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useong | 2011-07-20 11:42:10
1, 신라이전 시대 수성구 지역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 이 지역을 언제부터 “수성”이란 이름으로 불렀을까? 문헌상으로는 고려시대에 편찬한 삼국사기 지리지에 처음으로 “수성군(壽城郡)”이란 지명이 나온다. 신라 경덕왕16년(AD757년)에 이전부터 있어온 우리말 표현의 지명을 한자표기에 맞춰 전국적으로 고쳤다는 기록 가운데 처음으로 이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기사에는 당시의 수성군을 수창군(일명 가창군)으로 개명했다고 했다. 또 이 기사에는 수창군이 본래는 위화군(喟火郡)이라고 했다. 그뒤 조선조 세종때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본래 위화군이라하고 또한 상촌창군(上村昌郡)이라 불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수창군의 영역이 현재의 수성구와 반드시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다.다만 삼국사기 기록의 문맥으로 보아 대부분 이 지역일 것으로 비정될 따름이다. 그리고 지금의 가창이란 이름이 이 때에 쓰여진 것을 보면 현재의 달성군 가창면 지역이 당시에는 수성에 속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창면 지역은 신천의 발원지로써 지형상으로 보면 옛날에도 현재와같이 수성구 지역과 같은 생활권에 속해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다만 욱수천 매호천이 남천에 합류하는 고산 지역은 현재는 수성구에 속하고있지만 경산지역에 위치해있었던 당시의 압독소국이 신라의 공격을 받고 복속된 후 역시 경덕왕이 그 이름을 바꾸었던 장산군(獐山郡)에 소속돼있었다. “수성”이란 지명은 8세기경에 생긴 것으로 보지만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것은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자료에의한 학계의 추정으로는 구석기로 편년되는 약1만년˜70만년전부터 이 곳에 사람이 살았던 자취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성구지역에는 이처럼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고 그뒤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삼한시대),철기시대(삼국시대),통일신라기,고려시대,조선시대 등을 거쳐오면서 지금까지 이곳을 무대로 인간의 활동이 펼쳐저온 것이다. 수성구 지역에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된 것은 2000년 국립대구박물관이 파동(巴洞)의 바위그늘유적을 발굴조사하면서였다. 불을 맞았던 것으로 보이는 이 유물이 발견된 직후 구석기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이 있었으나 1999년까지만해도 대구의 고고학적 자료로는 신석기 시대조차 인정할 수 없었던 터라 구석기 유물로 단정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1998-1999년� 상동(上洞)지석묘 유적의 교란층에서 3점의 태선문 빗살무늬 토기편이 발굴됨으로써 신석기 유적이 있다는 사실이 최초로 입증되고부터 구석기 유물의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에 앞서 대구인근 지역인 상주군 낙동면 신상리와 밀양의 고례리에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된 바 있어 대구지역에도 구석기 시대의 인간 거주의 흔적이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것이 파동 유적에서 드러난 것이란 견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2006년에 달서구의 월성동에서 구석기 유물이 확인되면서 파동 바위그늘의 불맞은 유물도 구석기의 것으로 거의 확실시된 것이다. 수성구 지역에 구석기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해도 이들에대한 유적이나 유물이 매우 적어 어떻게 살았는지 쉽게 알 수 없다. 