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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드리는 4월 5일 종려주일 예배를 돕기 위해 성도님들께 보내는 손명목목사의 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일은 우리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한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려고 입성하시는 주일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이여” 라고 환영하던 일을 기념하며 종려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또한 우리 예수님은 오늘 어린 나귀를 타시고 겸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 복된 종려주일 예배를 통해서 성도 여러분 모두 위에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넘치시길 소원드립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150장(갈보리 산 위에)
기도 - 함께 기도 후 가족 중 마무리 기도
성경 - 마8:18-22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주기도문 - 다같이
교회 소식을 겸한 함께 드릴 기도 제목입니다.
1. 오늘은 종려주일에 드리는 가정에서의 예배도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가 될 수 있도록
2.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도록
3. 다가오는 금요일은 구주로 이 땅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날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4. 다음주일(12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자리에도 부활의 기쁨이 가득하게 해 주시기를
5. 코로나 19가 장기화 되어갑니다. 확진으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로해주시고, 치유의 기쁨을 주시고, 속히 종식될 수 있도록
6. 조국의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학연, 지연, 진영의 논리를 극복하고 국민을 제대로 섬기는 이들이 뽑힐 수 있도록 위해서
7. 성도들 모두 강건하시며, 예배당에서 함께 예배드릴 날이 속히 이르도록 기도해주세요.
마 8:18-22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예수님이 30세가 되셨을 때 당신의 공생애를 위해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나타내셨더니 주님이 보이시는 곳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서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모여든 사람들을 피해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는 방법을 택하셔야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장소로 옮겨가보면 그곳엔 이미 또 다른 사람들이 미리 와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곤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성경에서도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이야기를 소개하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모여든 군중들이 주님이 산상보훈을 선포하신 바로 직후의 일이라 주님이 말씀하신 그 가르침을 따라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열정과 각오를 남달리 가지고 모여든 것이라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있겠습니까만 실상 그들이 모여든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럼 이 많은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을까요?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예수님을 만나보겠다는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열정이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뚫고서라도 만나려는 시도로 이어졌고, 미리 나온 사람이 많고 자신의 키가 작아서 보이지 않으면 주님이 지나가시는 길가의 나무 위로 올라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던, 만나고 싶어하던 주님께로부터 그들이 가진 소원들이 이루어지는 기적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모여든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이유와 열정이었을까?에 대해 다시 질문한다면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나, 가까운 이들의 병이 예수님을 만나면 고침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열정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신기해서 모여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뒤로 등장하는 이들도 그런 사람들에 해당하는 군중이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찾아온 이들인데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표면적으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상대하시는 주님의 대답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열정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지면서 정말 세상이 볼 때에도, 우리 주님이 보실 때에도 그리스도인이 맞냐?라고 한다면 그렇습니다. 나는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안타까움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가져선 안되는 자세는?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져서는 안되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은 고난없이 영광만을 바라보고 쫓는 사람은 뼛속까지 그리스도인라고 부를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18-20절)
19절 말씀입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주님 주변에 모여든 이들 가운데 용감한 한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말합니다.
이 사람은 말합니다.
제가 당신을 쫓아가서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그것도 어디로 가시든지 제자로서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주님께는 시간이 많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를 양육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을 해야할 공생애라고 불려지는 시간은 3년반정도 밖에 안되는 시간이었는데 그것도 이미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갔으니 그 때에 주님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열정적인 결단은 주님께서도 기뻐하실만한 일이었을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각오에 대해 주님은 칭찬을 하시던지 크게 반기셔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몰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은 이 사람의 결단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우리의 예측과는 너무 달랐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니 말입니다.
요1:46에
빌립이 자기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소개받고 그 분 앞에 가보자고 하는 빌립에게 나다나엘이 한 말이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고 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나다나엘 한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지식층이라 일컬어지던 사람들이 애써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무시하려는 의도에서 했던 말들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 분의 메시야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사회 저변에 묵직하게 깔려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때에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스스로 나섰으니 이 사람을 주님은 마땅히 칭찬하셔야합니다.
