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로 일천리 08 황산~무흘 가는 길
대동여지도 상의 황산역(경남 양산시 물금읍 부근)에서 다음 역인 무흘역(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미전리 부근)까지의 영남대로는 일제 때 놓인 경부선 철도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일제가 조선의 관도였던 영남대로를 따라 철도를 부설한 것은 이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직선 길이었기 때문이다. 주로 낙동강변을 따라 나있는 이 길은 절벽과 수심 깊은 강물 사이에 난 잔도(棧道)였다.
성병달씨(76.향토사학자.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는 "1022호 지방도가 나기 전에는 화제리 사람들이 양산군 물금읍으로 가기 위해 주로 이 길을 이용했다" 며 "이 길은 대부분 낙동강 한 굽이에 돌을 깎아 만든 사닥다리길 이어서 발을 모아야 겨우 통과했을 정도로 위험했다" 고 말했다. 아직도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돌이 물이 일렁일 때마다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황산역터인 물금취수장에서 화제리로 가는 황산잔도에는 현재 철둑 왼쪽으로 수풀이 무성한 채 길이 허물어진 곳이 많지만, 낚시꾼들이 종종 이용해 아직은 간간이 흔적이 보인다. 강을 거슬러 화제리 쪽으로 20m쯤 올라가면 동래부사 정현덕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19세기 후반 양산군수 이만도가 이곳에 옮겨다 놓았는데, 그 연대는 알 수 없다.
여기서 화제 방면으로 1백m 정도 더 올라가면 강가에 평상처럼 넓게 펼쳐진 일명 자살바위가 나온다. 명주실 한 타래를 풀 정도로 강물이 깊어 한 맺힌 아낙네들이 자살하는 곳으로 유명했으나, 현재는 낚시꾼들의 명당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이곳 주민은 전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해석서인 대동지지에는 황산역 서쪽 황산강 가의 절벽에 임경대(臨鏡臺.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산 72)가 있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황산역터인 물금취수장에서 바라보면 임경대가 대동지지의 내용대로 서북쪽 절벽 상에 보인다는 사실이다.
임경대는 신라말 고운(孤雲) 최치원이 놀고 즐기던 곳으로, 벽에는 고운의 시가 새겨져 있다고 고문헌에는 전하고 있으나 무너진 지 오래다. 현재는 바위에 임경대라는 글씨만 새겨져 있다. 이곳은 1022호 지방도변 물금개발 (85년 준공) 위쪽 오봉산 정산 바로 밑으로 낙동강물이 주위 경관과 어우러진 절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황산역에는 동래를 기점으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의 첫 번째 찰방이 있던 곳이다. 황산역 찰방은 1597년 선조 30년 파발 제도가 시작되면서 군사 관할 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어 왜군들의 침략 길목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황산찰방 관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이 일대는 김해 밀양 양산의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황산역 찰방은 조선 세조 때 만든 40개 찰방역 가운데 하나로, 윤산역 소산역 위천역 덕천역 등 16개 역을 관할했다고 양산군지에는 기록돼 있다. 각 역은 찰방(종6품) 1명과 역승(종9품)이 관장했고, 역장 역사 역졸이 역의 관리와 공무를 담당했다.
당시 황산역 찰방은 양산군수(종3품)를 좌지우지했을 정도로 세력이 막강했다. 찰방은 중앙 직속 기관으로 어사가 순찰을 돌면 16개의 역에 있는 역졸(군대 병사)을 모아 보필했을 뿐만 아니라, 군수의 치정을 견제하는 역할까지 했기 때문이다.
양산향교 정문에 있는 34개의 비문 가운데 종3품인 군수에 비해 3품이나 낮은 찰방공덕비가 8개나 현존하는 것만 보아도 당시 찰방의 권세를 짐작케 해준다.
황산역찰방은 철종 8년(1857) 낙동강의 범람으로 이 일대까지 물이 차서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일대로 옮겨져 1895년 역원제가 폐지될 때까지 40여 년간 지속됐다. 옮긴 황산역터 자리는 현재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439의 4 상삼교회 바로 뒤편으로, 현재는 밭으로 변해 흔적도 없다.
이 일대는 당시 평원으로 주위에는 잡목이 무성해 아랫동네인 양산군 상북면 소석리에 말을 키우는 마구뜰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황산역은 이곳으로 옮겨와 한때 장터와 주막으로 가득 찬 주막거리로 번성했다고 지난 94년 발간된 양산군 상북면지에서 소개하고 있다.
황산역찰방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양산에서 대구까지 가는 영남대로는 관도와 과거길이 구분된다는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양산~물금~원동~밀양~ 청도~대구는 관도로서 지속적으로 이용됐지만, 양산~언양~자인~경산~대구 로 가는 길은 역원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40여 년 동안 과거길로 이용됐다는 것이다.
김두성씨(대한노인회 양산시지부회장. 경남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 838)와 양산시 상북면 삼상리마을 할아버지들은 "찰방이 상삼리로 옮겨지면서 나그네나 과거보러 가는 양반들은 대구로 갈 때 영남대로 상의 언양방면을 택했다" 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과 같이 과거길이 바뀌었더라도 황산도는 낙동강변을 따라 화제리를 박차고 원동면 서룡리 신주막으로 들어가게 된다.
* 취재기 영남대로 상의 양산 구간을 취재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작업은 '황산' 이라는 지명 찾기와 잔도 답사였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 상에 표기한 '황산' 이라는 지명은 온데간데없고, 양산문화원 양산시 공보실 등에서도 황산에 대해서 무성한 추측만 늘어놨기 때문이다. 물금이 '황산' 같다고 막연한 추정을 하는 할아버지들의 입을 빌려 물금읍사무소를 찾아갔으나 정확한 위치는 요원했다.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진 '황산' 이라는 지명을 알게 된 것은 일제가 지명개편작업을 벌였을 것이라는 추측과, 향토사학자 성병달씨(76. 경남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집을 찾아간 것이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성씨도 처음에는 '황산'을 몇 번씩 되뇌이더니 "물금, 물금…" 이라며 무릎을 쳤다. 그러나 역터를 찾는 작업에서 또다시 딜레마에 빠졌다. " 물금읍에 사는 한 대가집에서 묘터로 쓰고 있는 자리다" "기차역터다" 등 만나는 사람마다 추측만 난무했다. 할 수 없이 대동여지도를 소개한 '대동지지' 의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임경대. 황산역 서북쪽 절벽 상에 위치하다'는 단 한 줄의 번역으로 임경대의 위치를 알아내고, 황산역터가 물금취수장 부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황산잔도는 말 그대로 험난하기 그지없다. 강가 풀숲으로 난 잔도를 헛디뎌 낙동강에 빠지고 10여 분마다 지나가는 기차를 피하려다 헛걸음쳐 기차와 부딪힐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황산장의 주막에서 거나하게 한잔 걸치고 과거보러 가던 옛 선비들이 무수히 빠져 죽었다'는 주민들의 입방아를 실감케 하는 순간이었다.
최영철 박천학 기자 1997-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