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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는 주님과
살고있습니까 |
Ⅰ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1티모 4,5) |
우리는 각 본당과 대학에서 6개월 이상의 그룹공부를 마치고 가톨릭 청년 성서모임의 연수를 통해 말씀의 봉사자로 파견 받았다. 그리고 이젠 아련해진 3박4일의 뜨거웠던 연수를 뒤로하고, 그룹원들을 모집하여 그들 앞에서 나눔을 이끌어 가야한다. 하지만 그룹봉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말씀의 봉사자’라는 이름이 무겁게만 느껴지진 않는가? 그룹원들을 앞에 서기엔 무언가 부족한 것 같고 자신 없어지진 않는지... 연수에서 마음껏 주님을 외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지만 바쁜 일상과 또 다시 나약해지는 ‘나’로 인해 다시 주님을 잊고 살아가고 있진 않는지... 연수의 뜨거웠던 주님만을 그리워하고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멀리하고 있진 않은 지...이 같은 고민과 반성은 35년의 성서모임 역사 속에서 많은 선배들이 지속적으로 겪어왔던 것들이다.
가톨릭 청년성서모임 교육부에서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해결책으로 ‘기도와 말씀 묵상’을 꾸준히 제시해왔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끈을 놓지 않고 ‘나’를 주님께 의탁하며,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뜻을 찾고 따르도록 이끌어왔다. 하지만 지속적인 권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지키기 어려움을 호소했고, 우리들 또한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기도와 말씀의 묵상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생명의 양식과도 같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질 수 있다.(티모테오1 4,5)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생명의 양식을 등한시 한 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왜 기도하지 않는가? 우리는 왜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가? 친한 친구와는 매일 전화나 문자메시지를 통해 안부를 묻고 수다를 떨지만, 주님과는 매일 대화하지 않는다. 또한, 매일 미니홈피의 방명록을 확인하고,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을 보지 못했을 때는 ‘다시보기’를 통해 빼먹지 않고 찾아서 보지만, 매일 미사의 말씀을 보거나 꾸준히 말씀을 읽진 않는다.
교육부에서는 이 같은 반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왜 기도를 하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지 생각해보고, 기도와 말씀 묵상을 다시 한 번 권유하고자 한다. 기도와 말씀 묵상을 심층적으로 파고들어 추상적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자.’라는 기존의 제시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고 체화(體化)할지 제시해 보고자 한다.
Ⅱ.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테살 5,17) |
1.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응답이자 하느님과의 대화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당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힘과 아버지께 하는 것처럼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복음에서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기도가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들은 이 땅에 오신 말씀이신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자녀가 아버지와 함께 사랑스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의무나 필요성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즉, 기도란 하느님께 의식적으로 혹은 의지적으로 마음을 돌리고, 아버지인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응답'하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또 이러한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서로의 대화가 하나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활짝 열고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다리는 자세가 먼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세이다.
기도의 힘은 위대하다.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위대한 뜻에 전적으로 투신하게 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받아들일 것을 원하신 하느님께 순종할 힘을 얻게 해 준 것도 기도의 힘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자신의 이익보다는 이웃의 선익과 구원을 위해 일생을 봉헌할 힘이 생기는 것도 기도의 은총이다. 진정한 기도는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인간 내면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듣는 데서 시작된다. 이 하느님의 뜻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양심의 기본 명령과 성경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과정 속에서 찾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생활을 해야 기도가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기도는 인간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인간이 성실한 마음으로 노력하고 애쓸 때 이루어진다. 자기의 삶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으로 영위될 때 하느님께 감사와 흠숭을 드리고, 자기의 삶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생활로 이어질 때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며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고, 다시 올바른 삶에로 찾아가는 내적 쇄신의 과정이 기도행위인 것이다.
그렇지만 기도를 하는 데 있어 하느님을 아버지로 대하는 신뢰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 기도는 빈 말을 늘어놓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우리가 믿기 때문에 또한 기도드려야만 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전적으로 우리와 ‘다른 분’이시며 무한히 우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에게 아버지로서 그리고 진정한 친구로서 다가오신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에 의해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누구와 함께하고 있으며 어떤 분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지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기도해야 하지만 특히 삶의 중대한 계기를 만날 때나 혹은 기쁘고 슬픈 일,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할 때 더욱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믿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림으로써 힘과 용기를 얻고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봉헌하게 된다.
2. 기도의 종류
그렇다면 이러한 기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기도를 방법과 목적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방법상의 분류
① 염경 기도 - 구송 기도
정신 속의 생각과 마음 속의 감정을 하느님께 표현하기 위하여 소리를 내어서 하는 기도이다. 이 염경 기도는 미사와 성사, 준성사와 성무일도, 말씀의 전례 등과 같은 전례 기도와 아침, 저녁 기도, 십자가의 길, 여러 호칭 기도 등의 비전례 기도로 구분할 수 있다.