마 9장37절에서
주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적다고 탄식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굳은 결단으로 주님을 따라와서 주님이 원하시는 추수하는 일군이 되겠다고 나섰으니 말입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모두가 너 같았으면 좋겠다 하고는 사람들 앞에 세워놓고 “여러분 이 사람이 방금 나를 따르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는데 또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그래야 하는데... 이게 우리들의 생각인데 우리 생각과 주님은 달랐단 말입니다.
2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예수님)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머리 둘 곳 없다는 표현은 지금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말로하면 나는 노숙자 같은 삶을 살아야하는데 어디든 나를 쫓겠다고 했으니 나처럼 노숙자 신세가 되는 그 자리에 까지도 너는 나와 함께 갈 수 있어?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었던 그 많던 무리들이 일순간 썰물처럼 떠나버리고 예수님 혼자 외롭게 십자가를 지시도록 버려두는 시간이 곧 옵니다.
아니 홀로 남은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무리들 속에 홀로 남겨지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일컬어지던 베드로조차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작은 여자 아이앞에서 주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도망쳐버리고 때가 곧 올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 외엔 그렇게나 많이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냉정하게 외면할 때가 곧 올것입니다.
자신들의 겉 옷을 주님이 타신 나귀가 가는 길에 갈고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 마치 개선 장군을 맞이하듯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하며 그렇게 환영하던 이들이 안면을 몰수하고 흉악한 강도를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저주까지 하면서 죽음의 자리로 내 몰 때가 곧 올 것입니다.
주님은 그 때를 생각하시면서 그에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는 그 때도 나를 지금 네가 말한대로 나를 따를 각오가 되어있느냐?는 질문이셨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예수님께 몰려올 때입니다.
그 분의 기적을 보고 모두가 그 분의 능력에 놀라워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그 분 가까이 있고 싶어할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오자 제자들이 그들을 질서있게 줄을 서라고 반장노릇(?)하는 모습도 봤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뭔가가 된 듯 그들 눈엔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 가까이에 가면 자신도 제자들처럼 사람들에게 돋보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 생각이 나도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란 말을 하게 만든 것이란 것을 주님은 정확하게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지는 우린 분명히 예수님 때문에 높아진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신분이 달라집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고 사단의 종노릇하던 신분에서 하나님의 아들 딸의 신분으로 높아지게 됩니다.
사단을 두려워하며 사단의 종노릇하던 우리가 사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신분으로 바귀어집니다.
아니 사단이 우리를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는 신분으로 바뀌어졌으니까 말입니다.
천사도 우릴 흠모하는 그런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얻게된 이 영광스러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고난에 함께 참여할 각오와 삶이 다로는 이가 얻는 것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예수 믿고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 믿으면 하늘 영광을 맛볼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믿음과 기대대로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기에 우리의 기대와 소망대로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면 주님은 자신을 따르겠다는 이 사람에게 하시는 대답을 통해 우리에게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함께 받을 각오를 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보셔야합니다.
본문의 18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한 사람이 내가 당신을 따라가서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그런 그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낮은 자로 찾아왔는데 너도 너의 기득권, 너의 자랑거리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내려 놓고 낮은자리로 갈 수 있어?
난 곧 십자가를 지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러 가야하는데 너도 나처럼 십자가를 지러 갈 수 있느냐?
나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겨줄 수 있느냐?
나처럼 대접받는 자리가 아닌 대접하는 자리에 갈 수 있느냐?
아무도 가지 않는 외로운 진리의 길을 비난도, 고난도 감수하고 갈 수 있니?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질문 앞에 저와 여러분은 대답이 준비되어 있어야합니다.
NO CROSS, NO CROWN ! 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은 없습니다.
갈6:7에서 하나님의 법칙은 우리가 무엇으로 심느냐?가 무엇을 거두느냐?를 결정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섬김과 낮아짐을 제대로 닮아 사는 이가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시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농부라면 그는 반드시 봄에 씨를 뿌립니다.
씨를 뿌리기 위해 겨울 내내 버려져 있어 딱딱한 밭을 갈아엎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씨를 뿌릴 죄상의 상태를 만드는 일을 위해 농부는 땀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씨를 뿌립니다. 그것도 최상의 씨를 고르고 또 골라서 말입니다.
그리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논밭에 나가 김을 매어주고 피를 뽑아주면서 보냅니다.