다만 파동 지역이 신천과 산성산, 법이산 등의 강과 산을 끼고있다는 점에서 수렵과 어로를 하면서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그 뒤 이어지는 수성구의 신석기 시대의 유적 유물로는 상동지역 신천의 자연제방 위에서 발굴조사된 지석묘 유적의 교란층에서 나온 태선문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있는데 이는 남해안 지방에서 신석기 중기에 유행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일부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는 기원전 3500년-기원전 2000년전의 것으로 추정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도 수성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신천의 퇴적물이 만든 충적평야와 자연제방이 주된 활동무대였고 이같은 생활환경으로 미루어 어로와 채집,수렵활동 등으로 생계를 꾸렸을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 이전까지 수성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로는 주거집단내의 구성원들간에 불평등한 관계나 갈등이 진행되는 등 정치세력화 현상은 뚜렷히 나타나지않았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서는 정치세력의 출현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청동기시대에대한 개념과 시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별로 논란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대구시사의 편년에 따라 그 개시 시기를 기원전10-7세기(고조선이 위치했던 중국동북지방을 포함하면 BC10세기,한반도남부로 한정하면 BC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북한 서북지역에 철기가 나타나는 시기)까지로 했을 때 그러한 흔적이 보이는 것이다. 이같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크게 지석묘와 주거지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그중 지석묘는 대구권에는 4곳에서 조사발굴되었다. 수성구 지역에는 신천중류 일대와 상류인 가창지역에 있었던 지석묘가 그가운데 가장 큰 집단을 이루고 분포되어있었다. 또한 대덕산에서 발원한 욱수천과 매호천 유역에도 여러 기의 지석묘가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니까 청동기 시대이전의 수성구지역에는 동쪽의 금호강과 연결되는 욱수천,매호천 유역과 신천 중상류 유역에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던 것이다. 이들이 축조한 지석묘군은 최근까지 한반도내에서 뿐만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드물 정도로 많이 남아있었다. 일제침탈이후인 1920년대 초기만 하더라도 옛 대구읍성 바깥에는 지석묘가 즐비해 장관을 이루었다고한다. 그러나 일본인 들의 대구유입이 늘어나면서 그들이 정원석 등으로 마구 훼손하는 바람에 이미 그 7년뒤에는 거의 사라지게되었고 욱수천 매호천 유역의 지석묘도 해방후의 개발에 밀려 차츰 없어지게 되었다. 주거지의 경우는 구릉지와 하상충적지와 같은 평지에 입지하고 있었는데 ,수성구에서는 상동의 구정화여고(현 아파트)자리인 평지와 시지동의 지석묘가 발견된 지역에 인접한 욱수천 유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시대에는 이미 일부 지역의 평지와 구릉지에 마을을 이루고 하천변의 자연제방에는 지석묘를 만들어 집단의 경계표시를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주거지는 청동기 중기에는 주로 장방형이고 세장방형이나 방형의 형태로도 만들었다. 후기에는 원형이나 타원형 흑은 말각방형을 이루고 중앙에 작업구덩이를 가지고있었다. 이 시대에도 출토유물로 보아 농경,어로,수렵,채집 등의 방식으로 계절에 따라 주변의 여러 자원을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구지역의 청동기 유적에는 전기(前期)의 것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드러난 중후기의 것만을 분석해보면 대체로 중기이전에는 구릉지와 평지에 살다가 후기로 오면서 평지에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후기로 올수록 농경의 비중이 커지고있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상동의 거주유적은 청동기의 전후기를 막론하고 하천변의 충적대지에 위치해 다른 마을에 앞서 농경을 시작해 계속 그 비중을 높여온 것으로 보인다. 상동의 청동기 전기 주거지의 규모는 전체 약17동(150m2)이 확인되는데 이는 당시 대구지역 마을 규모로는 평균 크기에 해당될 것으로 짐작되고 인구는 작게는 10명 많게는 30여명 정도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동의 후기 거주지유적은 총주거면적 86.21m2로 6명-17명내외의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당시 상동지역의 사람들은 집단적 묘역을 만들었는데 이는 이들이 집단적으로 생업과 관련된 갈등과 분쟁을 해결 조정하기위한 사회적 통제기능을 수행하는 분화가 진행되고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개인의 위상을 강조하는 묘제라기 보다 집단중심적 특징을 드러낸 것이라할 수 있다. 