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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소개> 에띠엔느 방브네(Étienne Bimbenet), 『자연과 인간성: 메를로-뽕띠_인간학적 문제』(Nature et Humanité: Le Probléme Anthropologique Dans L’Oeuvre de Merleau-Ponty) (2004)_川崎唯史(가와사키 타다시)
저자 소개
방브네는 고등사범학교 출신의 철학자이다. 2014년 현재 리용 제3대학 철학부 조교수직을 맡고 있는 동시에 빠리 후설 문고의 멤버이기도 하다. 본고에서 소개하는 『자연과 인간성』(이하 본서)이라는 저서뿐만 아니라 이미 『메를로-뽕띠 이후 사고의 다산성에 대한 연구』(2001)와 『더 이상 이미 동물이 아닌 나』(2011) 라는 저서 두 권을 발표하였다. 앞의 책은 프랑스 내외의 학술잡지와 학회에서 발표한 십여 편의 논문을 모은 것인데, 푸코, 데리다, 레비-스트로스, 리꾀르 등 프랑스 현대 사상의 여러 면에서 부터 부르디외와 맥도웰, 더구나 근년의 신경과학에 이르기까지 다루면서, 그것들을 메를로-뽕띠적 사고와 합치되는 부분들을 다루면서, 메를로-뽕띠 연구자의 틀에서 담을 수 없는 저자의 박식과 역량을 느끼게 해준다. 그 다음 출판된 두 번째 책은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데리다의 동물론 저서인 『동물을 좇아서, 그러므로 나는 (동물)이다』(2006)에 대항한 저서이다. 이 책에서는 소위 대륙철학만이 아니라 분석철학과 최신의 인간과학의 문헌을 섭렵하면서, 동물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고찰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에서도 카나모리 오자무(金森修)에 의해 일찍부터 소개되었고, 20세기의 다양한 동물의 철학을 충분히 저작, 흡수하고, 독자적이고 현대적인 단계에까지 도달한 대단한 공헌의 하나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2009년에는 에라스무스 문도스 유로 필로소피의 파견교원으로 일본을 방문해 동경 대학과 오사카 대학에서 강연했다.프랑스 철학계에서 주목받는 젊은 철학자의 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본서의 위치
방브네는 『메를로-뽕띠 이후 사고의 다산성에 대한 연구』(2001)의 서문을“우리들은 지금부터 이제 메를로-뽕띠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생각해야만 한다”라고 맺고 있지만‘이제’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이 책에 앞서 본서 『자연과 인간성』은 정말로 메를로-뽕띠에 대한 연구이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메를로-뽕띠 연구의 권위자인 르노 바르바라스에게 본서를 헌정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본서는 그 바르바라스의 『현상의 존재에 대해서』(1991)가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지각의 현상학에서 살(chair)의 존재론으로”라는 주제를 어려움 없이 모방한 연구는 결코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본서의 주제가 현상학인가 존재론인가라는 방법론도 아니고, 지각과 살이라는 메를로-뽕띠의 유명한 개념도 아니고, 자연과 인간이라는 인간학적 문제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응하여 전기(前期)에서는 『지각의 현상학』만이 아니라 『행동의 구조』, 후기에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등에 뒤떨어지지 않는 강의록 『자연』이라는 텍스트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카구니 쯔네시(加國常志)가 마찬가지로 『행동의 구조』와 『자연』에 초점을 둔 연구를 본서보다도 조금 빨리 발표하였지만, 두 연구자의 저서들은 두 가지 점에서 성격을 달리 한다. 첫째로 카구니가 “저작이 제시하고 있는 문제성의 양태를, 그 저작에서, 다른 저작과, 다른 저자에게 선을 그음으로서 드러내고자 하는 문제사적 해석자”라는 태도를 취하고, 후설, 셀링, 화이트 헤드 등과 메를로-뽕띠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본서의 방브네는 오히려 메를로-뽕띠의 텍스트에 한정하여, “문헌학적인 정확성을 중시하여, 저작의 문의의 정확한 해석을 취지로 한 아카데믹한 해석자”로서 발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단지 그 때문이야말로 본서에서는 메를로-뽕띠가 읽었던 철학, 인간과학, 정신분석 등의 문헌에 대한 신중한 참조와, 당시의 지적 문맥에 관한 주기(注記)가 풍부하다는 것. 둘째로 카구니가 “대상적인 자연개념을 넘어서서 근원적인 자연이 문제화된 측면을 명확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아래 메를로-뽕띠를 자연철학의 계보에 위치지운 것에 대해,방브네는 ‘인간’이라는 현상이 어떻게 메를로-뽕띠의 사고에서 질문되었는지를 제기하고, 새로운 빛을 던지게 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것에 충분히 지면을 할애하여 자연의 문제도 논의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차이는 카구니의 연구에 대한 본서의 우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두 저서는 상호보완적으로 『행동의 구조』와 『자연』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심화시켜 주고 있다. 두 책 모두를 읽어보기 바란다.