② 묵상 기도 - 정신의 기도
하느님과 직접 관계되는 일이나,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가는 일들을 생각하며 속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묵상의 재료로는 성서의 말씀이나 교회의 가르침 이외에, 일상생활에서 오는 신앙적 문제나 대자연에 대한 감동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③ 관상 기도 - 신비적 기도
관상 기도는 기도의 형태라기보다는 기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우리가 의식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과 관계없이 우리의 모든 생활에 침투되는 분위기이며 동향이다.
관상은 “자기 안에 특별히 친밀한 방법으로 내재하시는 하느님의 본성을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으로 초자연적 능력으로써 순수하게 하느님 자체를 인식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관상의 주동자는 하느님이시며 사람은 움직임을 받는 자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하느님께 열고 맡기며, 자기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느낄 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에 순응해야한다.
(2) 목적상의 분류
① 흠숭기도
절대자 하느님께 드리는 공경이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행위이다.
② 감사기도
나의 존재와 여러 가지 은혜를 풍부히 베푸심에 감사드리는 기도이다.
③ 용서기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또는 궐함(하지 않음)까지도 잘못한 죄에 대하여, 뉘우치며 용서를 빌어야 한다.
④ 간청기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하여, 또는 현세적으로 필요한 어떤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도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지만, 기도가 지향하는 바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공동선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의향으로 바쳐져야 한다는 것으로 모두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길이 더 좋고 나쁘다고 말하기보다는 진정한 자세로 길을 걸어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즉,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세를 갖추고 기도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우리는 왜 기도하지 않는가?
우리는 앞서 신앙생활을 해 나감에 있어 기도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러한 기도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이미 많이 들었고,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생활 속에서 많은 이유로 인해 기도 생활을 꾸준히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가 기도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부터 그 이유의 몇 가지와 그 대안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시간이 없다.
‘왜 기도하지 않는가?’하는 물음에 기도 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기도를 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성당에 가서, 혹은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하느님과의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좋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쁜 일상 때문에 그런 시간을 낼 수 없다며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핑계거리에 불과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성호를 긋고 ‘하느님, 오늘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당신의 사랑을 담아주세요.’하는 것, 자기 직전에 성호를 긋고 ‘하느님, 오늘 하루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혹시 제가 알지 못한 사이 하느님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용서해주세요.’하는 것, 식사 전 기도와 식사 후 기도를 습관처럼 중얼중얼 외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하는 것, 길을 가다 느껴지는 하느님의 손길에 ‘하느님, 감사합니다.’ 말씀드리는 것 등이 모두 훌륭한 기도가 된다. 화살기도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집과 학교, 직장을 오가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하루는 24시간이다. 그 중 수면 시간,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실제 활동을 하는 시간만도 10시간이 넘는다. 그 시간의 1/10도 채 되지 않는 시간도 하느님을 위해 쓰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꾸만 만나고 싶고, 자꾸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처럼, 하느님도 늘 그렇게 우리를 만나 대화하고 싶어 하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된 우리도 하느님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기쁘게 내어드려야 하는 것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결코 귀찮은 짐이나 의무가 아니다. 우리 삶에 기쁨을 가져오고 사랑을 채워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2) 기도할 때 마음이 집중되지 않는다.
기도할 때 분심이 드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매우 자주 겪는 어려움이다. 기도를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지난 일에 대한 후회,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특히 염경기도와 같이 단순한 기도를 할 때 이와 같은 분심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 중에 마음이 산만해지면 ‘지금은 다른 생각이 너무 많이 드니, 나중에 기도를 해야지’하며 기도를 미뤄버리고, 나중에는 결국 기도를 하지 않기 일쑤다.
하지만 그럴 때 기도를 포기하기 보다는, 그런 분심마저도 하느님께 솔직하게 고백하고, 우리의 생각을 하느님께 고정시켜달라고 청해야 한다.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마음속에 있는 기도의 방해 요소들을 목록으로 작성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 모든 것을 주님 앞에 가져가, 우리 마음 한 가운데에 그분께서 자리 잡아 주시도록 청하는 것이다. 우리와 친교를 나누시길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우리의 흩어진 마음을 당신 앞으로 모아 주실 것이다.
(3) 기도드릴 말이 없다.
