍中)에 명령하여 벽루(壁壘)를 지키고 출전치 아니하니, 수병이 식량이 없는 중에 또 6월에 장마를 만나, 기아(飢餓)와 질병으로 죽은 적군이 무수히 발생하여 후퇴하자, 강이식장군이 이를 유수(水)상에 격퇴하여 수나라 군사는 거의 전멸하고 많은 노획물을 얻고 개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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