상동의 지석묘1호에는 피장자 가까이 구덩이를 파고 불을 피운 다음 자갈로 덮은 흔적이 있어 당시 장례의식과 관련 무엇인가를 태웠을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이 시기에는 내부 혹은 외부와의 분쟁이나 갈등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여러 증거들도 나타나고 있다. 그같은 갈등이 집단 안팎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해관계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주거지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무기류,방어용 시설,마을의 방어전략적 위치,화재의 흔적 등이 이를 말해준다. 상동의 주거지 17동 가운데 9동이 화재손실을 입었고 지석묘에서는 돌화살촉,간돌검 등이 나오고 있어 이때 사회에도 상당한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생각된다. 그뒤 철기시대는 철기가 등장하면서 청동기가 실제 사용되기 보다 의례용으로 쓰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철기시대는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데 중국의 전국시대무렵 우리나라 서북한 지역에 철기문화가 들어오는 기원 전후까지(기원전 300년-0)가 전기이고 그후 기원후 300년까지가 후기로 농기구 등 생활도구 등이 이미 철기로 보편화되는 시기다. 철기시대 후기는 대체로 학자들 가운데는 원삼국시대라고도 부르는 역사시대에 들어오는 시기이기도하다. 대구지역의 경우는 호남이나 호서지방보다도 늦은 기원전 1세기경 전반에 쇠도끼,쇠칼,쇠모자 등이 무덤에서 발굴되고 있다. 수성구 지역에는 상동의 구정화여고 지역에 원형점토대토기유구가 발견되었고,만촌동유적,신천동 청동기유적,지산동 청동기 유적 등이 그 시기의 것이다. 동모,동과,소동탁,간두령 등이 나온 신천동 유적은 기원전1세기-전반경 무렵의 것 으로 보고, 일광경(日光鏡),소명경(昭明鏡),우각형동기(牛角形銅器),과초(戈鞘),검파두식(劍把頭飾),검초(劍鞘)등이 출토된 지산동 유적은 기원전 1세기 후반경으로 보고 있다. 세형동검3점,중광형동과(中廣形銅戈)1점,검파두식금구(劍把頭飾金具)칼코부속구 등이 나온 만촌동 유적은 기원후1세기 전반의 것으로 편년된다. 또한 무덤은 기원전2세기경부터 지석묘 대신 목관묘가 축조되기 시작하고 무덤의 부장품은 홍도 대신 흑도장경호와 삼각형점토대토기 등이 부장되고 있어 이전까지의 지석묘 사회와는 다른 묘제와 부장품채택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기원후 1세기에 들어와서 동검,동과,동모와 더불어 철검,철모,철부 등의 철기류,그리고 주머니호 등이 출현해 위세품으로 청동무기류와 철기류가 부장되는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수성구 지역의 만촌동 유적 등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청동기가 부장되고 무덤에 따라 부장품의 양과 종류,질 등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기원전 2세기말부터 기원후 1세기전반 사이에 사회분화가 크게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때 수성지역을 비롯한 대구권에 사회권력이 집중되고 유력한 지배자가 출현하고 있는 과정으로 보인다. 대구권의 펑리동 유적에는 한경(漢鏡)과 방제경이 출토되기도해 이 시기에는 지석묘를 축조했던 청동기 시대와는 달리 대구권을 훨씬 넘어서는 교역연결망을 가지고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경은 낙랑을 포함한 장거리 교역망을 통해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아 물산의 분배와 소비권이 이같이 광역화되었을 것으로 보는 한편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이같은 광역적 상호연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대구권에는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에 걸쳐 수많은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고 신천변에 특별히 많은 것은 한반도 전역에서도 특기할 현상이며, 대구권이 호남 호서권과 다른 유형의 청동 철기 유물이 나오고 있는 것도 이 지역의 정치체 성격과 관련 관심을 끈다. 