가톨릭 신앙생활을 하며 정해진 기도문을 외는 것에만 익숙했다가, 청년성서모임에서 처음 ‘자유기도’를 접하고 당황했던 경험을 가진 성서가족이 적잖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며, 나도 기도를 하고 싶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라서 기도가 어렵다고 생각했던 경험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도란 그리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누군가 기도를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라고 말했다. 우리의 창조주 하느님은 늘 친한 친구와 같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신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 자신의 생각을 편안하게 이야기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훌륭한 기도이다. 기도에는 미사여구나 유창한 말솜씨도 필요하지 않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표현이 아주 단순하지만 내용은 완전하다.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가 긴지 짧은지, 문법에 맞는지 틀리는지, 문장이 아름다운지 투박한지에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솔직하게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그럼에도 기도가 어렵게 느껴지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성경에 나오는 기도문으로 기도를 드려보아도 좋겠다. 특히 시편은 많은 사람의 개인기도, 혹은 공동 기도를 모은 것으로, 찬미, 감사, 용서, 청원 등 다양한 기도를 담고 있기 때문에 시편으로 기도드리는 것도 훌륭한 기도가 된다. 또, 가톨릭 기도서에 나오는 기도문을 습관처럼 외지 말고, 진심을 담아 나의 언어로 바꾸어 기도드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4) 기도에 응답을 얻지 못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느님께 말씀드리지 않을 필요는 없다. 야고보 사도는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야고 4,2)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청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모두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어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야고 4,3)라고 했다. 또,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죄악을 품거나,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않거나, 사악하여 하느님과 사이가 갈라진 경우, 하느님을 떠나 제멋대로 어긋난 길을 돌아다닐 때 등에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나의 기도에 대해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기도를 그만두고 싶어진다. 기도하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같고, 하느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듣지 않고 계신 것만 같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때에, 하느님의 방식으로 응답하신다. 그 때는 우리가 원하는 때일 수도 있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때일 수도 있다. 그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원했던 방법으로 들어주지 않으셨다면, 나중에 돌아봤을 때 결국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그 방법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인 경우도 있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나보다 나를 만드신 하느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신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그러므로 내가 기도한 바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기도의 힘을 무시해서도 안 되며 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포기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듣고 계시며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굳은 신뢰를 갖고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일 것이다.
4.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기도생활
성경에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인간들이 나타난다. 구약의 아브라함, 모세, 다윗, 욥 그리고 예언자들, 현자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초대교회 신자들, 그리고 교회 역사 안에서 빛을 던져준 많은 성인 성녀들은 기도하는 인간의 전형을 이룬다.
특히 예수님은 우리가 추구하는 기도의 모범이셨다. 예수님의 매일의 활동은 기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으며 모든 것이 기도에서 나왔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여쭈어 보았고 또한 하느님의 응답을 들으셨다. 그분은 하느님을 '압바(Abba)'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어린 아이들이 자기의 아버지에 대한 신뢰에 찬 친밀감을 나타내며 부르는 '아빠'와 같은 말이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항상 당신의 '아빠'에게 기도하셨다. 이러한 기도를 통해서 당신의 참된 과업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그대로 행동에 옮기심으로써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기도했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모든 시간에 끊임없이 깨어 기도할 것을 명하셨고,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기도에 대한 사상이자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기도의 기본 바탕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일상적인 작은 일에서부터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기도 속에서 풀어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 전체가 기도의 소재가 되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란 영원한 생명에의 양식이며 가장 훌륭한 활동이자 신앙의 표현이다.
기도할 때는 자신이 하느님 앞에 있다는 마음 자세로 하느님께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형식적인 기도나 불손한 태도는 올바른 기도의 자세가 되지 못한다. 또한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자세이다. '당신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소서.'라는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의 뜻에 응해야 한다. 때문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의 자세가 요청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응의 자세와, 그것이 꼭 성취되리라는 확신과 인내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대화인 기도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교리나 신학이나 신자생활에 관한 지식은 하느님께 대한 간접적인 설명인데 반해 기도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로서 그분을 직접 체험하고 그분의 음성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5. 묵주 기도
(1) 묵주기도의 이름과 유래
묵주를 의미하는 라틴어 로사리움(Rosarium)은 '장미 밭'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묵주기도를 뜻하는 로사리오(Rosario)는 '장미 꽃다발' 혹은 '장미 화환'을 뜻한다. 중국에서 서양 꽃인 장미를 매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매괴신공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묵주기도라고 부른다.
정확한 묵주기도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박해 시대에 로마에서 순교자들이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가 사자의 먹이가 될 때 머리에 장미꽃으로 엮은 관을 썼다고 한다. 그러면 박해를 피한 신자들이 몰래 그 시신을 거두어들여 장미관을 모아놓고 꽃송이마다 기도를 한 가지씩 바쳤다고 한다.
한편 수도자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막의 은수자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매일 시편을 50편, 100편, 또는 150편을 바쳤는데, 이것이 나중에 수도자들의 성무일과가 되었고, 글을 모르는 수도자들의 경우에는 시편 대신에 주님의 기도를 바쳤다. 바치는 횟수를 세기 위해 작은 돌멩이나 곡식알 같은 것을 실로 묶어서 굴리면서 사용한 것이 묵주로 발전했다는 유래가 있다.
12세기 이후 특히 삼종기도가 널리 보급되면서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깊어지자 열심한 신자들은 주님의 기도 대신에 성모송을 50번 또는 150번씩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묵주기도가 오늘날과 유사한 환희, 고통, 영광의 15단 형태를 띠게 된 것은 15세기에 와서이다.
