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진주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沿海州, 주도 블라디보스토크에 1999년에 다녀 온지 15년이 되었다. 당시에는 김포에서 주 2회 블라디보스토크 행 항공편으로 가야 했다. 지금은 속초에서 배를 타면 블라디보스토크로 바로 갈 수 있는데 멀리 돌아갔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1999. 5월, 20세기 말에 갔었는데 지금이 21세기니 세기가 바뀌었다. 까마득한 옛날 일만 같다. 1999.5.27 최각규 도지사님이 연해주정부를 공식방문하여 정식으로 「우호협정서」(연해주가 중앙정부의 승인 받음)에 연해주 주지사와 함께 서명을 했다. 이 협정서가 강원도 도정사, 국제협력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나라와 교류가 있기 전 까지는 자유롭게 갈 수 없던 철의 장막 안에 있던 땅이었다. 학교에서, 지리시간에 러시아가 1895년 극동지역 부동항不凍港으로 개척한 군항이라고 배웠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뜻은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단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시나브로 비행기 창으로 다가오는 도시의 실루엣을 보면서 많은 상념에 잠겼다. 선조들이 해삼위海蔘威라 불렀던 이 도시는 우리민족의 한과 비원의 땅이다. 19세기에 선조들이 대거 이주하여 불모지이던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던 땅, 일제 강점기에는 잔혹한 일제의 수탈을 피하려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찾아갔던 땅, 이 땅은 피와 땀으로 삶의 보금자리를 일군 기회의 땅, 희망의 땅이었다. 20세기 들어와 일본의 노골적이고 악랄한 침략이 본격화되자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찾아들면서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춘천의 의병장인 류인석 장군을 비롯하여, 이범윤, 홍범도, 이상설 등이 조직한 13도의군과 국망 이후에는 이동휘, 이상설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회 등이 이 도시를 무대로 활동 하였다.(이상 독립기념관의 해외독립운동사 자료 인용)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면 이곳을 거쳐 저 페테르스 부르크며 독일 땅을 거쳐 서유럽의 관문이 네델란드 암스테르담까지 한 걸음에 달려 갈 수 있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첫인상은 우울하고 무기력한 회색 도시라는 느낌이었다. 반면 거리를 다니는 여인들의 금발이 무척 아름다웠다.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여 경제가 나락에 떨어졌고 백성들은 아무 희망도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의 최 영사가 한 말 중에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딸 있는 부모는 행복하고 아들만 있으면 불행 하다’는 말이 기억에 생생하다. 공산주의 철의 장막을 걷어치우고 자유경제체제에 들어 왔지만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그대로였다. 아직도 공산당 시대의 공산 관료가 주 정부의 요직을 여전히 차지하고 있고, 마피아가 매춘, 도박 불법영업, 수출입 등 모든 지하경제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직접 목격한 일로 우리가 묵었던 현대블라디보스토크 호텔에는 투숙객이 아닌 일반 여인들은 마피아의 승인 없이 아무나 들어 올 수 없었다. 이 호텔에는 밤이면 무도회가 열렸는데 러시아 해군 제독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몇 년 전만 하여도 일반 상선은 항구에 들어오지 못하고 더 북쪽에 있는 나홋카 항으로 입항해야 했다고 한다. 나홋카 시청에서 열렸던 투자상담회에는 사실상 팔아먹을 경쟁력 있는 상품이 거의 눈에 띠지 않았다. 수산물 가공공장 시찰을 가서 시찰대상으로 되어 있는 공장의 문이 엑스자 판자로 폐쇄되어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공산주의 경제체제가 실패한 몰락의 실상을 확인한 셈이었다. 거기에 더 하여 자르비노 항구에서는 공중화장실이 없어서 세관 화장실을 사용하였는데, 화장지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양변기에 프라스틱 뚜껑이 없어서 여성들은 볼일을 보는데 곤욕을 치렀다. 이해가 안 된 것은 경제교류회의 모든 일정에 들어가는 경비를 참가한 한국, 일본, 중국, 몽골 등 각국에서 각자가 부담한 것이다. 물건 팔기 위해 참석해 달라고 초청해놓고 현지 투어 경비를 방문한 측에게 부담시킨 것이다. 굼이라는 국영백화점에서 크리스탈 와인 잔을 샀는데 포장을 해 주지 않는다. 할 수 없이 포장용 비닐을 직접 구입하여 손님이 포장을 하니 이건 서비스라는 말 자체를 모른다. 물건을 많이 팔아도 그만, 조금 팔아도 그만 나에게는 아무런 인센티브가 없으니 친절 할리가 없다. 우여곡절 끝에 공식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의 관광 명소를 둘러보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먼저 둘러 본 곳은 혁명광장 이었다. 각종 집회와 국가적인 행사가 열리는 이 도시의 심장이라 할 만한 곳이다. 장동건이 주연을 했던 영화‘태풍’을 이곳에서 촬영 했단다. 겨울에는 광장에 임시로 스케이트장이나 눈썰매장을 만들어 아이들과 온 가족이 나와 함께 즐기기도 한다고 한다. 광장 가까이에 있는 제정러시아 시절이던 1906년에 지어져 100년 넘는 오랜 전통의 굼 백화점에 들러 쇼핑을 했다. 이곳에는 러시아 특산의 목각인형 마트로쉬까나 크리스탈 제품, 질은 낮지만 시베리아에서 캐낸 곤충이 들어 있는 호박, 따뜻한 모자며 모피제품이 비교적 저렴하고, 이곳에서 생산된 괜찮은 보드카를 살 수 있다. 굼 백화점을 나와 항구를 둘러보았다. 부두에서는 외화 벌이를 나온 북한 벌목공들을 우연히 만났다. 몇 마디 얘기를 해 보았지만 서로 감시하고 있는 눈치라서 북한실정 같은 민감한 얘기는 못해 보았다. 지금도 허름한 합성섬유 작업복에 남루한 운동화를 신고 낚시를 하고 있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회색의 도시를 빛나게 하는 아름다운 건축물은 단연 러시아 정교회였다. 크고 작은 정교회의 첨탑이 인상적이었고, 햇볕에 반짝 거리는 황금색 돔과 칼라 풀한 외벽이 아름다웠다. 다음에는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독수리전망대에 올랐다. 과거에 군사시설로 이용되기도 했던 독수리 요새가 있다. 이곳에 서면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순국자들의 묘비명이 새겨져 있었다. 전망대 아래에는 소원을 비는 공간도 있어서 신혼부부들이 찾아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단다. 나홋카에서는 김 비탈리 환경국장을 만났다. 그는 고려인(까레이스키)이었는데, 부인이 한국에서 대수술을 받아 완쾌 되었다면서 한국, 강원도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 동해시에서 기증받은 중고청소차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김 비탈리 국장에게 강원도 기념시계를 선물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 왔다. 공항에서는 평생 잊지 못할 러시아 아가씨의 작별 키스를 받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시베리아 특급열차로 여행을 하는 꿈을 꾸며 고향으로 돌아 왔다. 아쉬움을 남긴 채..