본서의 개요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본서는 서론에 이어 세 개의 장과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서론에서는 본서의 주제가 문제사적인 문맥과 함께 제시된다. 제 1장과 제 2장은 서로 맞대어 대조를 이루고 있고, 메를로-뽕띠의 전기 저작인 『행동의 구조』와 『지각의 현상학』을 상세하게 읽어나가는 독해를 통해서, 제1장에서는 인간의 문제, 제2장에서는 자연의 문제가 각각 고찰된 이후, 전기 사상의 문제점이 지적된다. 이것은 받아서 제3장에서는 『자연』강의를 중심으로, 『세계의 산문』, 『기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등 중후기의 텍스트의 검토를 통해서, 인간의 문제가 어떻게 물어지고, 또는 물어지지 않는가를 논의하고 있다. 결론에서는 소위 ‘인간의 죽음’의 사상과의 결합과 함께 본서의 논의가 정리되고 있다. 이하에서는 보다 상세하게 보겠지만 나의 관심에 따라서 최초의 2장에 비중을 두고 소개하는 데 양해를 바란다.
서론 「인간은 소리도 없이 들어왔다」의 모두에서는 확인되는 것은, 메를로-뽕띠가 인간인 현상에 놀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인간은, 충분히 해명되고 규정된 것도 아니고, 완성되어야만 하는 특정의 목적을 향하여 진보하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인간은 새로운 정의를 부여받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문제로서, 인간적인 것의 경계선상에서 생각될 수 있다. 그래서 본서는 인간의 놀랄 말한 불가사의로서 수육(受肉) 또는 심신합일을 거론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 문제가 메를로-뽕띠에 대해서 단순한 심신문제 이상의 복잡함을 띠고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악화된 데카르트 주의」(13쪽)이다. 거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유와 연장이라는 실체간의 관계가 아니라 개념론과 실재론이라는 서로 다른 관점의 관계이다. 철학으로 간주되는 관념론적, 지성주의적 관점은, 사고가 일체의 경험에서 자기 자신으로의 투명한 현전을 갖는다는 의문이 없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다른 한편 실증적인 과학에서 실재론적인 관점에서는, 인간은 심리학적, 사회학적, 역사학적인 결정론에 의해 설명된다. 각 관점은 전면적이고, 또한 각각의 수준에서는 완전히 정당하기 때문에, 양자는 근본적으로 조정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방브네는 이 이율배반과 그 대처가 메를로-뽕띠와 동시대의 심리학과 정신분석에서도 자기비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것을 ‘앎[知]의 동요’라고 명명했다(16쪽). 인간과학은 그 본성에서 부터, 과학적으로 대상화하고자 하는 그것이 바로 그 과학을 행하는 주체라는 역설을 피할 수 없다. 이런 동향을 지적 배경으로 하여 등장한 메를로-뽕띠는, 어떤 관점으로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학의 동요에 달라붙고, 놀라움으로 응답하면서, 두 가지의 관점의 항쟁을 조정하여 해결한다는 임무를 받아들였다. 이어지는 여러 장들은, 메를로-뽕띠의 발걸음에서 이 임무가 어떻게 수행되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제1장 「인간적 질서」에서는, 인간이라는 현상을 둘러싼 전기 메를로-뽕띠의 사고가 『행동의 구조』와 『지각의 현상학』에서 그 발자취를 보이고 있지만, 장의 모두에서는 먼저 양 저서의 방법이 고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잘 알려져 바와 같이 전자는 ‘외적 방관자’의 시점을 채용하고, 후자는 반성이라는 내적인 시점에서 기술을 수행한다. 