교황 비오 5세는 1569년 묵주기도의 기도문과 형식을 정하여, 묵주기도를 환희의 신비 5단, 고통의 신비 5단, 영광의 신비 5단, 모두 15단으로 하고 각 단은 주님의 기도 한 번과 성모송 10번, 영광송 1번으로 이뤄지도록 하였다. 최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전통적으로 묵상하던 세 가지 신비 외에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다섯 가지 사건을 묵상하는 ‘빛의 신비’를 추가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완성되었다.
(2) 묵주기도의 의미
교황 바오로 6세는 "묵주의 기도는 복음 전체의 요약이자 구원적인 강생에 집중하는 기도이며 그리스도께 대한 끊임없는 찬미이고 순수한 기도" 라고 정의한 바 있다. 묵주기도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환희의 신비)을 시작으로 예수님께서 구원의 소식을 말씀과 행동으로 선포하신 공생활(빛의 신비)과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희생(고통의 신비),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승리(영광의 신비)까지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묵상할 수 있다.
또한 묵주기도를 통해 묵상하게 되는 네 가지 신비는 우리의 삶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기쁨 뒤에 고통이 찾아오고 그 후에 다시 영광이 찾아온다는 단순한 진리를 각자의 삶을 통해 경험하고 있다. 묵주기도는 이러한 환희, 고통, 영광이라는 ' 순환고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담아내고 있으며, 예수님의 공생활을 담은 빛의 신비를 통해 더욱 깊이 묵상할 수 있게 해준다.
묵주기도는 성격상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께 바치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기도이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묵주기도가 바로 관상기도임을 뜻한다.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의 신비를 기억하며,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다. 또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노력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그리스도께 우리의 간절한 청을 드리는 것이다. 나아가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가 묵주기도를 바치는 그 행위를 통해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묵주기도는 평화의 기도이자 가정의 기도이다.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기도이며, 가족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는 가운데 나자렛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아 성가정을 가꾸어갈 힘과 용기를 얻게 된다.
어떤 신자들은 같은 기도문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보다 그냥 자유기도를 바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묵주기도를 특별히 장려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한 방법으로 쉽게 바칠 수 있고 철저히 성서를 묵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연인이나 부부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고백이라고 한다면 같은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도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이다.
(3) 묵주기도의 방법
묵주기도는 구도와 염도가 가장 아름답게 조화된 기도라고 한다. 구도란 일정한 문장으로 정해진 기도문이고, 염도는 일정한 문장으로 정해지지 않은 내심의 기도 또는 침묵의 기도이다. 묵주기도는 일정한 기도문을 되풀이하여 외우면서 예수님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주기도를 할 때 각 단의 신비 내용을 깊이 묵상하고 마음속에 되새기면서 정성을 다해 바쳐야 한다.
그런데 묵주기도는 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 중에 분심이 들거나, 아무 생각 없이 입으로만 기도문을 중얼거리는 등 진정으로 신비의 내용을 묵상하고 집중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인간인 우리는 바쁜 일상에 지쳐 쉽게 피곤해지고 부주의하게 되며, 이런 이유로 묵주기도를 하다가도 유혹을 이기지 못해 중간에 기도를 그만두고 자버리거나 딴 생각을 하면서 기도문 자체에만 얽매인 형식적인 기도를 하기도 한다.
기도할 때에 중요한 것은 지치고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기꺼이 내어 놓고 가장 작은 분심과도 떨쳐내려 애쓰며, 마음을 다해 묵상하고 은총을 청하는 것이다. 특히 묵주기도는 빠른 속도로 기도문을 중얼거릴 것이 아니라 각 구절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정성스럽게 바쳐야 한다. 또한 묵주기도를 하기 전에 지향을 세우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지향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는 것만을 바라며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묵주기도에 담긴 신비를 충분히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면서 자신이 필요한 은총을 정성스럽게 청해야 한다.
묵주기도를 얼마나 깊이 묵상하는가는 우리가 얼마나 자기 생활을 기도화 하고 신심을 다했는가에 달려있다. 묵주기도를 꾸준히 바치고 그 신비를 묵상하면서 자기 생활을 더욱 영적으로 풍요롭게 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묵주기도는 깊은 영성에 도달하기 위한 힘 있는 수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나눔♡ - 기도
#1.