기원전1세기 이후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사이에 이상과 같은 고고학적 유물자료들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수성지역을 보함한 대구권에도 초기국가 형태인 읍락국가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중국의 삼국지,일본서기 등의 문헌에도 이른 바,한국(韓國) 혹은 마한,진한,변한 등 삼한(三韓)으로 부르는 국가들의 존립시기에 소국(小國)들이 숱하게 등장하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다만 수성구의 고산지역은 당시 경산지역에 있었던 압독국(押督國)의 일부였고 나머지 수성구 지역과 대구가 그때에 어떤 이름의 정치체나 읍락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는지는 여러 학자들에의한 논의는 무성하지만 단정적으로 판단할 기록은 없다. 대구권이 신라에 편입된 후에도 달벌(達伐),달불(達弗),또는 달구벌(達句伐)로 불리워졌다는 사실과 수성지역을 이전부터 위벌(喟伐)로 불렀다는 기록은 이곳의 읍락국가 형성과 깊은 관계가 있는 지명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경산지역에 있었던 압독국은 초기문헌에 그 이름이 남아있는데 대구권의 소국은 왜 이름이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않았을까. 경주지역에서 세력이 가장 강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읍락국가인 사로국이 주변 읍락국가를 복속시켜 신라가 되는 과정에서 대구권의 읍락국가는 바로 사로국에 병합되지 않고 인근 국가에 복속되었다가 다시 신라에 합쳐지는 과정을 밟았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이같은 학설을 가진 일부 학자들은 경산지역의 고고학 출토물이 질과 양에서 대구지역 보다 우세하다는 점에서 대구지역의 읍락국가가 경산의 압독국에 병합되었고 압독국이 사로국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에 편입된 후에도 달벌,위벌 등의 이름이 문헌에 남아있는 것은 이들이 상당한 정치체를 형성했었던 것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신라가 삼국통일후 달구벌로 천도하려했던 점이나 이 달구벌을 수창군(현 수성지역)으로 이름을 바꾼 위벌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 점등은 읍락국가시절의 대구지역 정치체가 가진 위상을 짐작케하는 것이다. 당시 대구지역의 읍락국가는 현재의 대구광역시 행정구역과 비슷할 만큼 상당히 넓은 영역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구지역이 언제 사로국이나 압독국 등에 편입되었는지 불분명하지만 대구지역영역에 관한 최초의 문헌기록인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 경덕왕16년(서기 757년)기사에서 보이는 내용이 그같은 사실을 짐작케한다. “壽昌郡(壽一作嘉) 本喟火郡 景德王改名 今壽城郡 領縣四 大丘縣 本達句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八里縣 本八居里縣(一云北恥長里一云仁里) 景德王改名 今八居縣 河濱縣 本多斯只縣(一云沓只) 景德王槪名 今因之 花園縣 本舌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三國史記> 권34 地理志 尙州條)” 이 기사는 이미 8세기중반에 신라 경덕왕이 지명을 한자식으로 고치면서 본래 위화군이었던 수성군을 수창군 혹은 가창군으로 개명하고 그 아래 대구현,팔리현,하빈현,화원현 등 네 개현을 영속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수창군(가창지역 포함)이 대구전역의 행정중심인 군치(郡治)지역이며 현재의 칠곡지역인 팔거현과 현재의 달성군에 속하는 하빈현과 화원현을 관할하고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미 이들 다섯 지역에는 모두 5-6세기의 고분군이 분포되어 있고 주변 산지엔 산성이 있어 각 지역은 이미 성촌(城村)을 이루어왔고 이들 마을이 모두 합쳐저 하나의 읍락국가를 형성했던 것이 신라에 들어 그같은 군현의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정치적 중심지가 8세기 전후한 시기에는 수창군이었다는 사실이 이 기록으로 보아 분명하나 5개지역 유적과 유물을 비교해 보면 달구화 지역이 위벌 지역보다 우세하다는 점에서 이 지역이 읍락국가시기엔 달구화의 정치적 위상이 위벌 보다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곳이 신라에 병홥된 후 어느 때부터 위벌지역이 대구권 전체를 다스리는 군치지역으로 위상이 높아졌던 것이다. 학계에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달구벌로 천도하려했다가 귀족들의 반대로 좌절되자 그 과정에서 위상이 높아진 달구벌의 정치적 위상을 약화시키기위해 군치를 위화에 두었다는 주장을 펴고있다. 이같은 수성구의 옛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대구도호부 속현조 수성현항에서 “在府南十二里 本喟火郡 一云上村昌郡 新羅景德王改壽昌郡 一作嘉昌 高麗初改今名”이라 적고 있다. 