그런 수고 후에 가을이 돌아오면 그의 기대대로 곳간에 가득 채워지는 풍요로움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를 아끼지 않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이 풍성한 열매요 수확입니다.
어디든지 그곳이 골고다 언덕이라도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이는 주님처럼 고난도 달게 받겠다는 각오가 삶으로 옮겨지는 이가 보여줄 수 있는 행동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낮아지고 겸손함으로 자신을 주께 내아드리는 이에게서 따라 나오는 자연스러운 신앙의 행동이란 말입니다.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이 사는 사람은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받는 사람입니다.
영광은 주님이 홀로 받으시고 고난과 멸시와 천대는 우리가 받겠다는 삶이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만들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이 모습이 있다면 우린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선순위를 바꾸지 않습니다.(21-22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인은 우선순위를 잘 아는 사람이어야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가 되겠다고 각오를 밝히는 두 번째 사람은 우선순위를 잘못 말하고 있습니다.
21절입니다.
또 한 사람이 주님께 제자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고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지말고 바로 따라오라라고 말합니다.
장례문제는 다른 사람들, 다른 형제들에게 맡겨두고 넌 나를 쫓을 수 있느냐? 하고 묻습니다.
이 말씀에 오해가 있으면 안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당신을 쫓을 수가 없으니 장례가 끝나고 당신을 쫓겠습니다.
이렇게 말했는데 예수님께서 아니 장례식은 다른 형제들에게 맡겨놓고 넌 지금 바로, 즉시 나를 쫓아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오해 말입니다.
원문의 제대로 된 뜻을 살펴보면 이 사람의 이야기는 주님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 형제들이 나누어야할 상속문제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제가 당신을 쫓아가서 유산 분배하는 자리에 있지 않으면 상속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받아야할. 내가 챙겨야할 내 몫의 유산을 잘 챙긴 다음 당신을 쫓겠습니다. 이 말입니다.
내가 당신을 지금 쫓아갔다가 만일 아버지 임종시 곁에 없으면 유언이 바뀌어도 모르지 않습니까?
내 몫의 얼마라도 다른 형제들끼리 결탁해서 가져가버리면 안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 몫을 잘 챙겨서 그 때부터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이 말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의 대답도 마음에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 것은 우선순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에겐 시간이 별로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3년 조금 더 되는 시간만이 주어져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다가가는 걸음이 그만큼 급박하셨고 시간적으로 짧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셔야 했습니다.
18절에 보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곳으로 빨리 이동하자고 하시는 것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유사한 말씀들이 4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데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아직 천국복음을 듣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복음을 들려주시고 싶어하시는 주님의 뜨거운 마음이 만들어 낸 행동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자원한 이 사람은 말하길 주님 여기 머물러 계십시오.
그리고 내 형제들과 아저비가 돌아가시면 생길 유산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그리고 난 후 제가 당신을 따를테니 그 때 함께 가시지요?
이 말을 하고 있다고 보면됩니다.
제가 예배드리기 위해 예배당으로 가려고 옷을 입었습니다.
와이셔츠에 양복바지까지 다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속옷을 입지 않고 바깥 옷을 입은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벗고 입으려고 했더니 시간도 걸리고 귀찮으니까 에이 그냥 입으면 되지 뭐 하곤 바지 위에다가 팬티를 입고 예배당에 들어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저를 그런 차림으로 예배 인도하도록 두실까요?
목사님 왜 저러시지?
정신에 문제가 생기셨나?
저 나이에 벌써 치매라도 온거 아냐? 하실겁니다.
왜요?
저는 옷을 입다가 보니 속옷을 잊어먹어서 바지 위에다 입은 것뿐인데 말입니다.
문제는 입는 순서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속옷은 잊어버렸다고 해서 바깥 옷 위에 입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 대로 속에 입는 옷입니다.
옷은 입는 순서가 틀리면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하나님의 순서는 뒤 바꾸어놓고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우리들이라면 문제가 있지 않나요?
마6:33에 보십시오.
“나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우선 순위를 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우리가 이 땅에서 원하는 것들, 가지고 싶어 맹렬히 달려갔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들려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대단한 각오를 했던 두 사람을 보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이 두 사람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20절과 22절의 주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다음 절에 이 두사람에게서 나와야하는데 전혀 나오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 19장16절 이하에 보면 한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청년은 한동안 굉장한 고민에 빠져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부자였습니다.