1.아버지의 용서 아빠와 꽤 친했던 아빠 친구 아저씨.. 제가 초등학교 시절엔 그 아저씨 가족들하고 같이 바닷가에 여름휴가도 갔었고 아빠와 아저씨와의 친분으로 같이 놀러 다녔던 적도 많았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빠와 아저씨 두 분 다 비슷한 업종의 사업을 하고 계셨고 아저씨와 아빠가 서로 담보 없이 큰 돈(어음)을 빌려주는 관계가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아저씨의 사업이 점점 힘들어 졌는데 아저씨는 아빠에게 계속 잘 된다고 하셨고, 아빠는 더 큰 돈을 빌려다 아저씨를 빌려준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아저씨가 사업 부도를 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저씨는 그 당시 해외로 도망가셨고 아빠가 같이 부도를 내지 않는 이상 다른 데서 돈을 빌려와 아저씨를 빌려준 아빠는 그 돈을 다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엄마는 새로 이사 온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다시 이사 갈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아빠는 몇날 몇일을 힘들어 하셨습니다. 회사에서 퇴근해서 집에 오실 땐 거의 몸을 못 가눌 상태로 술에 취해 오셨고 그나마 쉬는 날에는 집에서 계속 줄담배를 태우시거나 낮부터 술을 드시곤 하셨습니다. 집의 가정 형편도 걱정이 되었지만 날마다 술을 드시는 아버지가 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친구를 너무 믿었던 아빠 자신의 문제, 친구에 대한 미움, 그리고 아빠도 같이 부도를 낼지 아니면 그 돈을 다 갚아야 할지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힘들어하셨던 시기였던 거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새벽에 30분씩 일찍 일어나서 엄마와 묵주 알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실에 나가면 두 분이 묵주기도를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때부터 아빠는 술, 담배도 점점 줄이셨고, 다른 힘든 일까지 마다하지 않고 쉬는 날도 없이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 당시 작은 돈도 아니었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애들 4명까지 부양해야할 가족이 8명인 아빠한테 쉬운 결정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아빠를 속이고 본인 재산을 어느 정도 챙기고 도망을 간 아저씨를 용서하는 것도 쉬은 것은 아니었을 껍니다. 그건 기도의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드린 묵주기도로 아버지는 친구를 용서(저희아빠 지금 그 아저씨 가끔 만나시고 옵니다.. -.-)하고 새로 시작할 용기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느끼는 기도는 마음으로는 정말 하기 힘든 용서도,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시작할 용기도 가능하도록 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2. 성서모임 대표 시절 성서모임 대표 시절 이해하기 힘든 나날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신부님이 바뀌었지만 학교 성당 내에 활등도 많은데 왜 외부 활등을 하냐며 같은 성당 활동인데도 탐탁치 않아하시고 안 좋아하셨던 신부님, 수녀님들로 상처도 많이 받고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럴수록 더 그룹봉사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룹봉사자들에게 기도부탁도 하고 제 자신도 더 열심히 성서를 찾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그런 기도를 했던 겉 같습니다. ‘당신이 좋은 방법으로,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해달라고’. 제 욕심이나 제가 편한 방법으로 해달라고 하면 하느님이 보시기에 제가 좀 이기적으로 보일 것 같아서요. . 그러던 중 성서모임 그룹원들이 너무 많이 신청해서 학교 성당에서 무시할 수 없는 숫자가 되었었고 그렇게 되니 학교 신부님 수녀님들도 저희에게 관심을 가져 주시게 되었습니다. 차츰차츰 해가 지날수록 저희 학교 내에 여는 미사도 함께 집전해 주시고, 신부님, 수녀님, 수도자 분께서 저희 그룹 내에 그룹원으로 함께 공부도 하시고, 마르코 그룹 봉사도 직접 진행해 주셨습니다. 만약 저의 급한 성격대로였다면 왜 당장 해결해 주지 않으시냐고 불만하고 힘들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 저는 기도와는 다르게 당장 해결해 주지 않으신다고 하느님께 불만 기도도 많이 했었지요... 하지만 그분에겐 나름의 때가 있고 나름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말 그분 보시기에 좋은 방법과 때가 있다는 것을 나름 깨달은 시기였습니다.
3. 나의 묵주기도 대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전에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지도 꽤 되었고 나도 제대로 된 남자친구 만나서 연애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성서모임 봉사자로써 간구하는 게 있으면 기도를 하라고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하면서 나는 정작 그러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묵주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54일 동안 기도하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 기도가 너무 이기적인 기도 같기도 했고, 하느님이 보시기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기도는 정말 다급하고 힘든 기도들이 많을텐데 내 기도까지 들어주실까...하는 마음으로 54일동안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내 이상형의 사람이 딱 나타날 줄 알았는데 기도하고 1년이 지나도 안 나타나더군요..역시...이런 기도는 너무 웃겨서 안 들어주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며 일상을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내 남자친구는 반드시 성당에 꼭 다녀야 한다던가, 키가 좀 컸으면 좋겠다던가, 그런 저의 이상형에 대한 생각도 많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둔 것도 저의 생각을 변화시키시려는 하느님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다가 친한 오빠의 소개로 지금 남편인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당도 안다니고 키도 크지 않았지만 마음씨가 착하고 잘 웃는 게 인상도 좋아보였습니다. 2년 동안 만나면서 그 친구는 성당에서 세례도 받았고 지금도 꾸준히 성당에 다니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느끼는 것은 아무리 하찮은 기도라도, 하느님께서는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 때에 당신이 계획한 방법으로...