고려초에 수성현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본래는 이곳을 위화군 혹은 상촌창군이이라 불렀고 신라경덕왕이 수창군 혹은 가창군으로 이름을 고쳤었다고 한 것을 보면 수성구 지역은 그 이름이 위벌 혹은 상촌에서 유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이곳에 상동(上洞)이란 지명이 남아있는 것과 위벌의 위(喟)는 위를 뜻하는 상(上)과 같고 벌(伐)은 벌판과 같은 뜻의 지역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위벌,상촌,상동 등은 같은 말이라 할 수도 있다. 이곳에 남아있는 상동지석묘, 두산동고분군,지산동 유적 등은 상고시대의 수성구 지역의 상황을 짐작케한다. 요컨대 상고시대의 수성구 지역은 신천의 중상류를 근거지로 한 위벌이 현재의 광역 대구권과 유사한 영역을 다스리는 중심지였고 욱수천 유역 고산지역은 달구벌 보다 더 세력이 강성했던 압독국의 군치지역에 편입되어있었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중요한 역할을 해온 곳이라할 것이다. 이 고산지역의 유적으로 고산고분군,욱수동고분군,남천지역 지석묘군,고산산성 등이 이를 말해준다. 수성지역이 언제 신라에 편입되었는지는 문헌과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지만 지리적으로 보아 분명한 것은 대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한 562년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한 578년에 건립된 대구 무술오작비에는 대구권에서 수리시설을 했던 내용을 전하면서 이미 그 당시 대구지역이 신라에 통합된 것을 알 수 있게 적어놓아 이 비가 세워진 시기 이전에 대구와 수성지역이 신라 땅이 된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비를 통해 이미 이 시기에 신라의 지방행정편제가 실시되었고 그에 따른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수성지역은 신라의 어떤 지방편제에 속해있었을까. 앞서 보았듯이 통일 신라 직후, 이전부터 실시하고 있던 주군제(州郡制)에서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꾸었다는 것과 통일신라 전에도 주군제(州郡制)에 따른 지명이 삼국사기 기록에 보이고있는 점은 신라의 당시 행정제도를 말해준다. 이는 이미 6세기경에 수성구를 포함한 대구권에도 주군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첫 대구권 군치지역은 기록상으로 드러난 것은 없으나 유물 유적 자료를 비교할 때 달구화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6세기경에는 위화군을 군치로 하여 3-4개의 성촌이 이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보고,압량군 예하에는 1-2개의 성촌이 속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들 군은 광역주(廣域州)인 하주(下州)의 영역에 속해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6세기경 신라 지증왕대에 위화군과 예하의 성촌,압량군과 예하의 일부 성촌을 설치한 사실과 진흥왕 16년 광역주인 하주를 설치하면서 이 지역을 영속시켰던 것에서 드러나있다. 이같은 사실에서 현재의 수성구는 당시 광역주인 하주에 속하면서 현재의 대구광역시역과 비슷한 지역 전체를 다스리는 행정중심(군치지역)인 위화군과 현재의 경산군과 대구시역 일부를 다스리는 군치지역인 압량군 일부를 아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는 삼국통일과 함께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분권체제가 중앙집권체제로 바뀌면서 백제,고구려 고토를 포함한 전국을 9개주로 나누고 그 아래 군현제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의 주요거점에 5소경(小京)을 두었다. 이에따라 수성지역의 상위행정단위인 하주의 변화가 생기면서 새로운 영속관계를 맻게된다. 그이전까지 수창군이 소속되었던 하주가 소멸되면서 삽량주와 거열주로 나누어지게 되고 대구권을 다스리던 수창군은 삽량주에 영속되었다. 삽량주의 주치(州治)는 양산(梁山)이었고 이 주에는 오늘날의 경남지역 일부와 경북의 경산군,영천시,대구시 등이 영속되었다. 그러나 신라왕조는 통일을 달성한 후 지배체제의 재편과정에서 신문왕5년부터 전국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군의 하부조직으로 비로소 현(縣)을 두었다. 현은 이전부터 있어온 성촌(城村)을 재편한 것인데 대구 지역에도 이때부터 현제가 실시되었고 수성지역은 삽량주에 속한 위화군과 압량군 일부로 현재의 대구광역시의 대부분 권역과 경산시 지역을 다스리는 군치지역의 역할을 했다. 위화군에 영속된 현은 대구를 관류하는 신천의 동편 지역인 군치지역 외에,서쪽의 달구화현(達句火縣), 월배지역인 설화현(舌火縣),성서지역인 다사지현(多斯只縣),칠곡지역인 팔거리현(八居里縣)등 4개현이었다. 