그러나 방브네에 의하면, 이 차이는 전술한 관념론과 실재로의 대립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양서는 대조적인 견해에서 출발하지만, 반대의 시점을 향해서 심화시켜가고, 이 대립이 실효(失效)한 지점에 도달한다. 즉 『행동의 구조』가 실재론에서 의식의 시점으로 넘어가고 있고, 자연주의가 갖는 일면의 진리를 초월론적 철학으로 쓰는 한편, 『지각의 현상학』은 의식의 시점에서 출발하여, 신체의 자연적인 힘에 이것을 종속시키는데 이른다. 겉으로 보기에 대립에 반하여, 이 두저서는 함께 방브네가 말하는 ‘고고학적인 요구’에 따르고 있고, 의식과자연의 합류하는 지점에서 인간이라는 현상을 위치지우고 있다(47쪽).
이어지는 각 절에서는 ‘구조’, ‘형태’, ‘실존’, ‘양의성’(애매성)과 같은 핵심 단어에 착안하여 검토가 진행되고 있지만, 보다 중요시되고 있는 것은 ‘범주적 태도’의 개념이다. 본서에서도 솜씨 좋게 소개된 바와 같이, 이것은 잭슨과 골드쉬타인이라는 신경과학자의 논의에서 등장하고, 캐시러도 주목한 개념이고, 복수의 사물과 개념을 하나의 범주 하에서 정리하여 포착하는 기능을 가르킨다(63-66쪽). 이 능력의 전주곡은 동물의 행동에서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충분히 발휘되는 것은 인간에서이다(68-73쪽). 『행동의 구조』의 메를로-뽕띠는 이것을 인간에게 특징적인 능력으로 간주하고, 지각과 운동의 두 측면에 있는 범주적 태도를 고찰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지각에서, 어떤 사물을 복수의 시점에서 보면서, 동일한 것에 대해서의 시각으로서 정리하는 능력, 즉 지각의 퍼스텍티브성(=원근[법]성)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에서는 오르간 연주자가 악보에서도 연주에서도 동일한 곡을 인정하는 예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상이한 현상에서 동일한 객관적인 본질의 핵을 그것으로서 간파하고, 다양한 상황에서 행동을 변화시키면서 이 핵을 지향하는 것, 즉 객관화와 행동의 변화가능성이다. 방브네에 의하면, 이런 범주적 태도는 ‘노동’에서 그 범례를 볼 수 있게 된다(77-80쪽). 사물을 도구와 문화적 대상으로 가공할 때, 인간은 서로 다른 기능의 관점에서 대상을 포착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이것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1장의 마지막 절은 『지각의 현상학』에서 범주적 태도의 실존적인 재해석에 대해서, 지각, 운동, 언어의 측면에서 검토하고 있다. 들고 있는 예는 그 유명한 슈나이터 증례이기 때문에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방브네가 거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범주적 태도가 어떻게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이 저작으로서는 전 저작보다도 주지주의적이 아닌 사고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도 메를로-뽕띠는 영원의 의식의 힘이라는 형태가 아니고, 신체라는 소여가 실존의 운동에 의해 의식으로 통합되어 이용되는 것을 통해서 낳은 기능으로서, 범주적 태도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방브네는, 범주적 태도에 착안을 계속하면서, 정신의 수육의 운동과 생생하게 살아있는 신체의 정신화라는 이중의 현상을 발견한다. 다음 장의 주제가 되는 것은, 이런 시각에서 인간이라는 현상의 기초로서 찾아지는 ‘근원적인 자연’인 것이, 전기 메를로-뽕띠에서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반면 제2장 「근원적인 자연」에서 방브네가 검토하고 있는 것은, 신체로서 주어진 자연이 아니라, 신체와 세계의 ‘공자연성’이다(173쪽, 이 점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 실태는 ‘생멸적 나르시시즘’이라고 명명한다. 