십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킬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주님 앞에 찾아 나와 그가 가진 고민거리를 이야기합니다.
선생님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그 청년과의 대화 끝에 너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러면 너의 소유가 하늘에서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와서 너는 나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민을 해결해 보려고 주님 앞에 찾아온 청년입니다.
그런 그가 돌아갈 땐 여전히 근심을 안은 채 가고 있습니다.
아니 올 때보다 더 큰 근심을 가지고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을 해 주시지 못해서 그가 근심을 그대로 가지고 간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그가 그렇게 원하던 바대로 정확한 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대답과는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근심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돌아가는 그를 더 크게 근심케 하고 만 것입니다.
이왕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하셨다면...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닮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왕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했으면 제대로 예수님을 쫓아보면 어떻겠습니까?
이왕 신앙생활 한다면 제대로된 신앙인이 되어 봄이 어떻겠습니까?
무늬만 크리스챤이 아니라 뼛속 깊숙이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새겨져있는 제대로 주님을 닮은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보잔 말입니다.
오늘 4월 5일 주일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마지막 일정을 보내실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신 바로 그날입니다.
우린 이 주일을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잘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한 일을 기억하며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며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주님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 한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시는 고난주간입니다.
주님과 고난은 참 가까운 사이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땅에 오신 최고의 목적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우리 위해 돌아가시는 것이었거든요.
애초에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뒤로하시고 이 땅에 찾아오셨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목숨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사람으로 찾아오시고 피조물인 우리, 그것도 죄를 지어 하나님을 스스로 떠나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케 하시는 일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을 통해 이루시려고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의 이루시려는 구원은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 고난을 당하셔서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고 하셨습니다.
이 고난을 당하시는 일에서도 그 분은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우선적으로 앞세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을 앞두고 바로 직전에 기도하셨던 겟세마네의 기도는 동일한 내용을 두고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드린 기도였습니다.
마26:36-46에 보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세 번이나 이어서 드립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고 게시는 이 잔이란 바로 십자가를 지시는 일로 이루실 구원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 길로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는 일을 이루시고 싶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고난과 수치와 저주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일로 구원을 인류에게 주시겠다고 하면 아버지의 원대로 순종하겠다는 주님의 순종의 결심이 담겨있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 후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원대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잡히십니다.
주님을 보세요.
그 분은 고난을 당하실 하등의 이유도 없으신 창조주이신 성자이셨으나 고난을 스스로 당하시려고 하십니다.
당신의 고난을 통해 죄인인 우리가 영우너한 형벌과 저주에서 놓임을 받을 수가 있으니까요.
주님이시라도 그 고난이 얼마나 큰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기도 중에 등장하시지만 마지막은 항상 아버지 하나님의 원대로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사람이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선 제자라는 말로 쓰여진 단어에 하당됩니다.
주님께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했던 두 사람은 원했던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 주님의 제자가 될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대로 하면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만족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고난은 할 수만 있으면 멀리하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영광만 기대하고 살아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이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을 기초로해서 얻은 것이란 사실을 외면한 채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대로 살면서 얻으려고 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삶을, 이 땅에 계시면서 걸어가셨던 그 길을 그대로 쫓아 걸으려고 힘쓰는 이입니다.
비록 그 길을 완벽하게 다 걷지 못하고 있지만 그런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하고 회개하면서, 넘어진, 모자란 그 자리를 떨치고 다시 일어나 주님만을 바라보는 자리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걸음을 옮겨가는 일에 힘쓰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세상과 너무 친숙해져 있어서 세상이 너무 좋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언제나 당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우선순위를 두시는 삶을 끝까지 사셨던 것처럼 끝내는 하나님의 원대로 살기 위해 자신을 되돌리는 삶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살아가기로 다짐하고 걸음을 옮겨가는 이가 종려주일에 주님의 오심을 제대로 환영하는 이일 것이고 다가오는 고난주간을 보냐면서 주님을 제대로 만나는 기쁨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과거의 우리 자신을 과감하게 던져버리고 이제는 주님과 함께 하는 고난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고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제대로된 그리스도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이 되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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