한편 수성구에 편입된 고산지역은 현재의 경산시 전체를 다스리는 압량군 군치지역의 일부로써 금호강을 경계로 한 팔공산 기슭 동북쪽의 현 동촌지역 일원인 치성화현(稚省火縣)을 속현으로 두었다. 이들 군현에는 <삼국사기>직관지에 규정된 바와 같이 군에는 군태수(郡太守)1인과 외사정(外司正)1인, 현에는 현령(縣令) 혹은 소수(少守)1인 등의 지방관을 파견해 지방출신 촌주들의 도움을 받아 지방을 다스렸다. 그후 이같은 군현제는 앞서 설명했듯이 경덕왕대에 와서 한화(漢化)정책 실시되면서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꾸었다. 이 때 대구라는 지명이 처음 쓰이게되었고 압량군은 장산군(獐山郡)으로 치성화현은 해안현(解顔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같은 한자식 지명은 19년 뒤인 혜공왕 12년(776)에 복고정책에 의하여 다시 이전의 지명으로 돌아가게되었으나 통일신라말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자식 지명을 차츰 널리 사용하게된다. 이러한 수성지역의 당시 내부사정은 자세한 기록이 없어 제대로 알 수 가 없으나 후대의 기록인 고려말의 주관육익(周官六翼)을 인용한 <신증동국여지승람>대구도호부 성씨조의 글은 여러 가지 의미를 시사한다. 즉 수성(壽城)빈(賓)라(羅)조(曹)혜(嵇)[주(註);주관육익(周官六翼)에 “수성에 옛날에 3성(城)이 있었는데,수대군(壽大郡)일명 양성(壤城)은 그 성(姓)이 빈(賓)이고 구구성(句具城)은 그 성이 나(羅)이고 잉조이성(仍助伊城)은 그 성을 조(曹),혜(慧)라하였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리고 수성군이 다스렸던 해안현(현동촌지역)에대해선 “해안(解顔) 모(牟) 백(白) 하(河) 신(申) 정(丁)[주(註);육익(六翼)에 또 말하기를 성화성(省火城)은 모(牟)이고,무가성(無價城)은 신(申)이고,불좌성(佛坐城)은 백(白)하(河)이고 명성(鳴城)은 정(丁)이라하였다.]”고 기록햇다. 이 기록에서 ”옛날“은 늦어도 신라의 경덕왕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따르면 당시 수창군 내에는 3개의 성이 있었고, 수창군의 속현인 해안현에는 4개의 성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대체로 한개의 군현에는 3-4개의 성촌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한개의 성촌에는 한 두개의 성씨들이 모여 살아 강한 혈연집단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성들은 현재 그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이 기록은 신기하게도 대구의 수성을 본관으로 하는 현재의 성씨들과 같아 완벽한 입증 자료로는 보기 어려우나 신빙도를 더해주는 것이다. 1990년 서울의 중앙일보사가 조사해서 발행한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에는 빈(賓)씨의 본관은 달성(達城),수성(壽城),대구(大邱),영광(靈光)등의 4본이 전하고 1985년 현재 2,647명의 인구가 있는데 영광 빈씨를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같은 혈족이라했다. 또 수성 조(曺)씨는 전국에 83명(1985년현재)이 살고 있고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대구의 수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수성 나(羅)씨는 이 책에서 금성(錦城;옛 나주)나씨에서 분관된 것으로 기록했으나 그 세계(世系)가 분명치않다. 수창군이 다스려왔던 대구권은 통일신라 후기에 벌어진 진골귀족이 중심이 된 왕위쟁탈전의 과정에서 전쟁터가 되었고 이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구체적 기록이 없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822년 김헌창의 난과 그 뒤 김우징과 장보고의 반란 등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가창권은 신라의 왕경인 경주로 진입하는 길목에 놓였기 때문에 군사적 피해가 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같은 왕위쟁탈전은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을 갖추었던 통일신라의 체제가 약화되고 지방세력들이 대두되는 결과를 낳았다. 대구권에도 이같은 지방세력인 호족이 두각을 나타냈으나 삼국사기나 고려사등 관찬사서에는 기록이 없고 조선조 성종 때 왕명에 따라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이란 저서 안에 들어있는 글 가운데 그같은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말의 대학자인 최치원이 찬한<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 壽昌郡 護國城 八角燈樓記)>라는 기문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왕위쟁탈전이 일어난지 70년후 쯤 신라의 지배체제가 동요되는 틈바구니에 중앙정부와는 반독립적인 지배권력을 가진 호족이 대구지역의 행정중심인 수창군에 있었다는 사실과 이 호족의 위세와 성향을 짐작케하는 내용들이 적혀있다. 