행위에서 주위의 환경에로의 실천적인 관심과, 지각에서의 세계와 신체의 내적인 교류 등 그 드러남은 다양하지만, “삶이 만나는 것은 항상 삶 그것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181쪽). 방브네는 『행동의 구조』의 「생명적 질서」에 관한 논의에서, 『지각의 현상학』에서의 ‘인간학적인 공간’의 기술에로와 나르시시즘의 선을 긋는 것에 의해서, 인간의 생은 자기를 반영하여 나타나는 한의 세계밖에 경험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자기에로의 절대적인 밀착”(190쪽), 또는 “살아가는 것의 깊은 결정적인 편향성”(192쪽)을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다.
그 위에서 「정신의 불가능한 생」으로 제목붙인 제2장의 마지막 절에서는, 의식의 자연적인 유래로서 제시된 생명적 나르시시즘과, 의식의 역능인 범주적 태도와의 사이에 넘어서기 어려운 간격이 지적된다. 전자는 환경에로의 주관적인 관심과 집중에 의한 자기 자신에로의 폐쇄인 것에 대하여, 후자는 거기에서 지가를 탈중심화하여 환경을 객관화하는 기능이다. 방브네에 의하면 메를로-뽕띠는 후자가 어떻게 자연의 편에서 생기게 되는 것인가를 논의하지 않고, 오히려 그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의식의 자연적인 뿌리의 해명이 불충분하다는 것,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의식의 우위를 남기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고, 논의는 그 후의 사고로 넘어가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제3장 「자연적인 생산성」은 바로 자연의 문제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인간학적인 주제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이는 후기의 텍스트 위에서도, 인간인 것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라는 것, 즉 항상 메를로-뽕띠의 염두에 있었던 문제이면서, 반성이 밖에서 넘쳐흘러 나가기 때문에 주제로서는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222쪽). 그 위에서 방브네는 고고학적으로 하강하는 방식으로, 언어, 감성적인 것, 자연의 순서로 고찰을 진행하고, 각 국면에서 인간이 탈중심화된 모습을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전기에서는 범주적 태도의 전능성으로서 남겨진 의식의 우위도, 그것에서 요동치고 해체되어 간다.
결론 「인간의 죽음」에서는 푸코 류의 사고에로 접속하면서, 메를로-뽕띠에서 인간이 기지(旣知)의 소여가 아니라 미결의 문제이라는 것이 재확인된다. 그렇지만 메를로-뽕띠는 구조주의와 같이 초월론적 주관성을 단지 해체하여 인간의 죽음을 선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문제의 심오한 곳까지 들어가서 내측에서 넘어서고자 하였다. 그 시도를 구동하여 “놀람이라는 철학적인 정념”을 각성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기술하고, 방브네는 본서를 맺고 있다(315쪽).
마치면서-제외된 논점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본서는 깊고 예리한 독서에 기초하여 복수의 논의의 선을 혼란 없이 달려감으로서 명확한 독해를 제시하는 것과 함께, 전체로서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주제에 집중한 훌륭한 연구이다. 때문에 본서의 내용에 이의를 제가하기에는 주도면밀함과 상당한 정도의 지면이 필요하다. 이하에서는 그 대신에 본서의 주제라는 점에서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제외된 논점을 두 가지 거론하고 싶다.
