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와의 사귐을 위해섭니다. [요일 1 : 3]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은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귐,
이 사귐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고
그 성품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맺게 하시는
열매로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사귐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성령의 열매와는 정 반대인
육체의 일[갈 5 : 19 ~21]이
나타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귐을
통해 성령님께서 맺게 해주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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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성령의 9가지 열매 가운데 첫번째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성령으로만이 열매 맺을 수 있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내어주신 십자가의 先사랑입니다.
죄로 인해 원수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6 : 27]
또한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눅 6 : 32]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은 우리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먼저 조건 없이 사랑하므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입니다.
성령으로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우리도 삶을 통해 열매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증명하셨 듯 죽음보다 더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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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락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매 맺는 "희락"은 구원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희락"의 참의미는 조건과 환경을 초월한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근원적인 구원의 기쁨은 상황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기쁨이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죄의 유혹을 가져다 주는 짜릿한 재미를 희락으로 흔히 착각하기 쉽습니다.
저급한 쾌락을 기쁨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저급한 잠깐의 재미를 주시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성도들에게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쁨의 열매인 "희락"은 조건과 환경을 초월한 기쁨입니다.
일회적인 조건의 변화로 인한 일희일비의 삶이 아닌 날마다 구원의 감격을 간직하여
조건과 환경에 관계없이 항상 기뻐하는 삶이야말로 성령의 열매로서의
"희락"을 맺고 있는 삶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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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
유명한 화가가 되기를 원하는 몇 명의 소년들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아주 조용한 가운데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화판 더미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작업장이 엉망이 되어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을 향해 붓을 집어 던지며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소년은 울면서 화실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다시 붓을 들고 예수님의 얼굴을 완성시켜 보려고
애썼지만 그의 창조성과 영감은 화를 내고 난 후 전혀 떠오르지 않아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화를 내어
내 쫓은 소년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미안하구나. 내가 좀 심했다. 나를 용서해다오. 내가 더 잘못했다.
너는 그저 화판에 걸려 넘어진 것 뿐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공연히
화를 내어 하나님의 영감을 막았구나. 나와 함께 화실로 돌아가자꾸나."
그런 후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마저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열매인 "화평"은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나 자신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 화해의 기본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화평의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는
물과 햇빛입니다.
성령 안에 거할 때 용서할 수 있고 화평할 수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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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참음
오래 참은은 상대방을 포기하지 않고 참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잘못을 하면 쉽게 분노하고 그것을 곧바로
표현하기를 즐겨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 화나는 부분, 잘못된 부분을
그 즉시 지적하고 분내기 보다는 기다려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에게 시간을 주고 또 나 자신에게 시간을 주면서
끈기있게 기다려주다 보면 어느 새 처음에 분한 감정, 상한 감정 등이
잠재워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됩니다.
기다림 후에 우리는 상대방이 더 잘못되기 전에 기회를 줘야 합니다.
오래 참음과 포기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마치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오랜 기다림처럼 말입니다.
그녀는 아들이 성적으로 타락해서 십대 때 사생아를 낳고, 마니교에 빠져
계속 쾌락을 즐기고, 신플라톤주의에 빠져 있었던 시간들을 참고 기다리며,
아침,저녁으로 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 가운데 어거스틴은 마침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참회록>을 비롯한
수많은 글들을 남겨 "은총의 박사"로 불리우며 기독계의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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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자비는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며
당신의 입장을 알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세대간의 갈등, 이념간의 갈등, 종파간의 갈등, 인종간의 갈등, 성차별 등이
극심할 때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내 입장만을 고집하며 상대방 이야기 듣는 것을 꺼려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이것과는 정반대이지요.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고 눈높이를 맞춰보며, 나의 입장이 아닌 바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알고 싶어 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
진정 그 분의 뜻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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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
양선은 자신이 가진 것을 실제로 나누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소유라는 마음을
품을 때 비로소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려운 사람의 입장을 알고 겸손히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 때 주의할 것은 조금의 거만함이나 교만함, 높은 사람인 체하는 입장으로서
상대방을 돕는 것 등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온전한 일꾼으로서 "섬김"의 자세를 지닌 "나눔"이야말로 진정한
양선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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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
"하루 종일 이렇게 맨발로 다니시는 거예요?" "하루가 아니라 30년이 훌쩍 넘었소."
"왜 이렇게 맨발로 다니시는 건가요?" "통일이 되면 신으려고요."
"할아머지는 무얼 전하시는 건가요?"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거침없이 말했다.
"하늘의 소명이 있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더니 갑자기 외쳤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비의 초대, 예수 그리스도 자비의 초대"
"...김구 주석을 꼭 닮았어, 축하합니다." "미스코리아 유관순, 가짜 아니요"를 외치며
맨발로 다니는 최춘선 할아버지를 보고 사람들은 헛소리나 하는
미치광이 노인네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평생 사명이라 여겨온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죽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충성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약속한 바를 끝까지 실행해 옮기는 것입니다.
설령 그 약속한 것이 내게 불리하고 때로는 해로울지라도
변함없이 지켜내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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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
보통 "온유"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부드럽고 화를 내지 않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온유의 참된 의미는 불의에 대해 타협하지 않으며 진리에 대해 올바르게
반응하여 옳은 말과 행동으로서 옮기는 것입니다.
영화의 한 장면이 기억납니다. 전쟁 중에 A는 어렵게 구한 트럭을 타고
국경을 넘어 통과합니다. 열명 정도의 피난민 중에서 아이를 안은
젊은 부부도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럭이 이내 세워지고 적군 수비대의 불시검문을 받게 되는
수비대의 대장이 아이의 엄마를 지못하더니 30분 간을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남편도 떨고만 있을 때 A가 나섭니다.
"전쟁 중이라도 수치심은 있습니다."
"뭐야 다들 죽고 싶어?"
"전쟁 중이라도 당신의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
그 대장은 여기까지 듣자, 화가 나서 이 남자에게 총을 겨눕니다.
다행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됐지만 생명을 담보로 한
의로운 행동이었습니다.
온유는 불의와 타협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
옳게 말라고 행하는 모습, 이것이 온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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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
군인은 명령에 따라 죽고 삽니다.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 중심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반영합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법도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좇아 얼마든지 절제할 수 있습니다.
예뻐지기 위해 다이어트를 할 수도 있고, 장래 성공을 위해 당장의 즐거움을
떨쳐버리고 책에만 매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절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을 때에 맺을 수 있습니다.
청지기는 소유(=물질, 달란트, 시간 etc)를 주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이 소유들이 내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청지기 의식은 모든 부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도록 하는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