4. 지금 나의 기도 지금 나의 기도는 솔직히 예전에 비해 많이 부실합니다. 예전처럼 매일 묵주기도도 하고 싶고 미사도 매일 드리고 싶지만 바쁜 회사생활, 사회생활과 나름의 집안일들로 쉽지만은 않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기도는 식사 전기도 (후기도는 회사사람들하고 밥먹다 보면 빨리 먹고 일어나야 해서 잊게 되더라구요...), 저녁기도 (부부를 위한 기도), 가끔 생각날 때 드리는 화살기도입니다. 화살기도 중 하나는 저의 첫 그룹봉사자한테 들었던 나눔이었는데...버스에서 임신한 아줌마를 볼 때 저 아이가 나중에 태어나면 건강하게 자라서 꼭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내 기도로 인해 정말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얼마나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었겠어요....그리고 제 나름의 화살기도는 친구들 생일이나 축일 때 문자보내주면서 문자 갈 때 잠시 화살기도 바치는 것입니다. 친구의 건강, 행복 등을 주제로요... 짧지만 다른 사람 위해서 하는 기도를 하느님께서 무시하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찮은 기도도 늘 응답하시는 하느님이시니까요....
#2.
묵주기도를 처음 만난 것은 중3 올라가던 겨울방학이었어요. 원래 다른 학년을 가르치셔야 할 교리 선생님이 한 번 잘못 들어오셨는데, 특수학교 교사이신 선생님이셨어요. 교리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무지 감동을 받아서 눈물이 날 뻔 했던 것과, 선생님의 성함(강 리따 선생님), 그리고 묵주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만 기억이 나요. 그렇게 해서 어떻게 묵주기도에 입문하게 되었고.... 저는 중3때 지방에 있어서 고입 연합고사를 봤는데, 그래서 나름대로 수험생이었어요.^^ 보충수업에 자율학습까지 하는.. 아무튼 그 때에 묵주기도를 참 열심히 했어요. 묵주기도가 꼭 책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아베마리아출판사에서 나온 파란 묵주기도 9일기도 책을 많이들 보실 거예요. 저도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 책을 보고 있는데(빛의 신비가 나온 후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샀는데, 옛 책이 손에 익어서..^^;) 그 책 앞에 ‘성모님께서 성 도미니꼬와 복자 알라노에게 주신 약속’이 있어요.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은총 15가지에 대한 것인데, 그게 너무 좋아서 다이어리에 써 놓고 그랬어요. 그리고 실제로 저는 그 때 너무나 큰 은총을 받아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냈지요. 수험생활도 잘 마무리할 수 있었구요.^^
그러다 대학교 2학년 때, 정말 간절히 바라는 일이 생겼어요. 그리고 다시 묵주기도를 시작했죠. 어떤 지향을 두고 54일 기도를 하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 지향으로 꾸준히 54일 기도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더군요. 하다보면, 내가 왜 이 기도를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구요. 그런데 앞에 얘기한 그 약속 중 하나인 ‘묵주기도를 통해 청하는 바는 무엇이나 얻게 될 것이다.’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처음엔 들어주실 것 같았는데..... 결국엔 들어주시지 않더라고요. 냉담을 할 생각도 해 봤고, ‘대체 왜?’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며 하느님을 미워했던 것 같아요.
한 6개월쯤 지났나, 어느 날 십자가를 봤는데.. 예수님이 너무나 힘없이 매달려 계시더군요. 그리고 그 예수님이 너무 슬퍼보였어요. 내가 많이 울고, 힘들어하는 동안,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걸 아시면서도 나에게 주시면 안 되기 때문에 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마음도 너무나 아팠고, 그 분은 나보다 더 많이 울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로는 예수님을 원망하지도 못하겠더라고요. 더불어 ‘청원기도’를 하지도 못했어요. 청해봤자 그 분 마음대로 하실 것 같아서요.
