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는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김일손이 사초에 옮긴 것을 빌미로 해서 발생했지요.
그 장본인 점필재 김종직은 밀양박씨의 외손이었다네요
점필재의 아버지 김숙자는 선산사람이었으나 처가인 밀양 부북면에 와서 살게 된 것이 우리 박문과 인연이었고
우리 조상도 점필재와 운명을 같이 하게 시원이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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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에 대한 참고자료
조선시대_김종직 (金宗直) : 1431~1492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으로 공의 자는 계온(季溫), 호는 점필재(占畢齋)이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으로 밀양 출생이며 본관은 선산이다.
부친인 김숙자(金叔滋)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공의 부친은 원래 경북 선산 사람이었으나 모친 밀양 박씨와 혼인하면서 장인이 왜국 대마도 싸움에서 전사하자 밀양으로 이사하여 공을 낳았다.
16세에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으며 21세에 결혼을 하고 이듬해 1453년(단종1)에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공부를 계속하여 증강시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여막생활을 하였다.
1459년(세조5)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성종대왕이 경연을 열어 우수한 인재를 선출할 때 첫번째로 선출되었다
이로서 정자, 교리, 감찰, 경상도 병마평사등을 역임하고 성종 초기에 경연관이 되었다.
1473년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성리학적 실천윤리로 백성을 다스려 봄가을로 향음례와 경노행사를 실시하고 효제와 주자가례대로 상제봉행을 권장하였으며 교육에 있어서는 길재 선생과 아버지 김숙자의 교육 방법대로 소학을 가르쳤다
이러한 성리학의 윤리 실천으로 학행일치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함양을 찾는 수많은 문하생들이 모여들었다.
함양에 부임하였을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유자광이 학사루에 시를 지어 시판을 걸어 놓은 것을 보고 평소 그의 인품을 좋게 보지 않았던 공이 시판을 떼어 가마솥에 불을 때어 버렸는데 이로 인하여 유자광과의 감정이 악화되어 훗날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으며 두류산(지리산)을 유람 유두류록을 남겼다.
또한 차가 생산되지 않는 함양 백성들이 특산물세인 차세를 납부하기 위하여 전라도로 가서 쌀 1말에 차 1홉을 맞바꾸어 납부하는 것을 보고 이를 감면해 주기 위하여 휴천면 엄천에 토지대금을 백성들에게 보상해주고 관영 차밭을 조성하여 대신 납부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함양읍성의 담장이 240간이나 되는데 그 지붕이 초가로 되어 있어 해마다 군민들이 부역으로써 많은 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이것을 기와로 바꾸어 민폐를 덜어 주는등 선정을 베풀어 1476년에는 선산부사로 승진 역임하던 중 모친상을 당하여 낙향하여 3년을 묘옆에 띠집을 지어 지냈다.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집안의 연못가에 서당인 경렴당을 짓고 후진양성을 하고 있을시 성종이 홍문관 응교로 불렀으나 사양하여 특별히 도승지를 제수하였으나 감당하기 어렵다며 다시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곧 이조참판겸 동지경연사로 제수하시면서 금대 한 벌을 하사하셨다.
이후 전라감사, 한성부윤, 공조참판, 형조참판, 지중추부사,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공의 학문은 고려말 정몽주 및 길재선생의 학풍을 그대로 이어받은 아버지로부터 배워 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가 되었으며 문하생으로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 표연말등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공의 학문적 계통을 보면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인 정몽주로부터→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황,이이로 이어져 내려가는데 길재 및 아버지 김숙자의 영향을 받아 효제충신을 주안으로 하는 실천적 방면에 치중한것이다.
성종의 총애를 받아 당시 훈구공신파 일색이던 조정에 문하생들을 많이 진출시켜 신진 사림세력을 형성함에 따라 훈구파와 심한 반목과 대립을 일으켰다.
공은 1489년(성종20)에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양하여 지중추로 벼슬을 옮기고 김천으로 돌아와 경렴당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때 성종이 특별히 벼슬을 바꾸지 말라 하시고 녹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나라에서 주는 녹을 받으라 권하여도 불응하고 세 번이나 상소를 하여 사양하니 성종이 친히 비답문을 지어서 어사품을 내리셨으며 가세가 빈한함을 듣고 경상도에 하명하여 쌀70석을 하사하고 의원을 보내어 약을 하사하셨다
1492년(성종23)에 밀양 외가에 갔다가 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8월에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소식을 듣고 조정에서는 2일간 정사를 보지 않고 애도하였으며 '문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중국의 고사를 이용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제문)을 지은바 있는데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것이 화근이 되어 유자광이 주도하여 자신들의 방호를 위한 무오사화를 일으켰을때 사화때에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문하생 33명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나 생질 강중진이 화를 당하면서 10여권의 책을 숨겨두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다.
중종이 즉위하자 신원이 회복되고 영의정에 추증되면서 '문충'으로 시호가 다시 내려졌다.
밀양의 예림서원, 구미의 금오서원, 함양의 백연서원(고종때 철폐), 금산의 경림서원, 개령의 덕림서원에 제향되었다.
또한 고령군 쌍림면에 선생을 모시는 부조묘가 있다.
함양의 상림숲의『함양을 빛낸 사람들』역사인물공원에 흉상이 2001년 건립되어 있다
문집은 점필재집, 저서에는 유두류록, 청구풍아, 당후일기 등이 있고
편서로는 동국여지승람, 일선지, 이존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