먼저 탄생의 문제에 대해서. 『지각의 현상학』 독해는 면밀하고 정확한 것이지만, 동시에 편향되어 있다. 제 2부 (보다 정확하게는 「코기토」와 「동시성」의 2장)에서 인간의 문제는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문에 거기에서 구사된 ‘사고하는 자연’, ‘비인간적인 땅’, ‘생의 연관’이라는 여러 개념, 그리고 이들을 구성하는 ‘탄생’의 문제영역이 누락되어 있다. 인간의 자연적인 유래를 문제로 하는 본서에서, 탄생이라는 사건이 주목되지 않는 것은 불가사의하게 보인다. 탄생이야말로, 주체가 자연의 속에서 던져진다는 것, 그리고 주체성 그것의 안에서 자연이 투명하게(훤히) 보일 수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지각의 현상학』제2부에서의 논의가 세계와 신체의 공자연성에 역점을 두고 있는 이상, 그쪽으로의 착안을 논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제3부가 주체성의 해명을 임무로 하는 한, 표면화된 방식을 아니라고 하여도 거기에 인간의 문제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는 않다. 그렇지만 탄생을 둘러싼 논의는 범주적 태도의 개념과 내적으로 관련지우는 것도 가능하다. 본서는 제2장의 결론부에서, 『지각의 현상학』의 시점으로는 정신이 지배력을 갖는 한, 자연의 힘이 아직 효력을 얻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지만(204쪽), 의식과 자연의 관계를 표시하는 탄생의 문제를 고찰하지 않고, 그와 같은 판정을 내리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가. 후기 저작의 검토를 시작함에 있어서 전기 저작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후자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하여둘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휴머니즘의 개념에 대해서. 이것도 검토하는 텍스트의 선택에 관한 것이다. 본서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물론 『행동의 구조』, 『지각의 현상학』그리고 『자연』강의이지만, 소르본느에서의 강의와 『세계의 산문』이라는 텍스트도 언어와 정신과 정신분석에 관한 절에 입각하여 검토되고 있고, 본서의 논의에 깊이를 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휴머니즘과 테러』와 『변증법의 모험』의 참조는 전혀 없고, 『의미와 무의미』와 『기호』에서 다루어지는 정치에 대해서의 논의도 고려 외에 두고 있다. 물론 이런 문장에서 자연과 인간이 관계가 논의되고 있지 않는 이상, 이 한정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메를로-뽕띠가 이들의 텍스트에서야말로 ‘휴머니즘’그리고 ‘인간’이라는 단어에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방브네는 본서의 서론에서 “메를로-뽕띠는 휴머니즘도 반휴머니즘도 아니다”라고 판단하고 있지만(11쪽), 이런 단정으로 충분한 설득력을 주기에서는 『휴머니즘과 테러』에서 『기호』의 서문에 이르는 일련의 정치적인 텍스트에서 휴머니즘에로의 태도, 이어서 인간으로의 눈길의─마키야 벨리, 몽테뉴, 사르트르들과의 관계도 더불어 결코 단순하다고 말할 수 없다─변천을 더듬는 작업이 불가결하지 않을까. 메를로-뽕띠가 인간에 대해서 말할 때 주요한 참조가 된 것의 하나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 책의 연구서로서의 균형을 생각하면, 이상에서 서술한 것은 생떼를 쓰는 것에 불과하다. 메를로-뽕띠를 연구하는 자로서, 본서는 비판의 대상이라기보다도 그 전에 눈을 열게 해주는 통찰에 가득 찬 자극적인 선행연구이다. 그렇지 않은 독자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한 사람의 철학자의 저작을 통해 고찰하는 책으로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