그로부터 또 1년 쯤 지나서.... 청원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교만임을 깨달았어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참 좋아했던 성경구절이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신 것,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이었어요. 그 기도가 정말 완벽한 기도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먼저 내가 원하고, 청하는 것을 말씀 드리고, 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는 기도가 가장 좋은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정말 해가 되지만 않는다면, 사람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생각과 함께요. 주변에서 열심히 기도해서 그 은총을 받은 사람들도 많잖아요. 기적도 일어나구요. 그 때부터 조심스레 다시 청원기도를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제가 가장 나누고 싶은 건 지금부터 하는 얘기예요. 저는 올 해 들어 심한 어둠에 시달렸어요. 열등감, 질투, 미움, 배척, 이기심 등등. 정말 마음 편하지 않은 한 학기를 보냈고.. 그게 조금씩 조금씩 심해지더니, 7월에 들어서는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로 울어댔어요. 심할 땐 하루에 서너번씩.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힘들게 느껴졌던 건 남자친구와의 관계였어요. 이런 저런 작은 불만에서 시작했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 불만과 미움이 너무나 커져서, 무슨 말만 해도 비꼬아서 받아들이고, 상처 주는 말만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고 돌아서서 바로 후회하고, 사과하고, 그게 1주일을 못 가고. 그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이대로는 정말 살 수가 없겠다 싶었어요. 나도 아무 것도 정상적으로 할 수가 없고, 그 친구에게도 상처만 줄 뿐이어서, 차라리 미안함과 아쉬움을 안고 살더라도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끝내기 전에 정말 마지막으로, 정말정말 마지막으로 기도 한 번만 하고 끝내자-라는 결심으로 묵주기도 54일기도를 시작했지요. 더불어서 어차피 개학하면 못 하니까, 매일 미사도 가기로 했구요. 지향은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기도였어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계속 만나라고 하면 계속 만나고, 헤어지라고 하시면 헤어지겠다고. 이 친구와 만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봉헌하니까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보여달라고. 알려달라고.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기도. 미사는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밖에 가지 못했고, 기도는 꾸준히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기도를 한지 열흘 정도 되었을까, 너무나 놀라운 제 내면의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모든 것들을 감싸 안으려고 노력하고 있더라구요. 그 친구에게 서운했던 마음들도 접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걸 보게 된 것 같아요. 또, 그 친구가 개신교라는 것 때문에도 정말 많이 힘들었고, 그 친구가 만나는 교회 사람들이 너무너무 미웠는데.. 그 미움대신, 나와 다른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하느님을 향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몇 줄의 말로 표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저에겐 너무나 놀라운 변화였어요. 7월 말만 해도, 정말 미친 듯이 울어서 매일 눈이 부었는데..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고. 마음이 정말 많이 편해졌어요. 하느님께, 또 저를 위해 함께 빌어주시는 성모님께 너무나 감사했어요. 이런 것이 기도의 힘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저는 그동안 저를 힘들게 하고 제 마음을 괴롭게 했던 것이, 하느님의 목소리가 아니라 어둠(악마?사탄?마귀?그런 것들)의 목소리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그 목소리와 싸워나갈 영적인 힘을 기도를 통해 얻는 것 같아요. 하느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것을 모두 다 깨닫지 못했고, 아마 깨달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싸우고, 미워하고,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그래서 저는,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그분 뜻대로 쓰시도록 맡겨드리고, 그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저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남자친구 뿐만이 아니라, 제가 만나는 세상 모든 사람을요.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가득 담은 말 한마디, 인사 한 번, 웃음 한 번을 건네주며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나가는 힘, 어둠의 목소리에 끌려다니며 나 스스로를 못살게 굴고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는 힘. 이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해, (또 더불어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음을 너무나 찐-----하게 느끼고 있는 요즘입니당... ^-^
#3. 첫 연수봉사에서 큰 은총과 기쁨을 받았던 나는 너무도 행복했다. 만남의 잔치까지 오면서 복학을 앞두고 지난 휴학 1년간을 돌이켜보니 인간적으로 계획했던 일들이 맘대로 이루어 진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성적이나 취업준비에 있어 남들보다 떨어지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행복한 와중에도 은근한 걱정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주님의 부르심은 계속되었다. 처음엔 학교에서 탈출기 봉사만 하겠다고 마음먹었었지만 본당의 성서모임에 지난 겨울 연수생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고 지난 보좌 신부님이 가시면서 하신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본당에서도 창세기 봉사를 시작하게 된것이다. 그리고 센터봉사까지 하게 되었다.
내가 본당에서 봉사를 한다는 것을 안 어머니는 이제 4학년인데 할 수 있겠냐며 걱정하셨다. 그 때문에, 차마 센터까지 들어갔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때 나에게 다가왔던 말씀은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필리 4,13)”였다. 그리고 사실은 이렇게 하면서도 성서모임이 다른 인간적 일들에 핑계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4학년이라, 바빠서, 여러 이유들로 성서모임에서 떠나가고 피하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하나의 좋은 예를 만들어 주고 싶은 은근한 마음도 있었다.
너무 일을 크게 저지른건 아닐까, 하면서도 후회는 되지 않았고 막연한 용기도 났다. 설마 하느님이 내가 잘 되길 바라는 분인데 내가 잘 못되길 바라고 부르시는 것은 아니겠지 싶었고, 연수봉사가 끝나고 허탈한 마음에 또 다른 사랑에 목이 말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4학년이 시작되었다. 남들은 취업준비에 열심인 시기였지만 나는 오히려 성서모임에 더욱 빠져들고 말았다. 성서모임에서 처음으로 ‘재미’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행복했다.
그러던 5월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대기업 중 하나인 모 그룹의 인턴 사원 모집이 있었다. 말이 인턴이지 합격하면 교육 후 신입사원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공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회사의 전형방법은 그나마 내세울 것이 없는 나에게는 경쟁력이 있었던것이기에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사지원을 앞두고 마감을 하루 앞두고야 자소서가 쓰여지기 시작했다. 결국 마감에 임박해서야 자소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고 그러다가 센터 회합에도 빠지게 되었다.