이 글은 이재(異才)라는 이름의 호족이 수창군내에 있는 호국성에 건립한 팔각등루에대해 최치원이 그 경위와 의의를 적은 기문이지만 그 기록에 호족의 실체파악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를 6개의 줄거리로 정리해볼 수 있다. (1)天祐 5년(908년;효공왕 15년) 戊辰 10월 겨울에 호국의영도장(護國義營都將)중알찬(重閼粲) 異才가 남영(南嶺)에 팔각등루를 세웠다. 나라의 경사를 빌고 전쟁의 화를 물리치기 위함이다. (2)모든 땅에 붙인 이름은 대개 하늘의 뜻에 부합된다. 이 보(堡)의 서방(兌位)에 못이 있어 佛佐라 하며,동남방(巽位)모퉁이에 못이 있어 불체(佛體)라하고 그 동쪽에 따로 못이 있어 天王이라 불리고, 서남방(坤維)에 고성이 있어 달붙(達佛)이라 하며,성의 남쪽에 산이 있어 佛山이라한다. (3)중알찬은 훌륭한 대부이다. 기회를 타서 뜻을 발휘하여 일찌기 풍운 속에서 민활한 역량을 시험하였고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 몸을 수양하며 水土(영토)에서 은혜를 갚을 생각을 가졌다. 범처럼 나타나 국가의 세가지 해(三害)를 아울러 제거하였고 뱀처럼 도사리고 들어앉아 더욱 인격의 수양을 쌓았다. 이미 나쁜 무리들을 제거하였으니 곧 반드시 시골로 다시 돌아갔다. 살고 있는 곳이라면 사람들이 감화할 것이니 어디에 산들 좋지않으리오. 드디어 높은 언덕을 택하여 義堡를 쌓았다. (4)이에 이르러 왕도의 서쪽(西畿)을 靜守하며 농사에 종사하였다. 지방의 주민을 편안이 돌보고 친구들을 맞아 잘 접대하니 찾아오는 자가 구름 같았는데도 바다 같은 아량으로 그들을 받아 들였다. (5)알찬은 진실로 기둥집안의 큰 선비이며,위대한 본국의 충신이다. 불법으로 방패와 창을 삼고 진리로서 갑주를 삼아 능히 한 경내를 편안이 하여 10년이 지났다.<중략>龍年 羊月 庚申日 밤에 꿈을 꾸었는데 달불성 북쪽 麻頂溪寺의 都一大 불상이 앉은 연화좌가 하늘 끝까지 솟고, 왼쪽의 補處菩薩의 높이도 역시 그러했다.<중략>또 성 남쪽의 불산 위를 보니 일곱 미륵상이 몸을 포개고 어깨를 밟으며 북으로 향해 섰는데 그 높이가 하늘에 달렸다. 며칠을 지난 뒤 다시 꿈을 꾸니 성의 동쪽 장산(獐山)에 나한승(羅漢僧)이 보였다. (6)그해 孟冬에 등루를 세우고 11월4일에 이르러 公山 桐寺의 弘順大德을 청하여 座主로 삼고 齋를 베풀어 慶讚하였다. 泰然大德, 靈達禪大德, 景寂禪大德, 持念禪大德, 興輪寺의 融善呪師 등의 고승이 다 모여들어 법회를 장엄하게 하였다. 이같은 줄거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신라말 서기 908년무렵 수창군내의 호국성을 근거지로 삼아 호국의영도장 중알찬이라 부르는 이재라는 이름의 호족이 살았다는 사실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때의 수창군은 현재 대구광역시 영역에 유사한 지역을 다스리는 군치지역인 지금의 수성구 일대를 가리킨다. 이재는 “시골로 다시 돌아왔다.”는 표현에서 드러났듯이 수창군 출신의 지방민이고, 따라서 이같은 촌주의 신분에서 그를 육두품 출신의 고위직인 중알찬이라 하고 또 호국도의영도장이라 칭했지만 이것은 나라에서 내린 벼슬이라기 보다 자칭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지방 호족들은 중앙권력이 약해지면서 자칭 장군이나 성주라했는데 이재의 경우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재의 세력은 기록상 여러 옛 지명에서 드러났듯이 현재의 수성구 지역을 중심으로 신천 서쪽의 대구권(달성),동촌(불좌지),비슬산(불산),경산(장산),동화사(공산 동사)등지를 장악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뿐만아니라 등루 건립 기념법회에 대구권지역의 대표 사찰이면서 9세기 후반 경문왕대에 국왕에의해 민애왕의 원탑이 건립되는 등 민애왕가의 원찰인 동화사의 큰 스님이 재의 좌장이 되었고 멀리 왕경의 대찰과 각지역의 고승대덕들이 재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의 위세를 충분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재의 정치적 성격은 당시 호족들이 일반적으로 반신라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친신라적 성향을 뚜렷이 드러냈고 자신을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뒤인 927년,대구의 팔공산에서 벌어진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의 결전 과정에서는 그같은 세력을 형성했던 호족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은 그 사이 몰락의 길을 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