지원서를 넣고 나서 불안했다. 사실 기대는 안한다고 했어도, 어떻게 생각하면, 이번에 인턴합격이 되어 채용이 확정되면 방학때 잠시 쉬더라도 마지막 학기인 2학기 때는 아무 부담없이 성서모임도 더 원없이 하고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부족하고, 아무 기대는 안한다고 했지만 솔직한 저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걱정도 많이 되고 사랑도 많이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뜻보다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앞으로 무슨 길로 이끄시든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돌봐 주십시오.”라고.
그때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조용히 나를 따스한 손길로 쓰다듬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이 흘렀다. 그 손길은 너무도 따뜻했다.
음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가 너의 마음 다 알고있다. 내가 이렇게 너를 보살필 것이니 걱정말아라.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것을 알수있었다..
기도를 마치고 초를 끄려고 했으나 꺼지지 않았다. 하느님이 나와 더 얘기를 하고 싶어한 다는 것 같기에 기도를 마치지 않고 이어서 계속 하게 되었다. 모처럼 평소에 생각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더 많은 기도를 실컷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기도를 끝내고 초를 끄고, 불을 켰을 때 제일 처음으로 본것은 책상위의 탈출기 그룹나눔 문제집이 었다. 그 책엔 이렇게 써있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그 말씀이 보이는 순간 그동안의 걱정보다 많은 힘과 용기가 났다. 꼭 하느님께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나에게 메시지를 주시는 것 같았다 . ‘ 죄많은 인간이 무엇이기에 오주여 이토록 돌보나이까 하느님 당신은 하느님 당신은 나의 전부 되시도다’라는 찬양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의 가사가 너무도 와닿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는데 매일 어머니께서 아침마다 들으시는 평화방송에서 찬양곡으로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 나왔는데 전날 밤의 일처럼 너무도 신기했고 마치 꿈만 같았다..
며칠 후 서류전형 결과가 나왔고 다행히 합격하여 며칠 뒤에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서류에 붙은 것만으로도 좋았고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또 욕심이 나기도 했다.
그 무렵 슬슬 여름연수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 여름엔 인턴이 되던지, 취업준비에 매진하던지 그런 일들로 여름연수는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에 내겐 관심 밖의 일이나 다름없었다.
면접날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나는 요렇다할 준비를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면접날이 되었다. 면접장으로 출발하기전, 다시 기도를 드렸고 그 전처럼 또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인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면접장에가니 같은 과의 친한 친구들과 기다리게 되었다. 1학년때부터 함께 웃고 고생한 친구들 모두 함께 같이 잘됬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서로를 이겨야 하는 경쟁자나 다름없었다.
그 때 기도드렸다. “제 옆의 사랑하는 친구들이 정말 얼마나 여기에 가고 싶어하는지 하느님도 알고 계시니 꼭 그들의 소원 이루어 주시고, 혹시 그들이 떨어지더라도, 그리고 내가 떨어지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고 어떤 경우에서라도 사랑과 행복이 가득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그 때문에 친구를 미워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하할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그리고 잠시 후 면접장에 들어갔다. 내 생애 첫 면접이었는데 면접장의 분위기는 살벌하도록 무서웠다. 이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보다 내가 더 잘났음을 어떻게든 보여야 하는 것이었고 그렇기위해서는 어느정도의 포장도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물론 준비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만, 정말로 이렇게 해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면접을 망쳤다. 약속이 있어 지하보도를 건너는데 지하보도엔 많은 노숙자들이 있었고 나는 언제나처럼 무심코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어느 한 여자가 노숙자의 손을 잡고 얘기하고 있는것이 보였다. 여기에 있으면 추운 데는 없는지, 아프지는 않는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갔을 때 또 다른 노숙자 앞에서 지나치려다가 걸음을 돌이켜 지갑속의 천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부끄러웠다. 오늘 나는 남들보다 내가 더 잘나고 높았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는데....
마더 데레사께서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제가 성공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이 생각났다.
며칠 후 면접결과가 나왔고 당연히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리고 처음엔 생각에도 없었던 연수봉사를 신청하게 되었고 이번 연수봉사를 통해 또다시 너무도 놀랍고도 큰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때 내가 입사하여 인턴이 되었더라면, 나는 이번 여름 이런 은총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너무도 쉽게 한번 만에 취업했더라면, 내가 더욱 교만해졌을 것이다. 아마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것을 주시기 위해 남들보다 ‘빠른 길’ 보다는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느님께서 결국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생각한다. 그 기도와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통해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를 언제나 보살피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상반기에 좋은 회사에 합격하지 못하고 또 다른 회사에도 두어번 떨어졌던 것 또한 아쉬워하거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소중한 것을 얻었기 때문에. 그리고 내게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알게 되었으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